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포된 전흥문은 지붕에 올라간 강용휘가 기왓장을 던지고 모래를 뿌리며 도깨비 흉내를 냈다고 자백했다. 눈을 현혹시키고 그 틈을 타 국왕 시해를 하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해하기 어렵다. 상대가 눈치채기 전에 바로 범행을 저질러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눈길을 끄는 행동을 했다는 것은 상식적인 행동이 아니다. 소란이 일고 수색이 강화되자 그들은 바로 도주했고, 거사를 기다리던 일행도 뿔뿔이 흩어졌다. 혹시 강용휘는 거사에 뜻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자객, 권력자를 향해 칼끝을 겨누는
영화 <역린> 포스터(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자객이라는 말에는 왠지 가슴을 뛰게 하는 요소가 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자객열전>에 등장하는 형가1)나 예양2) 이후,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자객은 대의를 위해 자신을 초개처럼 버리는 의지의 인간으로 묘사되어 왔다. 제대로 된 칼질로 거대한 권력을 무너뜨리는 일, 성공하기만 한다면, 이만치 권력의 무상함을 분명하게 느끼게 해 주는 행위가 있을까.
1) 형가 : 진나라 시황제를 암살하려고 했던 인물
2) 예양 : 의리를 지키기 위해 조나라의 종주였던 양자를 죽이려고 했던 인물
이런 자객들은 성공한다 해도 자신의 목숨까지 건지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는 것을 대개 잘 알고 있었다. 내 목숨 하나를 던져 만백성을 폭군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면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영웅들은 적지 않았지만 대개의 권력자들은 쉽사리 그런 식의 암살 목표가 되도록 자신을 위험상황에 내놓지 않았으므로, 실제로 자객이 권력자를 향해 칼끝을 겨누는 행위는 그 시도조차도 쉽지 않았다.
정조, 조선왕조 가장 유명한 암살 대상
정조의 어진(이미지 출처 : 수원효행기념관 소장)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암살 음모의 대상은 바로 정조였다.
1752년에 태어나 만 24세의 나이로 조선 22대 임금이 된 정조 이산은 열 살 때 아버지의 죽음(임오화변, 1762)을 맞은 뒤 늘 생명의 위협을 겪어왔다. 그런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 거처로 삼았던 경희궁 존현각은 그에겐 그 자신만의 요새였다.
존현각(尊賢閣)은 경희궁 흥정당 동남쪽의 친현각을 2층으로 개조한 건물로, 위층은 주합루(宙合樓), 1층은 존현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존현(尊賢), 즉 현인을 존경한다는 뜻 그대로 존현각은 임금이 될 세손의 공부방이자 접견실이었고 대리청정에 나섰을 때에도 정조는 존현각에 앉아 대신과 승지들을 맞아들여 정사를 돌봤다. 익숙한 곳이다 보니 왕위에 오른 뒤에도 거처를 바꿀 의사가 없어 보였다.
영화 <역린> 속 존현각 전투 스틸컷(이미지 출처 :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역린> 속 존현각 전투 스틸컷(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그가 즉위한지 1년 4개월이 지난 1777년 음력 7월28일, 바로 이 존현각으로 자객들이 침입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영화 <역린>은 바로 이 사건을 모티브로 삼아 그해 7월27일 새벽부터 7월28일 밤 11시 경까지의 30여 시간 동안 일어난 사건들을 다뤘다.
영화에선 젊은 노론 일파들이 주도
<역린>은 어느 날 새벽 존현각에서 책을 읽다 말고 웃통을 벗은 채 체력 단련에 힘쓰는 정조(현빈)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즉위 2년째에 접어든 정조는 여전히 국정을 온전히 장악하고 있지 못하다. 조정의 요직들은 거의 모두 노론 대신들의 차지고, 그 정점에는 할아버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한지민)가 있다. 병권 역시 노론의 일원인 구선복(송영창)의 차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 노론 일파가 정조를 시해할 음모를 꾸민다. 이들은 정순왕후의 승락을 받으면 그 즉시 정조를 살해하고 이복 동생 중 하나인 은전군 이찬을 왕위에 올리기로 한다. 이를 위해 음모자들은 어린아이들을 살인병기로 길러내는 범죄 집단의 총수 광백이(조재현)를 동원하고 광백이는 자신의 휘하 중 최고의 실력을 가진 을수(조정석)에게 정조 시해의 임무를 맡긴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이 음모는 정조의 측근에게 새 나가고, 결국 그날 밤 존현각에서는 을수가 이끄는 살수들과 정조를 보호하려는 금위영 군사들 사이의 치열한 공방이 펼쳐진다.
노론 전체가 뭉쳤다? 살수집단도 등장안해!
일단 <역린>의 설정은 몇 군데에서 좀 지나쳐 보인다. 정조와 노론의 극한대립, 특히 정순왕후가 그 정점에 있었다는 해석은 1993년 이인화의 소설 <영원한 제국> 등을 통해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모았지만, 이후 등장한 여러 사료들과 정조 시대에 대한 폭넓은 연구를 통해 우리는 이미 노론 전체가 한데 뭉쳐 정조에 맞선 일은 없었음을 잘 알고 있다. 이 영화에서 정조의 측근 모임으로 그려지는 ‘동덕회’만 해도 노론의 영수인 김종수, 소론의 영수 서명선, 그리고 정조의 최측근인 홍국영 등, 정조의 측근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세력들이 한데 모여 정조를 중심으로 정국을 논의하는 모임이었다.
이런 큰 그림은 그렇다 치고, <역린>과 실제 사건의 가장 큰 차이는 디테일이다. 물론 영화가 역사와 일치할 필요는 없고, 필요한 부분에서 과장이나 생략이 있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울 수도 있지만, 문제는 실제 발생했던 음모자들의 수준이 너무나 아마추어적이라는 데 있었다. 영화에 나오는 프로 살수(殺手)집단(의뢰를 받고 전문적으로 암살을 하는 단체) 같은 것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 기록은 비리로 쫓겨난 관료의 음모
<조선왕조실록>의 당일 기록을 살펴보자. 7월 28일 밤, 한밤중에 임금이 존현각에 앉아 혼자 촛불을 켜고 책을 읽고 있는데 지붕 위쪽에서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기왓장이 떨어졌다. 내시들에 이어 금위대장 홍국영까지 나서 황급히 수색했으나 사람이 있었던 흔적만 있을 뿐, 어디로 달아났는지는 찾을 수 없었다. 어쨌든 임금의 처소에 외부인이 침입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당연히 대내가 발칵 뒤집혔고, 그제서야 재상들은 경희궁이 민가와 바로 붙어 있어 경호에 어려움이 있다며 창덕궁으로 왕이 거처를 옮길 것을 요청했다. 결국 8월6일, 임금은 창덕궁으로 이사했다. 다음날인 7일, 범인을 잡지 못한다는 이유로 우포도대장을 구선복으로 교체했다. 경비 강화가 논의되고 있는 사이, 8월 11일에 2차 시해 시도와 함께 범인이 잡혔다.
이날 궁성을 수비하던 군사들이 궁궐 담을 넘으려 하는 자가 있는 것을 보고 따라가 체포하고 보니 전흥문이라는 사람이었다. 국문(鞠問)3)을 해 보니 지난 7월 28일에 강용휘라는 자와 함께 존현각 지붕에 올라간 자였음이 밝혀졌다. 강용휘는 무관 출신으로, 조카 강계창과 딸 강월혜가 모두 궁인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곧이어 배후에는 홍상범이라는 거물이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홍상범은 대사성과 황해감사를 지낸 남양 홍씨 가문 홍술해의 아들로, 홍술해가 비리 혐의로 흑산도에 귀양을 가자 정권에 불만을 품고 시역(弑逆)4)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었다. 여기서부터는 관련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의금부가 죄인들로 꽉 차는 상황으로 발전하게 된다.
3) 국문 : 중죄인을 심문하는 일
4) 시역 : 임금을 죽이는 일
불운 겪던 무사를 겨우 열다섯냥으로
이들의 자백 내용을 종합하면 이렇다. 홍상범과 강용휘는 원래 친한 이웃 사이였고, 강용휘는 무예가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으므로 홍상범은 강용휘를 통해 실제 손을 쓸 수 있는 무사들을 모았다. 거기에 첫 번째로 꼽힌 사람이 전흥문이었다. 전흥문은 나름 무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나 워낙 집안이 가난해 출세를 꿈꾸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이 점을 눈여겨보던 강용휘가 접근해 왔다. 돈으로 전흥문을 구워 삶은 강용휘는 마침내 홍상범의 음모에 참여할 것을 권유한다. 실록에는 이때 강용휘가 쓴 돈이 엽전 1500문(상평통보 엽전 하나가 1문, 100개가 1냥이니 15냥이다)이라고 나온다. 영화 <역린>에서 광백이의 대사로 “임금 모가지 값이 열 다섯냥이 뭐이가”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기록을 충실히 살린 것으로 보인다.
마침내 결단을 내린 두 사람은 음력 7월28일, 개장국을 든든히 먹고(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 부분 역시<역린>에 충실히 재현되어 있다.) 홍상범이 이끄는 장사 20명과 함께 존현각 기습에 나선다. 그런데 실행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당초의 계획은 무예가 뛰어난 강용휘와 전흥문이 선두에 서서 존현각으로 침투, 정조를 치면 나머지 20명이 따라 난입해서 궁을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대비전에 고하고 은전군을 옹립한 다음 백관들을 입궐시켜 정조의 측근들을 척살하면 상황은 마무리된다는 것.
실제로 조선시대의 궁정 쿠데타는 소수의 정예 병력을 동원해 궁정을 장악하면 성공으로 끝난다는 것이 두 차례의 반정(인조반정, 중종반정)과 계유정난5)을 통해 입증된 바 있다. 하지만 20명은 너무 적은 숫자였고, 더구나 숙련된 실력자들도 아니었다. 일단 선봉인 강용휘와 전흥문부터 너무 어설펐다. 이들은 강용휘의 조카와 딸의 안내에 힘입어 존현각 지붕까지는 침투했지만 막상 정조를 공격할 수 있는 상황이 되자 너무 긴장한 탓인지 이상한 행동을 한다.
5) 계유정난 : 1453년(단종 1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보좌 세력이자 원로대신인 황보 인, 김종서 등 수십 인을 살해,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
불과 스무명, 지붕위 도깨비 흉내... ... 너무도 어설펐던
영화 <역린> 스틸컷(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체포된 전흥문은 지붕에 올라간 강용휘가 기왓장을 던지고 모래를 뿌리며 도깨비 흉내를 냈다(撤瓦抛沙 作魍魎狀)고 자백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키고 그 틈을 타 국왕 시해를 하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좀 이해하기 어렵다. 구중궁궐의 보안을 뚫고 지근거리까지 접근했으면 상대가 눈치채기 전에 바로 범행을 저질러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행동을 했다는 것은 상식적인 사람의 행동이 아니다. 소란이 일고 수색이 강화되자 전흥문과 강용휘는 바로 도주했고, 이들의 거사를 기다리던 홍상범 일행도 뿔뿔이 흩어졌다.
혹시 강용휘는 거사에 뜻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도련님 홍상범과 친하게 지내며 돈이며 술이며 단물을 톡톡히 빨았던 강용휘는 집안의 몰락으로 울분에 찬 홍상범에게 “이 기회에 세상을 뒤집어 버리자”고 술자리 호기를 부린 것은 아닐까. 그렇게 해서 지능은 좀 떨어지지만 용력이 넘치는 전흥문을 끌어들이고 거사일까지 잡았지만, 막상 큰 일을 저지를 만한 용기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니 현장에서 일부러 소란을 피운 뒤 곧바로 도주해 숨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문제는 그야말로 의리 하나밖에 모르는 돌쇠 전흥문이었다. 그는 첫 거사에 실패한 뒤에도 ‘돈을 받았으면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을 잃지 않았고, 강용휘가 어디론가 숨어버리자 혼자라도 거사를 치르겠다는 생각으로 이번에는 창덕궁 담을 넘으려다 마침내 체포되어 사건의 전모를 털어놓고 만다.
그렇게 해서 연루자들 수십 명이 체포되어 조사를 받다 보니 점점 사건의 규모가 커졌다. 정조를 직접 살해하려 한 홍상범 외에도 홍상범의 어머니, 즉 홍술해의 아내가 무녀에게 돈을 주어 정조와 홍국영을 저주하게 한 정황이 드러났고, 이어 홍상범의 먼 친척인 홍계능과 아들 홍신해 등도 은전군을 왕으로 옹립하는 음모에 동참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이 과정에서 이미 살기를 포기한 홍계능은 “다 필요없으니 어서 죽이기나 하라”며 오히려 대들기도 한다.
오히려 왕권 강화 기회가 된 암살시도
그도 그럴 것이, 홍계능의 8촌형인 홍계희6)는 정조의 외종조부인 홍인한7) 등과 함께 사도세자8)의 죽음을 주도한 인물로 주목받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홍계희는 이미 죽었어도 남양 홍씨 가문은 언제든 정조의 보복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예측이 충분히 가능했다. 정조는 이미 즉위 직후 사도세자의 죽음에 책임이 있고 자신의 국왕 즉위를 막으려 했던 홍인한과 정후겸, 김귀주 등을 모두 처단한 바 있다. 그러니 홍상범 등이 체포된 순간 홍계능은 실제로 음모에 참여했건 아니건, 아무리 항변해도 자신이 살길은 없다고 판단했을 것 같다.
6) 홍계희 : 1703-1771. 영조시대 이조판서, 경기도 관찰사등을 지냄
7) 홍인한 : 1722-1776. 영조시대 예조판서, 우의정 등을 지냄
8) 사도세자 : 1735-1762. 영조의 둘째아들. 정조의 아버지
9) 이담 : 홍국영이 정조의 후궁으로 보냈던 누이동생의 양자로 들인 인물
결국 이 음모를 계기로 정조는 정후검, 김귀주의 잔당들과 남양 홍씨 가문을 척결하고 권력을 더욱 강화했다. 이제 남은 것은 구선복이었다. <역린>에서 반란군의 뒷배로 등장했다가 칼을 거꾸로 잡고 정조의 친위세력으로 변신한 것으로 그려진 무장 구선복은 그 뒤로도 고위직을 전전하며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끝내 정조의 칼끝을 피하지는 못했다. 9년 뒤인 1786년, 구선복은 상계군 이담9)을 왕위에 올리려 했다는 음모에 연루되어 아들, 조카 등 일족이 극형을 당했다.
정조의 9년 기다린 복수, 반대파로선 선택의 여지가
영화 <역린> 속 정조(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사실 구선복은 일찍이 사도세자가 죽던 임오화변 때, 뒤주 옆에서 웃으며 사도세자를 희롱했다는 소문이 있어 정조로서는 누구보다 먼저 죽이고 싶었을 인물이다. 그런 정조도 10년을 기다렸을 정도로 군 내부에서 구선복의 위치는 공고했던 모양이다. 구선복이 능지처참을 당하고 6년 뒤인 1782년, 정조는 신하들 앞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역적 선복(善復)으로 말하면 홍인한보다 더 심하여 손으로 찢어 죽이고 입으로 그 살점을 씹어먹는다는 것도 오히려 많이 참은 표현이다. 매번 경연(經筵)에 오를 적마다 심장과 뼈가 모두 떨리니, 어찌 차마 하루라도 그 얼굴을 대하고 싶었겠는가마는, 그가 병권을 손수 쥐고 있고 그 무리들이 많아서 갑자기 처치할 수 없었으므로 다년간 괴로움을 참고 있다가 끝내 사단으로 인하여 법을 적용하였다.”
이렇듯 존현각 습격 사건은 결국 그 배후 인물들을 몰살시키고 싶었던 정조에겐 울고 싶은 데 뺨을 때린 격이었지만, 9년을 더 버티고도 결국은 제거된 구선복의 경우만 보더라도 정조 반대파들로서는 이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어찌 보면 한번 품은 원한은 절대 잊지 않는 정조의 성정을 제대로 이해했기에 역모를 시도했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러려면 좀 더 치밀한 계획을 세웠어야 했을 듯.
방송PD
JTBC 보도제작국 교양담당 부국장. <차이나는 클라스>와 <양식의 양식> 등 지식 집약적 교양 프로그램 CP를 맡고 있다. 역사적 인물을 다룬 서사에 관심이 많은 사극 덕후. 최근 한국 음식의 근원과 현재에 대한 책 <양식의 양식>을 집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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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역린>이 그려낸 정조 암살 음모의 전모
-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 '어설픈 계획이 정조의 복수심에 불을 질렀다'
송원섭
2020-12-24
체포된 전흥문은 지붕에 올라간 강용휘가 기왓장을 던지고 모래를 뿌리며 도깨비 흉내를 냈다고 자백했다. 눈을 현혹시키고 그 틈을 타 국왕 시해를 하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해하기 어렵다. 상대가 눈치채기 전에 바로 범행을 저질러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눈길을 끄는 행동을 했다는 것은 상식적인 행동이 아니다. 소란이 일고 수색이 강화되자 그들은 바로 도주했고, 거사를 기다리던 일행도 뿔뿔이 흩어졌다. 혹시 강용휘는 거사에 뜻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자객, 권력자를 향해 칼끝을 겨누는
영화 <역린> 포스터(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자객이라는 말에는 왠지 가슴을 뛰게 하는 요소가 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자객열전>에 등장하는 형가1)나 예양2) 이후,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자객은 대의를 위해 자신을 초개처럼 버리는 의지의 인간으로 묘사되어 왔다. 제대로 된 칼질로 거대한 권력을 무너뜨리는 일, 성공하기만 한다면, 이만치 권력의 무상함을 분명하게 느끼게 해 주는 행위가 있을까.
1) 형가 : 진나라 시황제를 암살하려고 했던 인물
2) 예양 : 의리를 지키기 위해 조나라의 종주였던 양자를 죽이려고 했던 인물
이런 자객들은 성공한다 해도 자신의 목숨까지 건지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는 것을 대개 잘 알고 있었다. 내 목숨 하나를 던져 만백성을 폭군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면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영웅들은 적지 않았지만 대개의 권력자들은 쉽사리 그런 식의 암살 목표가 되도록 자신을 위험상황에 내놓지 않았으므로, 실제로 자객이 권력자를 향해 칼끝을 겨누는 행위는 그 시도조차도 쉽지 않았다.
정조, 조선왕조 가장 유명한 암살 대상
정조의 어진(이미지 출처 : 수원효행기념관 소장)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암살 음모의 대상은 바로 정조였다.
1752년에 태어나 만 24세의 나이로 조선 22대 임금이 된 정조 이산은 열 살 때 아버지의 죽음(임오화변, 1762)을 맞은 뒤 늘 생명의 위협을 겪어왔다. 그런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 거처로 삼았던 경희궁 존현각은 그에겐 그 자신만의 요새였다.
존현각(尊賢閣)은 경희궁 흥정당 동남쪽의 친현각을 2층으로 개조한 건물로, 위층은 주합루(宙合樓), 1층은 존현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존현(尊賢), 즉 현인을 존경한다는 뜻 그대로 존현각은 임금이 될 세손의 공부방이자 접견실이었고 대리청정에 나섰을 때에도 정조는 존현각에 앉아 대신과 승지들을 맞아들여 정사를 돌봤다. 익숙한 곳이다 보니 왕위에 오른 뒤에도 거처를 바꿀 의사가 없어 보였다.
영화 <역린> 속 존현각 전투 스틸컷(이미지 출처 :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역린> 속 존현각 전투 스틸컷(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그가 즉위한지 1년 4개월이 지난 1777년 음력 7월28일, 바로 이 존현각으로 자객들이 침입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영화 <역린>은 바로 이 사건을 모티브로 삼아 그해 7월27일 새벽부터 7월28일 밤 11시 경까지의 30여 시간 동안 일어난 사건들을 다뤘다.
영화에선 젊은 노론 일파들이 주도
<역린>은 어느 날 새벽 존현각에서 책을 읽다 말고 웃통을 벗은 채 체력 단련에 힘쓰는 정조(현빈)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즉위 2년째에 접어든 정조는 여전히 국정을 온전히 장악하고 있지 못하다. 조정의 요직들은 거의 모두 노론 대신들의 차지고, 그 정점에는 할아버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한지민)가 있다. 병권 역시 노론의 일원인 구선복(송영창)의 차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 노론 일파가 정조를 시해할 음모를 꾸민다. 이들은 정순왕후의 승락을 받으면 그 즉시 정조를 살해하고 이복 동생 중 하나인 은전군 이찬을 왕위에 올리기로 한다. 이를 위해 음모자들은 어린아이들을 살인병기로 길러내는 범죄 집단의 총수 광백이(조재현)를 동원하고 광백이는 자신의 휘하 중 최고의 실력을 가진 을수(조정석)에게 정조 시해의 임무를 맡긴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이 음모는 정조의 측근에게 새 나가고, 결국 그날 밤 존현각에서는 을수가 이끄는 살수들과 정조를 보호하려는 금위영 군사들 사이의 치열한 공방이 펼쳐진다.
노론 전체가 뭉쳤다? 살수집단도 등장안해!
일단 <역린>의 설정은 몇 군데에서 좀 지나쳐 보인다. 정조와 노론의 극한대립, 특히 정순왕후가 그 정점에 있었다는 해석은 1993년 이인화의 소설 <영원한 제국> 등을 통해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모았지만, 이후 등장한 여러 사료들과 정조 시대에 대한 폭넓은 연구를 통해 우리는 이미 노론 전체가 한데 뭉쳐 정조에 맞선 일은 없었음을 잘 알고 있다. 이 영화에서 정조의 측근 모임으로 그려지는 ‘동덕회’만 해도 노론의 영수인 김종수, 소론의 영수 서명선, 그리고 정조의 최측근인 홍국영 등, 정조의 측근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세력들이 한데 모여 정조를 중심으로 정국을 논의하는 모임이었다.
이런 큰 그림은 그렇다 치고, <역린>과 실제 사건의 가장 큰 차이는 디테일이다. 물론 영화가 역사와 일치할 필요는 없고, 필요한 부분에서 과장이나 생략이 있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울 수도 있지만, 문제는 실제 발생했던 음모자들의 수준이 너무나 아마추어적이라는 데 있었다. 영화에 나오는 프로 살수(殺手)집단(의뢰를 받고 전문적으로 암살을 하는 단체) 같은 것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 기록은 비리로 쫓겨난 관료의 음모
<조선왕조실록>의 당일 기록을 살펴보자. 7월 28일 밤, 한밤중에 임금이 존현각에 앉아 혼자 촛불을 켜고 책을 읽고 있는데 지붕 위쪽에서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기왓장이 떨어졌다. 내시들에 이어 금위대장 홍국영까지 나서 황급히 수색했으나 사람이 있었던 흔적만 있을 뿐, 어디로 달아났는지는 찾을 수 없었다. 어쨌든 임금의 처소에 외부인이 침입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당연히 대내가 발칵 뒤집혔고, 그제서야 재상들은 경희궁이 민가와 바로 붙어 있어 경호에 어려움이 있다며 창덕궁으로 왕이 거처를 옮길 것을 요청했다. 결국 8월6일, 임금은 창덕궁으로 이사했다. 다음날인 7일, 범인을 잡지 못한다는 이유로 우포도대장을 구선복으로 교체했다. 경비 강화가 논의되고 있는 사이, 8월 11일에 2차 시해 시도와 함께 범인이 잡혔다.
이날 궁성을 수비하던 군사들이 궁궐 담을 넘으려 하는 자가 있는 것을 보고 따라가 체포하고 보니 전흥문이라는 사람이었다. 국문(鞠問)3)을 해 보니 지난 7월 28일에 강용휘라는 자와 함께 존현각 지붕에 올라간 자였음이 밝혀졌다. 강용휘는 무관 출신으로, 조카 강계창과 딸 강월혜가 모두 궁인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곧이어 배후에는 홍상범이라는 거물이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홍상범은 대사성과 황해감사를 지낸 남양 홍씨 가문 홍술해의 아들로, 홍술해가 비리 혐의로 흑산도에 귀양을 가자 정권에 불만을 품고 시역(弑逆)4)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었다. 여기서부터는 관련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의금부가 죄인들로 꽉 차는 상황으로 발전하게 된다.
3) 국문 : 중죄인을 심문하는 일
4) 시역 : 임금을 죽이는 일
불운 겪던 무사를 겨우 열다섯냥으로
이들의 자백 내용을 종합하면 이렇다. 홍상범과 강용휘는 원래 친한 이웃 사이였고, 강용휘는 무예가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으므로 홍상범은 강용휘를 통해 실제 손을 쓸 수 있는 무사들을 모았다. 거기에 첫 번째로 꼽힌 사람이 전흥문이었다. 전흥문은 나름 무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나 워낙 집안이 가난해 출세를 꿈꾸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이 점을 눈여겨보던 강용휘가 접근해 왔다. 돈으로 전흥문을 구워 삶은 강용휘는 마침내 홍상범의 음모에 참여할 것을 권유한다. 실록에는 이때 강용휘가 쓴 돈이 엽전 1500문(상평통보 엽전 하나가 1문, 100개가 1냥이니 15냥이다)이라고 나온다. 영화 <역린>에서 광백이의 대사로 “임금 모가지 값이 열 다섯냥이 뭐이가”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기록을 충실히 살린 것으로 보인다.
마침내 결단을 내린 두 사람은 음력 7월28일, 개장국을 든든히 먹고(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 부분 역시<역린>에 충실히 재현되어 있다.) 홍상범이 이끄는 장사 20명과 함께 존현각 기습에 나선다. 그런데 실행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당초의 계획은 무예가 뛰어난 강용휘와 전흥문이 선두에 서서 존현각으로 침투, 정조를 치면 나머지 20명이 따라 난입해서 궁을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대비전에 고하고 은전군을 옹립한 다음 백관들을 입궐시켜 정조의 측근들을 척살하면 상황은 마무리된다는 것.
실제로 조선시대의 궁정 쿠데타는 소수의 정예 병력을 동원해 궁정을 장악하면 성공으로 끝난다는 것이 두 차례의 반정(인조반정, 중종반정)과 계유정난5)을 통해 입증된 바 있다. 하지만 20명은 너무 적은 숫자였고, 더구나 숙련된 실력자들도 아니었다. 일단 선봉인 강용휘와 전흥문부터 너무 어설펐다. 이들은 강용휘의 조카와 딸의 안내에 힘입어 존현각 지붕까지는 침투했지만 막상 정조를 공격할 수 있는 상황이 되자 너무 긴장한 탓인지 이상한 행동을 한다.
5) 계유정난 : 1453년(단종 1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보좌 세력이자 원로대신인 황보 인, 김종서 등 수십 인을 살해,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
불과 스무명, 지붕위 도깨비 흉내... ... 너무도 어설펐던
영화 <역린> 스틸컷(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체포된 전흥문은 지붕에 올라간 강용휘가 기왓장을 던지고 모래를 뿌리며 도깨비 흉내를 냈다(撤瓦抛沙 作魍魎狀)고 자백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키고 그 틈을 타 국왕 시해를 하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좀 이해하기 어렵다. 구중궁궐의 보안을 뚫고 지근거리까지 접근했으면 상대가 눈치채기 전에 바로 범행을 저질러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행동을 했다는 것은 상식적인 사람의 행동이 아니다. 소란이 일고 수색이 강화되자 전흥문과 강용휘는 바로 도주했고, 이들의 거사를 기다리던 홍상범 일행도 뿔뿔이 흩어졌다.
혹시 강용휘는 거사에 뜻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도련님 홍상범과 친하게 지내며 돈이며 술이며 단물을 톡톡히 빨았던 강용휘는 집안의 몰락으로 울분에 찬 홍상범에게 “이 기회에 세상을 뒤집어 버리자”고 술자리 호기를 부린 것은 아닐까. 그렇게 해서 지능은 좀 떨어지지만 용력이 넘치는 전흥문을 끌어들이고 거사일까지 잡았지만, 막상 큰 일을 저지를 만한 용기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니 현장에서 일부러 소란을 피운 뒤 곧바로 도주해 숨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문제는 그야말로 의리 하나밖에 모르는 돌쇠 전흥문이었다. 그는 첫 거사에 실패한 뒤에도 ‘돈을 받았으면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을 잃지 않았고, 강용휘가 어디론가 숨어버리자 혼자라도 거사를 치르겠다는 생각으로 이번에는 창덕궁 담을 넘으려다 마침내 체포되어 사건의 전모를 털어놓고 만다.
그렇게 해서 연루자들 수십 명이 체포되어 조사를 받다 보니 점점 사건의 규모가 커졌다. 정조를 직접 살해하려 한 홍상범 외에도 홍상범의 어머니, 즉 홍술해의 아내가 무녀에게 돈을 주어 정조와 홍국영을 저주하게 한 정황이 드러났고, 이어 홍상범의 먼 친척인 홍계능과 아들 홍신해 등도 은전군을 왕으로 옹립하는 음모에 동참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이 과정에서 이미 살기를 포기한 홍계능은 “다 필요없으니 어서 죽이기나 하라”며 오히려 대들기도 한다.
오히려 왕권 강화 기회가 된 암살시도
그도 그럴 것이, 홍계능의 8촌형인 홍계희6)는 정조의 외종조부인 홍인한7) 등과 함께 사도세자8)의 죽음을 주도한 인물로 주목받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홍계희는 이미 죽었어도 남양 홍씨 가문은 언제든 정조의 보복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예측이 충분히 가능했다. 정조는 이미 즉위 직후 사도세자의 죽음에 책임이 있고 자신의 국왕 즉위를 막으려 했던 홍인한과 정후겸, 김귀주 등을 모두 처단한 바 있다. 그러니 홍상범 등이 체포된 순간 홍계능은 실제로 음모에 참여했건 아니건, 아무리 항변해도 자신이 살길은 없다고 판단했을 것 같다.
6) 홍계희 : 1703-1771. 영조시대 이조판서, 경기도 관찰사등을 지냄
7) 홍인한 : 1722-1776. 영조시대 예조판서, 우의정 등을 지냄
8) 사도세자 : 1735-1762. 영조의 둘째아들. 정조의 아버지
9) 이담 : 홍국영이 정조의 후궁으로 보냈던 누이동생의 양자로 들인 인물
결국 이 음모를 계기로 정조는 정후검, 김귀주의 잔당들과 남양 홍씨 가문을 척결하고 권력을 더욱 강화했다. 이제 남은 것은 구선복이었다. <역린>에서 반란군의 뒷배로 등장했다가 칼을 거꾸로 잡고 정조의 친위세력으로 변신한 것으로 그려진 무장 구선복은 그 뒤로도 고위직을 전전하며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끝내 정조의 칼끝을 피하지는 못했다. 9년 뒤인 1786년, 구선복은 상계군 이담9)을 왕위에 올리려 했다는 음모에 연루되어 아들, 조카 등 일족이 극형을 당했다.
정조의 9년 기다린 복수, 반대파로선 선택의 여지가
영화 <역린> 속 정조(이미지 출처 : 네이버영화)
사실 구선복은 일찍이 사도세자가 죽던 임오화변 때, 뒤주 옆에서 웃으며 사도세자를 희롱했다는 소문이 있어 정조로서는 누구보다 먼저 죽이고 싶었을 인물이다. 그런 정조도 10년을 기다렸을 정도로 군 내부에서 구선복의 위치는 공고했던 모양이다. 구선복이 능지처참을 당하고 6년 뒤인 1782년, 정조는 신하들 앞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역적 선복(善復)으로 말하면 홍인한보다 더 심하여 손으로 찢어 죽이고 입으로 그 살점을 씹어먹는다는 것도 오히려 많이 참은 표현이다. 매번 경연(經筵)에 오를 적마다 심장과 뼈가 모두 떨리니, 어찌 차마 하루라도 그 얼굴을 대하고 싶었겠는가마는, 그가 병권을 손수 쥐고 있고 그 무리들이 많아서 갑자기 처치할 수 없었으므로 다년간 괴로움을 참고 있다가 끝내 사단으로 인하여 법을 적용하였다.”
이렇듯 존현각 습격 사건은 결국 그 배후 인물들을 몰살시키고 싶었던 정조에겐 울고 싶은 데 뺨을 때린 격이었지만, 9년을 더 버티고도 결국은 제거된 구선복의 경우만 보더라도 정조 반대파들로서는 이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어찌 보면 한번 품은 원한은 절대 잊지 않는 정조의 성정을 제대로 이해했기에 역모를 시도했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러려면 좀 더 치밀한 계획을 세웠어야 했을 듯.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영화 <역린>이 그려낸 정조 암살 음모의 전모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일부 고증 오류, 그래도 고대 이집트에 큰 관심 조성
방송PD
JTBC 보도제작국 교양담당 부국장. <차이나는 클라스>와 <양식의 양식> 등 지식 집약적 교양 프로그램 CP를 맡고 있다. 역사적 인물을 다룬 서사에 관심이 많은 사극 덕후. 최근 한국 음식의 근원과 현재에 대한 책 <양식의 양식>을 집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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