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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들의 총합’으로서의 나 그리고 대학의 책무

- 공동체 회복을 위한 인문 탐색 -

이재영

2021-11-22

공동체 회복을 위한 인문 탐색은? 세대 갈등, 남녀 갈등, 빈부격차, 혐오와 차별 등 우리 사회에는 갈등거리들이 지뢰밭 같이 널려있습니다. 개인의 존엄성을 높이면서도 이기주의에 빠지지 않을 방안은 무엇일까요? 파시즘처럼 ‘전체’를 강요하지 않고도 서로에게 힘이 되는 공동체를 가꾸어갈 방법은 무엇일지요?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인문 석학들이 공동체를 둘러싼 여러 문제에 대해 혜안을 열어 드립니다.


기초 지력과 용기가 결합되면 자기를 긍정할 수 있는 힘, 자기를 강화해갈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된다. 그 당연한 귀결로 자기를 교차하는 제반 관계를 건사하는 역량도 탄탄하게 갖추게 된다. 그랬을 때 비로소 공동체를 건사할 수 있게 된다. 자기를 긍정하고 자신을 강화해갈 줄 아는 이는 시야가 또 활동 반경이 결코 자신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해야 부자도 안전하게



따뜻한 공동체

따뜻한 공동체



영어에 “초라한 집이 행복해야 궁궐이 안전하다(The palace is safe when the cottage is happy)”라는 경구가 있다. 19세기 영국 총리를 두 번 역임한 정치가이자 작가인 벤자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가 한 말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해야 부자들도 안전하게 살 수 있다는 뜻이다. 부유층이 자기 이익만 추구하느라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않았을 때, 부자들의 행복은커녕 안위 자체가 보장되지 못했던, 나아가 공동체의 존립이 위태롭게 됐던 유럽 역사에서 얻은 교훈을 담고 있는 말이다.


다만 유럽뿐이겠는가? 디즈레일리가 던진 교훈은 사실 동서고금의 모든 공동체에 고루 적용된다. 가령 인류 공동체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류 공동체는 다양한 구성원의 총합이다. 인종이나 민족, 지역 등과 무관하게, 또 부자와 빈자, 강자와 약자, 연장자와 연소자, 남자와 여자 등 어떤 부류로 분류되든 간에 그 모두가 다 속하는 것이 인류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가 평화롭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구성원의 화합이 이루어져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예컨대 사회적 강자가 약자에 대한 책임감과 유대감을 지니고 이를 실천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회적 약자가 무시되고 핍박이 임계점에 달했을 때 사회적 강자는 물론 그들이 속한 공동체 전체가 불행의 늪에 빠지게 됨을 인류는 이미 적잖이 경험했다. 그 공동체가 가족이나 지역이든 간에 또 국가나 문명권이든 간에 늘 그러했음은 역사를 통해 쉬이 확인할 수 있다. 이들 공동체가 불행해지면 결국 이들로 이루어진 인류 공동체도 불행해지게 된다.



지구는 인간 말고도 무수한 생명들로 이뤄진 공동체



한편 초라한 집의 행복이 궁궐의 안전에 직결된다는 경구는 인간으로 구성된 공동체에만 적용되는 건 아니다. 인류의 삶터인 지구를 보자. 이 지구 공동체는 인간과 동물, 식물, 미생물, 무생물 등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인간 중심의 지구촌에서 인류와 모든 생명체와 무생물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지구 공동체의 일원으로도 살아가고 있다. 이 구성원 간에도 벤자민 디즈레일리의 경구가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류는 과학기술 기반 문명의 획기적 발전을 통해 지구 공동체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존재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한 지 꽤 오래되었다. 현대 문명 시기를 ‘인류세(anthropocene)’라고 부를 정도이다. 인간이 지구의 운명을 좌우하는 유일무이한 권력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지난 2년 가까이 겪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은 이 권력자와 지구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 간 조화가 깨지면 인류의 생존이 위협을 받게 될 것임을 고통스럽게 각인시켜 주고 있는 사례이다. 나와 지구 공동체는 이렇게 일상 차원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한 명 한 명이 다 복수(複數)의 관계들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다양한 공동체에 속하게 된다. 나와 가족이나 타인 사이는 물론 나와 조직, 지역, 국가 사이에, 그리고 나와 다른 생명체들, 나와 지구 사이에 형성되는 관계가 나를 실질적으로 구성해 주고 움직이게 하며 나의 삶에 일상적으로 작동되고 있다. 아무리 1인 가구가 확대되고 ‘혼밥’이니 ‘혼놀’ 같은 ‘혼족 현상’이 심화되고 된다고 해도 ‘나’는 어디까지나 ‘관계들의 총합으로서의 나’인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는 그것이 학교이든 직장이든 지역사회이든 국가이든 간에 이러한 개인들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관계들의 총합으로서의 나를 건사하는 길이 곧 공동체 회복의 효율적이고도 미더운 길이 된다. 나를 잘 건사하려면 나를 구성하고 있는 관계들을 잘 건사해야 한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관계들을 잘 건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나와 연결된 공동체를 잘 돌보고 보살피는 활동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에게 교차되는 관계를 잘 건사하는 역량이 공동체 회복의 관건이 된다.



대학, 관계로서의 나를 건사할 능력 키우는 곳



대학캠퍼스 생활

대학캠퍼스 생활



바로 이 점에서 대학은 공동체 회복의 중추이다. 사실 ‘나를 건사하는 역량’의 구비는 초등학교는 물론 중・고등학교 내내 이루어지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입시의 자장에 휩싸이는 현실은 이의 실현이 요원함을 잘 말해 준다. 한편 대학은 청년 학생이 생활인으로서의 삶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익히는 장이다. 청년은 결코 어리지 않다. 그들은 어엿한 성인이다. 대학은 이들이 성인으로서 자신을 건사하는 역량을 키우는 첫 단계이다. 물론 대학을 둘러싼 작금의 현실을 감안하면 대학에서조차 ‘나를 건사하는 능력’을 키우는 일이 쉽지 않음이 사실이다. 갈수록 대학을 사회 진출을 위한 ‘취업사관학교’로 대하기 때문이다.


물론 졸업 후의 삶을 위한 실무 역량을 튼튼하게 구비하는 일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만 대학이 존재한다면 ‘대학’이라는 이름을 굳이 고수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취업사관학교로서의 대학을 굳이 높은 비용을 감수하며 다닐 필요가 있을까 싶다는 얘기다. 기업에서 요구하는 실무 역량을 갖추는 데는 그쪽으로 특화된 학원을 다니는 것이 가성비가 훨씬 좋은 선택일 수 있기에 하는 말이다. 오로지 실무 역량만을 갖추고자 한다면 대학은 정답이 아닐 수 있다. 대학은 실무 역량뿐 아니라 ‘큰 학문’이라는 이름이 표방하는 여러 역량까지 더불어 갖추는 곳이다. 그 하나가 바로 자신을 건사할 줄 아는 역량을 갖춤으로써 공동체를 건사할 수 있는 역량을 겸비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꼭 배워야 하는 ‘기초 지력’과 ‘용기’



기초 체력

기초 체력



이를 위해서는 학생들이 대학에서 적어도 다음 두 가지를 익힐 수 있어야 한다. 대학이 그럴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첫째는 기초 지력이다. 기초 지력이라 함은 비유컨대 기초 체력에 해당되는 앎의 힘을 가리킨다. 생활 체육, 엘리트 체육 할 것 없이 어떤 종목이든 간에 반드시 ‘기초 체력’을 갖추고 있어야 비로소 해당 체육 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기초 체력이 활용 범위가 넓다는 뜻이고 그만큼 쓸모도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얘기다. 기초 체력 구비의 목적이 체육 활동에 필요한 힘을 ‘골고루’ 또 ‘지속 가능하게’ 갖춤에 있기에 가능한 현상이다. 여기서 종목을 직업으로, 체육 활동을 삶으로 바꾸어보자. 기초 지력을 왜 갖추어야 하는지가 명료해질 것이다. 이러한 기초 지력을 키우는 길은 다양하다. 기존의 인문 교양 교육을 비롯하여 사회적 역량 강화에 초점이 맞추어진 사회 교양 교육, 디지털 문명에 대한 문해력(digital literacy)을 높이는 과학기술 교양 교육 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 밖에도 더 다양한 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길이든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힘을 ‘골고루 지속 가능하게’ 갖추는 수준을 목표로 해야 하며, 전체나 그룹이 아닌 개인을 단위로 하는 교육을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나날이 진보하는 디지털 과학기술이 이를 가능케 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둘째는 용기이다. ‘용기 교육’이 대학의 중요한 인성 교육의 하나로 설정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여기서 용기는 완력이나 무력 같은 물리력을 기반으로 하는 용맹함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공자가 “어진 이는 반드시 용기를 지닌다(仁者必有勇)”(『논어』)고 잘라 말했던 그 용기를 가리킨다. 공자가 군자, 그러니까 ‘사회적 존재로서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면 어짊과 지혜, 용기를 갖추어야 한다고 했을 때의 그 용기를 말한다. 이 용기는 어짊을 구현해 주는 데 필요한 덕목이다. 오늘날로 치자면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를, 하고 싶은 바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역량이다. 이를테면 ‘욜로(YOLO)족’이나 ‘파이어(FIRE)족’으로서의 삶을 선택했을 때, 주변의 우려나 시선에 굴하지 않고 이를 실현해 내는 데 꼭 필요한 덕목이 용기라는 것이다. 물론 갖은 부조리와 불의 등에 흔들리지 않고 불확실한 미래로 인한 불안감에 휘둘리지 않는 데도 용기라는 힘이 요청된다. 남들과 다른 길을 가고자 하고 다수가 쳐다보지 않는 바를 인생의 이정표로 삼는 데도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나 하나를 건사하기도 힘든 시절에 더불어 살아감을 도모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용기이다.



나를 긍정하는 힘이 있어야 공동체 건사도 가능



긍정의 힘

긍정의 힘



대학이 이 둘을 구비하는 장으로 온전히 작동되면, 학생들은 개개인 차원에서 기초 지력과 용기를 겸비하게 된다. 그렇게 ‘기초 지력과 용기’가 결합되면 자기를 긍정할 수 있는 힘, 자기를 강화해갈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된다. 그 당연한 귀결로 자기를 교차하는 제반 관계를 건사하는 역량도 탄탄하게 갖추게 된다. 그랬을 때 비로소 공동체를 건사할 수 있게 된다. 자기를 긍정하고 자신을 강화해갈 줄 아는 이는 시야가 또 활동 반경이 결코 자신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강한 사람만이 자신을 열 줄 알고 주변을 자신의 실존에 담아낼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만을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다(We are not born for ourselves!)”라는 경구에 담긴 정신이 대학에서 일상적으로 구현될 때 공동체 회복은 요원한 일이 아니게 될 것이다.



[공동체 회복을 위한 인문 탐색] ‘관계들의 총합’으로서의 나 그리고 대학의 책무

- 지난 글: [공동체 회복을 위한 인문 탐색] 갈등을 사회 변화와 발전의 에너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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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영 교수 사진
이재영

서울대 인문대학 영어영문학과 교수
서울대 학생처장, 인문대 학장, 기초교육원장, 대학신문 부주간 등 역임. 문화부 인문정신문화진흥위원회 위원 역임. 한국연구재단 이사, 인문사회 학술발전위위원회 공동대표, 프라임사업사후관리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 중. 펴낸 책으로『영문도 모르고 영어를 해?』 『영어음운론』등이 있으며 『중학영어』『고등영어』(천재교육) 대표 저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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