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대가족이었다. 우리는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 삼촌과 고모들, 우리집 옆에 살고 있던 사촌들과 함께 식사하는 날들이 많았다. 제사와 결혼, 생일 등 집안의 대소사가 많아서 마당에서 음식 하던 모습들이 지금도 떠오른다. 음식들 중에서 지금까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음식이 바로 오징어 동그랑땡이다. 지금의 해물 오징어 동그랑땡 원조 격이라 할까. 오징어 동그랑땡은 찰지고 고소한 맛이 특징이다. 여러 야채를 섞어 노릇노릇하게 잘 구어진 오징어가 혀에 닿는 순간 그 맛에 숨이 멎는 듯하다.
동그랑땡 함께 빚으며 듣는, 엄마의 옛 이야기
▲ 재료들을 손질하는 엄마의 손 ⓒ김해선
엄마는 요즘 들어 우리집 음식을 만드는 양은 깨작거리는 수준이라고 하신다. 예전엔 대소사의 모든 음식을 집안에서 했으므로 오징어 동그랑땡만 해도 온종일 만드셔야 했기 때문이다. 오징어를 몇 궤짝씩 사서 동그랑땡만 만드는 전담 팀이 종일 만들어도 부족했다고 하실 정도다. 사람들이 오가다 한 입씩 먹고 몇 개씩 집어가서 저녁 늦게까지 만들어야 했던 음식, 그렇지만 공들인 표도 안 나는 음식이라 덧붙이셨다.
▲ 이렇게 하나씩 다듬어진 재료들. 빛깔이 곱고 아름답다. ⓒ김해선
지금은 예전처럼 많은 친지나 이웃들이 거의 오지 않고, 제사도 가족끼리 지내는 편이어서 동그랑땡을 만들 때는 자연스레 엄마랑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만드는 여유가 생겼다. 엄마 아빠가 맞선 봐서 결혼한 얘기, 엄마가 결혼식을 하고 나니 다락에 숨어 있다 내려왔다던 어린 고모들의 얘기, 엄마가 늑막염이 걸려 죽음 직전까지 갔던 얘기 까지……. 옛 이야기일 수록 엄마는 도리어 생생히 기억해낸다. 한번은, 왜 고모들이 다락에 숨어 있다 내려왔느냐 묻자, 식구들이 너무 많으면 새색시도 질리고 사돈 어른들도 딸이 시집살이 할까 걱정할 것에 대한 예방책으로 할머니께서 그리 하신 거라 했다. 나는 엄청 웃었다. "엄마, 그 당시에도 그런 게 있었어요? 다들 한 집에서 복작대며 살았잖아요." 엄마는 고모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도 목욕을 시켜서 새옷 입혀 보내며 절반은 본인이 키우셨다고 하셨다. 그래서일까, 우리 고모들은 엄마에게 친딸인 나보다도 더 잘하신다. 할머니 할아버지 제사 때는 모두 오셔서 엄마 방에서 함께 주무실 정도로.
엄마는 동그랑땡 반죽을 오른손으로 한 숟가락 떠서 왼손에 든 수저로 모양을 잘 다듬어가며 만드신다. “엄마, 왜 손으로 안 만들어요?” 엄마는, 오징어를 자잘하게 채 썰고 야채들을 아주 잘게 썰었기 때문에 손으로 하면 부서질 확률이 크다 하셨다. 서두르지 말고 한 숟갈 떠서 다른 숟갈로 동그랗게 만들면 모양도 예쁘고 손에도 묻지 않아 좋다고 하신다.
"엄마, 아빠는 왜 실패한 거야?"
엄마는 아빠가 그 옛날 법대를 나오시고 사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무엇인가를 이룰 거라 믿으며 종갓집의 그 많은 대소사니 제사, 명절을 지내는 일이 힘들어도 힘든 줄 몰랐다고 하셨다. 아빠가 절에서 공부할 때 엄마도 나도 함께 살았는데, 어느 날 병역 기피자로 아빠는 잡혀가셨다. 그 길로 아빠는 군대에 가야만 했고, 엄마와 나는 할머니 집에서 살게 되었다. 그 때부터 엄마의 고단한 삶의 전주곡이 시작되었던 듯하다.
어린 시절 군복 입은 아빠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처마 밑으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초여름 빗방울을 발끝으로 차면서 노는데 멀리, 어떤 군인 아저씨가 오고 있었다, 나는 왠지 눈길을 발끝에만 준 채 더 많은 빗방울들 앞에 하염없이 있었다. 아빠가 내 손을 잡고 집안으로 들어가던 기억, 내내 부끄러워 아빠라 부르지 못했던 것도 생각난다.
▲ 동그랑땡을 만들 때, 이렇게 숟가락을 쓰면 모양이 예쁘게 만들어진다. ⓒ김해선
"엄마, 기름을 직접 팬에 두르면 동그랑땡도 잘 익을 것 같은데, 왜 무 조각에 식용유를 발라서 후라이팬을 문지르는 거예요?" 엄마는 예전부터 이 방법으로 전을 부쳤다고 하셨다. 음식에 필요 이상의 기름이 들어가면 맛을 내기보다는 오히려 기름기에 절어, 음식 맛이 떨어진다고 하셨다. 접시에 기름을 넣고 기름이 묻은 무 조각으로 후라이팬에 문지르며 동그랑땡을 부치자 적당히 노릇노릇 반죽이 익어갔다. 무 자체가 수분이 많은데도 물기 없이 기름이 팬에 잘 발라지는 것이 신기했다. 엄마가 반죽을 한 스푼씩 떠서 동그랑땡 모양을 만드는 동안 나는 무 조각으로 팬을 문지르는 것이 재미있었다. 동그랑땡을 뒤집고 그 주위를 계속 문지르고 뒤집고 문지르기를 반복했다. 엄마는 자주 뒤집으면 모양이 부서지기 쉽고 익어가는 것도 더디니 중불에 천천히 뒤집고 조금씩 익어가는 것을 나한테 기다리며 보라고 하셨다.
"엄마, 아빠는 군대 제대하고 공부는 더 이상 안하신거예요?" "그렇단다. 니 동생들도 있고 종갓집 장남이고, 결혼한 사람은 아빠 혼자고, 삼촌 고모들 모두 결혼도 안했으니 불안해하고 초조해 하셨어."
나의 엄마에게
그래서 서울로 간 거였죠. 그것도 생각나요. 엄마 아빠가 동생 둘만 데리고 서울로 간 것, 자리 잡으면 나를 데리러 오겠다고. 네 명이서 사진 찍어서 보낸 것, 그 사진을 보고 나는 반갑지 않았어요. 나도 가족인데 나만 빠져서 어린 내가 서운했던 거 같아요. 어느 날 집 뒤에 있는 푸른 완두콩 밭 가운데서 엄마 엄마 몇 번이고 불렀던 기억이 있어요. 나는 아무도 못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저녁밥을 먹으면서 고모가 내 말을 흉내 내서 너무 속상했어요. 며칠 이따 할머니께서 읍내에서 빨간 바지와 하늘색 스웨터를 사오셨어요, 그 옷을 입고 둘째 고모와 엄마 아빠가 있는 서울에 갔잖아요. 막상 엄마를 만나니 많이 낯설었어요. 동생들도 그렇고요. 나만 시골아이 같다는 생각에 고모만 따라다녔던 것 같아요. 심심하니까 고모한테 집 옆에 있는 노란 꽃을 꺾어 달라고 졸라서 꽃을 꺾고 있는데 갑자기 주인이 뛰어나와 불같이 화를 내던 모습도 생생해요. 엄마 우리가 살았던 곳이 정릉, 정릉이 맞죠. 옛날에는 신흥사(흥천사)라고 불렀는데 그곳으로 약수 뜨러 다니던 것도 생각나요.
▲ 완성된 엄마의 오징어 동그랑땡. ⓒ김해선
엄마, 내가 정능 유치원에 다녔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미술학원인 것 같아요. 튤립이랑 뭔가를 계속 그렸고 ‘반짝반짝 작은 별’ 무용도 했어요. 선생님은, 여자 분이었는데 나를 예뻐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내가 유치원에 갈 때마다 따뜻하게 웃어준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내 옆에 앉은 여자 애가 노란 원피스를 입고 와서 무척 부러웠어요.
"나도 너 새 옷만 입혔다." 알아요, 엄마가 남대문 시장에서 새 옷과 스타킹을 자주 사 오신 것이 기억나요. 그런데 카키색 원피스를 입었을 때도 나는 노란색을 입고 싶었어요. 초등학교 때까지 노란색의 환상이 있었던 거 같아요.
엄마는 그때가 좋은 시절이었다고 쓸쓸하게 말하신다. 엄마, 지나갔으니까 그렇지 시간이 갈수록 힘든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어요. 지금은 엄마 아빠 건강이 걱정이지, 다들 자리 잡았잖아요. "그려. 감사한 일이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동그랑땡이 거의 다 만들어졌다.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일까
예전엔 집안의 대소사가 너무 많아서 일 많은 엄마랑 마주 앉아 얘기하며 집안일을 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엄마, 아빠가 시골의 옛 집을 떠나 도시에 정착한 지도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오징어 동그랑땡은 늘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어릴 적 철 없던 시간이 좋은지, 지금의 시간이 좋은지 잘 모르겠지만 엄마랑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동그랑땡을 만드는 시간이 어쩌면 내 생의 가장 행복한 시간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엄마 아빠가 연로 하시고 건강이 안 좋으시니, 올 겨울 무탈하게 잘 넘기셔야 할 텐데, 라는 걱정을 숨길 수가 없다. 엄마에게 나에게 좋은 시간이 왔지만 엄마 건강이 받쳐주지 못하는구나, 생각하니 조금 쓸쓸해진다. 하지만 엄마의 손에서 평생 이어져 온 음식처럼 우리의 이야기도 음식을 만들 때마다, 새로 다시 생겨나며 이어지고 있다. 많은 시간 속에 흩어진 이야기들이 찰진 오징어 동그랑땡을 빚는 이 자리에 꼭꼭 모여든다.
오징어 동그랑땡 레시피(5~6인분)
오징어: 3마리
계란: 4개
당근: 1개 (중간 크기)
큰 대파: 2개(흰 뿌리 20cm 쯤)
양파: 1개 (중간 크기), 큰 양파는 반 개
버섯: 느타리 버섯, 머쉬마루 버섯, 새송이미니 버섯등을 사용했지만, 냉장고 안에 있는 버섯들을 사용해도 좋을 것 같다. (각각 어른 주먹으로 한 줌씩)
부침가루: (성인 밥공기로 1개 )
소금, 후추: 적당히 (부침 가루가 간이 되어 있으므로). 특히 소금은 조절해 가면서 넣는다.
1. 오징어를 배를 가르고 내장을 들어낸다. 배를 가라놓은 오징어 몸통과 다리를 분리시킨다. 몸통을 다리 정도의 넓이와 길이로 잘라 놓는다. 다리도 몸통 옆에 놓는다.
2. 당근을 반으로 자른다. 채썰기 좋게 잘라놓는다. 곱게 채를 썬다.
3. 대파도 반으로 잘라서 길게 채 썰어 놓는다.
4. 양파도 반으로 잘라서 곱게 다질 수 있게 채 썰어 놓는다.
5. 버섯은 집에 있는 것을 사용해도 좋다. 느타리 버섯을 잘게 찢어 놓는다. 머쉬마루 버섯도 잘게 찢어 놓는다. 새송이 미니 버섯은 잘게 썰어 놓는다.
6. 계란 4개는 잘 풀어 놓는다.
7. 채 썰어 놓은 재료들을 다지듯 잘게 잘게 썬다. ( 오징어, 당근, 대파, 양파, 버섯들 )
8. 모두 잘게 썬 재료들을 큰 볼에 넣는다. 밥공기에 들어 있는 부침가루를 넣고 뒤섞는다.
9. 풀어놓은 계란을 넣고 섞는다.
10. 적당량의 가는 소금과 후춧가루를 넣고 잘 섞는다.
11. 반죽이 너무 되면 생수를 아주 조금씩 넣어가며 반죽을 한다. 반죽이 너무 묽은 경우, 오징어와 재료들이 잘 붙지 않는다
12. 반죽이 너무 묽을 때는 부침가루를 적당히 뿌리면서 반죽을 조절한다.
13. 찰 지게 된 반죽으로 동그랑땡 모양을 만들 때는 손으로 만들지 않는다.
14. 어른 스푼 두 개를 사용한다. 오른손으로 반죽을 한 스푼 뜬다. 왼손이 들고 있던 숟가락으로 동그랗게 다듬어 가면서 만든다. 처음엔 잘 안 되는 것 같지만, 손으로 만드는 것 보다 모양이 더 예쁘게 만들어진다. 손으로 만들면 너무 찰져서 손에 묻는 것이 너무 많다.
15. 노릇노릇하게 잘 익은 오징어 동그랑땡을 소반에 담는다.
16. 청양고추나 실파를 조금 썰어서 넣은 간장을 작은 용기에 담아 놓는다
17. 마지막으로 잘 익은 동그랑땡을 접시에 담는다.
[우리 엄마밥] 엄마의 오징어 동그랑땡
김해선
2016-02-19
우리 엄마밥 '엄마'와 '엄마 음식'에 관한 소소(小笑)한 이야기
엄마의 오징어 동그랑땡
우리 집은 대가족이었다. 우리는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 삼촌과 고모들, 우리집 옆에 살고 있던 사촌들과 함께 식사하는 날들이 많았다. 제사와 결혼, 생일 등 집안의 대소사가 많아서 마당에서 음식 하던 모습들이 지금도 떠오른다. 음식들 중에서 지금까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음식이 바로 오징어 동그랑땡이다. 지금의 해물 오징어 동그랑땡 원조 격이라 할까. 오징어 동그랑땡은 찰지고 고소한 맛이 특징이다. 여러 야채를 섞어 노릇노릇하게 잘 구어진 오징어가 혀에 닿는 순간 그 맛에 숨이 멎는 듯하다.
동그랑땡 함께 빚으며 듣는, 엄마의 옛 이야기
▲ 재료들을 손질하는 엄마의 손 ⓒ김해선
엄마는 요즘 들어 우리집 음식을 만드는 양은 깨작거리는 수준이라고 하신다. 예전엔 대소사의 모든 음식을 집안에서 했으므로 오징어 동그랑땡만 해도 온종일 만드셔야 했기 때문이다. 오징어를 몇 궤짝씩 사서 동그랑땡만 만드는 전담 팀이 종일 만들어도 부족했다고 하실 정도다. 사람들이 오가다 한 입씩 먹고 몇 개씩 집어가서 저녁 늦게까지 만들어야 했던 음식, 그렇지만 공들인 표도 안 나는 음식이라 덧붙이셨다.
▲ 이렇게 하나씩 다듬어진 재료들. 빛깔이 곱고 아름답다. ⓒ김해선
지금은 예전처럼 많은 친지나 이웃들이 거의 오지 않고, 제사도 가족끼리 지내는 편이어서 동그랑땡을 만들 때는 자연스레 엄마랑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만드는 여유가 생겼다. 엄마 아빠가 맞선 봐서 결혼한 얘기, 엄마가 결혼식을 하고 나니 다락에 숨어 있다 내려왔다던 어린 고모들의 얘기, 엄마가 늑막염이 걸려 죽음 직전까지 갔던 얘기 까지……. 옛 이야기일 수록 엄마는 도리어 생생히 기억해낸다. 한번은, 왜 고모들이 다락에 숨어 있다 내려왔느냐 묻자, 식구들이 너무 많으면 새색시도 질리고 사돈 어른들도 딸이 시집살이 할까 걱정할 것에 대한 예방책으로 할머니께서 그리 하신 거라 했다. 나는 엄청 웃었다. "엄마, 그 당시에도 그런 게 있었어요? 다들 한 집에서 복작대며 살았잖아요." 엄마는 고모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도 목욕을 시켜서 새옷 입혀 보내며 절반은 본인이 키우셨다고 하셨다. 그래서일까, 우리 고모들은 엄마에게 친딸인 나보다도 더 잘하신다. 할머니 할아버지 제사 때는 모두 오셔서 엄마 방에서 함께 주무실 정도로.
엄마는 동그랑땡 반죽을 오른손으로 한 숟가락 떠서 왼손에 든 수저로 모양을 잘 다듬어가며 만드신다. “엄마, 왜 손으로 안 만들어요?” 엄마는, 오징어를 자잘하게 채 썰고 야채들을 아주 잘게 썰었기 때문에 손으로 하면 부서질 확률이 크다 하셨다. 서두르지 말고 한 숟갈 떠서 다른 숟갈로 동그랗게 만들면 모양도 예쁘고 손에도 묻지 않아 좋다고 하신다.
"엄마, 아빠는 왜 실패한 거야?"
엄마는 아빠가 그 옛날 법대를 나오시고 사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무엇인가를 이룰 거라 믿으며 종갓집의 그 많은 대소사니 제사, 명절을 지내는 일이 힘들어도 힘든 줄 몰랐다고 하셨다. 아빠가 절에서 공부할 때 엄마도 나도 함께 살았는데, 어느 날 병역 기피자로 아빠는 잡혀가셨다. 그 길로 아빠는 군대에 가야만 했고, 엄마와 나는 할머니 집에서 살게 되었다. 그 때부터 엄마의 고단한 삶의 전주곡이 시작되었던 듯하다.
어린 시절 군복 입은 아빠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처마 밑으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초여름 빗방울을 발끝으로 차면서 노는데 멀리, 어떤 군인 아저씨가 오고 있었다, 나는 왠지 눈길을 발끝에만 준 채 더 많은 빗방울들 앞에 하염없이 있었다. 아빠가 내 손을 잡고 집안으로 들어가던 기억, 내내 부끄러워 아빠라 부르지 못했던 것도 생각난다.
▲ 동그랑땡을 만들 때, 이렇게 숟가락을 쓰면 모양이 예쁘게 만들어진다. ⓒ김해선
"엄마, 기름을 직접 팬에 두르면 동그랑땡도 잘 익을 것 같은데, 왜 무 조각에 식용유를 발라서 후라이팬을 문지르는 거예요?" 엄마는 예전부터 이 방법으로 전을 부쳤다고 하셨다. 음식에 필요 이상의 기름이 들어가면 맛을 내기보다는 오히려 기름기에 절어, 음식 맛이 떨어진다고 하셨다. 접시에 기름을 넣고 기름이 묻은 무 조각으로 후라이팬에 문지르며 동그랑땡을 부치자 적당히 노릇노릇 반죽이 익어갔다. 무 자체가 수분이 많은데도 물기 없이 기름이 팬에 잘 발라지는 것이 신기했다. 엄마가 반죽을 한 스푼씩 떠서 동그랑땡 모양을 만드는 동안 나는 무 조각으로 팬을 문지르는 것이 재미있었다. 동그랑땡을 뒤집고 그 주위를 계속 문지르고 뒤집고 문지르기를 반복했다. 엄마는 자주 뒤집으면 모양이 부서지기 쉽고 익어가는 것도 더디니 중불에 천천히 뒤집고 조금씩 익어가는 것을 나한테 기다리며 보라고 하셨다.
"엄마, 아빠는 군대 제대하고 공부는 더 이상 안하신거예요?" "그렇단다. 니 동생들도 있고 종갓집 장남이고, 결혼한 사람은 아빠 혼자고, 삼촌 고모들 모두 결혼도 안했으니 불안해하고 초조해 하셨어."
나의 엄마에게
그래서 서울로 간 거였죠. 그것도 생각나요. 엄마 아빠가 동생 둘만 데리고 서울로 간 것, 자리 잡으면 나를 데리러 오겠다고. 네 명이서 사진 찍어서 보낸 것, 그 사진을 보고 나는 반갑지 않았어요. 나도 가족인데 나만 빠져서 어린 내가 서운했던 거 같아요. 어느 날 집 뒤에 있는 푸른 완두콩 밭 가운데서 엄마 엄마 몇 번이고 불렀던 기억이 있어요. 나는 아무도 못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저녁밥을 먹으면서 고모가 내 말을 흉내 내서 너무 속상했어요. 며칠 이따 할머니께서 읍내에서 빨간 바지와 하늘색 스웨터를 사오셨어요, 그 옷을 입고 둘째 고모와 엄마 아빠가 있는 서울에 갔잖아요. 막상 엄마를 만나니 많이 낯설었어요. 동생들도 그렇고요. 나만 시골아이 같다는 생각에 고모만 따라다녔던 것 같아요. 심심하니까 고모한테 집 옆에 있는 노란 꽃을 꺾어 달라고 졸라서 꽃을 꺾고 있는데 갑자기 주인이 뛰어나와 불같이 화를 내던 모습도 생생해요. 엄마 우리가 살았던 곳이 정릉, 정릉이 맞죠. 옛날에는 신흥사(흥천사)라고 불렀는데 그곳으로 약수 뜨러 다니던 것도 생각나요.
▲ 완성된 엄마의 오징어 동그랑땡. ⓒ김해선
엄마, 내가 정능 유치원에 다녔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미술학원인 것 같아요. 튤립이랑 뭔가를 계속 그렸고 ‘반짝반짝 작은 별’ 무용도 했어요. 선생님은, 여자 분이었는데 나를 예뻐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내가 유치원에 갈 때마다 따뜻하게 웃어준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내 옆에 앉은 여자 애가 노란 원피스를 입고 와서 무척 부러웠어요.
"나도 너 새 옷만 입혔다." 알아요, 엄마가 남대문 시장에서 새 옷과 스타킹을 자주 사 오신 것이 기억나요. 그런데 카키색 원피스를 입었을 때도 나는 노란색을 입고 싶었어요. 초등학교 때까지 노란색의 환상이 있었던 거 같아요.
엄마는 그때가 좋은 시절이었다고 쓸쓸하게 말하신다. 엄마, 지나갔으니까 그렇지 시간이 갈수록 힘든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어요. 지금은 엄마 아빠 건강이 걱정이지, 다들 자리 잡았잖아요. "그려. 감사한 일이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동그랑땡이 거의 다 만들어졌다.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일까
예전엔 집안의 대소사가 너무 많아서 일 많은 엄마랑 마주 앉아 얘기하며 집안일을 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엄마, 아빠가 시골의 옛 집을 떠나 도시에 정착한 지도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오징어 동그랑땡은 늘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어릴 적 철 없던 시간이 좋은지, 지금의 시간이 좋은지 잘 모르겠지만 엄마랑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동그랑땡을 만드는 시간이 어쩌면 내 생의 가장 행복한 시간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엄마 아빠가 연로 하시고 건강이 안 좋으시니, 올 겨울 무탈하게 잘 넘기셔야 할 텐데, 라는 걱정을 숨길 수가 없다. 엄마에게 나에게 좋은 시간이 왔지만 엄마 건강이 받쳐주지 못하는구나, 생각하니 조금 쓸쓸해진다. 하지만 엄마의 손에서 평생 이어져 온 음식처럼 우리의 이야기도 음식을 만들 때마다, 새로 다시 생겨나며 이어지고 있다. 많은 시간 속에 흩어진 이야기들이 찰진 오징어 동그랑땡을 빚는 이 자리에 꼭꼭 모여든다.
오징어 동그랑땡 레시피(5~6인분)
오징어: 3마리
계란: 4개
당근: 1개 (중간 크기)
큰 대파: 2개(흰 뿌리 20cm 쯤)
양파: 1개 (중간 크기), 큰 양파는 반 개
버섯: 느타리 버섯, 머쉬마루 버섯, 새송이미니 버섯등을 사용했지만, 냉장고 안에 있는 버섯들을 사용해도 좋을 것 같다. (각각 어른 주먹으로 한 줌씩)
부침가루: (성인 밥공기로 1개 )
소금, 후추: 적당히 (부침 가루가 간이 되어 있으므로). 특히 소금은 조절해 가면서 넣는다.
1. 오징어를 배를 가르고 내장을 들어낸다. 배를 가라놓은 오징어 몸통과 다리를 분리시킨다. 몸통을 다리 정도의 넓이와 길이로 잘라 놓는다. 다리도 몸통 옆에 놓는다.
2. 당근을 반으로 자른다. 채썰기 좋게 잘라놓는다. 곱게 채를 썬다.
3. 대파도 반으로 잘라서 길게 채 썰어 놓는다.
4. 양파도 반으로 잘라서 곱게 다질 수 있게 채 썰어 놓는다.
5. 버섯은 집에 있는 것을 사용해도 좋다. 느타리 버섯을 잘게 찢어 놓는다. 머쉬마루 버섯도 잘게 찢어 놓는다. 새송이 미니 버섯은 잘게 썰어 놓는다.
6. 계란 4개는 잘 풀어 놓는다.
7. 채 썰어 놓은 재료들을 다지듯 잘게 잘게 썬다. ( 오징어, 당근, 대파, 양파, 버섯들 )
8. 모두 잘게 썬 재료들을 큰 볼에 넣는다. 밥공기에 들어 있는 부침가루를 넣고 뒤섞는다.
9. 풀어놓은 계란을 넣고 섞는다.
10. 적당량의 가는 소금과 후춧가루를 넣고 잘 섞는다.
11. 반죽이 너무 되면 생수를 아주 조금씩 넣어가며 반죽을 한다. 반죽이 너무 묽은 경우, 오징어와 재료들이 잘 붙지 않는다
12. 반죽이 너무 묽을 때는 부침가루를 적당히 뿌리면서 반죽을 조절한다.
13. 찰 지게 된 반죽으로 동그랑땡 모양을 만들 때는 손으로 만들지 않는다.
14. 어른 스푼 두 개를 사용한다. 오른손으로 반죽을 한 스푼 뜬다. 왼손이 들고 있던 숟가락으로 동그랗게 다듬어 가면서 만든다. 처음엔 잘 안 되는 것 같지만, 손으로 만드는 것 보다 모양이 더 예쁘게 만들어진다. 손으로 만들면 너무 찰져서 손에 묻는 것이 너무 많다.
15. 노릇노릇하게 잘 익은 오징어 동그랑땡을 소반에 담는다.
16. 청양고추나 실파를 조금 썰어서 넣은 간장을 작은 용기에 담아 놓는다
17. 마지막으로 잘 익은 동그랑땡을 접시에 담는다.
2015년 여름 산티아고 길을 40여일 걸었다. 낯선 길을 걷던 중, 『실천문학』 ‘시 ’부문 신인상 연락을 받았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가 지금은 카톨릭영시니아에서 ‘삶과 문학’ 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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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밥] 메이플 타피
문인혁
[우리 엄마밥] 엄마의 맛
박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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