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는 끔찍이도 손 많이 가는 음식을 싫어하셨다. 예를 들면 황백 지단과 채썬 김 고명 올린 음식 같은 건 경멸하셨다. 음식은 멋이나 폼이 아니다, 먹고 맛있으면 그만이다, 뭐 이런 지론이었다. 서울 변두리 막막한 날림 주택에서 살면서도 그다지 크게 낙심하지도 않으셨다. 있으면 먹자, 주의라서 뭐든 만들어 먹는 걸 좋아하시긴 했다.
장마철 비 오는 소리 같은 김치전 지지는 소리, 두부가 따박따박 썰리던 소리, 플라스틱으로 만든 사이폰 펌프로 풍로에 등유 넣을 때 나던 푸식푸식하던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자랐다.
먹자니 입은 많고 돈은 없었다. 엄마는 인형 눈깔 붙이는 건 아니어도 부업도 하셨다. 무려 미국 수출 보세품(이게 왠 말인가^^) 손뜨개 털실옷을 짰다. 나중에 알기로는 그 옷이 이태원과 미군부대 앞에서 팔렸다고 한다. 고국으로 귀국하는 미군 병사들의 선물용이었다. 가난한 우방국의 아주머니들 수고를 그들은 값싸게도 사갔던 것이다. 여하튼, 어머니는 그렇게 번 돈으로 우리를 먹이고 먹이고 또 먹이셨다.
재료에는 구애도 없었다. 개구리 뒷다리 튀김까진 안 했어도, 동물성 요리는 엄마의 주 공략품이었다. 까만 미군 타월 같은, 소 내장국은 엄마가 잘했다. 어른이 된 내가 이 놈의 내장을 다뤄 요리를 만들어 팔기 위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요리법을 물어본 적이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밀가루 쳐서 바락바락 치대라고 하신 게 전부였지만. 무 넣고 고추기름 띄워서 말갛고 빨간, 시원한 국을 끓였다. 그것이 소 위라고 했다. 소고기는 못 먹어도 소 내장은 먹고 자랐다. 소 허파 볶음도 먹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허파를 씹으면 마치 담요를 물어뜯는 것 같았다. 이것이 진짜 동물의 냄새구나, <동물의 왕국>에서 사자가 영양을 쓰러뜨려 배때기의 내장을 먹는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 사자처럼 입가에 피를 묻히지는 않았지만 벌건 고추기름을 바르고 배를 두드릴 수 있었다. 다 우리 엄마 덕이었다.
돼지 껍데기는 도시락 반찬으로 싸갔다. 껍데기는 집에서 먹다가 남으면 반찬통에 담겼다. 뜨거울 때는 이게 제법 맛있다. 학교에 가서 식으면 희한한 맛이 났다. 내 짝이 한 점 먹더니 “고래고기”라고 소리를 쳤다. 녀석은 어디서 진짜 고래고기를 먹어보긴 한 걸까. 그 탓에 나는, 반에서 고래고기 먹는 별난 소년이었다.
소년은 늘 배가 고팠다. 한 번은 담임 선생이 학교에서 본인이 들지 않은 도시락을 집에 가져다주라고 시킨 일이 있었다. 그 양반 댁이 내 하교길에 있었다. 그 길, 한 4킬로미터 가는 동안 내 손에 들린 그이의 도시락에서는 기막힌 냄새가 연방 풍겼다. 딱 봐도 쇠고기 장조림 냄새. 기어이 댁에 가기 전에 도시락 보따리를 풀렀다. 딱 한 점만 먹자던 장조림이 절반이나 없어졌다. 얼른 닫고 가져다드리긴 했다. 다음날 선생님이 알아채지나 않을까, 얼마나 조바심이 나던지.
엄마는 전을 부쳐도 손이 컸다. 기름 장수한테 사들인 비싼 들기름이나 낙화생유(땅콩유기름)을 살살 발라 까만색 싸구려 프라이팬에서 전을 부쳤다. 부치는 쪽보다 먹는 속도가 더디어 차곡차곡 쌓여야만 그만두었다. 엄마는 “먹을 때 아주 확실히 먹자.”는 주의였다. 그때는 발목이라도 부러져서 입원해야 먹을 수 있었던 바나나도 한 송이 째 들고 오신 분이었다. 대신 “1년 동안 바나나 타령 금지”를 조건으로. 딸기나 포도도 궤짝으로 샀다. 그게 쌌고, 그래야 물려서 안 찾으니 더 싸게 먹힌다는 게 엄마의 지론이었다.
자존심은 무지 세서 남 이목을 걱정하셨다. 쌀을 됫박으로 사오라고 심부름시킬 땐 꼭 토를 달았다. 저기 멀리 동네 입구, 잘 모르는 쌀집을 가라는 것이었다. 밥에 섞어 먹는 좁쌀을 살 때는 “병아리 모이라고 해라.”가 엄마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누가 물어본다고 그리 하셨나, 모르겠다.
고등어통조림을 살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국물을 쪽쪽 빨아먹으며 왔다. 집에 깡통 따개를 갖추지 않아서 가게 주인이 따주곤 했던 거였다. 녹슨 깡통 따개로 뚜껑을 열면 미원 잔뜩 친 맛있는 고등어 국물이 있었다. 집에 가면, 국물은 거진 반 가라지고 건더기만 남았던 기억. 지금도 나는 쇠고기 미역국보다 깡통 고등어 미역국을 좋아한다.
음식이란 본래부터 주어진 것을 맛있다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마빈 해리스라는 인류학자의 말이기도 하다. 오히려 군대에 갔더니 정초에 대통령 명령으로 쇠고기 미역국이 나왔다. 사람들은 맛있다 하나 내겐 별로 맛이 없었다. 엄마 자식으로 나는 먹고 자랐던 까닭이다. 그리고 그 손맛으로 요리사가 되었다. 나는 늘 엄마 급의 요리사가 되는 게 소원이었다. 복잡하지 않아도 맛있고, 값도 싸고, 먹다가 행복해지는 포만의 음식. 엄마가 이제 팔순을 바라보신다. 아직 손맛은 있으신 듯하다. 나는 많이 슬프다.
소 내장볶음(이탈리아식) 4인분
소 양 1킬로그램, 양파 다진 것 반컵, 마늘 다진 것 2큰술, 쪽파 4줄기, 토마토소스 1컵, 화이트와인 반컵, 올리브유 적당량, 소금, 후추, 파슬리 조금, 파르메산 치즈 4큰술
1. 양은 밀가루를 뿌려 오랫동안 치대서 빤다. 끓는 물에 가볍게 삶아서 속 껍질을 다 벗겨내고 손질한다.
2. 끓는 물에 소금을 약간 치고 양을 삶는다. 2시간 이상 삶아서 부드러워지면 꺼내서 한 입 크기로 썰어둔다.
3. 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마늘과 양파 다진 것을 볶는다. 양을 넣고 더 볶는다. 화이트와인을 뿌리고 토마토 소스를 넣어 조린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이탈리아에서 요리를 배웠다. 몇몇 레스토랑을 거쳐 지금은 서교동의 ‘로칸다 몽로’라는 식당에서 일한다. 어머니처럼 소 내장 요리를 만든다. 손님들이 줄을 서서 먹는 히트작이다. 물론 이탈리아 식이지만, 어머니에게 바치는 헌정 메뉴다. 『경향신문』과 『한겨레』에 칼럼을 쓴다. 『백년식당』,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등의 책을 써서 이름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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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밥] 엄마의 맛
박찬일
2016-03-10
우리 엄마밥'엄마'와 '엄마 음식'에 관한 소소(小笑)한 이야기
엄마의 맛
우리 엄마는 끔찍이도 손 많이 가는 음식을 싫어하셨다. 예를 들면 황백 지단과 채썬 김 고명 올린 음식 같은 건 경멸하셨다. 음식은 멋이나 폼이 아니다, 먹고 맛있으면 그만이다, 뭐 이런 지론이었다. 서울 변두리 막막한 날림 주택에서 살면서도 그다지 크게 낙심하지도 않으셨다. 있으면 먹자, 주의라서 뭐든 만들어 먹는 걸 좋아하시긴 했다.
장마철 비 오는 소리 같은 김치전 지지는 소리, 두부가 따박따박 썰리던 소리, 플라스틱으로 만든 사이폰 펌프로 풍로에 등유 넣을 때 나던 푸식푸식하던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자랐다.
먹자니 입은 많고 돈은 없었다. 엄마는 인형 눈깔 붙이는 건 아니어도 부업도 하셨다. 무려 미국 수출 보세품(이게 왠 말인가^^) 손뜨개 털실옷을 짰다. 나중에 알기로는 그 옷이 이태원과 미군부대 앞에서 팔렸다고 한다. 고국으로 귀국하는 미군 병사들의 선물용이었다. 가난한 우방국의 아주머니들 수고를 그들은 값싸게도 사갔던 것이다. 여하튼, 어머니는 그렇게 번 돈으로 우리를 먹이고 먹이고 또 먹이셨다.
재료에는 구애도 없었다. 개구리 뒷다리 튀김까진 안 했어도, 동물성 요리는 엄마의 주 공략품이었다. 까만 미군 타월 같은, 소 내장국은 엄마가 잘했다. 어른이 된 내가 이 놈의 내장을 다뤄 요리를 만들어 팔기 위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요리법을 물어본 적이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밀가루 쳐서 바락바락 치대라고 하신 게 전부였지만. 무 넣고 고추기름 띄워서 말갛고 빨간, 시원한 국을 끓였다. 그것이 소 위라고 했다. 소고기는 못 먹어도 소 내장은 먹고 자랐다. 소 허파 볶음도 먹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허파를 씹으면 마치 담요를 물어뜯는 것 같았다. 이것이 진짜 동물의 냄새구나, <동물의 왕국>에서 사자가 영양을 쓰러뜨려 배때기의 내장을 먹는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 사자처럼 입가에 피를 묻히지는 않았지만 벌건 고추기름을 바르고 배를 두드릴 수 있었다. 다 우리 엄마 덕이었다.
돼지 껍데기는 도시락 반찬으로 싸갔다. 껍데기는 집에서 먹다가 남으면 반찬통에 담겼다. 뜨거울 때는 이게 제법 맛있다. 학교에 가서 식으면 희한한 맛이 났다. 내 짝이 한 점 먹더니 “고래고기”라고 소리를 쳤다. 녀석은 어디서 진짜 고래고기를 먹어보긴 한 걸까. 그 탓에 나는, 반에서 고래고기 먹는 별난 소년이었다.
소년은 늘 배가 고팠다. 한 번은 담임 선생이 학교에서 본인이 들지 않은 도시락을 집에 가져다주라고 시킨 일이 있었다. 그 양반 댁이 내 하교길에 있었다. 그 길, 한 4킬로미터 가는 동안 내 손에 들린 그이의 도시락에서는 기막힌 냄새가 연방 풍겼다. 딱 봐도 쇠고기 장조림 냄새. 기어이 댁에 가기 전에 도시락 보따리를 풀렀다. 딱 한 점만 먹자던 장조림이 절반이나 없어졌다. 얼른 닫고 가져다드리긴 했다. 다음날 선생님이 알아채지나 않을까, 얼마나 조바심이 나던지.
엄마는 전을 부쳐도 손이 컸다. 기름 장수한테 사들인 비싼 들기름이나 낙화생유(땅콩유기름)을 살살 발라 까만색 싸구려 프라이팬에서 전을 부쳤다. 부치는 쪽보다 먹는 속도가 더디어 차곡차곡 쌓여야만 그만두었다. 엄마는 “먹을 때 아주 확실히 먹자.”는 주의였다. 그때는 발목이라도 부러져서 입원해야 먹을 수 있었던 바나나도 한 송이 째 들고 오신 분이었다. 대신 “1년 동안 바나나 타령 금지”를 조건으로. 딸기나 포도도 궤짝으로 샀다. 그게 쌌고, 그래야 물려서 안 찾으니 더 싸게 먹힌다는 게 엄마의 지론이었다.
자존심은 무지 세서 남 이목을 걱정하셨다. 쌀을 됫박으로 사오라고 심부름시킬 땐 꼭 토를 달았다. 저기 멀리 동네 입구, 잘 모르는 쌀집을 가라는 것이었다. 밥에 섞어 먹는 좁쌀을 살 때는 “병아리 모이라고 해라.”가 엄마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누가 물어본다고 그리 하셨나, 모르겠다.
고등어통조림을 살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국물을 쪽쪽 빨아먹으며 왔다. 집에 깡통 따개를 갖추지 않아서 가게 주인이 따주곤 했던 거였다. 녹슨 깡통 따개로 뚜껑을 열면 미원 잔뜩 친 맛있는 고등어 국물이 있었다. 집에 가면, 국물은 거진 반 가라지고 건더기만 남았던 기억. 지금도 나는 쇠고기 미역국보다 깡통 고등어 미역국을 좋아한다.
음식이란 본래부터 주어진 것을 맛있다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마빈 해리스라는 인류학자의 말이기도 하다. 오히려 군대에 갔더니 정초에 대통령 명령으로 쇠고기 미역국이 나왔다. 사람들은 맛있다 하나 내겐 별로 맛이 없었다. 엄마 자식으로 나는 먹고 자랐던 까닭이다. 그리고 그 손맛으로 요리사가 되었다. 나는 늘 엄마 급의 요리사가 되는 게 소원이었다. 복잡하지 않아도 맛있고, 값도 싸고, 먹다가 행복해지는 포만의 음식. 엄마가 이제 팔순을 바라보신다. 아직 손맛은 있으신 듯하다. 나는 많이 슬프다.
소 내장볶음(이탈리아식) 4인분
소 양 1킬로그램, 양파 다진 것 반컵, 마늘 다진 것 2큰술, 쪽파 4줄기, 토마토소스 1컵, 화이트와인 반컵, 올리브유 적당량, 소금, 후추, 파슬리 조금, 파르메산 치즈 4큰술
1. 양은 밀가루를 뿌려 오랫동안 치대서 빤다. 끓는 물에 가볍게 삶아서 속 껍질을 다 벗겨내고 손질한다.
2. 끓는 물에 소금을 약간 치고 양을 삶는다. 2시간 이상 삶아서 부드러워지면 꺼내서 한 입 크기로 썰어둔다.
3. 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마늘과 양파 다진 것을 볶는다. 양을 넣고 더 볶는다. 화이트와인을 뿌리고 토마토 소스를 넣어 조린다.
4. 쪽파를 썰어 얹고, 소금 후추 간을 한 뒤, 치즈를 뿌려서 낸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이탈리아에서 요리를 배웠다. 몇몇 레스토랑을 거쳐 지금은 서교동의 ‘로칸다 몽로’라는 식당에서 일한다. 어머니처럼 소 내장 요리를 만든다. 손님들이 줄을 서서 먹는 히트작이다. 물론 이탈리아 식이지만, 어머니에게 바치는 헌정 메뉴다. 『경향신문』과 『한겨레』에 칼럼을 쓴다. 『백년식당』,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등의 책을 써서 이름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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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밥] 엄마의 오징어 동그랑땡
김해선
[우리 엄마밥] 우리 엄마는 여하간, 그렇다
임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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