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11일, 전 세계 영화인들이 모이는 영화축제인 프랑스 칸국제영화제에서 윤종빈 감독의 <공작>이 전 세계 최초 공개됐다. <공작>은 1997년 12월 15대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해 안기부가 주도했던 북풍공작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안기부 출신 박채서 씨의 수기를 바탕으로 쓰여진 이야기로 '흑금성'이라는 암호명으로 북핵의 실체를 캐기 위해 북의 고위층 내부로 잠입한 스파이 박석영(황정민)의 시점을 따라 베이징, 평양, 서울을 바삐 오가며 펼쳐지는 첩보물이다. 영화가 끝난 뒤에 "혹시 4.27 남북정상회담이나 지금의 남북관계 이야기가 극비리에 시나리오에 반영된 게 아닐까"라는 의심 섞인 농담이 오갈 정도로, 영화의 말미가 긴장이 완화된 현재 남북관계가 반영된 듯 보였다. 박석영을 연기한 주연배우 황정민은 칸에서 가진 인터뷰를 통해 "남북정상회담을 보는데 우리 영화 속 장면과 너무 비슷해 놀랐다. 극중 박석영과 리명운이 함께 다리를 건너는 장면이 이번 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워장의 모습과 굉장히 비슷해서 놀랐다"며 현실과의 유사성을 언급했다.
▲ 영화 <공작> 스틸컷 이미지 ⓒCJ 엔터테인먼트
물론 4.27 남북정상회담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가장 비현실적인 광경이 연출된, 역사적으로 뛰어난 만들어지지 않은 각본임에는 틀림없었다. 불과 얼마 전 <공작>이 기획되던 당시만 해도 남북관계의 민감한 지점을 대중영화로 옮긴다는 것 자체가 금기시 되던 때였다. 주연배우 황정민과 이성민 모두 "작년 영화를 촬영할 때만 해도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오히려 쉬쉬하면서 촬영했다. 그런데 올해 이렇게 평화적인 남북정상회담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 너무 묘하다"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영화를 만든 윤종빈 감독 역시 "처음에 영화 만들 때는 박근혜 정권이었고 블랙리스트에 있다는 건 공공연히 다 알고 이었다. 원래는 영화 제목이 '흑금성'이었는데 그렇게 외부에 알려지게 되면 정치적 외압이 들어 올까봐 영화를 찍기 전까지 '공작'이라는 가제를 썼다."고 말했다. 어쩌면 이 영화의 말미에 전해져 오는 감동이야말로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인 우리 모두가 오랫동안 바라는 공통의 희망이어서 그렇게 귀결된 게 아닐까. 4.27 공동회담에서 보여준 믿기지 않는 현실과 비슷한 장면이 연출된 게 아닐까 싶어진다.
▲ 영화 <공작> 스틸컷 이미지 ⓒCJ 엔터테인먼트
<공작>이 남북관계를 토대로 한 기존 첩보물과 가장 차별화된 지점은 첩보 장르라는 형식에도 불구하고 141분이나 되는 긴 러닝타임 동안 단 한 번도 액션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지점이다. 자신의 의도를 숨긴 채 끊임없이 속고 속이는 대사로 가득 찬 이 영화에서 집중하는 것은 숨 막히는 추격 액션보다는 조국을 위한 신념 하나로 가족도, 목숨도 걸었던 박석영이 남한의 대선 작전을 조작하려는 남과 북 수뇌부 사이의 거래를 감지하면서 겪게 되는 마음의 변화다. 철저히 사업가로 위장한 채 적진으로 뛰어든 스파이의 활약을 그리고 있지만, <공작>은 액션을 토대로 한 스파이물인 '본 시리즈'보다는 심리전에 치중한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Tinker Tailer Soldier Spy, 2011)나 스티븐 스필버그의 <스파이 브릿지>(Bridge of Spies, 2015)가 구현한 톤이 더 많이 연상된다. 이 과정에서 박석영만큼이나 도드라지는 캐릭터는 이성민이 연기한 리명운 캐릭터다. 북한의 고위 간부로 박석영과 끊임없이 견제를 하는 리명운은 그간 남북관계를 그린 영화에서 북한 군인 캐릭터가 가진 전형적인 '적'의 이미지를 깨고, 남한의 캐릭터와 같이 입체적인 성격을 가진 캐릭터로 구현되어 큰 울림을 자아낸다.
남북한 냉전관계 속에서도 잃지 않은 휴머니즘을 다룬 영화들
이렇게 <공작>에서 보여준 남북한군 캐릭터 묘사는 지난 반세기, 남북 분단의 역사가 새롭게 쓰이는 동안의 변화를 영화가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예다. 1945년 해방 직후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이 나뉘고 단독 정부를 수립한 후 6.25 전쟁을 거치면서 남북 분단 반세기의 역사가 지나는 동안 휴전과 분단을 소재로 한 영화가 끊임없이 제작되어 왔으며, 한국 관객에게는 특수한 상황인 만큼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어왔다. 강제규 감독의 <쉬리>(1999)가 분단 이후 액체 폭탄을 둘러싼 남측의 OP요원과 북측 조직 간의 대결을 통해 남북관계를 소재로 한 액션블록버스터의 역사를 새로 쓴 이후 남북관계를 다룬 영화들이 꾸준히 제작되기 시작했다.
<공작>과 같이 남북의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인물들이, 남북의 이해관계로 대치하는 동안 서로 인간적인 이해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영화의 본격적인 뿌리는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2000)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4.27 정상회담의 역사적 장면이 구현된 그 판문점이 이 영화의 주요 배경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감회가 더 새롭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돌아오지 않는 다리 북측 초소에서 북한 초소병(신하균)의 죽음 이후, 사건의 발단을 찾아가는 액션스릴러 장르의 영화다. 북한은 남한의 기습 테러라고, 남한은 북한의 납치라고 각각 다른 주장을 펼치는 가운데 사건 당사자인 남한의 이수혁 병장(이병헌)과 북한의 오경필 중사(송강호), 그리고 사건의 최초 목격자인 남성식 일병(김태우) 등을 통해 비극적 죽음의 배후가 밝혀진다. 반공이 제일 원칙으로 강조되고 이념이 좌지우지하는 사회에서, 남과 북의 병사가 총구를 겨누어야 하는 적이 아닌, 서로를 하나의 인간으로 인지해 나가고 우정을 나누는 과정이 관객들에게 큰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 영화 <공동경비구역JSA> 스틸컷 이미지 ⓒ명필름
특히 <공동경비구역 JSA>가 보여준 성취는 분단을 소재로 한 기존의 영화들의 관습에서 벗어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 주었다는 점이었다. 박찬욱 감독은 <씨네21>과 가진 인터뷰에서 "북한 사람을 악마나 괴물로 묘사하는 전통은 이미 박정희 정권 동안 신물 나게 보아온 시각이었다. 편향된 주입식 교육은 분단 현실을 극복하는데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북한에도 다양한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줘야 통일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며 남북한 병사들의 조화를 묘사한 이유를 들었다. 당시만 해도 남과 북 병사들이 격의 없이 서로 우애를 나누는 장면을 쓰면서 "개봉을 할 수 있을까" 정하면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자칫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소나 고발을 당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겁도 났다. 우리 세대가 군사정권하에서 성장하다 보니 그런 걱정을 안 할 수 없었다." 제작사 대표가 '감옥까지 갈' 각오를 해야 한다는 말까지 했다는 후일담을 들려주기도 했었다. 당시 이 같은 위험부담을 안고 기획되어 개봉한 영화는 연속 9주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583만 명의 관객을 동원, 박찬욱 감독을 이른바 흥행 감독으로 각인시키며 차기작의 물꼬를 트게 해준 작품이 되었다.
남과 북의 캐릭터가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서로 인간적인 우애를 나누는 <공동경비구역 JSA>의 플롯은 이후 무수히 많은 영화의 중심 서사가 되었다. 헤어진 형제가 남과 북의 병사로 총구를 겨누게 되는 <태극기 휘날리며>(2004), 남과 북의 병사와 마을 주민들이 우애를 형성하는 <웰컴 투 동막골>(2005), 1953년 남북 최후의 격전을 통해 남과 북 병사의 소통을 그린 장훈 감독의 <고지전>(2011) 역시 비극적인 대치 상황을 바탕으로 남과 북이 서로를 이해하고 휴머니즘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남북관계, 다양한 소재와 시선으로 다룬 영화들
이 관계성을 통해 호응을 얻은 대표적인 작품은 국정원 요원 한규(송강호)와 남파공작원 지원(강동원)이 서로의 신분을 숨기고 각자의 목적을 위해 함께하다 이해의 폭을 넓혀가는 과정을 그린 장훈 감독의 <의형제>(2010)다. 간첩, 탈북자, 남과 북의 문제를 코믹과 감동이 섞인 버디무비 형식으로 버무려 낸 지점이 특히 관객의 호응을 얻었다. 서로의 본분을 잊고 마치 의형제라도 된 것처럼 우애를 형성해 나가는 두 남자의 관계가 송강호와 강동원이 보여주는 파트너십을 통해 표현된다. 남북 병사의 이해관계는 김성훈 감독의 <공조>에서 한층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앞서 북한 최정예 특수요원 지동철(공유)의 추격전을 그린 첩보 액션물 <용의자>(2013)와 <의형제>의 장점을 하나로 모은 듯한 코믹 버디물이다. 역사상 최초의 남북 공조수사를 다룬 <공조>에서 북한 특수 정예부대 출신의 북한 형사 림철령(현빈)과 남한의 형사 강진태(유해진)은 남한으로 숨어든 북한 조직의 리더 차기성(김주혁)을 잡기 위해 손을 잡는다. 단 3일간 한 팀이 되지만, 실상 한 팀이 되기에는 서로의 속내가 너무 다른 남과 북이 인간적 관계를 회복해 나가는 과정이 코믹하게 그려지면서, 영화의 만듦새는 조금 부족하지만 흥행 면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 영화 <의형제> 스틸컷 이미지 ⓒ쇼박스
가장 최근작으로는 양우석 감독의 첩보 액션물 <강철비>(2017)가 북핵 문제로 긴장이 최고조로 치달은 위기일발의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 작품이었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가장 피부로 와닿는 현실적 상상이자, 남북정세를 가장 통찰력 있는 시선으로 관찰하고 있는 작품이다. 특히 미국, 중국, 일본의 이해관계의 각축전이 펼쳐지는 한반도의 정세 묘사는 마치 현재 한반도가 처한 상황을 보는 듯 사실적이었다. 적어도 4.27 남북정상회담 이전의 상황이긴 했지만, 그때까지의 북핵 문제를 둘러싼 세계정세를 이만큼 영화에 사실적으로 반영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액션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쉬리>, <용의자>를 비롯해 남과 북의 요원들이 각축전을 펼치는 류승완 감독의 첩보 액션물 <베를린>(2013)의 흐름을 잇는 작품. 한편으로 ‘강철’같이 차가워진 일촉즉발의 남북관계 안에서, 한편으로는 남북 캐릭터의 이해를 통한 감정의 교류를 여실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형성된 남북 병사의 이해관계의 계보를 잇는 작품이기도 하다. 쿠데타 발생 직후 최정예 요원 엄철우(정우성)가 치명상을 입은 북한 1호와 함께 남한으로 내려오게 되고, 그 사이 정보를 입수한 남한의 외교안보수석 곽철우(곽도원)이 전쟁을 막기 위해 긴밀하게 접근을 시도한다. 재밌게도 이해관계가 다른 남과 북의 두 남자가 모두 1977년생이자 같은 철우라는 이름을 쓴다는 점에서 두 남자의 아이러니한 상황을 보다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치다.
양우석 감독 역시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강철비>를 통해 그간 남북관계의 편향된 시선을 영화를 통해 재고해 볼 것을 의도했다는 점을 밝히기도 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북한에 대한 상반된 교육을 받지 않나. 하나는 북한이 우리의 주적이라는 주적교육이고, 또 하나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통일교육이다. 너무나 상반된 입장을 가진 채 접근하다 보니 북한은 제대로 인지하기 힘든 대상이 되었다. 북한을 냉철하게 바라보려는 노력이나 시도도 물론 있지만, 대체로 북을 과소평가하거나 예민하게 받아들이거나 아예 무시하는 시선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도 그래서다"며 "영화를 통해서 한국이 처한 상황을 냉정하게 점검하는 기회를 만들어 보고 싶다"고 전했다.
▲ 영화 <강철비> 스틸컷 이미지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남과 북의 관계를 소재로 한 작품들은 이밖에도 손에 꼽기 힘들 정도로 많다. 때로 액션으로, 드라마로, 멜로로, 코믹으로 장르적인 다변화가 꾀해지며, 북에서 온 간첩을 그리거나, 탈북자를 소재로 하거나, 남북 단일 탁구팀의 이야기 등 소재적으로도 다양하게 개발되어 왔다. 남과 북의 정세가 지금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스크린에서 재연될 남북 소재의 영화는 앞으로도 무궁무진해질 것이다. 6.21 북미정상회담을 둘러싸고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정세로 긴장이 끊이질 않는다. 지금의 이 분위기 역시 스크린에 반영되겠지만, 모쪼록 남북이 화해하는 해피엔딩이 부디 영화적 상상이 아니길 바래본다.
이화정
영화주간지 『씨네21』 취재팀장. 영화 속 인물들의 흔적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걸 즐겨 한다. 저서로 여행 에세이 『시간 수집가의 빈티지 여행』 『언젠가 시간이 되는 것들』과 인터뷰집 『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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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그린 남북 분단
<공동경비구역 JSA>부터 <공작>까지, 휴전과 분단을 소재로 한 영화들
이화정
2018-05-29
지난 5월11일, 전 세계 영화인들이 모이는 영화축제인 프랑스 칸국제영화제에서 윤종빈 감독의 <공작>이 전 세계 최초 공개됐다. <공작>은 1997년 12월 15대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해 안기부가 주도했던 북풍공작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안기부 출신 박채서 씨의 수기를 바탕으로 쓰여진 이야기로 '흑금성'이라는 암호명으로 북핵의 실체를 캐기 위해 북의 고위층 내부로 잠입한 스파이 박석영(황정민)의 시점을 따라 베이징, 평양, 서울을 바삐 오가며 펼쳐지는 첩보물이다. 영화가 끝난 뒤에 "혹시 4.27 남북정상회담이나 지금의 남북관계 이야기가 극비리에 시나리오에 반영된 게 아닐까"라는 의심 섞인 농담이 오갈 정도로, 영화의 말미가 긴장이 완화된 현재 남북관계가 반영된 듯 보였다. 박석영을 연기한 주연배우 황정민은 칸에서 가진 인터뷰를 통해 "남북정상회담을 보는데 우리 영화 속 장면과 너무 비슷해 놀랐다. 극중 박석영과 리명운이 함께 다리를 건너는 장면이 이번 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워장의 모습과 굉장히 비슷해서 놀랐다"며 현실과의 유사성을 언급했다.
▲ 영화 <공작> 스틸컷 이미지 ⓒCJ 엔터테인먼트
물론 4.27 남북정상회담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가장 비현실적인 광경이 연출된, 역사적으로 뛰어난 만들어지지 않은 각본임에는 틀림없었다. 불과 얼마 전 <공작>이 기획되던 당시만 해도 남북관계의 민감한 지점을 대중영화로 옮긴다는 것 자체가 금기시 되던 때였다. 주연배우 황정민과 이성민 모두 "작년 영화를 촬영할 때만 해도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오히려 쉬쉬하면서 촬영했다. 그런데 올해 이렇게 평화적인 남북정상회담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 너무 묘하다"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영화를 만든 윤종빈 감독 역시 "처음에 영화 만들 때는 박근혜 정권이었고 블랙리스트에 있다는 건 공공연히 다 알고 이었다. 원래는 영화 제목이 '흑금성'이었는데 그렇게 외부에 알려지게 되면 정치적 외압이 들어 올까봐 영화를 찍기 전까지 '공작'이라는 가제를 썼다."고 말했다. 어쩌면 이 영화의 말미에 전해져 오는 감동이야말로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인 우리 모두가 오랫동안 바라는 공통의 희망이어서 그렇게 귀결된 게 아닐까. 4.27 공동회담에서 보여준 믿기지 않는 현실과 비슷한 장면이 연출된 게 아닐까 싶어진다.
▲ 영화 <공작> 스틸컷 이미지 ⓒCJ 엔터테인먼트
<공작>이 남북관계를 토대로 한 기존 첩보물과 가장 차별화된 지점은 첩보 장르라는 형식에도 불구하고 141분이나 되는 긴 러닝타임 동안 단 한 번도 액션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지점이다. 자신의 의도를 숨긴 채 끊임없이 속고 속이는 대사로 가득 찬 이 영화에서 집중하는 것은 숨 막히는 추격 액션보다는 조국을 위한 신념 하나로 가족도, 목숨도 걸었던 박석영이 남한의 대선 작전을 조작하려는 남과 북 수뇌부 사이의 거래를 감지하면서 겪게 되는 마음의 변화다. 철저히 사업가로 위장한 채 적진으로 뛰어든 스파이의 활약을 그리고 있지만, <공작>은 액션을 토대로 한 스파이물인 '본 시리즈'보다는 심리전에 치중한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Tinker Tailer Soldier Spy, 2011)나 스티븐 스필버그의 <스파이 브릿지>(Bridge of Spies, 2015)가 구현한 톤이 더 많이 연상된다. 이 과정에서 박석영만큼이나 도드라지는 캐릭터는 이성민이 연기한 리명운 캐릭터다. 북한의 고위 간부로 박석영과 끊임없이 견제를 하는 리명운은 그간 남북관계를 그린 영화에서 북한 군인 캐릭터가 가진 전형적인 '적'의 이미지를 깨고, 남한의 캐릭터와 같이 입체적인 성격을 가진 캐릭터로 구현되어 큰 울림을 자아낸다.
남북한 냉전관계 속에서도 잃지 않은 휴머니즘을 다룬 영화들
이렇게 <공작>에서 보여준 남북한군 캐릭터 묘사는 지난 반세기, 남북 분단의 역사가 새롭게 쓰이는 동안의 변화를 영화가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예다. 1945년 해방 직후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이 나뉘고 단독 정부를 수립한 후 6.25 전쟁을 거치면서 남북 분단 반세기의 역사가 지나는 동안 휴전과 분단을 소재로 한 영화가 끊임없이 제작되어 왔으며, 한국 관객에게는 특수한 상황인 만큼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어왔다. 강제규 감독의 <쉬리>(1999)가 분단 이후 액체 폭탄을 둘러싼 남측의 OP요원과 북측 조직 간의 대결을 통해 남북관계를 소재로 한 액션블록버스터의 역사를 새로 쓴 이후 남북관계를 다룬 영화들이 꾸준히 제작되기 시작했다.
<공작>과 같이 남북의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인물들이, 남북의 이해관계로 대치하는 동안 서로 인간적인 이해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영화의 본격적인 뿌리는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2000)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4.27 정상회담의 역사적 장면이 구현된 그 판문점이 이 영화의 주요 배경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감회가 더 새롭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돌아오지 않는 다리 북측 초소에서 북한 초소병(신하균)의 죽음 이후, 사건의 발단을 찾아가는 액션스릴러 장르의 영화다. 북한은 남한의 기습 테러라고, 남한은 북한의 납치라고 각각 다른 주장을 펼치는 가운데 사건 당사자인 남한의 이수혁 병장(이병헌)과 북한의 오경필 중사(송강호), 그리고 사건의 최초 목격자인 남성식 일병(김태우) 등을 통해 비극적 죽음의 배후가 밝혀진다. 반공이 제일 원칙으로 강조되고 이념이 좌지우지하는 사회에서, 남과 북의 병사가 총구를 겨누어야 하는 적이 아닌, 서로를 하나의 인간으로 인지해 나가고 우정을 나누는 과정이 관객들에게 큰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 영화 <공동경비구역JSA> 스틸컷 이미지 ⓒ명필름
특히 <공동경비구역 JSA>가 보여준 성취는 분단을 소재로 한 기존의 영화들의 관습에서 벗어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 주었다는 점이었다. 박찬욱 감독은 <씨네21>과 가진 인터뷰에서 "북한 사람을 악마나 괴물로 묘사하는 전통은 이미 박정희 정권 동안 신물 나게 보아온 시각이었다. 편향된 주입식 교육은 분단 현실을 극복하는데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북한에도 다양한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줘야 통일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며 남북한 병사들의 조화를 묘사한 이유를 들었다. 당시만 해도 남과 북 병사들이 격의 없이 서로 우애를 나누는 장면을 쓰면서 "개봉을 할 수 있을까" 정하면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자칫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소나 고발을 당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겁도 났다. 우리 세대가 군사정권하에서 성장하다 보니 그런 걱정을 안 할 수 없었다." 제작사 대표가 '감옥까지 갈' 각오를 해야 한다는 말까지 했다는 후일담을 들려주기도 했었다. 당시 이 같은 위험부담을 안고 기획되어 개봉한 영화는 연속 9주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583만 명의 관객을 동원, 박찬욱 감독을 이른바 흥행 감독으로 각인시키며 차기작의 물꼬를 트게 해준 작품이 되었다.
남과 북의 캐릭터가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서로 인간적인 우애를 나누는 <공동경비구역 JSA>의 플롯은 이후 무수히 많은 영화의 중심 서사가 되었다. 헤어진 형제가 남과 북의 병사로 총구를 겨누게 되는 <태극기 휘날리며>(2004), 남과 북의 병사와 마을 주민들이 우애를 형성하는 <웰컴 투 동막골>(2005), 1953년 남북 최후의 격전을 통해 남과 북 병사의 소통을 그린 장훈 감독의 <고지전>(2011) 역시 비극적인 대치 상황을 바탕으로 남과 북이 서로를 이해하고 휴머니즘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남북관계, 다양한 소재와 시선으로 다룬 영화들
이 관계성을 통해 호응을 얻은 대표적인 작품은 국정원 요원 한규(송강호)와 남파공작원 지원(강동원)이 서로의 신분을 숨기고 각자의 목적을 위해 함께하다 이해의 폭을 넓혀가는 과정을 그린 장훈 감독의 <의형제>(2010)다. 간첩, 탈북자, 남과 북의 문제를 코믹과 감동이 섞인 버디무비 형식으로 버무려 낸 지점이 특히 관객의 호응을 얻었다. 서로의 본분을 잊고 마치 의형제라도 된 것처럼 우애를 형성해 나가는 두 남자의 관계가 송강호와 강동원이 보여주는 파트너십을 통해 표현된다. 남북 병사의 이해관계는 김성훈 감독의 <공조>에서 한층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앞서 북한 최정예 특수요원 지동철(공유)의 추격전을 그린 첩보 액션물 <용의자>(2013)와 <의형제>의 장점을 하나로 모은 듯한 코믹 버디물이다. 역사상 최초의 남북 공조수사를 다룬 <공조>에서 북한 특수 정예부대 출신의 북한 형사 림철령(현빈)과 남한의 형사 강진태(유해진)은 남한으로 숨어든 북한 조직의 리더 차기성(김주혁)을 잡기 위해 손을 잡는다. 단 3일간 한 팀이 되지만, 실상 한 팀이 되기에는 서로의 속내가 너무 다른 남과 북이 인간적 관계를 회복해 나가는 과정이 코믹하게 그려지면서, 영화의 만듦새는 조금 부족하지만 흥행 면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 영화 <의형제> 스틸컷 이미지 ⓒ쇼박스
가장 최근작으로는 양우석 감독의 첩보 액션물 <강철비>(2017)가 북핵 문제로 긴장이 최고조로 치달은 위기일발의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 작품이었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가장 피부로 와닿는 현실적 상상이자, 남북정세를 가장 통찰력 있는 시선으로 관찰하고 있는 작품이다. 특히 미국, 중국, 일본의 이해관계의 각축전이 펼쳐지는 한반도의 정세 묘사는 마치 현재 한반도가 처한 상황을 보는 듯 사실적이었다. 적어도 4.27 남북정상회담 이전의 상황이긴 했지만, 그때까지의 북핵 문제를 둘러싼 세계정세를 이만큼 영화에 사실적으로 반영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액션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쉬리>, <용의자>를 비롯해 남과 북의 요원들이 각축전을 펼치는 류승완 감독의 첩보 액션물 <베를린>(2013)의 흐름을 잇는 작품. 한편으로 ‘강철’같이 차가워진 일촉즉발의 남북관계 안에서, 한편으로는 남북 캐릭터의 이해를 통한 감정의 교류를 여실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형성된 남북 병사의 이해관계의 계보를 잇는 작품이기도 하다. 쿠데타 발생 직후 최정예 요원 엄철우(정우성)가 치명상을 입은 북한 1호와 함께 남한으로 내려오게 되고, 그 사이 정보를 입수한 남한의 외교안보수석 곽철우(곽도원)이 전쟁을 막기 위해 긴밀하게 접근을 시도한다. 재밌게도 이해관계가 다른 남과 북의 두 남자가 모두 1977년생이자 같은 철우라는 이름을 쓴다는 점에서 두 남자의 아이러니한 상황을 보다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치다.
양우석 감독 역시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강철비>를 통해 그간 남북관계의 편향된 시선을 영화를 통해 재고해 볼 것을 의도했다는 점을 밝히기도 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북한에 대한 상반된 교육을 받지 않나. 하나는 북한이 우리의 주적이라는 주적교육이고, 또 하나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통일교육이다. 너무나 상반된 입장을 가진 채 접근하다 보니 북한은 제대로 인지하기 힘든 대상이 되었다. 북한을 냉철하게 바라보려는 노력이나 시도도 물론 있지만, 대체로 북을 과소평가하거나 예민하게 받아들이거나 아예 무시하는 시선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도 그래서다"며 "영화를 통해서 한국이 처한 상황을 냉정하게 점검하는 기회를 만들어 보고 싶다"고 전했다.
▲ 영화 <강철비> 스틸컷 이미지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남과 북의 관계를 소재로 한 작품들은 이밖에도 손에 꼽기 힘들 정도로 많다. 때로 액션으로, 드라마로, 멜로로, 코믹으로 장르적인 다변화가 꾀해지며, 북에서 온 간첩을 그리거나, 탈북자를 소재로 하거나, 남북 단일 탁구팀의 이야기 등 소재적으로도 다양하게 개발되어 왔다. 남과 북의 정세가 지금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스크린에서 재연될 남북 소재의 영화는 앞으로도 무궁무진해질 것이다. 6.21 북미정상회담을 둘러싸고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정세로 긴장이 끊이질 않는다. 지금의 이 분위기 역시 스크린에 반영되겠지만, 모쪼록 남북이 화해하는 해피엔딩이 부디 영화적 상상이 아니길 바래본다.
영화주간지 『씨네21』 취재팀장. 영화 속 인물들의 흔적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걸 즐겨 한다. 저서로 여행 에세이 『시간 수집가의 빈티지 여행』 『언젠가 시간이 되는 것들』과 인터뷰집 『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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