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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 기억과 추억의 언어

기억을 끄집어내 추억을 노래하는 대중음악

임진모

2019-03-18


말과 글 그리고 그림과 사진. 어쩌면 문학과 예술은 기억의 언어일 것이다. 기억으로 말하고 싸우며 다시 글로 저장한다. 문학도 그렇겠지만, 음악, 영화, 연극, 미술 등 제반 예술은 기억을 기록하거나 저장하거나 혹은 호소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기억상실은 곧 관계의 상실이다


2017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픽사 애니메이션 〈코코〉는 영화 스토리는 물론, 사운드 트랙 전부가 기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영화에 여러 차례 등장하고 마지막 장면에 알앤비 가수 미구엘(Miguel)의 노래로 흐르는 주제가의 제목 자체가 ‘날 기억해주오(Remember me)’다.


‘날 기억해줘/ 이별을 해야 하지만/ 날 기억해줘/ 울지 마/ 내가 멀리 가더라도 당신을 내 마음속 깊이 간직할 테니까/ 우리가 떨어져 있는 밤마다 난 비밀의 노래를 하지’


기억을 호소하는 것은 곧 나의 존재를 알아달라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헤어져도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는 나의 존재를.

 

전미 흥행 3주 연속 1위 골든글로브 2개 부문 노미네이트 장편애니메이션상 주제가상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겨울왕국> <인사이드 아웃>제작진 Disney·PIXAR 코코
▲영화 <코코(Coco,2017)>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그러고 보면 기억은 한 인간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나는 타자에게 사랑인가, 무관심인가 혹은 혐오의 대상인가. 내가 어떤 사고와 행위를 했느냐에 따라 상대의 기억은 전혀 달라진다. 만약 그에게 나에 대한 기억이 없다면, 그와 나의 관계가 ‘제로’라는 뜻과 다르지 않다. 때문에 기억이 사라지는 ‘기억상실’은 곧 정체성의 상실이다. 정체성을 잃는다는 것은 무(無)라는 점에서 자극적일 수밖에 없어서, 〈내 머릿속의 지우개〉, 〈메멘토〉나 〈시크릿 가든〉, 〈환상의 커플〉 등과 같이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기억상실을 주제로 한다.


 巨美 GUMMY 2nd ALBUM It's different


‘화장을 하고 지우고 옷을 꺼내고 입어도/ 아무리 해도 하나도 기억할 수 없나 봐/ 사랑한다는 말도 들었던 웃는 내 모습을/ 찾고 돌아올 널 위해 내가/ 같아야만 하는데/ 조금도 기억이 나지를 않아’


같은 맥락에서 헤어진 상대를 잊을 수 없지만 기억나지 않는다면 관계는 끝이다. 거미의 절창이 빛나는 2004년 발표 곡 ‘기억상실’은 이별 노래다.



깊은 기억에서 탄생하는 대중음악


기억이라고 다 같지는 않다. 얼마 전 출간된 책 《기억전쟁》에서 저자 임지현 교수(서강대 사학과)는 심리학자 도리 라우브가 아우슈비츠 감옥 생존자들의 기억을 분석한 결과를 통해 ‘지적 기억’과 ‘깊은 기억’의 개념을 구분했다. 1944년 아우슈비츠 감옥에 폭동이 발생했을 때 굴뚝 네 개가 폭파되었다는 생존자의 증언이 있었으나, 실제 현장에 굴뚝은 하나였다. 임지현 교수는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눈앞에서 벌어질 때 인간은 과장되게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한다.


“굴뚝 하나가 사실 중심의 ‘지적(知的) 기억’이라면 굴뚝 네 개는 ‘깊은 기억’입니다.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의 기억은 대개 ‘깊은 영역’에서 나옵니다.”


이에 따르면 사랑의 환희든 트라우마든 대중음악이 담아내는 사랑과 이별의 테마는 깊은 기억일 것이다. 이별은 사랑의 기대와 환희가 급격하게 꺾이면서 슬픔으로 전환되어 일종의 트라우마 정서를 남기는 것 아닌가.


기타의 신 에릭 클랩튼은 음악 동료 조지 해리슨의 아내 패티 보이드를 짝사랑했고, 거절당했을 때의 처참한 고통을 마약과 술로 달랬다.(후에 에릭 클랩튼은 사랑의 승리자가 되어 패티 보이드와 결혼한다.) 그 결과물이 록 클래식 ‘레일라(Layla)’다.


Success Eric Clapton Layla Let it rain·Anyday·Key to the highway·Layla·Little Wing·After midnight·Bell bottom blues

 
‘레일라, 당신은 나를 이렇게 무릎 꿇게 했어요/ 레일라, 제발 이렇게 애원하잖아요/ 레일라, 달링/ 나의 이 고통을 덜어줄 순 없나요’


이 모든 절규와 아우성은 친구의 아내를 흠모하는 불안감과 고백했으나 걷어차인 실연의 통증, 그 ‘기묘한 사랑의 삼각관계’에 대한 깊은 기억에서 시작된다. 결국 패티 보이드는 ‘에릭 클랩튼은 진심의 소유자이자 날 영원히 사랑해줄 사람’이라는, 이를테면 ‘좋은 기억’의 기능으로 그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여성들만의 축제 ‘릴리스 페어’를 기획한 위대한 발라드 여가수 사라 맥라클란의 노래 중에도 ‘난 당신을 기억할게요(I will remember you)’가 있다.

 

Sarah Mclachlan, I Will Remember You, Theme from The Brother Mcmullen, INCLUDES 4 BONUS TRACKS, PREVIOUSLY UNRELEASED


‘당신을 기억할게요/ 저도 기억해줄래요?/ 삶이 당신을 그냥 지나쳐가게 하지 말고/ 추억 때문에 울지 말고요/ 당신을 사랑하기가 너무 두렵지만/ 당신을 잃은 게 더 두려워요/ 제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은 과거에 매달려서/ 어둠과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밤이었던 때/

당신은 제게 모든 걸 주었어요’


이 노래는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의 기억이 추억(memory)을 만든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기서의 기억은 지적 기억이나 공식적인 기억이 아니다. 우리 감성에 호소하는 깊은 기억이다. 상기한 《기억전쟁》의 임지현 교수는 인간적인 기억이 법적 혹은 공식적인 기억보다 부정확할지 몰라도, 실체적 진실에 더 가깝다는 논리를 펼친다. 이 점에서 좋은 기억의 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추억’이야말로 우리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진실이지 않을까.



대중예술, 기억을 꺼내고 추억을 팔다


결국 삶은 온통 기억과 추억이다. god의 기념비적인 노래 ‘어머님께’는 앞으로 달려가기 바쁜 랩과 힙합 음악이 어머니와 효(孝)라는 지극히 복고적인 패러다임으로 회귀하여 센세이션을 야기했던 노래다. 여기서 대중음악과 같은 대중예술은 적절한 시기마다 추억을 복고의 물결로 확산해 산업적 이익을 도모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슴이 시리고 아련해지는 과거 시제를 동원하면 대부분의 소비자는 견딜 재간이 없다.


god CHAPTER ONE

 
‘중학교 1학년 때 도시락 까먹을 때/ 다 같이 함께 모여 도시락 뚜껑을 열었는데/ 부잣집 아들 녀석이 나에게 화를 냈어/ 반찬이 그게 뭐냐며 나에게 뭐라고 했어/ 창피했어 그만 눈물이 났어/...참을 수 없어서 얼굴로 날아간 내 주먹에/ 일터에 계시던 어머님은 또다시 학교에/ 불려오셨어 아니 또 끌려오셨어/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며 비셨어.../ 야이야이야아아/ 그렇게 살아가고 그렇게 후회하고 눈물도 흘리고’


이러한 내용은 ‘전사의 후예’와 ‘아이야’ 등의 노래로 청소년 인권을 주창하는 듯한 H.O.T.의 강펀치와는 완전히 달랐다. god는 ‘어머님께’에 이어 TV 프로그램 〈재민이의 육아일기〉에서 대놓고 가족, 부모, 효(孝) 같은 복고적 이미지를 장착하여 god 세대의 출현을 알렸다. 서구의 유명 음악평론가 사이먼 레이놀즈는 저서 《레트로마니아》에서 대중문화의 현재와 미래가 철저히 과거 시제에 굴복했다며 ‘과거 중독’ 상태라고 규정했다.


배우 브래들리 쿠퍼가 감독한 영화 〈스타 이즈 본〉은 1937년 윌리암 웰먼 감독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1954년 주디 갈란드 주연으로 다시 만들어졌고, 1976년에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주연의 영화로 재해석되었다. 리메이크만 세 번째인 전형적인 복고작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호평을 받았고, 레이디 가가와 브래들리 쿠퍼가 함께 부른 주제가 ‘Shallow’는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 음악상을 휩쓸었다.


말해 봐 친구/ 공허함을 채우려다 지치지 않니/ 아님 더 많은 게 필요하니/ 악착같이 버티는 게 힘들진 않니/ 나는 빠져들어/ 행복했던 시간 속으로/ 나 자신의 변화를 바라지/ 내 스스로가 두려웠던 시간들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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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타 이즈 본(A Star Is Born, 2018)>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이처럼 대중문화가 행복한 과거 시간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밴드 퀸의 프레디 머큐리를 추억하게 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국내에서 993만 명이라는 관객 동원 신드롬을 창출한 것은 전적으로 프레디 머큐리가 살아있을 때 퀸의 음악을 듣거나, 그가 에이즈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충격적으로 접한 ‘실시간 세대’가 주도한 덕이다. 곧이어 다음 세대가 대규모로 가담하면서 두 세대를 관통한 열풍으로 번졌다고나 할까. 전문가들은 앞으로 영화든 음악이든 리메이크가 일상다반사가 될 것으로 진단한다. 새로움 보다는 기억과 추억이라는 익숙함이 비교 우위에 있다는 것. 기억을 끄집어내고 추억을 팔아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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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임진모
임진모

대중음악 평론가 겸 방송인. 1986년 대중음악 평론가로 입문한 후 평론, 방송, 라디오, 강연 등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대한민국 최고의 음악 평론가이자 해설자다. 음악의 아름다움을 전달하기 위해 평론가가 되었고, 대중과 가까이 호흡하는 음악평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저서로 『팝 리얼리즘 팝 아티스트』 『시대를 빛낸 정상의 앨범』 『팝, 경제를 노래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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