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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가만히 읽는 당신의 이야기

나의 화초는 오늘도

나의 화초는 오늘도

식물과 기억의 공통점

by 김정은 / 2019.03.20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식물, 그리고 기억

 

부모님이 식물을 무척 좋아하신다. Illustration ⓒ Amy Shin


부모님이 식물을 무척 좋아하신다. 그래서 이런저런 식물을 집에 종종 들이시고는 한다. 비밀 하나를 털어놓자면, 사실 부모님은 식물을 좋아하시는 만큼 잘 아시지는 못한다. 언제나 사랑 가득한 눈빛과 정성스러운 손길로 이파리를 보듬으셨지만 식물들은 두 분의 따뜻한 손길을 아랑곳하지 않고 쉴 새 없이 죽어 나갔다. 우리 집은 식물의 무덤, 불모지였다. 집에 들여온 식물은 베란다 한쪽에서 무사히 자라는 듯하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원인불명으로 생을 마감했다. 부모님은 힘없이 고개가 꺾이는 줄기를 보며 애잔하게 중얼거리셨다. “이번엔 물을 너무 많이 줬어, 햇빛이 부족했어, 뿌리에 바람이 들었어.” 슬픔 가득한 부모님의 모습이 씁쓸해 식물이 죽을 때면 누군가 그 원인을 알아내서 줄기 위에 원인이 쓰여 있는 푯말을 띄워줬으면, 했다. 이유라도 명확히 알 수 있도록.


내뜻대로 되지않는 식물 그리고 기억 Illustration ⓒ Amy Shin

 

무수한 풀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었듯이 반대로 알 수 없는 이유로 생명을 다시 틔우기도 했다. 식물을 키우는 것, 특히 잘 자라게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가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죽었던 줄기에서 새잎이 갑작스레 돋거나, 말라버린 줄 알았던 뿌리에서 연초록의 새싹이 났다. 그럴 때면 부모님은 감동에 찬 얼굴로 새잎을 조심스레 쓰다듬으셨다. 두 분은 죽음을 물리친 여린 잎을 아주 기특해하셨고 다시 살아난 이파리는 쑥쑥 자랐다. 제멋대로 죽거나 살아나는 식물을 보면서, ‘노력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많구나’, ‘어떤 일이 벌어졌는데, 아무도 그 일이 일어난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기억은 식물이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것, 불현듯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또 생명을 찾는 것, 그 모든 것의 이유를 알 수 없는 것. 식물을 잘 키워보려고 노력해도, 죽길 바라며 차디찬 베란다 바닥에 내버려 두어도, 그들의 생명은 내 의도대로 되지 않는다. 기억도 마찬가지다. 노력으로 어느 지점까지는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노력으로는 할 수 없는 지점을 넘어가면 기억의 생존 여부도 내 의도대로 되지 않는다.



잊은 줄 알았던 기억이 갑자기 문득


우연히 듣게 된 노래 한 두 소절에 잊은 줄 알았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일은 참 흔하다. 잊고 싶었던 사람이나 사건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눈앞에서 생생하게 그려지는 것도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본 일이다. 기억을 지우고자 체머리를 흔들지만 제아무리 베란다로 화분을 옮겨도 자라날 새싹은 움트기 마련이다. 초록은 미미한 온기에도 반응한다. 기억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찰나의 순간에 생명력을 되찾는다.


우연히 듣게 된 노래 한 두 소절에 잊은 줄 알았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일은 참 흔하다. Illustration ⓒ Amy Shin

 

어느 날 아침, 늘상 듣던 알람 소리에 눈을 뜬다. 그날은 이유 없이 지난 사랑의 흔적이 떠올랐다. 내가 언제나 안겨있던 따뜻한 품, 그 안을 은은히 맴돌던 살결 냄새, 나를 보듬던 섬세한 손길과 눈을 감고도 보이던 깊은 눈빛. 이 모든 것이 너무도 실감 나게 그리고 갑작스럽게 기억나면 나는 무척 괴로워진다. 잊은 줄 알았던 온기와 감정이 살아나고 이내 더 많은 기억 조각들이 서로 손을 잡고 들이닥친다. 나는 몹시 당황한다. 전혀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할 수만 있다면 모조리 잊고 싶었던 것들이다. 없던 일이 되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던 기억이다. 마치 지난날의 그런 생각에 복수하듯 기억 조각들이 무차별하게 밀려 들어온다.


가장 춥고 어두운 곳에 조용히 방치해두고자 아등바등했던 모든 순간은 물거품이 된다. 나는 놀란 눈빛으로 바짝 마른 가지와 차가운 화분을 더듬는데, 거짓말처럼 마른 가지에 새잎이 돋아있다. 식물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다. 지금 당장 손으로 새 잎을 뜯어내도 소용없다. 새싹이 뜯긴 자리에는 곧 다른 이파리가 돋아날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저 새잎을 못 본 척 이번엔 물 한 방울 없는 뙤약볕에 화분을 내어놓을 것이다. 얼려 죽이지 못했으니 말라죽여야지, 설마 선인장으로 모습을 바꾸어 보란 듯이 자라는 것은 아니겠지. 나도 모르는 새에 곁에 와서 함부로 말을 거는 지난 기억이 무척이나 무섭고 두렵다. 그의 생명력은 마음대로 빼앗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무섭다.


새싹이 뜯긴 자리에는 곧 다른 이파리가 돋아날 것이다. Illustration ⓒ Amy Shin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그 감동


난, 분재와 같이 까다로운 식물을 잘 길러내는 것은 퍽 힘든 일이다. 하루 열 번씩 문안인사를 여쭈며 안절부절못해도 기르기가 쉽지 않다. 온갖 정성을 다해 쓰다듬고 보듬어도 어느 날엔가 픽, 하고 갑자기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기억을 온전히 보존해내는 일도 똑같다.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감정, 감각 같은 것들은 보관하기가 더 힘들다. 그들은 아주 금세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감정은 자칫하면, ‘그때 참 좋았지’, ‘그 경치는 정말이지 가슴 벅찬 감동 그 자체였어’와 같은 문장 한 줄로 짤막이 기록되고 말기 십상이다. 당시의 좋았던 기분, 가슴 벅찬 느낌, 설렘을 오롯이 되살려내는 것은 참 힘들다.


사소하지만 소중한 일에 마음이 충만해지는 순간이면 그 찰나를 영원히 기억에 담아두고 틈틈이 꺼내 보고 싶어진다. 탁 트인 바닷가에서 밀려오는 파도와 뺨을 스치는 바람을 온전히 맞이할 때, 수평선 위로 넘어가는 해가 그려내는 하늘의 색감이 황홀하게 아름다울 때, 주위를 둘러싼 이런저런 모든 것들의 조합이 완벽해 믿기지 않을 때, 내 곁에 선 나의 사람이 그렇게도 사랑스러워 그저 내 옆에 서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행복하고 감사할 때. 그 순간 그 느낌은 그저 흘려보내기엔 아깝다.


사소하지만 소중한 일에 마음이 충만해지는 순간이면 그 찰나를 영원히 기억에 담아두고 틈틈이 꺼내 보고 싶어진다. Illustration ⓒ Amy Shin

 

좋은 기억뿐 아니라 슬픈 기억을 두고도 잊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마음은 미어지지만 그 아픔을 나에게 새기어 마음을 다 잡고 싶을 때 말이다. 아픔을 잊는다면 나의 어리석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이기에 상처와 슬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싶어지곤 한다. 또 실수할라치면 냉큼 꺼내어 내 눈앞에 들이밀 수 있도록.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억들은 종종 생명을 다했다. 노력에 힘입어 초록빛을 잘 유지해줄 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았다. 누군가를 사랑했던 마음은 이내 설레는 순간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짜증스러움으로 바뀌곤 했고, 스스로에 대한 다짐은 너무도 쉽게 무너졌다. 모든 것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던 황홀함의 순간도 언제부턴 가는 그때의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조차 떠오르지 않는 마른 가지가 됐다. 중요한 부분은 하나둘 어디론가 빠져나가고 없었다. 아픔은 더 이상 기억나지 않았고 빛났던 순간은 그저 평범해졌다. 그때의 마음과 기억은 차차 생명을 잃어갔다.



내게 초록을 더하고 생명력을 주는 기억


좋은 기억도 슬픈 기억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생생하게 살려내기 힘들다. 무게감이 크던 기억도 무미건조한 한 두 줄짜리 기록이 되어버리고 마는데, 단편적인 문장으로만 남아버린 순간을 보고 있으면 서글프고 안타깝다. 되살리려 애써도 쉽사리 생생해지지 않고, ‘아마 그랬던 것 같다’는 느낌만 남기는 희미함을 마주하고 있자면, 나의 마음은 마치 부모님의 마음처럼 애잔해진다.


불모지인 우리 집에서도 꽃을 피운 난이 있고, 풍성한 잎을 자랑하는 나무가 있다. 물론 빠르게 말라간 다육식물과 안타까움만 자아낸 화초도 많다. 우리 부모님은 여전히 식물을 잘 알지 못하시는 것 같다. 두 분의 노력이 반드시 결실을 맺는 것은 아니지만, 이파리를 쓰다듬는 그 손길까지 무의미하다 할 순 없다. 식물에는 자생적인 생명력이 있어 보살핌의 손길과는 별개로 금세 죽어버리기도 하고 살아나기도 한다. 그를 보듬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식물은 우리 집으로 들어오고, 또 들어올 수 있었다. 식물에 대한 두 분의 애정이 없었다면 우리 집에는 초록이 없었을 것이다.


기억도 마찬가지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쇠약해지거나 강력해지지만, 기억에 대한 나의 관심과 애정이 없다면 기억은 별다른 흔적조차 남겨주지 않은 채 내가 텅 빈 모습이 되도록 버려두었을 것이다. 잊고 싶은 기억이 제멋대로 살아나 괴로워하는 일도,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 훌쩍 사라져버려 안타까운 마음에 몸부림치는 일도 모두 슬프다. 그러나 기억에겐 그들만의 생명이 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기억은 아름답고 서글프고 잔인하고 자비롭다. 분명 나의 노력의 손길이 닿지만 그것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 스스로의 생명력으로 나에게 초록을 더 하고 나를 풍성하게 하는 것. 역시나 기억은 오늘도 또 한 번 들여온 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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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Amy S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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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담백한 글 잘 읽었습니다.

    김나은 2019.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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