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코에서 비록 자식이 잘못한 것을 알았어도 이들을 살리기 위해, 같이 도망가려고 시도하는 것도 아버지이기에 가능하다. 멕시코 유모 아멜리아가 불법 체류자의 신분으로 미국에서 강제 추방당했을 때, 역 앞에서 기다려 준 사람도 그녀의 아들이다. 자살하려고 베란다에 서 있던 일본 여고생 치에코의 손을 말없이 잡아 준 사람도 가족인 아버지다. 소통하며 끈끈한 유대의 감정을 나누는 우리는 더 이상 흩어진 모래알이 아니다…….
“공감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공감
우리는 지금 격변의 시기를 살고 있다. 과거 100년이라는 ‘한 세기’의 주기가 이젠 10년으로 바뀐 듯하다. 20년 전만 해도 ‘인구 폭발’이 가장 큰 이슈 중 하나였다. 그런데 ‘코로나 19 사태’의 등장으로 모든 게 바뀌기 시작했다. 이제는 ‘인구 절벽’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라 회자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시각도 확 바뀔 수밖에 없다. 하느님의 모상(模像)이니 이성적 동물이니 하는 인간에 대한 정의는 이제 더 이상 먹히지 않는 듯싶다. 그러니 ‘인문학’ 자체가 변해야 할 시점이다. 이 시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인문학이 무엇인지 새롭게 고민해 봐야 한다.
『공감의 시대』 책 표지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세계적인 미래학자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 1945~)은 『공감의 시대』(이경남 옮김, 민음사, 2010)라는 저서에서 인류의 문화 발전을 ‘공감의 문명’이라는 관점에서 풀이하면서 우리가 사는 시대를 ‘공감의 시대’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인간에 대해 ‘공감인(homo empathicus)’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 줬다. 나 역시 우리 시대의 화두는 ‘소통’과 ‘공감’이라고 보면서 그런 시각으로 〈소통의 방법론과 영화 분석〉(한국외국어대 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 강의록 2015)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한 적이 있다. 여기 그런 관점에서 풀어본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Alejandro Gonzalez Inarritu, 1963~) 감독의 영화 〈바벨〉을 간략하게 소개하겠다.
〈바벨〉: ‘인과’가 아닌 ‘인연’으로 풀어보는 ‘소통’의 고리들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좌)와 영화 〈바벨〉 포스터(우)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네이버 영화)
21세기를 사는 인간은 ‘원인과 결과’의 연결고리만을 찾고 ‘기능과 효율’의 ‘도구적 합리성’ 속에서 전체를 설명하는 ‘이론적인 태도’만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자세라는 생각을 접어야 한다. 인간에게는 ‘지성과 이성’ 외에도 ‘감성과 영성’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탈근대 문화의 세기는 우리가 그동안 등한시했던 감성과 영성이 꽃피는 ‘예술과 종교’의 시대가 될 것이다. 이 모든 능력을 아우르는 ‘공감의 능력’이 문화적 존재로서의 인간다움을 가늠하는 잣대가 될 것이다.
영화 〈바벨〉에서 눈에 띄는 가장 큰 특징은 이냐리투 감독이 영화 전체를 ‘인과(因果)’론적인 관점이 아니라 ‘인연(因緣)’론적인 시각에서 풀어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사물, 사태, 사건, 사람들은 ― 자신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 보이지 않는 인연으로 서로 얽히고설키게 된다. ‘인연(因緣)’은 “1.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 2. 어떤 사물과 관계되는 연줄, 3. 일의 내력 또는 이유, 4. 〈불교〉 인(因)과 연(緣)을 아울러 이르는 말, 곧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힘과 그를 돕는 외적이고 간접적인 힘, 5. 〈불교〉 원인이 되는 결과의 과정”으로 풀이되고 있다(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여기서 중요한 개념들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 사물과의 연줄, 일[사태]의 내력이나 이유, 결과를 만드는 힘들, 원인이 되는 결과의 과정 등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영화의 줄기를 따라가 보자.
맨 처음 모든 인연의 고리를 만들어낸 것은 ‘사냥총’이다. 이 사냥총에서 발사된 한 발의 총성으로 시작된 비극적인 사건은, 4개국의 아무런 관련이 없던 사람들을 마술의 고리처럼 하나로 맞물리게 만든다. 모로코 외딴 사막에서 울려 퍼진 한 발의 총성은 모로코, LA, 도쿄, 멕시코의 세계 4개국 사람들을 하나의 인연으로 엮고, 그들은 또 각기 서로 다른 파장의 물결들을 일으킨다.
영화 〈바벨〉 스틸컷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모로코의 어느 외딴집에서 한 남자가 이웃으로부터 사냥총 한 정을 산다. 밥줄이며 생명줄인 염소 떼를 공격하는 자칼(jackal: 개와 같은 과의 포유류 동물로 여우나 늑대와 비슷한 외양을 가지고 있음)을 잡기 위해서이다. 그는 염소 떼를 돌보는 어린 두 아들에게 사냥총을 건네 준다. 동생 유세프가 사격 솜씨를 뽐내려 조준한 총알이 외국인 관광버스에 명중하면서 유세프와 아흐메드 형제는 예기치 않은 운명적인 인연과 마주치게 된다.
아이를 잃고 실의에 빠진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모로코로 여행 온 미국인 리처드(브래드 피트)는 아내 수잔(케이트 블란챗)이 총에 맞으면서 이 인연의 회오리에 휘말리게 된다. 이로 인해 여행 안내원을 포함해 관광버스에 탔던 모든 사람들이 이 뜻하지 않은 인연에 개입되며 ‘소통의 고리’를 만들어 나간다.
오랫동안 리처드 부부의 집에서 두 아이의 보모 노릇을 하던 멕시코인 유모 아멜리아(아드리아나 바라자)는 이 사건으로 인해 일정과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부부가 예정대로 마국에 있는 자신들의 집에 도착하지 못하는 관계로 아멜리아는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인 두 아이를 데리고 멕시코 국경을 넘는다.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 갑자기 여권 조사가 강화되면서 한 아이의 여권이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되면서 유모는 아이 유괴범으로 몰리며 쫓기게 된다.
‘멕시코’는 이냐리투 감독의 조국이다. 멕시코는 여기서 ‘축제의 나라’로 묘사된다. 그런데 그 축제를 뒷받침하는 돈은 다른 곳, ‘미국’에서 온다. 돈을 벌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래 미국으로 밀입국하여 불법 체류를 하고 불법 노동을 하며 돈을 벌어 고향에 있는 가족과 친척들에게 보낸다. 이로 인해 멕시코 인들은 일종의 ‘문화적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경제적 의존이 문화적 의존으로 나타난다. 역사학자 프란츠 파농(Frantz Fanon, 1925~1961, 의사 겸 탈식민주의 철학자)은 “식민지 사람은 2개 언어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로써 2개의 언어를 해야 하는 민족이 겪는 ‘정체성 혼란’을 부각시키고 있다.
‘감성적인 멕시코인’과 ‘지성적인 미국인’들 사이의 ‘소통 방식의 차이’로 인해 쉽게 끝날 수 있었던 하찮은 사건은 뜻하지 않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여기에 또 한 사람이 인연에 얽힌다. 좋은 사냥 체험의 기회를 마련해 준 답례로 모로코인에게 자신의 사냥총을 선물한 일본인이다. 그가 총 주인임이 밝혀져 형사가 도쿄에 사는 그를 찾아 나서게 된다. 그에게는 엄마의 자살 이후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청각장애인 딸, 여고생 치에코가 있다. 형사를 만나게 되는 사람은 이 딸이다.
이렇게 하나의 사건이 만들어낸 인연이 ‘4개의 에피소드’를 만들며 ‘4개의 나라’를 이 ‘인연’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 네 개의 에피소드의 중심에는 언제나 ‘가족’이 있다. 인연을 풀어나가게 하는 핵심 동력도 바로 이 가족 관계 안에 있다. 그런데 완벽한 ‘인간관계’란 없다. 가족 안에서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소통은 ‘막힘없이 통함’을 의미하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이 ‘막’으로 싸여 그 개체성을 이루고 있는 한, 우선 너와 나 사이를 막고 있는 이 막이 열려야 한다.
신뢰와 결속으로 이어진 가족의 인연 속에도 소통은 쉽지 않다. 다양한 문화권 안에서 ‘소통의 불협화음’이 요동친다. 부자 사이의 관계(모로코), 부부 사이의 관계(미국 LA), 모자 사이의 관계(멕시코), 부녀 사이의 관계(일본 도쿄)가 개개의 문화권 안에서 어떤 동력과 가치 속에서 소통되고 있는지 그 ‘문화 코드’를 읽어낼 수 있다.
감독 이냐리투는 언어가 다른 문화권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소통에 대해서도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네 개의 에피소드를 영화의 축으로 설정한 이유도 궁극적으로는 ‘문화 간의 소통’을 중심 주제로 삼은 데 있을 것이다. 여기서 미국인 부부는 실제로 관광 온 모로코에서 예기치 않은 다양한 소통을 경험한다. 감독은 여기서 두 ‘문화권의 차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고 리처드 부부의 집에서 일하는 유모인 아멜리아(멕시코 여자)를 축으로 해서 멕시코 문화와 미국 문화가 교차되며, 그 차이를 내보이고 있다.
〈바벨〉이 의미하는 것 – ‘소통’과 ‘공감’의 길
성경에 나오는 대 피터르 브뤼헐의 바벨탑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영화의 제목인 ‘바벨(Babel)’은 성경에 나오는 바빌로니아의 고대 도읍을 지칭하는 낱말이다.(창세기 11장 1∼9절) 태초에 인간의 언어는 하나로 인간은 한뜻으로 모여 큰일을 할 수 있었다. 인간이 성읍을 세우고 하늘에까지 도전하며 탑을 쌓아 올리자, 하느님이 분노하여 인간의 언어를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어 버렸다. 이 문제의 도읍이 바로 ‘바벨’이다. 혼돈과 단절, 그로 인한 온 땅으로 흩어짐이 바벨이 상징하는 의미다.
그러면 오늘날 바벨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수많은 언어는 수많은 민족과 나라를 낳았고, 수많은 역사와 문화를 만들었다. 언어의 수만큼이나 많은 세계를 만들었다. 그렇지만 같은 언어 속에서 인간은 하나로 뭉쳐 큰일을 일궈낼 수 있다는 성경의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 바벨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돈 또는 자본이라는 ‘단일한’ 소통 단위, 디지털이라는 ‘단일한’ 소통 기술, 그림 문자라는 전 세계 ‘공통적인’ 소통 수단, 소비라는 ‘단일한’ 욕망, 나 하나만이라는 ‘단일한’ 중심 등이 지구인을 또 다시 오만의 탑으로 불러 모으고 있다. 이들은 다시 한번 하느님의 권위에 도전하며, 전 세계인을 획일화시켜 자신들의 발아래 굴복시키려 한다. 그것은 ‘자본주의’이며 ‘소비주의’이며 ‘개인주의’이다.
오늘날 언어가 통하지 않아, 소통이 되지 않아 초래되는 ‘혼돈’과 ‘단절’ 그리고 흩어짐의 현상은 어떤 것이 있는가? 이 현상을 상징하는 것이 ‘모래’다. 각자 자신의 캡슐 속으로 숨어버린 ‘개인들’은 ‘모래알’이나 다름없다. 모래알들은 각자의 경계막을 세우고 있고 서로 단절되어 있다. 그것이 모여 흩날리면 ‘황사’며 ‘모래 폭풍’이고, 조용히 머물러 있으면 ‘모래벌판(사막)’이다. 모래가 모였다 흩어졌다,하는 곳에서 질서를 찾기는 어렵다. 희뿌연 황사 속에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돈’과 ‘무질서’ 속의 ‘불안’과 ‘공포’가 모두를 엄습한다. 감독 이냐리투는 어린 시절 여행하게 된 모로코에서 ‘황량한 사막’을 보며 무한한 동경을 느꼈다고 한다.
자신을 열려고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감정이 메마른 ‘소통 부재’의 오늘날의 ‘개인들’이 바로 ‘모래알들’이다. 국가의 경계, 지방의 경계, 도시의 경계, 문화권의 경계를 탓하며, 소통이 어렵다고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는 온 세상에 흩어져 사는 인류에게 희망은 없다. 먼저 우리 안에 있는 ‘생각의 경계’, ‘마음의 경계’부터 허물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다.
‘소통’의 시작은 가족, 타인도 초대해야
영화 〈바벨〉 스틸컷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시작해야 한다. ‘가족 사이의 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영화 〈바벨〉은 가족에서 시작해서 가족으로 끝난다. 가족끼리 보듬어 끌어안으면서, 불통의 불안을 잠재우면서, 희망의 이심전심을 나누어 갖는다. 거동을 못하던 수잔은 팬티에 오줌을 지렸다고 남편 리처드에게 고백한다. 리처드는 국가와 이웃이 등을 돌리는 상황에서도 수잔을 살리려고 백방으로 노력한다. 다 가족이기 때문이다.
모로코에서 비록 자식이 잘못한 것을 알았어도 이들을 살리기 위해, 같이 도망가려고 시도하는 것도 아버지이기에 가능하다. 형과 아버지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유세프는 자수를 결심한다. 멕시코 유모 아멜리아가 불법 체류자의 신분으로 미국에서 강제 추방당했을 때, 역 앞에서 기다려 준 사람도 그녀의 아들이다. 자살하려고 베란다에 서 있던 일본 여고생 치에코 의 손을 말없이 잡아 준 사람도 가족인 아버지다. 소통하며 끈끈한 유대의 감정을 나누는 우리는 더 이상 흩어진 모래알이 아니다. 우리는 어느새 ‘딴딴한’ 시멘트가 되었다. 가족끼리 느낄 수 있는 이러한 ‘공통의 감정’을 확산시켜 ‘우리’의 울타리 안에 낯선 ‘타인’까지도 초대해 불러들여야 한다. 그것이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철학자
가톨릭대학 신학부를 졸업하고 독일 뮌헨 예수회 철학대학에서 철학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84년부터 2012년까지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였고, 지금은 명예교수이다.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의 초대회장이었으며 우리사상연구소 소장이다. 1992년 열암학술상을 수상하였으며 1994년 한국출판문화상 번역상을 수상하였다. 40여 권의 저술과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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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다양성 시대 ‘공감적 소통’만이 살길이다
- 영화 〈바벨〉이 전하는 인문학적 메시지 - 철학자, 드라마(영화)에 빠지다 -
이기상
2022-01-25
모로코에서 비록 자식이 잘못한 것을 알았어도 이들을 살리기 위해, 같이 도망가려고 시도하는 것도 아버지이기에 가능하다. 멕시코 유모 아멜리아가 불법 체류자의 신분으로 미국에서 강제 추방당했을 때, 역 앞에서 기다려 준 사람도 그녀의 아들이다. 자살하려고 베란다에 서 있던 일본 여고생 치에코의 손을 말없이 잡아 준 사람도 가족인 아버지다. 소통하며 끈끈한 유대의 감정을 나누는 우리는 더 이상 흩어진 모래알이 아니다…….
“공감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공감
우리는 지금 격변의 시기를 살고 있다. 과거 100년이라는 ‘한 세기’의 주기가 이젠 10년으로 바뀐 듯하다. 20년 전만 해도 ‘인구 폭발’이 가장 큰 이슈 중 하나였다. 그런데 ‘코로나 19 사태’의 등장으로 모든 게 바뀌기 시작했다. 이제는 ‘인구 절벽’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라 회자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시각도 확 바뀔 수밖에 없다. 하느님의 모상(模像)이니 이성적 동물이니 하는 인간에 대한 정의는 이제 더 이상 먹히지 않는 듯싶다. 그러니 ‘인문학’ 자체가 변해야 할 시점이다. 이 시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인문학이 무엇인지 새롭게 고민해 봐야 한다.
『공감의 시대』 책 표지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세계적인 미래학자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 1945~)은 『공감의 시대』(이경남 옮김, 민음사, 2010)라는 저서에서 인류의 문화 발전을 ‘공감의 문명’이라는 관점에서 풀이하면서 우리가 사는 시대를 ‘공감의 시대’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인간에 대해 ‘공감인(homo empathicus)’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 줬다. 나 역시 우리 시대의 화두는 ‘소통’과 ‘공감’이라고 보면서 그런 시각으로 〈소통의 방법론과 영화 분석〉(한국외국어대 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 강의록 2015)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한 적이 있다. 여기 그런 관점에서 풀어본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Alejandro Gonzalez Inarritu, 1963~) 감독의 영화 〈바벨〉을 간략하게 소개하겠다.
〈바벨〉: ‘인과’가 아닌 ‘인연’으로 풀어보는 ‘소통’의 고리들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좌)와 영화 〈바벨〉 포스터(우)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네이버 영화)
21세기를 사는 인간은 ‘원인과 결과’의 연결고리만을 찾고 ‘기능과 효율’의 ‘도구적 합리성’ 속에서 전체를 설명하는 ‘이론적인 태도’만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자세라는 생각을 접어야 한다. 인간에게는 ‘지성과 이성’ 외에도 ‘감성과 영성’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탈근대 문화의 세기는 우리가 그동안 등한시했던 감성과 영성이 꽃피는 ‘예술과 종교’의 시대가 될 것이다. 이 모든 능력을 아우르는 ‘공감의 능력’이 문화적 존재로서의 인간다움을 가늠하는 잣대가 될 것이다.
영화 〈바벨〉에서 눈에 띄는 가장 큰 특징은 이냐리투 감독이 영화 전체를 ‘인과(因果)’론적인 관점이 아니라 ‘인연(因緣)’론적인 시각에서 풀어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사물, 사태, 사건, 사람들은 ― 자신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 보이지 않는 인연으로 서로 얽히고설키게 된다. ‘인연(因緣)’은 “1.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 2. 어떤 사물과 관계되는 연줄, 3. 일의 내력 또는 이유, 4. 〈불교〉 인(因)과 연(緣)을 아울러 이르는 말, 곧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힘과 그를 돕는 외적이고 간접적인 힘, 5. 〈불교〉 원인이 되는 결과의 과정”으로 풀이되고 있다(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여기서 중요한 개념들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 사물과의 연줄, 일[사태]의 내력이나 이유, 결과를 만드는 힘들, 원인이 되는 결과의 과정 등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영화의 줄기를 따라가 보자.
맨 처음 모든 인연의 고리를 만들어낸 것은 ‘사냥총’이다. 이 사냥총에서 발사된 한 발의 총성으로 시작된 비극적인 사건은, 4개국의 아무런 관련이 없던 사람들을 마술의 고리처럼 하나로 맞물리게 만든다. 모로코 외딴 사막에서 울려 퍼진 한 발의 총성은 모로코, LA, 도쿄, 멕시코의 세계 4개국 사람들을 하나의 인연으로 엮고, 그들은 또 각기 서로 다른 파장의 물결들을 일으킨다.
영화 〈바벨〉 스틸컷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모로코의 어느 외딴집에서 한 남자가 이웃으로부터 사냥총 한 정을 산다. 밥줄이며 생명줄인 염소 떼를 공격하는 자칼(jackal: 개와 같은 과의 포유류 동물로 여우나 늑대와 비슷한 외양을 가지고 있음)을 잡기 위해서이다. 그는 염소 떼를 돌보는 어린 두 아들에게 사냥총을 건네 준다. 동생 유세프가 사격 솜씨를 뽐내려 조준한 총알이 외국인 관광버스에 명중하면서 유세프와 아흐메드 형제는 예기치 않은 운명적인 인연과 마주치게 된다.
아이를 잃고 실의에 빠진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모로코로 여행 온 미국인 리처드(브래드 피트)는 아내 수잔(케이트 블란챗)이 총에 맞으면서 이 인연의 회오리에 휘말리게 된다. 이로 인해 여행 안내원을 포함해 관광버스에 탔던 모든 사람들이 이 뜻하지 않은 인연에 개입되며 ‘소통의 고리’를 만들어 나간다.
오랫동안 리처드 부부의 집에서 두 아이의 보모 노릇을 하던 멕시코인 유모 아멜리아(아드리아나 바라자)는 이 사건으로 인해 일정과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부부가 예정대로 마국에 있는 자신들의 집에 도착하지 못하는 관계로 아멜리아는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인 두 아이를 데리고 멕시코 국경을 넘는다.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 갑자기 여권 조사가 강화되면서 한 아이의 여권이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되면서 유모는 아이 유괴범으로 몰리며 쫓기게 된다.
‘멕시코’는 이냐리투 감독의 조국이다. 멕시코는 여기서 ‘축제의 나라’로 묘사된다. 그런데 그 축제를 뒷받침하는 돈은 다른 곳, ‘미국’에서 온다. 돈을 벌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래 미국으로 밀입국하여 불법 체류를 하고 불법 노동을 하며 돈을 벌어 고향에 있는 가족과 친척들에게 보낸다. 이로 인해 멕시코 인들은 일종의 ‘문화적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경제적 의존이 문화적 의존으로 나타난다. 역사학자 프란츠 파농(Frantz Fanon, 1925~1961, 의사 겸 탈식민주의 철학자)은 “식민지 사람은 2개 언어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로써 2개의 언어를 해야 하는 민족이 겪는 ‘정체성 혼란’을 부각시키고 있다.
‘감성적인 멕시코인’과 ‘지성적인 미국인’들 사이의 ‘소통 방식의 차이’로 인해 쉽게 끝날 수 있었던 하찮은 사건은 뜻하지 않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여기에 또 한 사람이 인연에 얽힌다. 좋은 사냥 체험의 기회를 마련해 준 답례로 모로코인에게 자신의 사냥총을 선물한 일본인이다. 그가 총 주인임이 밝혀져 형사가 도쿄에 사는 그를 찾아 나서게 된다. 그에게는 엄마의 자살 이후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청각장애인 딸, 여고생 치에코가 있다. 형사를 만나게 되는 사람은 이 딸이다.
이렇게 하나의 사건이 만들어낸 인연이 ‘4개의 에피소드’를 만들며 ‘4개의 나라’를 이 ‘인연’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 네 개의 에피소드의 중심에는 언제나 ‘가족’이 있다. 인연을 풀어나가게 하는 핵심 동력도 바로 이 가족 관계 안에 있다. 그런데 완벽한 ‘인간관계’란 없다. 가족 안에서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소통은 ‘막힘없이 통함’을 의미하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이 ‘막’으로 싸여 그 개체성을 이루고 있는 한, 우선 너와 나 사이를 막고 있는 이 막이 열려야 한다.
신뢰와 결속으로 이어진 가족의 인연 속에도 소통은 쉽지 않다. 다양한 문화권 안에서 ‘소통의 불협화음’이 요동친다. 부자 사이의 관계(모로코), 부부 사이의 관계(미국 LA), 모자 사이의 관계(멕시코), 부녀 사이의 관계(일본 도쿄)가 개개의 문화권 안에서 어떤 동력과 가치 속에서 소통되고 있는지 그 ‘문화 코드’를 읽어낼 수 있다.
감독 이냐리투는 언어가 다른 문화권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소통에 대해서도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네 개의 에피소드를 영화의 축으로 설정한 이유도 궁극적으로는 ‘문화 간의 소통’을 중심 주제로 삼은 데 있을 것이다. 여기서 미국인 부부는 실제로 관광 온 모로코에서 예기치 않은 다양한 소통을 경험한다. 감독은 여기서 두 ‘문화권의 차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고 리처드 부부의 집에서 일하는 유모인 아멜리아(멕시코 여자)를 축으로 해서 멕시코 문화와 미국 문화가 교차되며, 그 차이를 내보이고 있다.
〈바벨〉이 의미하는 것 – ‘소통’과 ‘공감’의 길
성경에 나오는 대 피터르 브뤼헐의 바벨탑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영화의 제목인 ‘바벨(Babel)’은 성경에 나오는 바빌로니아의 고대 도읍을 지칭하는 낱말이다.(창세기 11장 1∼9절) 태초에 인간의 언어는 하나로 인간은 한뜻으로 모여 큰일을 할 수 있었다. 인간이 성읍을 세우고 하늘에까지 도전하며 탑을 쌓아 올리자, 하느님이 분노하여 인간의 언어를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어 버렸다. 이 문제의 도읍이 바로 ‘바벨’이다. 혼돈과 단절, 그로 인한 온 땅으로 흩어짐이 바벨이 상징하는 의미다.
그러면 오늘날 바벨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수많은 언어는 수많은 민족과 나라를 낳았고, 수많은 역사와 문화를 만들었다. 언어의 수만큼이나 많은 세계를 만들었다. 그렇지만 같은 언어 속에서 인간은 하나로 뭉쳐 큰일을 일궈낼 수 있다는 성경의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 바벨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돈 또는 자본이라는 ‘단일한’ 소통 단위, 디지털이라는 ‘단일한’ 소통 기술, 그림 문자라는 전 세계 ‘공통적인’ 소통 수단, 소비라는 ‘단일한’ 욕망, 나 하나만이라는 ‘단일한’ 중심 등이 지구인을 또 다시 오만의 탑으로 불러 모으고 있다. 이들은 다시 한번 하느님의 권위에 도전하며, 전 세계인을 획일화시켜 자신들의 발아래 굴복시키려 한다. 그것은 ‘자본주의’이며 ‘소비주의’이며 ‘개인주의’이다.
오늘날 언어가 통하지 않아, 소통이 되지 않아 초래되는 ‘혼돈’과 ‘단절’ 그리고 흩어짐의 현상은 어떤 것이 있는가? 이 현상을 상징하는 것이 ‘모래’다. 각자 자신의 캡슐 속으로 숨어버린 ‘개인들’은 ‘모래알’이나 다름없다. 모래알들은 각자의 경계막을 세우고 있고 서로 단절되어 있다. 그것이 모여 흩날리면 ‘황사’며 ‘모래 폭풍’이고, 조용히 머물러 있으면 ‘모래벌판(사막)’이다. 모래가 모였다 흩어졌다,하는 곳에서 질서를 찾기는 어렵다. 희뿌연 황사 속에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돈’과 ‘무질서’ 속의 ‘불안’과 ‘공포’가 모두를 엄습한다. 감독 이냐리투는 어린 시절 여행하게 된 모로코에서 ‘황량한 사막’을 보며 무한한 동경을 느꼈다고 한다.
자신을 열려고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감정이 메마른 ‘소통 부재’의 오늘날의 ‘개인들’이 바로 ‘모래알들’이다. 국가의 경계, 지방의 경계, 도시의 경계, 문화권의 경계를 탓하며, 소통이 어렵다고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는 온 세상에 흩어져 사는 인류에게 희망은 없다. 먼저 우리 안에 있는 ‘생각의 경계’, ‘마음의 경계’부터 허물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다.
‘소통’의 시작은 가족, 타인도 초대해야
영화 〈바벨〉 스틸컷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시작해야 한다. ‘가족 사이의 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영화 〈바벨〉은 가족에서 시작해서 가족으로 끝난다. 가족끼리 보듬어 끌어안으면서, 불통의 불안을 잠재우면서, 희망의 이심전심을 나누어 갖는다. 거동을 못하던 수잔은 팬티에 오줌을 지렸다고 남편 리처드에게 고백한다. 리처드는 국가와 이웃이 등을 돌리는 상황에서도 수잔을 살리려고 백방으로 노력한다. 다 가족이기 때문이다.
모로코에서 비록 자식이 잘못한 것을 알았어도 이들을 살리기 위해, 같이 도망가려고 시도하는 것도 아버지이기에 가능하다. 형과 아버지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유세프는 자수를 결심한다. 멕시코 유모 아멜리아가 불법 체류자의 신분으로 미국에서 강제 추방당했을 때, 역 앞에서 기다려 준 사람도 그녀의 아들이다. 자살하려고 베란다에 서 있던 일본 여고생 치에코 의 손을 말없이 잡아 준 사람도 가족인 아버지다. 소통하며 끈끈한 유대의 감정을 나누는 우리는 더 이상 흩어진 모래알이 아니다. 우리는 어느새 ‘딴딴한’ 시멘트가 되었다. 가족끼리 느낄 수 있는 이러한 ‘공통의 감정’을 확산시켜 ‘우리’의 울타리 안에 낯선 ‘타인’까지도 초대해 불러들여야 한다. 그것이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공감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철학자,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문화 다양성 시대 ‘공감적 소통’만이 살길이다
- 지난 글: [철학자,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사멸하는 언어들을 위한 진혼곡
철학자
가톨릭대학 신학부를 졸업하고 독일 뮌헨 예수회 철학대학에서 철학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84년부터 2012년까지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였고, 지금은 명예교수이다.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의 초대회장이었으며 우리사상연구소 소장이다. 1992년 열암학술상을 수상하였으며 1994년 한국출판문화상 번역상을 수상하였다. 40여 권의 저술과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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