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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하나의 테마, 360도 관점

바닷 물결
인류 여행 심리

횡단의 임계점

경계 너머를 욕망하는 사람들

by 김명철 / 2020.01.20


수백 명의 소년들로 이루어진 작은 공동체가 있다. 이들은 사방이 두터운 장벽으로 둘러싸인 조악한 녹지에 산다.

이곳에서 소년들은 알 수 없는 존재가 보내오는 보급품에 의존해 단출한 삶을 꾸려간다. 무엇 하나 풍족하지 않은 원시적인 생활이지만 이들에겐 서로가 있고 식량이 있으며 몸을 뉘어 쉴 곳도 있다. 더 나은 삶을 바라지 않는 것은 아니나 소년들에겐 이를 개선할 방법이 없다. 무엇보다 이들은 장벽을 넘어갈 수가 없다. 낮시간에는 장벽 틈새로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입구가 열린다. 하지만 그 너머에는 소년들을 참살하는 미로가 있고, 맹목적인 살의를 지닌 괴수 ‘그리버’가 있다.


소년들은 주어진 환경과 일상에 만족하며 사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장벽 너머, 미로를 돌파해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장벽 너머에도 희망은 없을지 모른다는 무망감과 그래도 그들에겐 최소한의 삶을 영위할 터전이 있지 않은가라는 안일함과 싸우며, 이들은 장벽의 입구가 열려 있는 낮시간 동안 미로를 달린다. 그렇게 미로의 구조를 익히고 미로가 변화하는 패턴을 연구하는 일이 당장은 무의미하고 무익해 보일지라도 ‘러너(Runner)’들은 날마다 미로를 달린다. 미로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고 새로운 단서가 수집될수록 이들의 희망과 용기는 커져간다. 그리고 어느 날 소년들의 터전에 그리버가 쳐들어와 학살을 벌이자 러너들은 소년들을 이끌고 미로를 돌파한다.


영화 <메이즈 러너> 이미지

▲ 영화 <메이즈 러너> (이미지 출처: imdb.com)


이는 영화로도 제작된 소설 『메이즈 러너』의 줄거리인 동시에 인류의 횡단에 관한 이야기이다.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이 두려움과 안일함을 넘어서는 순간, 오랜 기간 축적해 온 지식과 기술이 빛을 발하는 순간, 위기가 새로운 삶으로 이어지는 순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류가 처음으로 『메이즈 러너』와 같은 위대한 횡단에 나선 것은 무려 20만 년 전의 일이다. 이때부터 우리 선조들은 15만 년에 걸쳐 ‘아웃 오브 아프리카’ 이주라 불리는 횡단을 감행했다.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초기 인류는 광활한 아프리카 건조지대를 지나 식생이 생소한 중동 지역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가며 인도와 유럽에 이르렀다. 사냥감의 이동에 따라, 강과 해안을 따라 대대손손 이어진 이주와 횡단은, 글도 쓸 줄 모르고 활도 만들 줄 모르며 그저 두 발로 걷는 원숭이에 불과했던 초기 인류 또한 보다 나은 삶을 꿈꾸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인류는 이런 꿈을 실현하기 위해 끝없이 변경에 도전하고 희생을 치르며 횡단의 고통과 두려움을 이겨냈다.


3만 년 전 빙하기가 찾아왔을 무렵 선조들은 이미 시베리아에 이르러 있었다. 그리고 빙하기의 해수면 하강으로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사이의 베링 해협이 바닥을 드러내자 선조들은 이곳을 지나 아메리카 대륙을 새로운 터전으로 삼았다. 그들에겐 쇄빙선이나 사륜구동 차량은커녕 변변한 방한복조차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삶을 향한 욕망, 이 욕망이 일구어낸 지식과 기술, 빙하기의 기후 변화라는 위기 상황이 겹쳤을 때 이들은 횡단의 임계점을 맞이했다. 그리하여 혹한의 땅을 지나는 공포와 불안을 떨쳐내고 마침내 위대한 횡단을 이루어냈다.


횡단의 임계점을 다루고 있는 또 다른 사례로 디즈니의 장편 애니메이션 『모아나』가 있다. 이는 인류 최초의 대항해시대를 연 오스트로네시안들의 이야기이다. 지금으로부터 5천 년 전 대만을 떠나 바다로 나선 인류는 필리핀과 인도네시아를 거쳐 파푸아뉴기니를 지나 피지와 뉴질랜드에 이르렀으며, 동으로는 하와이에 서로는 마다가스카르에 다다랐고 아시아와 중동의 고대 문명들과 교역을 했다. 이들 오스트로네시안은 별다른 기술 없이 오직 항해술만으로 세계에서 가장 험하고 막막한 바다를 누비며 무수한 섬과 삶의 터전을 발견했다.


영화 모아나 이미지

▲ 영화 <모아나> (이미지 출처: imdb.com)

 

모아나는 오스트로네시안 대항해시대를 상징화한 캐릭터다. 모아나는 낙원처럼 행복한 섬에서 족장의 딸로 태어났다. 모아나의 부족은 자신들이 사는 섬에 만족하기에 위험한 바다로 나아가는 일은 꿈도 꾸지 않는다. 자꾸만 대양에 이끌리는 기색을 보이는 어린 모아나에게 위험한 바다에 도전하기를 원치 않는 부모와 부족 사람들은 이런 노래를 불러준다.


모아나 잊지 마

네가 있어야 할 곳은 모투누이 마을

우리 춤을 배워봐

옛 노래에 맞춰서

새 노래는 필요 없어 옛것이 좋아


섬은 우리에게 모든 걸 주네

떠나면 안 돼

그래, 이곳은 안전하고 풍요롭지


아무 걱정 마

너도 곧 배울 거야

이곳에서 행복을 찾는 법을


모아나는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자이며 항해자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인물이다. 모아나는 끝없이 바다의 부름을 듣는다. 하지만 모아나의 꿈은 무의미하고 무익해 보인다. 실제로 모아나는 불충분한 기술만으로 바다에 도전했다가 커다란 좌절을 겪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섬에 죽음의 힘이 다가온다. 물고기가 잡히지 않고 야자수가 말라죽는 등 섬의 위기에 자극받은 모아나는 동굴에 감춰진 부족의 배와 항해 지식을 발견하고, 그녀를 바다로 이끌어줄 조력자를 찾아내 바다로 나아간다. 험난한 모험 끝에 모아나는 부족 사람들을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이끌고 간다. 이제 횡단에 나선 부족 사람들은 전과는 다른 노래를 부른다. 두려움과 안일을 극복한 횡단자들의 노래다.


아우에 아우에

드넓은 바다로 새로운 섬을 찾아 떠나네

아우에 아우에

꿈에 그리던 그 섬

집을 찾아가네

우린 길을 안다네

아우에 아우에

세상 모든 게 다 나침반

우리의 이야기는 끝없이 전해 내려가네

아우에 아우에

우린 길을 안다네


인간이 천성적으로 횡단을 즐기고 사람들에겐 본래 횡단을 하고픈 욕망이 있기 때문에 인류가 끝없이 횡단에 나섰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횡단은 고통스럽고 불안하며 많은 희생을 동반하는 일이다. 결코 즐겨 하거나 가벼이 생각할 일이 아니다. 

인류는 더 나은 삶을 욕망하기 때문에 횡단의 고통과 공포를 감수하고 횡단에 나선다. 새로운 삶에 대한 욕망이 끓어오르면 우리 중 누군가는 변경에 도전하며 횡단을 위한 지식과 기술을 쌓는다. 그리고 우리를 현실에 안주할 수 없도록 만드는 크고 작은 위기가 닥쳐오면 횡단의 임계점도 성큼 다가오고,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향해 도약한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횡단 가운데 하나인 콜럼버스의 대서양 횡단 역시 욕망과 기술, 위기라는 세 요인이 종합하여 일어난 위대한 횡단이었다. 당대의 문화적, 기술적 변경이자 유라시아의 풍요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져 있던 유럽에는 더 나은 삶을 향한 욕망이 끓고 있었다. 유럽인들은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항해술을 연마하고 배를 개량하며 꾸준히 대서양에 도전했다. 그러던 중 중동 지방에 오스만 제국이 등장해 지중해를 틀어쥐고 유럽과 유라시아의 연결고리를 통제하기 시작하자, 가장 먼저 포르투갈의 탐험가들이 변경의 횡단에 나섰다. 이들은 오스만 제국의 함대를 피해 아프리카를 돌아 아시아에 이르는 항로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많은 희생을 치렀다.


항해는 횡단의 상징이다


그러던 중 이탈리아의 수학자 파올로 토스카넬리가 서쪽으로 대서양을 횡단해 인도에 이르는 항로를 추론해 냈다. 토스카넬리는 여러 사람들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들려주었는데 그중에는 제노바 사람으로 포르투갈에서 활약하던 항해자이자 지도 연구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있었다. 토스카넬리는 지구의 크기를 터무니없을 정도로 작게 상정했기에 포르투갈에서 서쪽으로 5천 킬로미터 정도만 항해해 가면 인도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이는 완전히 잘못된 추론이었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이미 욕망과 기술과 위기의 삼박자가 횡단의 임계점을 돌파한 마당에는 오히려 횡단을 촉발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뿐이었다. 콜럼버스는 생각보다 훨씬 오랫동안 항해한 끝에 대서양을 가로지를 수 있었고 스스로 죽을 때까지 인도라고 생각한 땅에 도착했다. 이로써 아메리카와 유라시아가 뱃길로 연결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이 달라졌다. 


오늘날에는 ‘더 나은 삶을 향한 욕망’이라든가 ‘횡단’이라는 말에서 죽음을 감수하고 국경을 가로지르는 밀입국자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유럽과 미국에서의 풍족한 삶을 꿈꾸는 아프리카와 중동, 아시아, 중앙아메리카 사람들은 기약 없이 노숙을 하며 기회를 노리다가 자동차 엔진룸 밑에 숨거나 정글과 사막을 몇 주씩 걷거나 철조망 장벽과 터널을 건너 횡단을 감행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횡단이 밀입국이라는 필사적이고 극단적인 형태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횡단이란 새로운 삶에 대한 욕망으로 공포와 안일을 뛰어넘는 것이다. 이는 밀입국자뿐만 아니라 경계에 도전하고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며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서는 국가와 기업, 개인들에게서도 오늘날 꾸준히 나타나는 행위, 활동, 전략이다.


경계에 도전하는 모든 모험은 횡단의 다른 말이다


모든 사람이 횡단을 꿈꿀 필요는 없다. 새로운 삶을 열망하는 대신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몫의 삶을 성실히 일구어나가고 공동체의 안정을 도모하는 사람들도 우리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필수불가결한 존재다. 하지만 공동체에, 국가에, 인류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 우리의 횡단을 이끌어줄 사람들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점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일견 무의미해 보이는 활동을 통해 끊임없이 경계에 도전하고 횡단의 지식과 기술을 축적하는 예술가들, 작가들, 몽상가들, 사상가들, 기업가들, 여행자들, 도전자들과 혁신가들, 탐험가들, 과학자들과 기술자들, 사회운동가들의 노력을 소중하게 여기고 보호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창의적 힘을 비축하고 새로운 삶을 기획하며 새로운 역사를 일구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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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철
김명철
심리학 박사. 창의성과 여행을 연구하고 관련된 저술활동을 하는 심리학자다. 저서로 『빅히스토리18: 과학과 기술은 어떻게 발전해왔을까?』, 『여행의 심리학』이 있다.
이미지 제공 _ ⓒ김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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