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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혐오의 언어를 걷어내는 일은 ‘검열’이 아닌 ‘검토’

- 이달의 답변 -

신지영

2022-04-13

인문 쟁점은? 우리 시대가 마주하고 있는 여러 인문학적 과제들을 각 분야 전문가들의 깊은 사색, 허심탄회한 대화 등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더 깊은 고민을 나누고자 만든 코너입니다. 매월 국내 인문 분야 전문가 두 사람이 우리들이 한번쯤 짚어봐야 할 만한 인문적인 질문(고민)을 던지고 여기에 진지한 답변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퇴고 과정에서 행해지는 띄어쓰기나 맞춤법, 혹은 비문 등을 점검하는 일을 두고 ‘검열’이라는 단어가 떠오를까요? 보통 ‘검열’이 아니라 ‘검토’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퇴고의 과정이 더 나은 문장을 만들기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검토’에 들어가는 수고는 기꺼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내 글에 숨어 있는 차별과 혐오의 표현을 덜어내려는 수고를 ‘검토’라고 생각하는지 ‘검열’이라고 생각하는지만 따지면... ...



좋은 질문은 생각의 지평을 넓힙니다. 인문360에서 보내 주신 질문을 읽으며 다시 한번 좋은 질문의 가치와 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질문을 보내 주신 소영현 평론가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이에 답을 적으며 생각을 정리하여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음에 감사함을 표하며 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차별과 혐오의 시대인가?



혐오사회: 장애인 혐오

혐오사회: 장애인 혐오



우선 질문에 답을 하기 전에 먼저 독자들께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과연 지금 대한민국은 차별과 혐오의 말들이 사회를 뒤덮고 있으며 차별과 혐오가 위험 수위로 차오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일견 그런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습니다. 지난 대선 기간 동안은 성차별과 여성 혐오 문제가 선거의 쟁점이 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더니 최근에는 장애 관련 차별과 혐오 문제가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한다면 질문자인 평론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 어느 때보다 대한민국은 차별과 혐오가 위험 수위로 차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뉴스에 사용된 ‘차별’과 ‘혐오’라는 단어의 사용은 과거에 비해 현재 훨씬 더 많이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림 1]은 뉴스 빅데이터 분석 서비스인 빅카인즈(https://www.bigkinds.or.kr/)를 활용하여 얻은 것으로 1990년 1월부터 2021년 3월 사이에 11개 전국 일간지, 5개 방송사 뉴스에서 ‘차별’과 ‘혐오’라는 단어가 월별로 몇 번 사용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림에서 보인 것처럼 두 단어의 사용 빈도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급격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차별’의 사용 빈도가 ‘혐오’의 사용 빈도보다 높다는 점과 ‘혐오’의 사용 빈도가 특히 2015년 이후 눈에 띄게 높아진 점도 확인됩니다.



[그림 1] ‘차별’과 ‘혐오’의 월간 사용 빈도 변화(빅카인즈 검색 결과 정리_1990년 1월부터 2021년 3월, 11개 전국 일간지와 5개 방송사 뉴스)

[그림 1] ‘차별’과 ‘혐오’의 월간 사용 빈도 변화(빅카인즈 검색 결과 정리_1990년 1월부터 2021년 3월, 11개 전국 일간지와 5개 방송사 뉴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과거에 비해 우리 사회의 인권 의식과 평등 의식은 분명히 높아진 것 같은데 차별과 혐오가 왜 유독 지금 이렇게 우리 사회를 가득 메우고 있는지 말입니다. 좀 더 꼼꼼히 따져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사실, 100년 전, 200년 전에는 성차별이나 장애인 차별이 우리 사회의 논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회적 논제가 되지 않았다고 문제가 없었던 것일까요?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회적 논제가 되려면 서로 대립될 수 있는 생각이 서로 대립될 수 있는 크기로 존재해야 합니다. 여성이나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는 그에 대립되는 생각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그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그에 대립을 이루는 압도적인 크기의 생각에 맞설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목소리가 대립을 이루려면 한쪽의 목소리가 다른 한쪽의 목소리를 완전히 가릴 수 없어야 합니다. 즉, 차폐(遮蔽, masking)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할 만큼, 새로운 목소리가 힘을 얻어 기존의 목소리를 뚫고 나올 수 있을 정도의 크기가 되어야 비로소 사회적 논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최근 들어 차별과 혐오가 우리 사회에서 위험 수위로 차오르고 있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차별과 혐오의 생각이 더 커져서라기보다는 반대로 차별과 혐오에 맞서는 목소리가 그만큼 커지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의 진보가 이루어진 덕에 그간 억눌리고 가려졌던 목소리들이 세력을 얻게 되어 기존의 생각과 충돌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차별과 혐오가 위험 수위로 차오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차별과 혐오에 맞서는 새로운 목소리가 힘을 얻어 커지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목소리가 기존의 목소리와 부딪혀 세상에 큰 목소리로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이죠. 우리 사회가 지향하고 있는 방향이 차별과 혐오인 거냐고 말입니다.



퇴출의 대상인가 재현의 대상인가?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이달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함께 찾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질문자의 질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차별과 혐오의 말은 적폐로서 문학에서 퇴출되어야 하는 것일까, 현실의 흔적이자 기록으로서 남겨져야 하는 것일까?”


이 질문을 통해 저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 차별과 혐오의 말이 우리 현실에 존재한다.

2) 그런데 그런 말이 문제라는 인식이 대두되어 힘을 얻고 있다.

3) 질문자는 그 인식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4) 그래서 고민이 된다.

5) 그 말을 사용하자니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고, 그 말을 사용하지 않으려니 존재하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것 같다.


확인한 사실을 기초로 이제는 차근차근 생각을 이어가 볼 차례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1) 우리가 문학에 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2) 그것이 과연 차별과 혐오가 서려 있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인가?

3) 문학의 기능이 단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재현하는 데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질문을 던지기에 앞서 꼭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나는 과연 차별과 혐오가 서려 있다고 지적되고 있는 표현의 문제에 100% 공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나의 답이 ‘그렇다’라면 아마 나는 그런 표현을 굳이 사용하지 않고도 원하는 바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답이 ‘그렇지 않다’라면 나에게 먼저 다가오는 것은 나의 ‘불편함’일 것입니다. 기존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내게는 아주 편한 일입니다. 반면에 다른 표현을 찾아서 대체하거나 새로 만들어 사용하는 것은 모두 불편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우리 마음속에서 줄다리기가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존의 표현을 사용하며 얻게 되는 불편한 마음과 새로운 표현을 사용해야 함에서 오는 불편함이 벌이는 줄다리기 말입니다.


이처럼 문제의 핵심은 바로 내가 과연 차별과 혐오가 서려 있다는 지적되고 있는 표현의 문제에 100% 공감을 하는가 아닌가에 있었던 것입니다.



‘검열’인가 ‘검토’인가?



검열

검열



질문자님이 보내준 글에 있는 “차별과 혐오의 표현을 고르고 배제하는 일을 두고 ‘검열’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는 대목에서 문제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가가 드러나는 듯합니다. 차별과 혐오가 서려 있다고 지적받고 있는 표현에 대해 ‘그 정도는 사용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지 않고서야, 그 말을 거르는 일에 ‘검열’이라는 이름표를 붙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글을 쓴 후에 퇴고 과정에서 행해지는 띄어쓰기나 맞춤법, 혹은 비문 등을 점검하는 일을 두고 ‘검열’이라는 단어가 떠오를까요? 우리는 그 과정을 보통 ‘검열’이 아니라 ‘검토’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퇴고의 과정이 더 나은 문장을 만들기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검토’에 들어가는 수고는 기꺼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내 글에 숨어 있는 차별과 혐오의 표현을 덜어내려는 수고를 ‘검토’라고 생각하는지 ‘검열’이라고 생각하는지만 따지면 됩니다. 그럼 자연스럽게 그 수고로움을 감당할 것인지 아닌지가 명확해집니다.


결국, 차별과 혐오가 서린 표현을 골라내는 일을 두고 ‘검토’가 아니라 ‘검열’이라는 단어가 떠오른 이유는 그 표현을 골라내는 일이 썩 마음에 내키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일이 썩 내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두 가지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는 골라내야 한다는 생각에 100% 동감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 한구석에 ‘그게 왜 차별이야? 그게 왜 혐오야? 너무 지나친 거 아냐?’ 하는 생각이 아직은 조금 남아있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남아있던 그 생각이 마음속 한편에 숨어 있다가 수고로움을 만나면서 저항감으로 훅 올라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동의가 100% 된다고 하더라도 익숙한 것을 바꿔야 하는 주체가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익숙한 것을 쓰면 쉬운데 입에 아직 오르지 않는 말을 써야 하고 고민도 해야 하니 ‘귀찮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엄밀히 말하면 ‘귀찮다’는 생각이 드는 것 자체도 어쩌면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내게 아직은 절실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에 절실히 동의한다면, 그리고 그 표현이 담고 있는 차별과 혐오가 그 단어를 사용할 때마다 절절히 내게 느껴진다면 나도 모르게 나오는 습관적인 사용에도 스스로 놀라고 소름이 돋을 테니 말입니다. 그럴진대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검열’이라는 표현이 떠오를 수 있겠습니까?


이제 생각이 좀 명확해지는 것 같습니다. 차별과 혐오의 표현을 골라내는 일에 대해 ‘검열’이라는 단어가 내 마음에서 훅 올라오는 이유는 전적으로 내가 아직은 그러한 과정에 대해 온전한 동의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핵심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기분’이 아니라 그런 기분이 왜 드는가에 대한 철저한 성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언어: 개인이 바꿔야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바꿀 수 없는 것



‘차별과 혐오의 생각 걷어내기에 동의하시나요?’ O(네) X(아니오)

‘차별과 혐오의 생각 걷어내기’ 동의한다VS동의하지 않는다



그럼 이제 물어야 합니다. 우리의 언어에서 차별과 혐오의 생각들을 걷어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말입니다. 단순화하면 가능한 답은 두 가지입니다. 동의한다는 답과 동의하지 않는다는 답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동의하지 않는다’는 답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서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만약 동의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면 애초에 이런 질문을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한 가지 가능성을 버리고 나니 이제 우리에게 남은 답은 한 가지, 즉 ‘동의한다’뿐입니다. 즉,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중에 차별과 혐오의 생각이 서려 있는 표현이 있다면 그 표현을 걷어내는 방향으로 언어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언어가 가진 특징에 있습니다. 언어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입니다. 내가 혼자 바꾼다고 혹은 몇몇 사람들이 바꾼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바꾸려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합니다. 언어 사용자들이 함께 공유하고 있는 약속을 바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언어는 개인이 바꿔야 바뀌지만 개인적으로 바꾼다고 해서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래서는 우리는 언어에서 그 사회의 합의된 생각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언어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일컬어지는 이유입니다.


또, 우리는 언어를 흔히 생각을 담는 도구라고 합니다.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언어가 사용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더 나아지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면 앞선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도구인 언어 중에 우리의 바뀐 생각을 담지 못하는 낡은 언어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언어라는 도구는 우리만 사용하고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 세대에게 물려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수고롭다고 바꾸지 않으면 그 수고로움까지 고스란히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게 됩니다. 나의 수고로움을 피하기 위해 바꿔야 할 것을 바꾸지 않는다면 다음 세대에게 그 수고로움이 전가됩니다.


다음 세대에게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고 싶다면, 또 우리가 이룬 생각의 진보를 이어갈 수 있게 해 주고 싶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불편함을 주는 도구를 고치고 새로 만드는 수고를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언어에서 차별과 혐오를 걷어내는 일은 이제 ‘검열’이 아니라 ‘검토’가 되어야 합니다. 비록 그 수고로움이 우리의 몫이 되더라도 말입니다.



4월 [이달의 답변] 차별과 혐오의 언어를 걷어내는 일은 ‘검열’이 아닌 ‘검토’

- 지난 글: 4월 [이달의 질문] 문학과 예술은 차별과 혐오의 말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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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영 고려대학교 교수 사진
신지영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흥미진진한 언어의 세계를 탐험하는 언어 탐험가이자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옥스퍼드사전 자문위원, 대검찰청 과학수사 자문위원 등을 맡고 있다. 말소리 연구로 시작하여 언어의 다양한 측면을 연구 중이며, 방송과 강연 등 다양한 사회 활동을 통해 연구 결과물을 시민 사회로 확산하고자 노력 중이다. 대중서로는 『언어의 높이뛰기』(2021), 『언어의 줄다리기』(2018), 『한국어 문법 여행』(2015) 등을, 전공서로는 『한국어의 말소리』 (2011, 2014), 『말소리의 이해』 (2000, 2014)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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