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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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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류의 임계점에 서 있는 현대인
과학기술

신인류의 임계점에 서 있는 현대인

현대인과 신인류

by 이정모 / 2019.01.31


“선생님, 300년 후에 사는 사람들은 지금 우리들을 뭐라고 부를까요?”

“그게 무슨 말이냐?”

“지금 우리는 스스로 현대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300년 뒤에는 그때 사는 사람들이 현대인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우리를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정모야, 좋은 질문이다. 하지만 선생님도 아직 모르겠어. 다음에 이야기해 주마.”


1981년 3월 서울 영동고등학교 3학년 8반 국사 수업 시간의 한 장면이다. 별명이 네안데르탈인이었던 선생님은 요즘 표현으로 하면 힙한 분이셨다. 하지만 내가 졸업할 때까지 끝내 답을 찾아주지는 못하셨다. 17년 후 똑같은 질문을 독일 본 대학교의 한 역사학자에게 했다. 그 분은 이 질문이 무의미하다고 말했다.


“여보게. 우리는 100년 후든 300년 후든 영원히 현대인이야. 그 이름은 우리가 차지한 것이거든.

후대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다르게 지어야겠지. 그것은 그들 일이라네. 자네는 쓸데없는 걱정 말고 맥주나 사게.”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너무 다르다


얼마나 다행인가. 우리가 영원히 현대인이라니 말이다. 그런데 채 20년이 지나지 않아서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현대인’으로 표현할 수 없다고 믿게 되었다. 나만 해도 그렇다. 10~20대의 나와 지금 50대인 나를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과학 발전 속도가 너무 빨라서 자연스러운 성장과 노화 과정을 거친 것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우주를 표류하다가 30년 전에 지구를 방문했던 외계인이 다시 방문했다면 인간을 아마 우주의 다른 지적 생명체로 착각할지도 모르겠다.


타자기와 컴퓨터

 

20세기에 태어나서 21세기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은 지난 세기의 자신과 현세기의 자신을 같은 존재라고 인정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나는 다른 존재다. 두 세기에 지속한 것이라고는 유전자뿐이다. 우리는 존재가 변화하는 임계점에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임계점이라고 하면 뭔가 대단한 것 같지만 사실 별것 아니다. 직소 퍼즐을 맞추면서 숱하게 경험한 특이점과 같다. 수백 조각이나 되는 직소 퍼즐 맞추기 놀이를 하다 보면 걱정이 된다. 이 속도라면 완성하는 데 시간이 엄청나게 걸릴 것 같은데…. 그 정도로 처음에는 엄청 느리지만, 어느 정도 맞추다 보면 맞추는 속도가 매우 빨라진다. 그러다가 그림 조각 맞추는 속도가 극적으로 빨라지는 순간이 바로 임계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크고 작은 임계점을 경험하면서 살고 있다.



임계점을 몰랐던 인류, 임계점을 알게 된 인류


“올 한 해도 지난 10년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1859년 1월 1일 런던 시민들이 아침 식탁에서 읽은 《더 타임즈》 사설이다. 이 사설을 유럽 대륙의 주요 정치인들은 점심시간에, 영국 지방 사람들은 저녁 식탁에서 읽었다. 그리고 미국 사람들은 2주 후에 같은 사설을 읽었다. 단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사설이 퍼졌다. 기차와 전신망 그리고 증기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증기기관차

 

1859년은 근대사의 임계점이었다. 세계 인구가 10억 명을 돌파했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1월 1일 자에는 “열이 물질이 아니라 에너지라는 것이 분명하다”라는 글이 실렸다. 파스퇴르는 자연발생설을 뒤집는 실험에 성공했다. 에드윈 드레이크는 최초의 유정(油井)을 시추했다. 알루미늄이 금보다 싸졌다. 대서양 바닥에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잇는 전신 케이블이 설치되고 수에즈 운하 공사가 시작되었다. 브래지어가 특허 등록되다. 링컨은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고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을 출판했다.


이처럼 임계점은 도둑처럼 찾아왔기에, 당시 사람들은 자신이 임계점에 서 있는지도 몰랐다. 지나고 났더니 후대 사람들이 “그때가 임계점이었다.”라고 말할 뿐이다. 당연히 그때 발표된 사설에 대한 사과문이나 해명을 《더 타임즈》는 발표하지 않았다. 아무도 따지지 않았으니까. 산업혁명도 혁명인지 모르고 진행된 시절이었다.


160년이 지났다. 2019년 1월 1일 그 어떤 신문도 “올해도 지난 10년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대한 요란한 나팔을 분다. 이젠 임계점의 성격도 바뀌었다. 도둑처럼 오는 게 아니라 선거처럼 오고 있다.



현대인을 넘어 신인류로


4차 산업혁명을 만들어 낸 사람들이 있다. 아무리 봐도 그들은 ‘현대인’이 아니다. 현대인은 2019년의 대한민국을 한가로이 걸을 수 없다. 사람이 바뀌었다. 이제는 현대인이 아니라 ‘신인류’이다.


동굴에 그림을 그리고 빗살무늬토기를 굽던 신석기인이든, 농사를 짓고 거대 포유류를 멸종시킨 구석기인이든, 청동기 시대를 호령하던 고대인이든, 암흑기를 살던 중세인이든, 그리고 새로운 경제체제를 이뤄낸 근대인이든, 또 자본주의를 꽃피운 현대인이든 모두 호모 사피엔스였다. 신인류는 호모 사피엔스로 차마 분류할 수 없어서 부르는 이름이다. 학명은 언젠가는 생길 것이다. 차마 부끄러워서 우리 스스로 이름을 짓지 못할 뿐이다.


신인류는 기록하는 인간이다. 지식뿐만 아니라 정보와 기억을 기록한다. 지식은 아직 책에 기록하지만, 정보와 기억은 매체가 달라졌다. 인스타그램, 블로그, 페이스북, 유튜브가 새로운 매체이다. 신인류는 쉬지 않고 사진 찍고 저장소에 올린다.


신인류는 연결된 채 고립된 인간이다. 잠시도 연결이 끊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항상 혼자이다. 같이 밥을 먹지만 각자 사진 찍고 멀리 있는 이들과 연결되어 있다. 엄청나게 구매하지만, 판매자를 대면하지는 않는다. 판매자는 구매자를 만난 적이 없지만, 그의 취향과 재력을 본인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 신인류는 자기 자신과도 단절된 채 네트워크를 통해 돌고 돌아서 자기 자신과 연결된 셈이다.


휴대폰 하는 사람들, SNS

 

20세기에 태어난 신인류는 죽기 전에 자기 육체가 해체되는 모습을 목격할 것이다. 뼈와 살로 이루어진 팔과 다리 대신 기어와 캠 그리고 전선으로 이뤄진 로봇 팔과 다리를 장착하게 될 것이다. 신인류는 편집의 왕이다. 매일 편집한다. 사진을 수정하고 글을 다듬는다. 마찬가지로 자기 유전자도 편집한다. 자식에게는 편집된 유니크한 유전자를 물려줄 것이다. 하여, 유전자라는 끈으로 마지막까지 연결된 자식과 부모 관계는 고립된다.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될 뿐이다.


나무에서 내려가지 말라는 엄마의 말을 듣지 않았던 아이들 덕분에 우리는 두 발로 서게 되었다. 산불 난 곳에는 절대로 가지 말라는 엄마의 말을 듣지 않은 아이들 덕분에 우리는 불을 사용하게 되었고 엄청나게 큰 뇌를 갖게 되었다. 자꾸 걸어 나가면 벼랑에 떨어질 거라는 선생님의 말을 듣지 않은 청년 덕분에 우리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신인류는 멸망의 길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듣지 말아야 할 것 같다.


그렇다. 우리는 이미 신인류의 길에 들어섰다. 그런데 여기에도 임계점이 있을 것이다. 그 임계점이란 램프 뚜껑이 열리는 순간이다. 지니는 아직 램프 속에 갇혀 있다. 램프에서 한 번 나온 지니는 결코 스스로 돌아 들어가지 않는다. 지니를 램프에서 불러내기 전에 우리는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그나저나 아직도 궁금하다. 300년 후에 사람들은 21세기 초반에 신인류라고 스스로 불렀던 우리들을 뭐라고 부를까?


인문360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화체육관광부 신인류 이정모 임계점 현대인 20세기 21세기 호모사피엔스
필자 이정모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 관장으로 일하는 과학 커뮤니케이터.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 과학문화위원회 회원이다. 강연과 저술 그리고 방송을 통해 전문적인 과학자와 시민 사이를 연결하는 일을 한다. 과학은 ‘의심에 대한 잠정적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 『공생 멸종 진화』, 『달력과 권력』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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