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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강시는 좀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걸까?

- 장르문화 속을 걸어다니는 시체들의 용쟁호투 - 장르 문화 속 인문 찾기 -

by 임태운 / 2022-02-15

장르문화 속 인문찾기는? 흔히 웹툰, 웹소설, 만화, 게임 같은 장르와 이들 장르가 사용하는  맨스, 추리, SF, 스릴러, 무협, 코미디같은 패턴 등을 아울러 ‘장르문화’라고 부른다. 이상한 것은 이들 ‘장르문화’가 점점 큰 인기를 얻고 산업적으로도 크게 성장하고 있음에도 아직 예술작품으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교과서, 언론 등에서도 소홀히 다뤄지고 있는 점이다.  이에 이미 일상과 문화 곳곳에 깊숙이 파고든 다양한 장르문화 콘텐츠들과 그 속에 숨어있던 인문적 가치와 요소,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새롭게 발굴해 함께 나눠보려고 한다.


세 명의 아이들이 동시에 대야에 머리를 처박고 숨을 참는 동안 강시는 유유히 그 아이들의 뒤를 지나치고 있었다. 그런데 가장 어린 꼬마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푸핫!’ 하며 고개를 든 순간 강시가 걸음을 우뚝 멈추더니 뒤돌아섰다. 피냄새를 맡은 사자처럼 꼬마가 내뱉은 숨을 탐지한 것이다. ‘이제 쟤들은 다 죽었다, 어떡해!’ 하며 발을 동동 구르던 순간 분노한 아버지가 …….



납량 특집의 제왕 ‘강시’



무더운 여름이었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우리에게 더위에 대항할 무기라곤 탈탈거리는 오래된 선풍기와 ‘납량 특집’이란 이름으로 편성된 특선 영화들뿐이었다. 그중에서도 코흘리개 아이들에게 공포의 제왕으로 군림했던 존재는 단연코 홍콩 영화의 단골 등장 캐릭터인 강시(僵屍)였다.


이마에는 노란 부적을 붙인 채 양팔을 나란히 한 자세로 콩콩 뛰어다니며 괴력을 발휘하는 요괴. 이마에 붙은 부적이 떼어지는 순간 산 사람의 피를 빨아먹기 위해 폭주하는 언데드 몬스터(Undead Monster). 90년대 어린아이의 악몽 속에서 드라큘라, 늑대인간, 미이라에 밀리지 않는 출현 빈도를 자랑하는 위용을 갖고 있었다.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던 장마철에 형들과 함께 브라운관 TV 앞에 옹기종기 모여 강시 영화를 보던 기억이 난다. 강시의 여러 특징 중 하나는 사람의 호흡을 탐지하여 먹잇감을 찾는 것인데 우리가 보던 장면은 부적이 떼어진 붉은 눈의 강시가 민가로 숨어드는 순간이었다. 굶주린 사자가 토끼굴에 막 발을 들여놓은 긴장감 넘치는 순간. 강시가 길 위를 콩콩 뛰어다니는데 가장 가까운 마당에서 내 또래의 꼬마들이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놓고 숨참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세 명의 아이들이 동시에 대야에 머리를 처박고 숨을 참는 동안 강시는 유유히 그 아이들의 뒤를 지나치고 있었다. 그런데 가장 어린 꼬마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푸핫!’ 하며 고개를 든 순간 강시가 걸음을 우뚝 멈추더니 뒤돌아섰다. 피냄새를 맡은 사자처럼 꼬마가 내뱉은 숨을 탐지한 것이다.



영화 〈강시선생〉(1985)의 한 장면 (이미지 출처: 필자 제공)

영화 〈강시선생〉(1985)의 한 장면 (이미지 출처: 필자 제공)



‘이제 쟤들은 다 죽었다, 어떡해!’ 하며 발을 동동 구르던 순간 분노한 아버지가 늦잠 자면 곤란하다며 TV를 꺼 버리셨다. 우리 형제는 딱 10분만 더 보자고 애원했지만 소용없었다. 강시를 제압하는 영환도사보다 더 무서운 것이 당시의 젊은 아버지였다.


그래서 나는 제목이 뭔지도 모르는 그 강시 영화에서 숨참기 놀이를 하던 아이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너무도 궁금하다. 보다 만 뒷이야기를 제멋대로 상상하기 시작하던 습관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강시는 추억으로, 지금은 대좀비 시대



지금의 3040세대는 강시와 관련해 위와 같은 추억 한두 가지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MZ세대에게 강시란 희미한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거나 개념으로만 접하는 화석 같은 존재일 것이다.


대신 지금은 범람한다고 표현해도 될만큼 다양한 좀비물이 그 빈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게임 〈바이오하자드〉 시리즈와 이를 원작으로 6편이나 만들어진 영화 〈레지던트 이블〉, 〈월드워Z〉, 〈워킹데드〉 등 세계적인 좀비물 대유행의 수혜를 우리 또한 정면으로 받았다.


〈부산행〉을 필두로 〈킹덤〉, 〈창궐〉, 〈살아있다〉 등 한국형 좀비물도 이제 우리에겐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환갑이 넘으신 내 어머니도 이제 좀비가 무엇인지 아신다. ‘그거 사람 무는 시체 아녀?’ 본질을 꿰뚫는 통찰이다.



영화 〈부산행〉(좌)와 넷플릭스 오리지널 〈킹덤〉(우)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넷플릭스)

영화 〈부산행〉(좌)와 넷플릭스 오리지널 〈킹덤〉(우)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넷플릭스)



나 또한 좀비 유행의 커다란 수혜자 중 한 명이다. 국가대표 선수촌에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며 엘리트 운동선수들이 좀비와 싸우는 〈태릉좀비촌〉과 바이러스로 멸망한 지구를 탈출한 거대 방주(方舟: 네모진 모양의 배) 우주선에서 다시 좀비와 싸워야 하는 강화인간들의 액션물 〈화이트블러드〉를 집필했고 두 장편소설 모두 영화화 계약을 체결했다. 구상 중인 차기작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좀비 세상과 함께한 청소년들이 주인공인 영어덜트(young adult) 좀비물이다.



임태운의 소설 〈화이트블러드〉(좌)와 〈태릉좀비촌〉(우)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임태운의 소설 〈화이트블러드〉(좌)와 〈태릉좀비촌〉(우)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이쯤되면 생계의 절반을 좀비에 의존해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수준이다. 강시의 추억을 유전자에 새긴 채 좀비소설을 쓰며 살아가는 창작자로서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정말로 강시는 좀비에게 밀려 사라진 것일까.

좀비가 차지한 자리가 정말로 강시의 빈자리인가.

아니, 일단 두 존재가 제대로 맞붙었던 적이 있기는 한가.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에 한정하여 강시와 좀비의 흥망성쇠를 되짚어 보며 그 두 코드의 명암이 엇갈린 순간을 포착해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한’이라는 정서(강시) vs. 팬데믹의 공포(좀비물)



이미 죽은 시체가 일어난다.

어지간한 피해로는 물리칠 수 없다.

접촉하면 전염된다.


의외로 강시와 좀비는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으나 본질적으로 ‘무엇을 은유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파고 들어가면 커다란 차이를 갖고 있다.


강시를 대중적으로 널리 알린 홍콩 영화 〈귀타귀〉와 〈강시선생〉을 보면 이미 장르의 공식들이 확실하게 정립되어 있다. 강시는 전쟁터에서 ‘객사’한 병사들이 고향에 돌아와 묻히지 못할 경우 원귀가 된다는 도교적 세계관에서 출발한 요괴 캐릭터다. 대량의 시체를 한정된 인력으로 운반하기 위해 두 개의 막대기에 시체 여러 구를 묶어서 운반하는 모습이 ‘콩콩 뛰는 시체’인 강시의 원형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



영화 〈강시선생3-영환도사〉의 임정영 배우 (이미지 출처: 필자 제공)

영화 〈강시선생3-영환도사〉의 임정영 배우 (이미지 출처: 필자 제공)



그렇기에 강시물에는 영환도사라는 명확한 퇴치법이 존재한다. 영환도사는 강시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무술 실력과 닭의 피로 만들어진 부적을 신묘하게 구사하는 일종의 히어로다. 동양계 괴담에서 원혼과 소통하고 넋을 달래거나 퇴치하는 무당의 존재가 맡은 역할과 동일하다.


동아시아의 여러 민담과 설화에서 핵심이 되는 ‘한(恨)’의 정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강시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즉, 산 자의 세계를 침입하는 괴이한 존재라는 면에선 좀비와 동일하나 강시는 본질적으로 달래 줘야 하는 사연을 가진 대상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좀비는 거장 조지 로메로(George Romero, 1940~2017)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태동한 이미지가 온갖 영화나 게임에서 변주되어 지금까지 살아남았는데 그 핵심은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이 주는 공포가 캐릭터로 형상화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좀비는 매스미디어에 의해 판단력을 잃고 우매한 대중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상징한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즉, 좀비는 개인의 사연과 그 원통함에 집중하기는커녕 반대로 ‘개인을 잃어 버리고’ 이름 없는 집단 속의 일원으로 말살될지 모른다는 공포에 그 기반이 있다. 전염병의 창궐에 2년째 전세계가 시달리고 있는 상황 속에서 이제 좀비는 단순히 콘텐츠 속에만 갇힌 이야기가 아니다. ‘확진자 1,000명’이란 숫자 안에는 무수한 개인의 비극들이 숨어 있겠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지독하게 무서운 일이고 또 피부에 와닿는 현실적인 공포다.


좀비물의 유행을 ‘계급으로 타자화시키는 인간관’으로 분석하는 시선도 있다. 이 또한 물질 만능주의와 금수저론에 익숙한 우리에겐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좀비를 막기 위해 장벽을 세우는 영화 속 생존자들처럼 우리는 너무나 쉽게 서로를 향해 장벽을 세우곤 한다. 그 장벽이 전복되는 순간 역시 좀비물에서는 중요한 구성 요소다.



영화 〈새벽의 저주〉 스틸컷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새벽의 저주〉 스틸컷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필자는 좀비물이 계속 파급력 있게 확장되는 배경에 ‘개인으로서의 내가 말살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대체할 만한 시스템이 발명되지 않는 한 이 병증이 단시간에 고쳐질 것 같지도 않다. 그렇기에 한 인간의 원혼을 잘 달래 주지 않으면 화를 입는다는 강시의 도교적 세계관이 비현실적이고 낡은 것으로 취급되는 것도 당연한 수순 같아 보인다.


강시 영화의 테마는 ‘권선징악’이다. 패악질을 일삼던 탐관오리가 강시에 의해 혼쭐나는 류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명확하다. 집단의 구성원을 돌보며 착하게 살자는 것이다. 그 등장만으로 안심시켜 주는 영환도사의 존재에서 알 수 있듯 강시 영화의 서사구조는 한풀이를 위한 굿판과도 닮아 있다.


그러나 좀비물은 다르다. 개인으로서의 내가 아무리 건실한 삶을 살고 도덕적인 가치관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좀비는 무는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바이러스는 마치 중력처럼 공평하게 찾아오는 대재앙이다.


가상의 캐릭터가 주는 공포감이라는 면에서 그 규모에서도, 현실감에서도 강시는 이제 좀비에 비빌 수가 없게 되었다.



창작 도구로서의 강시 vs 좀비, 문제는 확장성!!



‘홍콩 영화의 전성기가 저물고 할리우드 영화가 왕좌를 차지한 것처럼 강시와 좀비도 그렇게 봐야 한다.’


이렇게 설명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강시와 좀비 모두 소설 같은 전통적 텍스트보다는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그 세를 불렸으니까. 홍콩 영화가 절정의 위상을 구가하던 90년대가 끝나버린 순간에 더이상 강시 또한 한반도에 머무를 수 있는 토양을 잃어버렸다는 뜻이다.


하지만 외래종이라는 면에서는 좀비 또한 강시와 같은 약점이 있다. 하지만 좀비는 그 뻣뻣한 움직임처럼 경직된 코드를 가진 강시와 달리 다양한 변주와 실험을 통해 진화하는 중이다. 코미디, 사극, 로맨스 등 어떤 서브 장르와 달라붙어도 찰떡같이 융합이 가능한 전천후 코드가 되어가고 있다.


결국엔 확장성이란 면에서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났기 때문에 게임이 끝나버린 것은 아닐까.



영화 〈귀타귀(1980)〉에서 코믹스러운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 홍금보의 모습 (이미지 출처: Alchetron)

영화 〈귀타귀(1980)〉에서 코믹스러운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 홍금보의 모습 (이미지 출처: Alchetron)



강시물에서는 의외로 코믹 요소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청나라 관복을 입고 얼굴을 하얗게 분칠한 채 콩콩 뛰어다니는 모습 자체가 우스꽝스럽기도 하거니와 비극을 해학으로 승화시켜 한풀이를 한다는 강시 영화의 태생 자체가 가진 한계이기도 하다.


거꾸로 말하면 강시에게 청나라 관복을 벗기고 부적을 빼앗아 버리면 더 이상 ‘강시’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강시 캐릭터가 가진 잠재력은 그리 크지 않다. 창작자의 입장에서는 강시를 소재로 취하는 것만으로도 작품 전체의 톤 앤 매너(Tone & Manner)와 세계관을 구현하는 데 있어 일정 부분 자율성이 줄어들도록 하는 까다로운 도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좀비는 이제 그 유래를 설명할 필요성조차 없어지고 있을 만큼 변형이 자유로운 소재다. 좀비 영화의 초반에 뉴스 앵커들이 공항이나 쇼핑몰을 배경으로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다는 소식을 긴박하게 전하는 몽타주 장면들은 이제 고리타분한 장치가 되어버렸다. 아예 시작과 동시에 전 세계를 쑥대밭으로 만든 후 본격적인 스토리를 전개하는 좀비물도 많아졌다. ‘보는 이가 이미 규칙을 숙지하고 있다’는 점이 장르물에서 얼마나 뛰어난 장점이란 말인가. 이렇게 판이 깔리면 창작자는 좀비물을 통해 자신의 색채를 마음껏 덧칠할 수 있다.



수백의 좀비 떼를 혼자서 학살할 수 있는 게임 〈데드라이징3〉 (이미지 출처: 필자 제공)

수백의 좀비 떼를 혼자서 학살할 수 있는 게임 〈데드라이징3〉 (이미지 출처: 필자 제공)



그동안 다양한 배경으로 좀비물을 창작해온 입장에서 또 하나 좀비의 장점은 스케일과 디테일을 동시에 챙길 수 있다는 점이다. 〈월드워Z〉나 게임 〈데드라이징〉에서처럼 수백의 좀비가 떼로 덮쳐오는 쓰나미형 장면을 연출할 수도 있으며 〈바이오하자드1〉처럼 폐쇄된 저택이나 자동차, 엘리베이터처럼 공간을 극도로 한정하여 쫄깃한 서스펜스를 창출해낼 수도 있다. 영화 〈부산행〉에서는 그 두 장면이 함께 쓰이기도 한다. 영화 초반부 좀비 떼로부터 달아나 기차역에서 탈출하는 장면과 클라이맥스에서 기관실로 향하는 좁은 통로로 다가오는 좀비를 막아서는 공유를 떠올려 보라.


인간이 아닌 괴물이 등장하는 장르물을 폭넓게 ‘크리처물’이라고 한다. 한 가지 소재만으로 스케일과 디테일을 모두 챙길 수 있다는 것은 다른 크리처물로도 일궈 내기 어려운 면이기도 하다. 죠스가 바다를 뛰쳐나와 도로 위에서 사람들을 깨물 수 있나? 뱀파이어가 어둠에서 해방돼 대낮에 사람들을 물고 다닐 수 있나? 그런 크리처들이 수백과 수천이 뭉쳐서 그 숫자만으로도 질식할 것 같은 장면을 연출해낼 수 있나? 장르를 파괴하는 데서 웃음을 창출하는 코미디가 아니고서야 어려운 것이다.


강시가 좀비와 닮은 점이 많다는 것 또한 강시 측면에서는 불운이다. 윈도우 운영체제의 상위 호환(컴퓨터의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가 한층 업그레이드된 환경에서도 충분한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출처: IT 용어 사전) 개념처럼 강시가 갖고 있는 으스스함이나 포텐셜을 좀비는 대부분 대체할 수 있다. 그리고 강시로는 연출하지 못하는 다양한 변주 또한 가능하다.


육식 공룡인 랩터와 호랑이를 각각 강시와 좀비에 대입해 보고 싶다. 그 둘을 여름과 겨울이 공존하는 한국에 데려온다고 생각해 보자. 직접 맞붙으면 랩터가 이길 수야 있겠지. 하지만 온도에 적응하는 능력 면에서 큰 차이가 있기에 랩터는 멸종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강시의 시대는 끝났다’ 호언장담할 수 없어



콘텐츠의 세계에서 무언가를 호언장담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한국에서 ‘스페이스 오페라(Space Opera: 우주를 무대로 전개되는 SF 활극)’은 절대 만들어질 수 없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숱하게 많았다. 하지만 〈승리호〉가 떡하니 나왔다. ‘뽑기’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소재로 한 〈오징어게임〉이 넷플릭스 월드 랭킹 1위를 찍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렇기에 어떤 괴물 같은 창작자가 다시 한번 강시 붐을 일으킬 수 있는 영화나 드라마를 내놓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절대 없다’고 확언할 수는 없다.



리마스터로 살아나는 추억, 리메이크될 수는 없을까



영국 유레카에서 출시한 〈강시선생〉 블루레이 (이미지 출처: Eureka)

영국 유레카에서 출시한 〈강시선생〉 블루레이 (이미지 출처: Eureka)



하지만 현실적으로 가능성을 따져 보라면 강시 영화의 추억을 가진 세대로서 아쉽게도 몹시 비관적이라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너무도 많은 우연들과 기연들이 합쳐져야 할 것이다. 살아 있는 티라노 사우르스를 동물원에서 보게 될 확률보다는 물론 높겠지만.


강시는 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를 보여 주는 창 역할을 하던 낡은 브라운관 TV와 닮았다고 생각이 든다. 물론 브라운관 TV를 레트로 아이템으로 구매하는 이들은 여전히 존재하겠지. 하지만 오래된 것들을 추억하는 감성만으로 장르 콘텐츠의 살벌한 전장에서 생존하기란 지난한 일이 아닐까 싶다.


‘납량 특집’이라는 단어조차 이제는 국어사전에서나 볼 수 있는 요즈음에 나는 그 여름날의 강시 영화를 다시 떠올려 본다. 대야에 얼굴을 박고 숨을 참던 아이들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


살아남았다면 지금은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


숨을 참는 것만으로 귀신을 피할 수 있다고 믿었던 어린 소년은 이제 귀신보다 바이러스가 훨씬 더 무섭다. 그리고 노란 부적 대신에 하얀 일회용 마스크를 서랍 속에 쌓아 두는 재미없는 어른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영환도사의 아련한 종소리가 추억 속을 스치운다.



[장르문화 속 인문 찾기] 강시는 좀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걸까?

- 지난 글: [장르문화 속 인문 찾기] 인문학을 통하면 더 많이, 더 잘 보이는 만화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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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태운 작가 사진
임태운

SF소설가
2007년 장편소설 『이터널마일』로 데뷔해 이후 『태릉좀비촌』, 『화이트블러드』 등의 장편소설을 집필했으며 단편집으로는 『마법사가 곤란하다』, 『종말 하나만 막고 올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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