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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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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글자 그 너머에 있는 가치
디자인

한글, 글자 그 너머에 있는 가치

한글의 제자원리와 그 마음을 생각하다

by 이용제 / 2018.10.22


문자, 한글


문자는 보통 자연 발생한 듯 나타나서 발명 시기를 명확하게 규정하기 어렵다. 수천 년 또는 수백 년 동안 사회 구성원들은 고유한 생활과 문화에 맞춰 자신들의 문자 체계를 정교하게 다듬었고, 일상적인 필기도구와 습관을 반영한 미감을 글자체에 반영하여 진화시켰다. 문자야말로 인간이 만들어 낸 정신적, 물질적 창작 중에서 인류가 오랜 시간 갈고 닦은 훌륭한 창작품이 아닐까. 그렇기에 모든 문자는 아름다울 수밖에 없지 않을까.


문자를 연구하는 국내외 여러 학자가 유독 한글이 우수하다고 말한다. 그중에서 한글이 소리의 질서를 찾아내 그에 맞춰 글자 형태의 질서 체계를 세웠고, 복잡할 듯한 이 둘의 관계를 간단명료하게 표현한 것을 놀라워한다. 언어를 적는 것이 문자의 기능이라면, 소리를 적는 데 탁월한 한글은 뛰어난 글자다.


‘자연의 질서에서 경이로움을 느끼듯, 자연의 질서를 모방한 한글에서도 경이로움을 느낀다.’


지구상에 있는 여러 문자는 모두 제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그중 직선과 원을 이리저리 더하고 조합해서 만든 한글의 모습은 기하학적이라고 평가받는다. 한글 창제 뒤 사람들이 붓으로 쓰고 칼로 새기면서 기하학적이었던 처음 생김새가 직선은 적당히 휜 곡선으로 바뀌고, 수직 수평의 선은 기울어졌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이 그렇다. 한글의 조형적인 멋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누구는 기하학적인 멋을 가진 한글이 좋다 하고, 누구는 글씨의 유려한 멋을 가진 한글이 좋다 한다. 


한글 꽃피다



창작의 소재가 되는 한글


문자는 대부분 사물이나 자연의 모습을 응축하여 시각화한 결과이다. 추상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한글 또한 비슷하다. 조금 차이가 있다면, 많은 문자가 사물이나 산과 강과 같은 구체적인 자연의 형상을 추상화했다면, 한글은 우주와 자연의 질서처럼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개념을 추상화했다. 모방 대상의 규모와 깊이가 다르다. 마치 궁극의 추상화를 보는 듯하다.


‘우주와 자연을 소재로 디자인한 한글은 간소한 조형 요소를 이용하여 간결한 질서 체계로 만들었다.’


한글을 소재로 디자인하다 보면 장단점을 느낀다. 한글의 구성 요소가 너무나 단순해서 조금이라도 생략하면 더는 문자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과감한 변형과 삭제를 하기 어렵다. 반면 단순한 글자 형태는 서로 이어 붙여도 이질감이 없다. 부분과 전체가 마치 하나인 듯하다. 또한 반복하며 확장하는 한글 제자 원리를 조형 질서로 이용하면 조형을 무한히 확장할 수 있다. 이러한 확장성은 한글이 가진 심미성의 특질을 잘 보여준다.


최근 2018 평창 올림픽 로고는 한글을 소재로 디자인했다. 상당히 잘 표현한 디자인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추상의 끝을 보여주는 한글은 그 자체로 심볼의 기능을 할 수 있으며, 그중에서도 ‘ㅍ, ㅊ’은 완결된 조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ㅍ, ㅊ’을 기하학적으로 표현한 것 역시 올림픽에서 느낄 수 있는 젊음을 잘 반영했다고 생각한다.


평창 로고

▲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공식 엠블럼 ⓒ2018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


한글은 다른 문자에 비해 비교적 젊은 문자다. 다시 말하면 아직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앞으로 많은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 특히 조형적인 면이 그렇다.



예술, 디자인 속의 한글


일상에서 한글을 소재로 창작하는 일이 전보다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조금 아쉬운 점은 주로 궁서체, 명조체, 훈민정음체 등 제한된 몇 개의 글꼴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한글로 디자인하려는 많은 창작자들이 마음에 쏙 드는 한글 글꼴을 찾기 힘들다면서도 새로운 글꼴은 낯설어서 사용을 주저한다. 안타깝게도 쓸 수 있는 양질의 한글 글꼴도 많지 않다. 한글 디자이너들이 새로운 글꼴을 개발하기보다는 잘 팔리는 글꼴을 빠르게 베껴서 조악한 품질의 한글 폰트를 시장에 내놓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결국 창작자들은 몇 되지 않는 양질의 한글 폰트나 이미 익숙한 한글 글꼴만 선택하게 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글 디자이너가 다양한 양질의 글자꼴을 제작하고, 한글로 디자인하는 많은 창작자들이 한글의 조형적 특질을 이해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여 활용한 예시를 보여줘야 한다. 한글을 디자인하는 사람, 한글로 디자인하는 사람 모두 두려움과 걱정을 넘어서는 시도가 필요하다.


다행히도 최근 몇 년 사이에 젊은 한글 디자이너가 보이고, 그들이 디자인한 한글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아직 우리가 한글로 다양한 조형 실험을 하지 못해서 새로운 시도가 두렵긴 하지만, 앞으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한글 꼴을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또 그 한글 꼴을 이용한 새로운 표현이 나타날 것이다.



한글의 디자인적 가치


아무리 소소한 디자인을 할지라도 창작의 순간마다 깊은 고민에 빠진다. 그리고 창작을 반복하면 할수록 이 고민은 내 몸을 갉아 먹는 듯해서 육체와 정신이 메말라 가곤 한다.


취미로 한글을 디자인하던 대학 시절, 한글은 나에게 디자인 소재를 넘어 주제였다. 생활 주변에서 흥미롭게 보이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소재로 한글을 그렸다. 그렇게 대학을 다니면서 80여 가지의 한글 꼴을 그렸다. 그리고 난 뒤에 더는 한글을 디자인하는 일이 힘들어졌다. 디자인하게 만드는 자극이 없어져 무기력했다.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건 ‘훈민정음’에 적혀있는 한글 제자원리 덕분이었다. 자음 글자를 만드는 가획 원리와 모음 글자를 만드는 조합 원리, 그리고 자음 글자와 모음 글자를 모아쓰는 합자 원리가 무한한 조형 요소를 생산할 수 있는 방법론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가획, 조합 원리

▲ 자음 가획 원리와 모음 조합 원리 


한국어라는 음성과 직선과 원이라는 재료를 한글 제자원리 시스템에 넣으면 한글이 만들어진다.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이러한 제자원리를 다른 창작 영역에서 창작 시스템으로 활용한다면 흥미로운 변화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직선과 원을 재료로 하지 않고 다른 조형 요소를 대입한다면, 지금의 한글과 다른 한글 글꼴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한글의 디자인적 가치는 한글 글꼴에서 발견할 때보다, 한글 제자원리에서 발견할 때 더 흥미롭다.


‘한글 제자원리의 핵심은 ‘질서’고, 이 질서는 무한한 확장을 가능하게 한다.’



한글, 글자 그 너머의 가치를 보자


한글은 소리를 적는 문자로서 탁월하고, 우리는 한글을 통해서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다. 한글로 우리 일상의 시각문화를 더 풍요롭게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나아가 한글 제자원리에 대한 이해가 넓어져서, 여러 창작 분야에서 한글 제자원리를 활용하는 날을 상상해 본다.


한글을 통해서 우리가 더 나아질 수 있는 또 다른 가치가 있다. 바로 한글에 배어 있는 선함이다. 디자이너로서 늘 한글과 같은 창작은 천재라서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글은 인정과 배려에 의한 결과물이었다. 훈민정음해례 첫 부분에 나와 있듯이, 한글은 백성을 가엾이 여기는 선한 마음으로 만들어졌다. 한글을 만든 사람의 마음이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었기에,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도록 최대한 간결하게 만들었고, 백성이 변화하는 사회에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계속 확장할 수 있는 문자 체계를 고안했을 것이다. 


훈민정음

 

‘우리가 한글과 같은 훌륭한 창작품을 다시 만들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한글을 만들던 태도와 마음은 따를 수 있지 않을까.’


창작자는 사람에 대한 인정과 배려를 갖춰야 하지 않을까. 특히 사람의 일상을 만들어가는 디자이너는.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이 인정을 가지고 배려하며 산다면 우리 사회가 지금보다 더 따듯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잘 만들어진 한글이라는 큰 문화유산을 받았다. 우리는 쉽고 편한 문자를 이용하는 데에서 멈추지 말고, 한글이 ‘훌륭하다’고 과거의 유산을 자랑만 하지 말고, 이 탁월한 문자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마음과 태도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우리는 앞으로도 한글만큼 자랑스러운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한글을 쓰는 우리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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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용제
이용제
한글디자이너. 계원예술대학교 교수. 타이포그라피 잡지 <히읗>과 <모임꼴> 발행인. 세로쓰기 전용 활자 ‘꽃길’과 ‘바람’, ‘잉크를 아끼는 글자’ 등 디자인. 기업 전용 서체 <아리따> 개발 참여. <한글+한글디자인+디자이너> 등을 저술, <한글디자인교과서>와 <활자흔적> 등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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