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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우리 영혼은

곁에서 잠든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하는 밤

고수리

2018-10-10


잠들지 못하는 밤


어린 시절, 엄마와 동생과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워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서서히 졸음이 몰려와 눈꺼풀에 내려앉을 때쯤 엄마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 덮어주며 말했다.


"잠들 때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밤이 우리를 지켜줄 거야."


그런 밤은 편안하고 따뜻했다. 나는 단잠을 잤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아침이 밝아 있었다. 서늘한 아침 공기가 코끝에 스치면 나는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온기를 찾아 몽롱한 정신으로 내 곁에 누운 엄마의 가슴팍이나 손목, 동생의 등과 어깨를 가만히 쓸어내리면서 잘 잤느냐고 건네는 아침 인사가 행복했다. 하지만 그런 아침은 자주 찾아오지 않았다.


엄마의 바람과는 달리, 밤은 우리를 지켜주지 못했다. 우리 집에는 매일 소란스러운 밤들이 찾아왔고, 끝내 가족들은 흩어져 살았다. 낯선 곳에서 불안한 잠을 자며 나는 거의 매일 꿈을 꿨다. 더러는 괜찮은 꿈도 있었지만 대체로 나쁜 꿈이었다.


혼자 유학 생활을 하던 열아홉 살 때, 거짓말 않고 두 달 내내 악몽에 시달린 적이 있었다. 철제 이층침대가 여섯 개 놓인 기숙사 방에서 열두 명이 함께 생활하던 때였다. 왼쪽 가운데에 놓인 침대의 아래층에서 잠을 잤다.


뒤척이다 잠이 들면, 누군가 머리맡에 서 있거나 가슴팍에 앉아 있거나 얼굴을 맞대고 목을 졸랐다. 억지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럼 쫓기거나 꼼짝 못 하거나 떨어지는 꿈들이 이어졌다. 괴로운 날들이었다. 밤이 오는 것이, 잠이 드는 일이 무서웠다.


잠못 드는 이미지

 

 

무사히 잠들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써봤다. 공들여 샤워하고 따뜻한 우유를 마셨다. 좋아하는 노래를 듣기도 하고 늦게까지 책을 읽었다. 이모가 준 성경책을 머리맡에 두기도 했다. 아예 자지 않고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 소용없었다.


너무 괴로워서 일상생활이 힘든 지경에 이르렀을 때, 보다 못한 같은 방 친구들이 제안했다. 우리 침대에서 자지 말고 방바닥에 다 같이 모여 자자고. 그날 밤, 나를 가운데 두고 열한 명이 좁은 방바닥에 다닥다닥 붙어 누웠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하나같이 유치하고 가볍고 실없는 말들이었다. 여기저기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누운 자리가 너무 좁아서 옆옆 사람의 웃음까지도 팔뚝에 느껴졌다. “이렇게 자니까 우리 수학여행 온 거 같다. 불편해도 재밌네. 가끔 이렇게 자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라며 조잘거리던 친구들이 하나둘 잠이 들었다. 나는 잠든 친구들의 숨소리를 들으며 마지막에 잠들었다. 아주 곤히 잤다. 그날 이후로 좀 괜찮아졌다. 여전히 악몽을 꾸는 날은 많았지만 견딜 만했다. 


친구들이 함께 했다

 


길고 외로운 밤이라는 터널


한 침대에 누워 함께 밤을 보내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아름다운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켄트 하루프의 『밤에 우리 영혼은』. 거기서 여주인공은 이런 말을 한다.


"가끔 나하고 자러 우리 집에 올 생각이 있는지 궁금해요. 밤을 견뎌내는 걸, 누군가와 함께 따뜻한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말하는 거예요. 나란히 누워 밤을 보내는 거요. 밤이 가장 힘들잖아요. 잠을 좀 자보려고 수면제를 먹고 늦게까지 책을 읽는데 그러면 다음 날 하루 종일 몸이 천근이에요. 나 자신에게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아무 쓸모없게 돼버리는 거죠. 그런데 침대에 누군가가 함께 있어 준다면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은 사람이, 가까이 있다는 것. 밤중에, 어둠 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


이 부분을 읽다가 깨달았다. 오랫동안 내가 나쁜 꿈을 꾸었던 이유를. 그건 두려움도 공포도 아닌, 외로움 때문이었다. 나는 늘 혼자였다. 혼자를 견디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어딘가 기대고 싶은 마음을 닫아두고 나의 외로움을 모른 척했다. 사실 나는 아주 외로운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 가족들 곁에, 사랑하는 사람 곁에 아이처럼 가만히 안겨 있고 싶은 밤도 아주 많았는데, 어떻게든 혼자서 견디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이십 대 시절에도 악몽은 나의 친구였다. 슬프게도 너무 익숙해서 견딜 만했다. 새벽에 출근하거나 밤새워 일하고 소진된 정신으로 기절하듯 쓰러져 잠을 잤다. 밤은 여전히 길고 외롭고 힘들었다. 악몽을 꾼 날은 아침까지 잠들지 못하고 글을 썼다. 악몽에 대하여, 상처에 대하여, 외로움에 대하여, 그것들을 모두 가진 나에 대하여. 그런 나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쓰면서 밤을 견뎌냈다.



함께이기에 다정한 어둠, 두렵지 않은 밤


그런데 놀랍게도 서른을 넘어서고는 악몽을 잘 꾸지 않는다. 그사이 나는 남편을 만나고 두 아이를 낳았다. 이상하게도 나에게 가족이 생긴 이후로 나쁜 꿈은 사라졌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특별한 밤도 나는 기억한다. 남편과 두 살배기 아이들을 재우다가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 다 같이 잠이 든 날이었다. 악몽을 꾸다가 잠에서 깼다. 보이는 건 어둠뿐. 검은 어둠이 나를 집어삼킬 듯 짓누르고 있었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누운 자리에서 손을 허우적대며 바닥을 더듬거렸다.


그때 무언가 작고 따뜻한 것이 손에 잡혔다. 아이의 발이었다. 아이는 내 곁에 거꾸로 누워 자고 있었다. 가만히 아이의 발을 붙잡고 숨을 골랐다. 아주 천천히 여린 맥박이, 조그만 온기가 느껴졌다. 고요한 어둠 속에 곤히 잠든 남편과 두 아이의 숨소리가 들렸다. 내 곁에 모두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나를 지켜주고 있었다.


그 순간. 어둠이 다정했다. 익숙하고 친근했다. 함께 누운 우리는 편안하고 아무 근심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죽는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나 행복했다. 그래서 나는 울었다.


밤에 우리 영혼은.

잠들지 않고 서로의 곁을 지켜주고 있는 걸까. 여린 맥박으로, 조그만 온기로, 가만한 숨결로.


부드러운 이불 같은 어둠을 함께 덮고 가까이 누워 이야기를 나누는 밤. 그러다가 스르르 잠드는 밤. 잠이 깼을 때 옆 사람의 숨소리에 안심하는 밤. 나쁜 꿈을 꾼 날이면 괜찮다며 이마를 짚어주는 밤. 손을 잡아주는 밤. 끌어안고 등을 토닥이는 밤. 믿을 수 없게도 나는 그런 밤들을 매일 보내고 있다.


이제 나는 밤마다 아이들 곁에 누워 속삭인다.


"잠들 때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우리가 서로를 지켜줄 거야."


우리가 서로를 지켜줄거야.

 

언젠가 이 밤들도 사람들도 사라질 것을 안다.

알지만 조금만 천천히, 오래, 우리가 이 밤에 머물렀으면 좋겠다.

잠들기도 잠들지 않기도 하면서. 그렇게 서로의 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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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고수리
고수리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 저자. 소소한 것 소외된 것 소중한 것들을 보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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