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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기억에 위태롭게 매달린 우리의 자아를 바라보다

- 영화 〈더 파더〉, 자아와 인간 실존에 대한 몇 가지 깨우침 - 철학자,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

안희곤

2022-03-25

철학자, 영화(드라마)에 빠지다는? 평범한 시민들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영화와 드라마(웹툰, 만화 등 포함)는 내 일도 아닌데 마치 내 일처럼 함께 웃고 울고 한숨쉬고 기쁘게 만드는 특별한 매력을 가진 대중문화콘텐츠이다. 그런데 이들은 단순히 대리만족을 통해 잠시 재밌고 무료한 시간들을 보내도록 하는 오락거리에 불과한 것일까.  평소 우리에게 친숙한 여러 영화(드라마) 속에 숨겨져 있어 미처 눈치채기 힘들었던 세상과 인생에 관한 질문, 이들을 낳은 시대적 상황, 여러 사상가들의 생각을 해당 작품을 흥미롭게 살펴본 철학자들을 통해 알아보자.


안소니는 점점 쇠약해지고 기억을 잃어가는 자기 상태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리며, 때로는 그 두려움에 눈물을 흘리기까지 한다. 죽음을 알고는 있지만 그것을 통해서 더 이상 현재의 자아가 가진 의미를 구성할 수 없는 사람의 막막한 공포이다. 영화 마지막에서 안소니는 간호사 캐서린 앞에서 울먹이며 말한다. “내가 누구지? 내 잎사귀가 다 지는 것 같아. …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도통 모르겠어.”



‘치매노인’의 의식으로부터 자아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



영화 〈더 파더〉 포스터 THE FATHER

영화〈더 파더〉 포스터



영화 〈더 파더〉는 ‘치매’를 주제로 한 영화이긴 하지만 ‘자아’, ‘기억’, ‘정체성’ 같은 철학의 용어들을 내내 떠올리게 하는 점에서는 매우 사색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드라마틱한 전개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몇 개의 공간, 며칠인지 모를 짧은 시간, 몇 명의 등장인물만으로 마치 퍼즐을 맞추듯 줄거리를 완성해 가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수백 개의 퍼즐 조각을 맞출 때 곁에서 보는 사람은 그것이 어떤 그림이 될지 알 수 없다. 해진 옷을 깁듯 군데군데 빈 공간을 채워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불현듯 이미지가 나타난다. 퍼즐을 맞추는 사람은 이미 전체 그림을 머릿속에 담고 있겠지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그림이 완성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몇 개의 조각을 잃어버리거나 엉뚱하게 맞춰진 조각 때문에 그림은 여기저기 구멍이 난 채 끝날 수도 있다.


〈더 파더〉의 감독 플로리안 젤러는 점점 희미해지는 기억과 지각의 편린들을 안간힘을 다해 짜 맞춰가려는 치매 노인의 의식을, 마치 퍼즐을 맞추는 과정처럼 따라간다. 이미 여러 개의 조각을 잃어버려 영영 완성할 수 없는 그림을 노인의 시점에서 맞춰보도록 유도한다. 치매(癡呆)는 말 그대로 바보 또는 어리석음을 뜻하는 단어다. 단어가 가진 비하 의미 때문에 (알츠하이머병이라는 의학용어가 있긴 하지만) 요즘은 ‘인지저하증’이라는 말로 바뀌고 있는 중이다. 영화는 그렇게 인지 저하에 시달리는 노인의 의식 안에 관객을 들어오게 함으로써, 치매의 고통은 물론이고 우리들 인간이라는 존재의 불확실한 조건에 대해 다시 한번 성찰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라는 존재는 단지 나의 기억 아닌가, 무상한 시간 속에서 나는 어떻게 계속 나로 존재하는가. 〈더 파더〉는 치매에 관한 영화이되 우리들의 자아, 정체성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철학적 텍스트이기도 하다.


사실 영화적 경험은 철학적 사색과는 달라서 추론하거나 분석하거나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필름이 돌아가는 시간적 추이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스토리를 요약하고 메시지를 캐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체험하고 공감하기 위한 것이다. 〈더 파더〉는 이런 공감과 추체험이라는 영화적 기능을 빼어나게 성취한 작품으로 보인다. 우리는 혼돈에 싸인 노인 안소니에게 이입하고, 그와 함께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쓰다가, 결국 나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간다.



시계 - 뒤섞인 시간 찾고 싶은 치매노인의 집착



영화 〈더 파더〉 스틸컷. 치매를 앓고 있는 주인공 안소니

치매를 앓고 있는 주인공 안소니



〈더 파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런던의 어느 아파트에 사는 치매 초기의 노인 안소니에게 어느 날 딸 앤이 파리로 가서 살게 되었다고 알려주는 데서 영화가 시작된다. 거실, 침실, 주방 등이 어딘지 모르게 조금씩 모습을 달리하며 등장하는 공간에서, 안소니는 그곳이 자신의 집인지 딸의 집인지 혼란해하며 하루하루를 지낸다. 안소니의 무례함에 질려 간병인 안젤라가 그만둔 후, 새 간병인을 구할 때까지 딸 앤의 집에 살게 된 며칠 혹은 몇 주의 시간이 영화의 시간적 배경이다.


그 며칠 혹은 몇 주 동안 동일한 사건과 인물이 시간을 잊은 안소니의 눈앞에 매번 다른 형태를 띠고 몇 번이나 되풀이된다. 딸 앤이 요양병원 간호사 캐서린의 얼굴로 바뀌어 다가오고, 독신인 딸에게 사위 폴인지 병원관리자 빌인지 모를 얼굴이 남편이라며 등장한다. 사건과 인물만 안소니에게 혼돈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감독은 일부러 시간의 추이를 토막토막 잘라서, 현재의 일을 과거의 것으로 역진시키기도 하고, 이미 일어난 사건을 다가올 사건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저녁식사로 딸 앤이 내놓은 닭고기를 사위와 함께 먹었는데, 현관에서 막 들어온 앤이 포장된 그 닭고기를 주방에 올려놓는다. 앤은 내일부터 새 간병인 로라가 온다고 거듭해서 말하는데, 젊은 간병인 로라는 이미 안소니를 돌보고 있다. 영화는 치매 노인 안소니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현실의 객관적 사건으로 묘사하지 않고, 안소니의 기억에서 재구성된 형태 그대로 제시한다. 여기서 감독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단서로 나오는 것이 ‘시계’다.


영화 첫 장면에서부터 안소니는 간병인인 안젤라가 손목시계를 훔쳐 갔다고 의심하고, 시계를 어디에 두었는지 끊임없이 찾아 헤맨다. 앤의 남편 폴이 차고 있는 손목시계를 탐내면서 자기 것이 아닌지 의심한다. 그가 끊임없이 시계에 집착하는 것은 사실 뒤섞여버린 시간을 되찾으려는 안간힘이기도 하다. 시간의 질서 안에서만 기억의 질서를 세울 수 있고, 기억의 질서를 찾아야만 자신의 자아를 온전하게 복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는 가령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테마―노쇠한 채 막내딸 코델리아를 그리워하는―라든지, 처벌(앤의 남편)과 돌봄(앤과 캐서린)이라는 생명관리 권력의 양면성에 대한 미셸 푸코의 분석 등 상징적인 요소가 많이 등장하지만, 시계의 메타포보다 더 뚜렷한 것은 없다.



‘인간 정체성의 핵심’, 시간에 대한 철학자들의 생각은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손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손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더 파더〉의 감독은 한 마디로 말해서, 시간이야말로 우리의 의식, 우리의 자아,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시간의 질서를 망각하고 끊임없이 손목시계를 찾는 안소니의 모습은 자아를 잃어버린 인간 존재의 모습이기도 하다. 치매란 바로 시간 속에 주어진 기억의 연속성을 잃어버림으로써 자아까지 잃어버린 상태를 일컫는 말에 다름 아닌 것이다.


시간의 문제를 가장 깊이 있게 고민한 철학자로는 앙리 베르그손(프랑스. 1859-1941)을 들 수 있다. 그는 『물질과 기억』 등에서 시간을 ‘순수 지속’이라고 주장했다. 분절되고 측정될 수 있는 물리적 시간으로서의 ‘크로노스’가 아닌 주관적 의미로 짜인 시간인 ‘카이로스’가 시간의 특성을 올바르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단절되지 않는다. 이 시간은 계량화될 수 있는 물리적 단위가 아닌 ‘지속’이며, ‘지속’은 기억이기도 하고, 자아라는 정체성의 가장 근원적인 기초이기도 하다. 이런 시간과 정체성의 관계는, 기억을 차츰 잃어가고 있는 안소니에게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징후가 시간에 대한 인지력의 상실인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죽은 막내딸 루시가 아직 살아있다고 착각하고 지내는 안소니의 모습은 지나간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사실로 잇지 못하는 정체성의 부분 상실을 보여준다. 그것은 절대적 시간을 나의 시간으로 재구성하는 능력의 상실이기도 하고, 결국은 자아에 대한 기억의 상실인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아예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적 지평을 인간 현존재의 기본 조건이라고 보았다. 인간은 현재 안에 있되 현재 안에서 사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의식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건을 과거의 결과로 봄으로써 그 시간을 현재에 끌어오며, 끊임없이 미래의 시간을 예감하고 계획함으로써 미래라는 시간마저 현재의 것으로 구성한다. 즉 인간은 과거의 기억과 앞날에 대한 투사 혹은 기투(企投)를 통해 현재의 실존을 지속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 가장 마지막 미래는 죽음이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는 현재 속에 죽음이 들어옴으로써 우리의 실존이 완성된다는 놀라운 통찰에 이른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미래를 끊임없이 기획하는 것은 미래에 벌어질지 모르는 불안과 공포 때문인데, 그것의 최종적 형태가 죽음이라는 점에서 죽음은 실존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는 것이다.



“내가 누구지, 내 잎사귀가 다 지는 것 같아”



영화 〈더 파더〉 스틸컷

영화 〈더 파더〉 스틸컷



안소니는 점점 쇠약해지고 기억을 잃어가는 자기 상태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리며, 때로는 그 두려움에 눈물을 흘리기까지 한다. 죽음을 알고는 있지만 그것을 통해서 더 이상 현재의 자아가 가진 의미를 구성할 수 없는 사람의 막막한 공포이다. 영화 마지막에서 안소니는 간호사 캐서린 앞에서 울먹이며 말한다. “내가 누구지? 내 잎사귀가 다 지는 것 같아. …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도통 모르겠어.” 안소니의 말은 우리 가슴을 찢는다. 우리는 그 울먹임을 우리들 자신에게 잠재되어 있는 자아 상실의 두려움에 대한 울먹임처럼 느낀다.


〈더 파더〉는 기억이 상실된 노인을 통해 사건을 재구성해 나가는 추리적 기법, 한정된 시공간이라는 연극적 장치, 무의식과 의식이 반복해서 서로 영향을 미치고 제약하는 정신분석학 적 요소 등을 매우 정교하게 엮어낸 빼어난 작품이다. 타인의 정상적 시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안소니의 정신적 혼란은,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점차 이 일이 안소니에게만 생기는 특수한 사건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극히 일부의 기억과 경험이 뒤섞일 때 일어나는 착각은 우리도 일상에서 늘 겪는 것 아닌가. 이렇듯 우리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맥락 없이 뒤섞이고 재조합된 기억으로 이루어진, 극히 연약하고 위태로운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우리들 자아가 붙들고 있는 기억의 질서가 매우 임의적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른다. 치매 노인의 고통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단순한 이해를 넘어 깊은 공감에까지 이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더 파더〉에 흐르는 오페라 아리아 몇 곡을 짚어두어야겠다. 영화가 시작될 때 흐르는 헨리 퍼셀의 오페라 〈아서왕〉의 ‘너는 무슨 힘으로’는 춥고 음울한 목소리로 황폐해진 안소니의 내면을 묘사하는 듯하다. 마리아 칼라스가 부른 오페라 〈노르마〉의 ‘정결한 여신’은 딸 앤의 인내와 슬픔을 상징한다. 치매 노인을 돌보는 가족은 어쩌면 속죄의 의식을 치르는 사제와도 같다고 말하려는 것일까? 그리고 비제의 오페라 〈진주조개잡이〉의 아리아 ‘귀에 익은 그대 음성’이 주요 장면마다 흐르며 관객의 가슴을 저민다. 희미해져 가는 기억 속에서 가끔 정신이 맑을 때 문득 들려오는 이야기를 ‘귀에 익은’ 추억의 목소리로 듣는 안소니… 우리는 늘 위태롭고 불안하고 망가지기 쉬운 자아를 붙들고서 이 연약한 존재를 안간힘을 다해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철학자,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시간과 기억에 위태롭게 매달린 우리의 자아를 바라보다

- 지난 글: [철학자,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우리의 게으른 삶이 우리의 작품을 만들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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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연세대학교 철학과와 같은 대학원에서 독일철학을 공부하고 헤겔철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고려원, 김영사 편집장을 거쳐 세종서적 대표이사를 지냈고, (사)한국출판인회의 교육위원장으로도 일했다. 현재는 ‘사월의책’ 출판사의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일하며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 분야를 주로 출판하고 있다. 칸트 및 헤겔 관련 책들을 오래 전에 번역한 적이 있고 최근 『H2O와 망각의 강』(이반 일리치)을 번역했다. 경향신문과 몇몇 잡지에 문화 및 출판 관련 칼럼을 꾸준히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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