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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의 윤리학’을 배워야 할 시간

- 이달의 답변 -

조형근

2021-02-04

인문쟁점은? 우리 시대가 마주하고 있는 여러 인문학적 과제들을 각 분야 전문가들의 깊은 사색, 허심탄회한 대화 등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더 깊은 고민을 나누고자 만든 코너입니다. 매월 국내 인문 분야 전문가 두 사람이 우리들이 한번쯤 짚어봐야 할 만한 인문적인 질문(고민)을 던지고 여기에 진지한 답변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이달의 질문] '꼰대 마인드'는 과연 잘못인가?  / 질문자 - 이한우

 

Q. 대략 질문의 골격이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세대 갈등의 성격이 이러하다면 그 해법은 어디서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석학이신 사회학자 조형근 선생님께 고견을 구합니다.



[이달의 답변] / 답변자 - 사회학자 조형근



A. ‘듣기의 윤리학’을 배워야 할 시간

 

  

국의 청년 세대는 20세기 내내 정신적으로 고아였습니다. 기성의 질서를 상징하는 권위 있는 ‘아버지’는 없었습니다. 1918년, 이광수는 『청춘』 15호에 “우리는 선조도 없는 사람, 부모도 없는 사람으로 ··· 신종족으로 자처하여야 한다”고 썼습니다. 신종족을 자처했건만 이들의 운명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광수와 그의 동료, 후배들은 4.19세대, 6.3세대에게 가혹한 비판을 받게 되지요. 새 세대 눈에는 술만 마시면 일본 노래를 부르며 “조선 놈은 맞아야 된다”는 우익 아비도, 집안을 풍비박산 낸 좌익 아비도 모두 환멸의 대상이었을 겁니다



내가 꼰대라고…? 내가? 내가아??~~~~



꼰대 마인드를 가진 남자

꼰대 마인드를 가진 남성



흔히 꼰대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자기는 절대 꼰대가 아니라고 믿는 데 있다고들 합니다. 이 말은 서로 얽혀 있는 두 가지 사실을 보여줍니다. 첫째, 꼰대가 현대 한국인들이 두루 혐오하는 대표적인 인간형 중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누구도 꼰대라고 손가락질 받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둘째, 자신이 (적어도 어느 정도는) 그 혐오스러운 꼰대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만 꼰대를 벗어날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인정만이 부정을 가능하게 한다는 이 역설 속에 오늘날 꼰대라는 존재의 특이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놀랍게도 선생님의 질문은 이 상호 의존하는 두 명제를 향해 정면으로 육박해 들어옵니다. 선생님께서는 “‘꼰대 마인드’는 과연 잘못인가?”라고 묻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혐오의 아이콘이 되어 있는 꼰대라는 인간형이, 늘 가르치려 드는 그의 마음가짐이 반드시 잘못된 것이냐고 정색하고 질문을 던지신 것이지요. 이 질문의 진의는 무엇일까요? 꼰대라는 낙인이 두려워 옳다고 믿는 것을 말하기를 저어하는 또 다른 편향에 대한 염려에 선생님의 본뜻이 있지는 않을까 짐작해 봅니다. 결국 소통의 단절을 낳는다는 점에서는 그런 편향 또한 옳지 못할 것입니다. 옮음을 말하는 방법과 태도에 관한 질문과 대답은 윤리적 차원의 성찰을 요청하기 마련입니다. 제게는 늘, 가장 버거운 영역이지요. 바라건대 이 글의 결론부에 이르러서 소략하나마 답변 비슷한 것, 적어도 실마리 정도는 찾을 수 있으면 합니다. 우선은 선생님께서 제시한 세대 갈등을 둘러싼 ‘사실들’로부터 출발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도시세대와 농촌 세대 사이의, 그리고 도시세대끼리의 갈등이라는 역사적 대립 구도의 변화로부터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농촌 세대의 트로트, 도시 세대의 포크송



산업화하던 서울의 모습 세운상가, 1968 이미지 출처 국립역사박물관

산업화하던 서울의 모습(세운상가, 1968)(이미지 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산업화 시대 세대 갈등의 특징을 포착하기 위해 선생님께서 제시하신 트로트와 포크송을 향한 세대 간 취향의 대조는 무척이나 흥미롭습니다. 트로트를 선호하던 기성세대와 포크송을 선호하던 청년 세대의 갈등이 사실은 농촌 세대와 도시 세대 사이의 갈등이었다는 통찰은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본디 늙은 거지를 가리키던 비속어였던 꼰대라는 단어가 교사, 특히 담임교사를 가리키는 말로 바뀌게 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였다고 합니다(김성윤, 「꼰대의 이유」, 『오늘의 문예 비평』, 2016년 가을호). 1960년대 후반이라면 한국 사회의 도시화가 역전 불가능하게 가속화되던 시기였지요. 문학 연구자 송은영은 110여 편의 소설 분석을 통해 서울의 변화를 탐구한 『서울 탄생기』(2018)에서, 서울이 식민지 시절 ‘경성’의 흔적을 벗고 완전히 ‘서울’이 된 시점으로 1960년대 후반을 꼽고 있습니다. 자유의 공기 속에 자란 도시 세대 학생들에게 농촌 세대로서 질서와 순종을 미덕으로 알고 자랐을 교사들의 훈육이란 얼마나 답답하고 숨 막히는 것이었을까요! 이들에게 학교 밖 도시 세계는 자유이자 해방의 공간이었을 것입니다. 소설가 이청준은 1970년대에 쓴 자신의 연보에서 대학을 졸업하던 1965년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서울을 사수하자— 서울에서 다시 쫓겨나지 않도록 하자. 어떻게 올라온 서울 길이었던가. 어떻게 버티어 온 서울의 6년이었던가.”


이 시대 세대 갈등의 이면에 ‘농촌에서 도시로’라는 문명사적 변화가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라는 선생님의 통찰에 공감합니다. 아마도 트로트와 포크송 사이 취향의 대립은 그토록 거대한 변화가 드러난 빙산의 일각이었을 것입니다.


한편 오늘날의 세대 갈등에 대해서 선생님은 첨단산업사회 내에서의 기술적 발언권과 사회적 주도권 사이의 대립으로 진단하고 있습니다. 아마 사회적 주도권을 쥔 기성세대가 기술적 발언권이 강한 청년 세대를 존중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을 강요할 때 꼰대가 되겠지요. 과연 오늘날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급속한 디지털 기술의 발전 속도는 변화에 개방적인 청년 세대의 가쁜 호흡과 박자가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인이 된 후에야 컴퓨터를 만지기 시작한 기성세대는 날 때부터 디지털로 호흡해온 청년 세대의 기술적 진취성이 종종 부담스럽습니다.


반면 역으로 사회적 주도권이라는 측면에서 기성세대와 청년 세대 사이의 불균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해 보입니다. 이를테면 지금의 기성세대를 대표하는 소위 ‘86세대’는 생애 주기 상으로도 정점에 있지만, 대한민국 현대사의 궤적에서도 정점에 서 있습니다. 이들은 산업화의 과실 속에서 자랐고, 민주화 과정에 가장 역동적으로 참여했으며, 정보화의 1세대이자 한류와 문화 산업의 개척자라는 위상도 누리고 있습니다. 반면 이들의 자녀 세대일 지금의 청년 세대는 ‘88만 원 세대’, ‘N포 세대’라는 말이 상징하듯 성장의 역동성이 사라진 시대의 우울을 대변합니다. 이 우울한 청년들을 향해 “노력이 부족하다”라거나 “나 때는 말이야….”를 외칠 때 기성세대는 꼰대가 됩니다. 청년들은 능숙한 디지털 콘텐츠 생산 능력을 활용해서 기성세대들을 풍자하기 시작합니다. 오늘날 꼰대가 담임교사를 넘어 기성세대 일반을 가리키는 말로 용례가 확장된 계기일 것입니다.



20세기 청년 세대 교체의 약사



식민지 시절에 나온 트로트 앨범 이난영 목포의 눈물 이미지 출처 사운드네트워크

식민지 시절에 나온 트로트 앨범 : 이난영 <목포의 눈물>(이미지 출처 : 사운드네트워크)



이 시점에서 저는 오늘날 꼰대의 의미와 세대 갈등의 특성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선생님께서 제시한 도시 세대와 농촌 세대 사이, 도시 세대 사이의 갈등이라는 역사적 대립 구도를 20세기 전체로 확장하고 조금 더 구체화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께서 제시하신 트로트라는 키워드에서 떠오른 생각입니다.


산업화 시대에 트로트는 낡고 구린 기성세대의 취향을 대표했습니다. 맥주를 마시며 포크 기타 반주에 서구 멜로디를 즐기던 청년 세대들은 실향과 실연의 신세를 한탄하는 트로트의 신파조 정서가 몹시 답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트로트는 그로부터 한 세대 전에는 최신 유행이었습니다. 트로트라는 장르가 한반도에 처음 등장한 1930년대에 이 장르의 명칭이 바로 ‘유행가’였지요. 유행가는 그 시절 청년 세대의 노래였습니다. 민요와 속요를 즐기던 기성세대는 이 낯선 정조의 악곡들에 도무지 적응할 수가 없었습니다. 식민지에서는 청년들도 종종 우울했지요. 아니, 청년들이야말로 우울했습니다. 유행가는 식민지 청년의 우울을 한층 더 고조시켜 울게 해주고, 또 달래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파조’였지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신파(新派)’ 라는 말은 1920년대에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청년 지식인들의 신파극 운동에서 나왔습니다. 그것은 신파, ‘새로운 흐름’이었습니다. 유행가, 즉 트로트도 그 일환이었지요. 한때 첨단의 유행이던 신파조 트로트가 한 세대가 흐르자 낡고 구린 기성세대의 추억거리로 바뀐 것이지요.


한때 기성의 질서를 비판하며 출현한 새로운 취향, 새로운 세대가 어느덧 또 하나의 진부한 취향, 낡은 기성의 세대로 퇴락하는 것은 인간사의 피할 수 없는 법칙일 것입니다. 그런 성쇠의 교체가 있기에 많은 것이 존재할 수 있겠지요. 다만 20세기 한반도에서 이 교체는 역사상 어느 곳, 어느 때보다도 더 숨 가쁘게, 또 극적으로 진행된 것 같습니다. 20세기 한반도(의 남부)에는 대략 다섯 개의 정체(polity)와 다섯 가지의 경제 시스템이 쉴 새 없이 교체됐습니다. 대한제국, 식민지 조선, 미군정, 대한민국, 그리고 잠시나마 대한민국을 거의 점령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바로 그것들이죠. 이 격동의 시기 동안 경제 시스템도 전통적 농업 경제로부터 식민지 자본주의를 거쳐 원조 경제, 국가 자본주의, 시장 자유주의(신자유주의)로 숨 막히게 변신해 왔습니다. 망국의 시절이었고, 해방과 분단, 전쟁과 혁명, 쿠데타와 항쟁 들이 연거푸 일어난 시대였습니다.



춘원 이광수 이미지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소설가 춘원 이광수(이미지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즈)



20세기 내내 기성의 권위가 제대로 자리 잡기도 전에 세상이 바뀌었지요. 그래서 한국의 청년 세대는 20세기 내내 정신적으로 고아였습니다. 기성의 질서를 상징하는 권위 있는 ‘아버지’는 없었습니다. 1918년, 신문명의 전도사 청년 이광수는 『청춘』 15호에 “우리는 선조도 없는 사람, 부모도 없는 사람으로 ··· 신종족으로 자처하여야 한다”라고 썼습니다. 선조도, 부모도 없다며 신종족을 자처했건만 이들의 운명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광수와 그의 동료, 후배들은 해방 전후에 태어난 4.19세대, 6.3세대에게 가혹한 비판을 받게 되지요. 해방된 조국에서 자란 새 세대 눈에는 술만 마시면 일본 노래를 부르며 “조선 놈은 맞아야 된다”는 우익 아비도, 무슨 운동인가 한답시며 집안을 풍비박산 낸 좌익 아비도 모두 환멸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김승옥 소설집 무진기행 이미지 출처 알라딘

김승옥 소설집 <무진기행>(이미지 출처 : 알라딘)



일본 유학까지 한 좌익 인텔리였던 소설가 김승옥의 아버지는 결국 산으로 들어가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지요. 김승옥은 평생 아버지를 형상화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차라리 부재하는 편이 나았을 것입니다. 그 김승옥이 1964년 「무진기행」을 발표하자 아버지의 세대들은 “모두 김승옥이라는 벼락에 맞아 넋이 빠진 상태”가 되었고, “이제 우리들 시대는 갔다”며 절망했다고 합니다. 소설가 김훈이 에세이집 『바다의 기별』에서 들려주는 문인 아버지와 그 친구들에 대한 기억입니다. 이 벼락같은 축복의 주인공처럼 보였던 4.19세대와 6.3세대는 미구(未久)에 쿠데타 정권에 협력하면서 소시민으로 길들여져 갑니다. 그들의 개량주의를 비판했던 386세대는 그 찬란한 민주화의 성과만큼이나 재빠르게 기성 질서의 일부가, 아니 그 핵심이 되었습니다. 앞선 모든 세대의 위선과 권위주의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신인류 X세대는 피기도 전에 닥친 IMF의 물결에 휩쓸려 사라졌습니다.


미국의 정치이론가 마셜 버만은 모더니티, 근대성의 근본 특징에 대해 셰익스피어와 마르크스의 용례를 따라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내린다”고 묘사한 바 있습니다. 끊임없는 자기 부정과 갱신 속에 모더니티의 본질이 있다는 것이지요. 20세기 한국에서는 미처 견고해지기도 전에 이미 모든 것이 녹아내렸습니다. 여기에 20세기 한반도 청년 세대 교체사의 특징이 있는 것은 아닐지요?



기울어진 저울

기울어진 저울



선생님이 제시한 사회적 주도권이라는 측면에서 기성세대와 청년 세대 사이의 불균형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심해 보인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기성세대의 힘이 청년 세대를 압도하고 있는 형국이지요. 저는 이 불균형이 20세기를 관통해온 청년 세대 교체의 사이클이 종결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 자본주의는 고도성장의 에너지를 이미 오래전에 소진한 것으로 보이고, 사다리를 타고 오를 수직 이동의 가능성 또한 양극화라는 강고한 성채 앞에서 쇠잔해진 것처럼 보입니다. 꼰대 담론의 일반화에는 이런 사정이 작용하고 있지 않을까요?


기성세대가 젊은이들 앞에서 가르치려 드는 것은 자연스런 모습입니다. 청년들의 (내적) 반발도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하지만 20세기 한반도의 숨 가쁜 역사는 기성세대에게는 가르칠 권위를 허락하지 않으면서 청년 세대에는 도전의 용기를 부여했습니다.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이제 기성세대는 스스로 성취한 것에 대해 확신하는 반면, 청년 세대에는 도전에 필요한 가용 자원이 지극히 빈약합니다. 꼰대의 일반화, 꼰대에 대한 반발심의 일반화는 이 극도의 불균형이 초래한 현상이 아닐는지요?



귀를 기울이면 들리는 것들



경청하는 사람들

경청하는 사람들



꼰대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든, 이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시간대를 언제부터로 소급하든 꼰대를 둘러싼 담론 지형이 세대 간 소통의 단절을 함축한다는 점에는 변화가 없을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세대 갈등이 부상한 20세기 이래 세대 간 소통이 원활했던 적이 과연 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처음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서두에서 저는 옮음을 ‘말하는’ 방법과 태도에 대한 윤리적 성찰에 대해 언급했었습니다. 이제 글을 마무리할 즈음이 되어 다시 살펴보니 저 역시 어떻게 말할 것인지만을 계속 고민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들을지에 대한 고민은 생략되어 있었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은 양방향 행위이지만, 늘 자신을 발신자로서만 상상합니다. 수신자로서 요청되는 윤리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이미 기성세대임을, 저 스스로 꼰대임을 자각하게 되는 시간입니다. 청년들에게 말하라고 말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그들은 이미 말하고 있을 것입니다. 제대로 들으려 귀 기울인 적이 없기에 듣지 못한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듣기의 윤리학’을 배워야 할 시간인데, 어디서 배워야 할지 막막합니다. 제가 풀어야 할 숙제로 삼으면서 글을 맺고자 합니다.



2월 [이달의 답변] ‘듣기의 윤리학’을 배워야 할 시간 ⑫

2월 [이달의 질문] '꼰대 마인드'는 과연 잘못인가? ⑪

1월 [이달의 답변] 유병장수 시대...죽음의 결정권은 스스로 가져야 ⑩

1월 [이달의 질문] 개인의 수명을 누가 결정할 것인가? 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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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근
조형근

학점용 강의와 업적용 논문쓰기의 제약을 벗어나고자 대학을 떠나 지역에서 독립 지식인으로 살고 있는 사회학자다. 쓴 책으로 《사회를 구하는 경제학》, 《섬을 탈출하는 방법》, 《근대주체와 식민지규율권력》(공저), 《좌우파사전: 대한민국을 이해하는 두 개의 시선》(공저), 《사회적 가치와 사회혁신》(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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