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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하나의 테마, 360도 관점

[관계]풀과 애벌레와 말벌의 사정
과학기술

[관계]풀과 애벌레와 말벌의 사정

경쟁과 동맹의 관계

by 박재용 / 2018.02.19

 

필요에 의한 이용 관계
어느 저녁 어스름 밤나방과에 속하는 나방 하나가 조심스레 그늘진 담뱃잎에 내려앉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잎 뒷면에 지름 0.5mm 정도의 알 몇백 개를 바쁘게 낳고는 서둘러 떠난다. 담뱃잎이 만든 그늘에서 알들은 부화를 준비하며 며칠을 보낸다. 하얗던 알들이 점점 회색으로 변하면 이제 깨어날 준비가 끝난 상태다. 그리고 며칠 뒤 알에서 애벌레가 나온다. 머리 넓이는 0.2mm 정도고 길이는 1.4mm밖에 되지 않는다. 이 작은 녀석들은 알에서 나오자마자 열심히 서로 다른 잎으로 자리를 옮긴다. 모여 있으면 천적들에게 먹히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제 녀석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열심히 먹는 것뿐이다. 번데기가 되기 위해선 대여섯 번의 탈피를 해야 한다. 그동안 머리 넓이도 15배, 몸 길이도 25배는 커져야 하기 때문이다. 녀석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담뱃잎을 갉아 먹는다. 오로지 먹는 일 이외에는 관심이 없다.

아직 번데기가 되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하는 어느 날, 담뱃잎을 갉아 먹는 애벌레 뒤편에 은밀한 날갯짓이 일어난다. 붉은꼬리말벌이다. 꽁무니에서 삐져나온 긴 산란관 끝, 날카로운 끝부분이 햇빛에 반짝이지만 정작 애벌레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한참 동안 애벌레를 바라보던 말벌은 조용히 뒤로 다가간다.

마침내 말벌이 애벌레 등 바로 위까지 접근했다. 찰나의 순간 산란관 끝이 애벌레의 등을 뚫고 꽂힌다. 0.1초 정도의 순간이 지나자 말벌은 다시 날아오른다. 애벌레는 잠시 몸을 떨었지만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계속 잎을 갉아 먹는다. 일은 이미 끝난 뒤다. 찰나의 순간 애벌레의 몸 안에 말벌 알 수십 개가 자리 잡았다.

며칠 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애벌레는 계속 잎을 갉아먹고 몸을 불린다. 애벌레 몸속 말벌 알은 조용하다. 그러나 이 며칠이 애벌레가 자신의 본능대로 움직일 수 있는 마지막 날들임을 애벌레는 모른다.

 
  • 나방 애벌레 나방 애벌레 ©Whitney Cranshaw

두 애벌레의 공생 아닌 공생
말벌 알이 깨지고 애벌레가 나온다. 애벌레의 몸 안에 또 다른 애벌레들이 꿈틀대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다. 말벌 알 중 아주 일부만 깨어난 것이다. 이들은 재빨리 주변의 살을 갉아먹는다. 그러나 나방 애벌레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말벌의 애벌레는 살을 갉아먹으면서 동시에 통증을 차단하는 물질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먹는 것도 조심스럽다. 결코 나방 애벌레의 생사와 관계된 핵심적인 기관들은 건드리지 않는다.

말벌 애벌레의 선발대는 모두 수컷이다. 이들은 서둘러 성적으로 성숙하여 짝짓기를 할 태세를 갖춘다. 이윽고 나머지 알들이 모두 부화하는데 이들은 모두 암컷이다. 이 암컷들은 자신의 오빠와 짝짓기를 하고 그 정자를 저장한다. 먼저 태어난 수컷 애벌레들은 정자를 넘겨주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모두 마치고 죽는다. 나방 애벌레의 몸 속이라는 한정된 공간은 암컷과 수컷이 모두 살기엔 협소하기 때문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방 애벌레는 그사이에도 부지런히 담뱃잎을 먹어치웠지만 예정되었던 번데기가 되지는 못했다. 대신 그가 만든 영양분은 모두 말벌 애벌레 암컷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고, 이제 말벌 애벌레들이 고치를 틀 차례다. 나방의 애벌레는 담뱃잎의 뒷면에 자리를 잡고 움직임을 멈췄다. 말벌 애벌레가 고치 틀 장소에 고정된 것이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나방 애벌레의 몸 여기저기가 허물어지고 성충이 된 말벌들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담뱃잎 뒤편 말벌이 살았던 나방 애벌레의 몸은 이제야 곰팡이가 하얗게 슬기 시작한다. 곰팡이 안쪽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들이 애벌레의 몸을 분해하고 있다. 말벌 애벌레가 터를 잡던 시기에는 그들이 내놓은 항생제 역할을 하는 물질이 곰팡이와 세균을 막아주고 있던 것이다. 시나브로 애벌레의 형상은 허물어져 먼지가 되고, 포자가 되어 사라진다.

 
  • 식물

풀과 말벌의 동맹
당신이 알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나방 애벌레가 담뱃잎 뒤편에 있다는 걸 어미 말벌은 어찌 알았을까? 기실 어미 말벌 또한 다른 담뱃잎 뒤편의 나방 애벌레 몸 안에서 애벌레로 살았던 과거가 있다. 그리고 어미 말벌의 어미 또한 다른 담뱃잎 뒤편 다른 나방 애벌레 몸 안에서 살았었다. 이들 말벌은 어미에게서 딸로 수백, 수천 세대를 거쳐 기생의 역사를 물려오고 있었다. 그렇게 수천 세대를 거치면서 이들에게는 담뱃잎의 냄새가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다. 어디서나 어미 말벌은 담뱃잎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기생일망정 고향의 냄새다.

밤나방 애벌레가 담뱃잎을 갉아 먹기 시작하면 잎의 속살이 드러난다. 과일을 한입 베어 물면 과일 향이 퍼지듯, 잎의 갈라진 상처에서도 향이 피어오른다. 휘발성 탄소화합물 VOCs라 한다. 예초기가 풀을 난자할 때 풍기는 향도 그러한 것. 이 휘발성 탄소화합물은 대기로 피어오르고, 바람을 따라 숲으로 퍼진다. 그리곤 말벌에게 가닿아 그를 부른다. 밤나방 애벌레가 여기 있다고 신호를 보낸다. 이는 풀의 구조신호기도 하다. 여기 나의 소중한 잎을 갉아먹는 애벌레가 있다는, 나를 구해달라는 신호다. 그래서 갉아 먹는 애벌레의 종류가 다르면, 풀이 피워 올리는 휘발성 탄소화합물의 종류도 다르다. 누가 나를 갉아먹고 있는지, 그의 정체까지 알려주는 것이다.

애벌레의 입장에선 절대로 보고 싶지 않은 천적이지만 풀의 입장에선 말벌이야말로 구원자요, 든든한 동맹군이다. 애벌레의 입장에선 자신을 고자질하는 밀고자이지만 말벌의 입장에선 풀이야말로 자신의 번식을 도와주는 고마운 동지인 셈이다. 풀의 입장에선 자신의 잎을 갉아먹는 무서운 포식자이지만 말벌의 입장에선 애벌레야말로 자식을 키울 고마운 둥지인 셈이다. 그리고 이들 모두가 죽을 때를 기다리며, 그 주검에서 자신의 번식을 이루어낼 때를 기다리는 곰팡이와 세균이 있다.

생태계에선 모두 누군가의 사냥꾼이며 동시에 먹이고, 누군가의 경쟁자이며 동맹군이다.

 

 

 

2월 관계 과학 동맹 공생 애벌레 말벌 생태계 경쟁
필자 박재용
박재용
(과학 커뮤니케이터)과학을 공부하고 쓰고 말한다.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 과학문화위원회 회원이다. 『나의 첫 번째 과학 공부』 『모든 진화는 공진화다』 『멸종 생명진화의 끝과 시작』 『짝짓기 생명진화의 은밀한 기원』 『경계 배제된 생명들의 작은 승리』 등을 썼다. '인문학을 위한 자연과학 강의' '생명진화의 다섯 가지 테마' '과학사 강의'의 강연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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