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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위풍당당 집 되기

위풍당당 집 되기

함께 늙어가는 것에 대하여

by 김정옥 / 2019.02.07


나와 당신의 관절을 보듬으며


바람이 차가워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따뜻한 말 한마디, 따뜻한 마음씀씀이가 서로에게 큰 의지가 된다. 그러나 나는 이럴 수록 안락한 보금자리가 되어주지는 못할 망정 한파를 이겨낼 세심한 손길을 필요로 한다. 올해는 겨울이 빨리 온다는 소식에 보온력이 좋다는 새 옷을 미리 입었다. 이렇게 꼼꼼하게 돌봐주는 손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몸도 이제 예전만 못하여 어제까지 괜찮았던 뼈마디가 자고 나면 더 아프고, 잔병치레도 잦아졌다. 나를 돌봐주는 엄마 같고 애인 같은 여자도 골골하기는 마찬가지여서 툭하면 병원신세를 지고, 입원을 한다. 여자를 힘들게 하는 것은 주로 나인 것 같다. 나를 돌보느라 늦도록 힘을 쏟은 날은 몸살처럼 관절을 심하게 앓는다. 나도 미안한 마음에 아프다는 내색을 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내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 더 미안하다.


주변의 친구들은 좀처럼 내 나이를 가늠하지 못한다. 대개는 십 년은 어리게 보지만 굳이 일러주지는 않는다. 엄애(엄마 같고 애인 같은 여자)씨가 남자들도 엄두 내지 못하는 일을 척척 해주기 때문에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것 같다. 이 여자는 도무지 겁이 없다. 나를 위한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지 제 몸 생각은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시작한다. 마치 자식을 위하여 어떤 어려운 난관이라도 극복해 내는 엄마처럼 버드나무 같은 몸으로 꺾이지 않고, 강인하게 헤쳐 나간다.


지난 기습 강추위에 나의 관상동맥 일부에 경색이 발생했다. 연말 야근으로 자정쯤 돌아온 여자가 세수를 하려 수돗물을 틀었을 때, 증기기관차마냥 수증기를 내뿜으며 뜨거운 물만 콸콸 쏟아내고 말았다. 동파방지를 위해 냉수와 온수가 함께 섞여서 똑똑 떨어지게 틀어 놓았던 수도의 냉수 쪽이 언 것이다. 여자는 주방 개수대에서 쥐 오줌 같이 찔끔 찔끔 나오는 찬물로 대강 씻는가 싶더니 화장실 외벽 쪽을 향하여 난로를 켜고 헤어드라이어를 손에 쥐었다. 앉은뱅이 의자에 쪼그려 앉은 여자는 책까지 펼쳐 들었다. 그리고 새벽 내내 헤어드라이어를 두 손에 번갈아들며 수도관을 향해 뜨거운 바람을 쐐 주었다. 나의 몸 구석구석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여자는 이 사건의 원인을 단번에 알아낸 것이다. 허리부터 무릎, 손목, 팔꿈치, 어깨까지 성한 곳이 없어서 병원을 드나들며 치료받는 중인 여자를 쉬지도 못하게 했으니 더 미안하였다. 예년에 없던 강추위가 내일이면 더 심해질 거라는 두려움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데도 그 성치 않은 몸으로 책까지 보는 여자의 여유로움은 기이하기까지 했다. 몹시 피곤할 텐데 그런 기색도 없었다. 공들인 끝에 막힌 혈관이 뚫리듯 폭포처럼 시원하게 물이 흘렀고, 그날의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피곤하지?”라고 묻자 여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괜찮아. 이만하길 다행이야.”라며 침대로 들어갔다. 


세수하는 엄애 씨와 뜨거운 물만 콸콸 쏟아지는 화장실


내 얼굴은 지금 주근깨처럼 짙고 옅은 얼룩이 잔뜩 묻어 있다. 엄애씨가 빗물에 젖을까 시멘트 위에 회색 우레탄을 덧입혀 주었는데 그것마저 자외선에 노출되어 방수효과가 떨어질 것 같다며 지난 가을 실리콘 보강을 해준 덕분이다. 다른 때 같으면 마무리 색조화장까지 진작 말끔하게 해주었을 터인데 바쁘긴 꽤 바쁜 모양이다. 방수공사를 할 때도 예기치 못한 사건이 있었다. 원래 방수공사는 날씨가 따뜻하고 볕이 좋은 날 해야 한다는데 굳이 흐린 날 손을 본 통에 발라놓은 것들이 소나기에 온통 씻겨 버린 것이다. 결국 출장에서 늦게 돌아온 여자는 자정이 넘도록 보강 작업을 하고, 다음날 덧씌우기를 하는 등 마무리까지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공사가 다 끝나고 여자는 머리며 옷에 페인트를 잔뜩 묻힌 채 뿌듯한 표정으로 “어때? 새로 태어난 기분이지? 참고 일을 해야 좋은 일도 생기는 걸 알겠지?”라며 나를 토닥였다.


직접 집을 수리하는 엄애 씨


이럴 땐 꼭 엄애씨는 가정의학과 의사 같다. 소아과, 내과, 산부인과, 이비인후과, 정형외과, 피부과 등 거의 모든 과목을 진료하는 가정의학과 의사처럼 여자는 미장, 페인트칠, 도배, 방수공사에 멋진 벽화까지 그려준다. 나를 위한 일이라면 막무가내로 일을 벌이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별다른 치장을 하지 않는다. 얼굴에 색조화장을 하거나 립스틱 바른 걸 본 적이 없다. 내가 본 여자는 대개 아들의 남방셔츠에 감물을 들인 작업복을 입은 채 쉬지 않고 일했다. 이 동네의 집들은 키가 고만고만한데다가 다들 붉은 벽돌로 지은 비슷한 옷차림을 하고 있어 나를 설명을 하려면, 큰길에서부터 약도를 그리듯 짚어주어야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좌회전해서 오면 담장에 그림이 보여요.” 라고 간단명료하게 설명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는 나만의 개성을 갖게 되어 더 당당해진데다 골목의 미술품이 되어 지나가는 길손에게도 즐거움을 줄 수 있어 내가 내 몸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서로가 서로의 안락함이 되어주기 위해


몇 달 전, 엄애씨가 사고로 입원을 하게 되어 아들이 찾아왔다. 아들은 “이제 엄마도 늙었어요. 혼자서 이 집을 관리하는 건 무리예요. 다 정리하고 아파트로 가서 편하게 사시지요.”라고 권했다. 여자의 아들은 제 고향이기도 한 ‘집’의 의미를 한 장의 종이처럼 가볍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근래에 주변 친구들이 흔적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키 큰 원룸이 꿰차고 들어오는 일이 많아져 심란한 중이었던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다행히 엄애씨는 “나는 여기가 좋아, 흙을 밟을 수 있고, 몸을 자꾸 쓰게 되니 건강에도 좋고.”라고, 아들의 외조모가 매일 덩치 큰 집을 돌보느라 쉬지 않고 일하다가 아파트로 이사를 간 후 건강이 부쩍 안 좋아졌음을 상기시켰다.


정리하고 아파트로 이사가라는 아들과 이 집을 고집하는 엄애 씨


엄애씨와 나, 함께 한 세월만큼 돌담처럼 차곡차곡 정이 쌓였다. 여자는 봄이면 내가 좋아하는 자목련, 함박꽃, 홍도, 수양매화로 뜰 안에 꽃향기를 가득 채워주고, 해 가는 줄도 모르고 둘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이제는 내가 잔병치레 없이, 그리하여 엄애씨가 나를 돌보느라 무리하는 일 없이 지냈으면 좋겠다. 오히려 내 덕분에 몸도 마음도 편안해진다면 더 좋겠다. 아늑한 내 품에서 날마다 산뜻한 기분을 만들어주고 싶다. 좋아하는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면서 자신의 성장을 위한 시간으로 하루하루 채워가길 바란다. 여자의 고향집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지 않고, 여자의 아들이 도시의 각박한 삶에서 돌아올 수 있는 고향으로서, 이 터를 오래오래 지키고 싶다. 


뜰 안에 꽃을 심는 엄애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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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Amy S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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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옥
오래된 집과 화초들과 정을 나누며 사는 소소한 이야기를 그림과 글에 퍼 담아 나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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