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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하나의 테마, 360도 관점

심리 문학 일상

[한 페이지 필사] 책 읽어주는 남자

by 장석주 / 2016.02.04

한 페이지 필사
‘꼭꼭’ 마음으로 읽고 ‘꾹꾹’ 손으로 써보는 시간


책읽어주는 남자


어린 시절과 청춘 시절에 병석에 누워 있는 시간은 정말 마법의 시간이라고 할 것이다! 바깥 세계, 즉 마당이나 정원 또는 길거리의 자유 시간의 세계는 아주 희미한 소리가 되어 병실로 들어올 뿐이다. 병실 안에는 환자가 읽고 있는 이야기와 형상들의 세계가 무성하게 우거진다. 고열은 주변 세계에 대한 감지력을 떨어뜨리고 상상력을 날카롭게 하여 병실을 하나의 새로운, 친숙하면서도 낯선 공간으로 만들어준다. 괴물들은 커튼과 벽지의 문양들 속에서 흉측한 얼굴들을 내보이고, 의자들과 테이블들 그리고 서가들과 책장들은 우뚝 솟아올라 손을 뻗어 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우면서도 멀리 있는 산이나 건물 또는 배가 된다. 긴 밤 시간 내내 교회 탑시계의 종소리와 가끔씩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부르릉 소리와, 사방의 벽과 지붕을 더듬으며 반사되는 헤드라이트 불빛이 환자와 동행한다. 이때는 잠이 오지 않는 시간이다. 그러나 불면증의 시간은 아니다. 즉 결핍의 시간이 아니라 충만의 시간이다. 동경, 회상, 불안, 욕망 등이 미궁을 만들어놓아 환자는 그 속에서 끊임없이 길을 잃고 또다시 찾았다가 또다시 잃곤 한다. 이때는 모든 것이 가능한 시간이다. 좋은 것이나 나쁜 것 할 것 없이.

 

이 모든 것은 환자의 병이 낫게 되면 끝나고 만다. 하지만 병이 아주 오랫동안 계속된 상태라면, 병실이 외부 세계에 대해서 내화(耐火)되어 환자는 이제 전혀 열이 나지 않고 병에서 거의 회복된 상태라 하더라도 미궁 속에서 헤매게 된다. 베른하르트 슐링크, 『책 읽어주는 남자』, 김재혁 옮김, 시공사, 2013, 28~29쪽.

 

모든 “병은 죽음에 대한 수련”(알베르 카뮈)이다. 병은 오래 앓을수록 친숙해진다. 다른 한편으로 자기에 대한 연민이 커진다. 이 연민은 자기애의 변주다. 환자가 누워 있는 병실은 외부 세계에 방어벽을 친 내실이다. 고열 환자는 외부의 빛과 소리가 차단된 내실에서 마법의 시간을 보낸다. 이때 환자의 내면에는 “동경, 회상, 불안, 욕망”이 들끓는다. 병은 사람을 정신적으로 성숙하게 이끈다. 병에서 회복한 아이들이 어딘지 성큼 커버린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장석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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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장석주
(기획자문위원)시인. 인문학 저술가. 『월간 문학』 신인상에 당선해 문단에 나오고,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당선, 같은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입선하여 시와 평론을 겸업한다. 스물 다섯에 편집자로 첫 발을 내딛은 이후, 13년 간 직접 출판사를 경영한 바 있다. 1993년 출판사를 접은 뒤에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방송진행자로도 활동했다. 시집 『몽해항로』, 『오랫동안』, 『일요일과 나쁜 날씨』 를 포함해 『마흔의 서재』, 『새벽예찬』, 『일상의 인문학』, 『불면의 등불이 너를 인도한다』, 『글쓰기는 스타일이다』 등 다수의 저서를 냈으며 최근 필사에 관한 저서인 『이토록 멋진 문장이라면』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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