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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타는 법

헬멧을 집어던지고 싶을 때면 개구리 왕눈이 주제가를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
일곱 번 혹은 수십, 수백 번 넘어져도 일어나면 된다.

김수인

2020-01-08


몇 년 전 여름, 약 7개월간의 뉴욕 어학연수 생활을 끝내고 친구와 서부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국제 나이로는 고작 스물넷임에도 한국에 돌아가는 순간 빼도 박도 못하게 스물여섯이 되는 현실에 착잡하기도 했고, 7개월이라는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 동안 뉴욕에 머물면서 만났던 인연들과 헤어지는 게 퍽 섭섭했다. 부모님에게는 취직 전 마지막 일탈이라고 호언장담하고 떠나온 탓에 언제 다시 뉴욕에 올지도 기약할 수 없었다. 이제 진짜 마음잡고 ‘취준생’의 신분으로 돌아가자고 회유하는 자아와 한 번 사는 인생, 조금 돌아가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자고 유혹하는 자아가 충돌 중이었기 때문에 고뇌는 더욱 깊어만 갔다. 

 

자전거 타는 법 일러스트

 

갈피를 잡지 못한 채로 서부여행이 시작됐다. 막상 여행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그 자체로 신나고 설레는 마음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친구와 향한 미 서부의 첫 번째 도시는 샌프란시스코였다. 뉴욕에 브루클린 브리지가 있다면 샌프란시스코엔 금문교가 있다. 자전거를 타고 금문교를 건너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을 느낄 수 있다던 지인의 말을 새겨들은 우리는 자전거를 빌려 금문교를 건너기로 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자전거를 탈 줄 몰랐다. 자전거를 배우면서 넘어지고 다치는 게 무서워 늘 미뤄뒀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선책으로-앞에 앉을 친구가 힘들기는 하겠지만-2인용 자전거를 빌리자고 미리 결정해둔 터였다. 

 

막상 자전거 대여소에 가서 확인해보니 2인용 자전거의 안장이 너무 높아 친구가 운전을 하지 못하는 게 문제였다. 하는 수없이 점원에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는 자전거를 못 타니 키즈용 자전거라도 빌리면 안 되겠냐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는 성인에게 키즈용 자전거는 너무 작을 거라고 딱 잘라 거절했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포기하기엔 같이 온 친구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나도 왠지 승부욕 같은 게 발동하여 우리는 고민 끝에 1인용 자전거 2대를 빌렸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도전해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렇게 나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친구와는 금문교에 도착하기 직전에 있다는 휴게소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나는 헬멧을 장착하고 호기롭게 자전거에 올라탔다. 그러나 올라타기 무섭게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머리로는 페달을 굴리자 생각하면서도 이미 잔뜩 겁을 먹은 상태라 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 번 더 넘어졌다. 넘어지고 또 넘어졌다. 계속 넘어졌다. 하필 날도 흐려서 금문교는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았다. 친구는 이미 저만치 앞서 간지 오래였다. 


금문교로 향하는 자전거 코스가 잘 되어 있어 길 위에는 나 말고도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빠른 속도로 나에게 돌진하는(것 같은) 자전거들을 피하는 것도 일이었다. 기어 조정에 미숙해 방향을 바로 바로 틀수가 없었던 것이다. 기어이 나는 차도 쪽으로 자전거와 함께 넘어졌다. 자칫 사고가 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인도를 걷던 백인 아주머니가 깜짝 놀라 내게 괜찮으냐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임 오케이.”라고 대답하면서도 나는 울먹였다. 손바닥은 까맣게 때가 묻어 더러워졌고, 무릎과 종아리에는 그새 잔뜩 피멍이 들었다. 그런 몰골을 하고 괜찮다고 말하니 당연히 괜찮게 들릴 리 없었다. 아주머니는 나를 달래면서도 내 자세를 지적하며 안장을 낮추라고 조언했다. 


자전거 타는 법 일러스트


나는 툭툭 털고 일어나 아주머니의 말을 되새기며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다, 심기일전한 채로 다시 자전거에 올라탔다. 순간 머릿속에서 어릴 때 즐겨보던 만화 <개구리 왕눈이>의 주제가가 떠올랐다. ‘일곱 번 넘어져도 일어나라 울지 말고 일어나 빰빠밤’ 뭐 그런 식의 가사였는데 그게 당시 내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그래, 넘어지면 까짓것 다시 일어나면 된다. 그러니 페달을 굴리자. 하나, 둘, 셋! 


마침내 기적처럼 자전거가 앞으로 나아갔다. 아직 자리를 떠나지 않고 지켜보던 아주머니가 뒤에서 박수를 치며 나를 응원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방향을 트는 게 미숙해 얼마 안 가 브레이크를 잡았지만,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가장 오랫동안 나아갔다. 그러고 나서 다시 한 번 페달을 굴리자 이제는 자전거가 제법 안정적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금문교까지의 고지가 머지않았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금문교는 공사 중이었다. ‘자전거 타고 금문교 건너기’ 미션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뭔가 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탈하면서도 자꾸만 웃음이 났다. 내 몰골을 본 친구가 이것도 기념이라며 열심히 사진을 찍어줬다. 안개 때문에 흐릿한 형체이긴 했어도 금문교를 배경으로 ‘셀카’도 찍었다. 자전거를 타는 동안 잠깐이나마 피부에 닿았던 상쾌하고 시원한 바람의 감촉은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일주일간의 서부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7개월 만에 한국 땅을 밟았다. 겉으로 보기에 나는 ‘취준생’의 신분이었지만 아무도 모르게 몇 년 전부터 가고 싶었던 대학의 영화과에 원서를 접수했다. 영화에 관심을 갖고 끝내주는 시나리오를 써보고 싶다는 꿈을 품기 시작하면서부터 나의 로망이 되어버린 곳이었다. 매번 너무 늦었다고 생각해 시험을 쳐 볼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이러다 몇 십 년 뒤에 “그래도 시험이나 쳐볼 걸.”하며 후회할 것 같았다. 포기할 땐 포기하더라도 한 번 도전이나 해보고, 떨어지면 깔끔하게 미련을 버리자고 결심했다. 


기적적으로 1차 시험에 합격하고 이틀 만에 부랴부랴 자기소개서를 써서 제출하고 곧장 2차 글쓰기 시험과 면접을 치르는 폭풍 같은 일정을 소화하는 동안, 나는 점점 더 합격이 간절해졌고, 그만큼 불안했다. 그럴 때마다 자그마치 26년 만에 자전거 타는 법도 깨우쳤는데 못할 게 뭐가 있냐고 일부러 담대한 척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리고 다음 해, 나는 거짓말처럼 영화과 신입생의 신분으로 다시 대학에 입학했다. 


자전거 타는 법 일러스트


나는 요즘도 뭔가를 포기하고 싶어 질 때마다 처음 자전거를 타던 순간의 기억을 떠올린다.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울 때보다 훨씬 더 심하게 넘어지고 다쳐 온몸이 멍투성이가 될 수도 있는 게 인생이라고,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힘든 것도 당연한 거라고 마음을 다잡기 위해. 어쨌든 대학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스물여섯에 내린 선택으로 언제나 남들과 비슷한 속도로 걷는 게 당연했던 나는 무려 궤도를 이탈한 채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더딘 걸음을 내딛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여전히 불안하다. 


애초에 자전거를 타지 않았다면 넘어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대신 자전거고 뭐고 다 포기하고 헬멧을 집어던지고 싶을 때면 개구리 왕눈이 주제가를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 일곱 번 혹은 수십, 수백 번 넘어져도 일어나면 된다.



○ 일러스트레이터 - 김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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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인

뭐라도 계속 쓰다보면 뭐라도 되겠지, 란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잊고 싶지 않은 순간들을 최대한 오래 기억하려고 애쓰면서.
이미지 제공 _ ⓒ김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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