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간 문화 매개자는 실감 콘텐츠를 경험하는 ‘객체’와 그것을 기획하는 ‘주체’ 사이에서 ‘실감 콘텐츠’가 나의 삶에 어떤 발전과 에너지가 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그리고 내가 나의 삶에서 실감 콘텐츠를 통한 변화를 모색하고, 시도하는 것은 결국 현실의 삶을 더욱 의미 있게 살아가기 위한 많은 방법들 중에 하나일 뿐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기술의 진보를 논하기 이전에…….
〈오징어 게임〉 포스터(출처: 나무위키)
오늘날 K 컬처의 성공 요인 중 하나는 국내외를 구분하는 문화 국경선을 만들지 않았던 우리 창작자와 개발자들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예측되지 않았던 시장에서 요구하는 지점에 부합한 콘텐츠를 만들어내기 위해 헌신했다. 특히 세계화를 위해 우리 것을 잃지 않으면서도 현지 고객들의 취향을 담아내는 글로컬리제이션(glocalization)을 만들어왔다. 우리 창작자들이 펼친 창의적 노력은 뚜렷한 성과를 이뤄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2020년 한국의 문화 콘텐츠 산업 수출액은 약 12조 원이며, 이는 전년보다 8.2% 증가한 수치이다. 이 수치가 놀라운 점은 K 컬처가 우리나라의 주요 수출품목 내에서 섬유에 이은 12번째 품목이 되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소비자들이 특정 문화 상품에 대해 매력을 느끼는 경험은 해당 상품에 대한 지속적인 수요 및 가치 창출로 이어진다. 이 점에서 보면 K 컬처의 수출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확장되는 현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K 컬처가 개척할 신대륙 ‘가상세계’
메타버스 가상세계
이런 가운데, K 컬처는 새로운 공간을 개척하는 초입에 도달해있다. 바로, 메타버스로 총칭하여 지칭되는 가상세계가 K 컬처가 개척할 신대륙이다. 이는 시대의 사명과도 같다. 전 세계가 메타버스라는 빅뱅이 임박하고 있음을 지켜보고 있고, 구글과 애플,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글로벌 IT 기업들은 이 메타버스의 기준을 선점하기 위해 사활을 걸고 있다. 물론, 가상세계가 현실에 사는 우리에게 미칠 영향력은 아직 속단하기 어렵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가상세계는 완전한 상태를 구현한 것이 아닌, 발전 과정에 있는 일시적인 경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만, 가상세계에서 K 컬처의 확장성은 특정 상황에 강한 실제감을 입히는 증강현실 세계의 구축 확장, 소셜 미디어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에 초점을 둔 라이프 로깅(life logging. 개인들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들을 온라인으로 수시로 기록하는 일)의 확장, 아이돌 팬카페의 효용과 확장에 초점을 둔 거울 세계의 확장, 시간과 공간에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여 현실과 다른 아바타 공간을 현실 경험자가 창조하는 가상적 공간 세계의 확장을 그 목표로 한다. 따라서 이러한 확장을 위해서는 가상세계 이야기 설계의 경험을 통해 가상세계의 완전한 가치를 도출해 내야 한다. 이는 스토리 전개 방식의 변화가 요구되고, 이를 실행할 새로운 작가가 필요하다는 점을 의미한다. 바로 가상세계의 K 컬처를 성공시키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작가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3막 이론(사건의 시작, 갈등 과정, 해결)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극작법에서는 특별한 시공간 내에서 특별한 사건을 해결하는 특별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했다. 이 주인공은 관객이라는 관찰자와의 동질화 현상을 통해 이야기를 이끌어갔고, 전통적인 극작법에서는 이를 이야기의 3요소로 칭했다. 이야기의 3요소는 결국 관찰자인 내가 주인공처럼 느끼기는 하지만, 결코 내가 주인공은 아니라는 뜻이다.
‘경험자 중심 스토리’, ‘실감 콘텐츠’ 설계할 전문작가
반면, 가상세계에선 경험하는 내가 주인공이다. 가상공간에 입장한 나는 그곳에서 능동적으로 특별한 경험을 만들어간다. 물론, 경험자의 교체와 변화를 통해 이야기의 진행이 매번 달라질 수도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바로 가상세계에서 추상적인 사물이나 개념을 구체적인 사물로 나타내는 표상(representation)이 변화되었고, 이를 위해서는 경험자 중심으로 이야기를 설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를 표상 처리 방식의 실감형 변화라고 한다.
실감형 변화를 담아낼 실감 콘텐츠는 정보통신기술(ICT)을 기반으로 인간의 오감을 극대화하여 실제와 유사한 경험을 제공하는 미디어 기반의 몰입형(immersive) 콘텐츠로 AR(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VR(가상현실/Virtual Reality), XR(확장 현실/Extended Reality)을 말한다. 이 콘텐츠들은 2차원의 기존 콘텐츠가 가진 한계에서 벗어나 시야, 각도, 형태 등을 극대화한 3차원처럼 구현된다. 이때, 이 콘텐츠들은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시각적 혼동을 이용하여 경험자를 자극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방법이 가상세계 산업을 확장하는데 어려움이 된다. 바로 기존의 콘텐츠와는 스토리 표현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상세계라는 새로운 공간에 K 컬처가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이를 다룰 전문작가의 양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현재 VR 영화의 경우, 필요한 시나리오는 과거부터 영화 시나리오를 써왔던 작가 또는 감독이 쓰고 있으며, 360도 카메라로 촬영하는 360도 콘텐츠도 다를 바 없다. 전시 콘텐츠의 경우, 콘텐츠의 스토리는 기존의 구성작가가 구성하고 있고, 최첨단의 버추얼 스튜디오를 활용한 XR 촬영에서도 스토리 창작 과정은 과거의 영화를 만드는 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필자가 보기에는 기존형 작가들이 가상공간에서 K 컬처를 이끌어 낼 실감 구현 작가로 활동하게 되면, 가상세계의 발전을 하드웨어적인 기술 발전을 활용해 표현하면 된다는 정도로 협소하게 바라보고, 실감형 콘텐츠의 취지나 내용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 듯하다.
기존형 작가의 실감 콘텐츠 스토리 창작에서 가장 큰 문제는 3차원적 깊이를 다룰 콘텐츠를 만들기 위한 영상 언어의 표현이 빈약하다는 것이다. 가상세계의 콘텐츠는 보통 벡터(vector)라는 방향과 모든 이미지의 단층이 선명한 초점 심도(deep focus), 공간과 입체를 특정한 순간에 특정한 위치에서 보이는 대로 묘사하는 지각적 표현법인 원근감(perspective)의 처리를 드라마틱 하게 구현할 수 있어야 하기에 심오한 표현이 요구된다. 그중, 벡터는 방향이 가진 힘이 다르다는 점 때문에 중요하다. 예를 들어 물방울이 한 지점으로 모이는 3차원 영상이 있다고 할 때, 이것은 방향의 집중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실감 콘텐츠 작가는 물방울이 어떤 지점에 어떤 방식으로 집중되는가에 대해 직관적인 표현을 해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첨단 기술로 정확하게 구현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세찬 불길이 솟구치는 영상이 있다고 하면, 이는 확산되는 힘이 매우 강한 영상이다. 이때 방향은 아래에서 위로 향하며, 작가는 불길이 가진 벡터(힘)을 제대로 표현해야, 그 뜨거움이 경험자에게 시각적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참고 그림 (이미지 출처: 필자제공)
위의 그림에서 z축(z-axis)은 수평, 수직의 축인 x축(x-axis)와 y축(y-axis)보다 심도와 원근법이 개입된 방향성을 만들어낸다. 실감형 콘텐츠 작가는 이러한 z축을 다루는 표현에 능숙하고, 직관적이어야 한다. 그러할 때, 가상세계에 어울리는 수준의 콘텐츠가 구현될 수 있다.
‘시공간 문화 매개자’라는 새로운 작가의 탄생
가상세계의 작가는 결국, 문화매개자이다. 문화매개자는 작가와 프로듀서의 역할을 종합적으로 수행하는 역할자일 것이다. 좀 더 자세하게 지칭한다면, 현실과 가상을 이어주는 ‘시공간 문화 매개자’가 바로 실감을 구현할 작가의 역할을 할 것으로 본다. 게임엔진에 속하는 언리얼(에픽게임즈에서 개발한 3차원 게임엔진) 또는 유니티(인터랙티브 콘텐츠 제작을 위한 통합 제작 도구)를 능숙하게 다루면서도 스토리를 짜는 작가의 영역까지 수행하는 역할자라고 하면 보다 쉽게 이해될 것이다. 과거의 서사가 작가에 의한 이야기 창조였다면, 실감 콘텐츠는 시공간 문화 매개자에 의한 이야기 창조라고 할 수 있다.
시공간 문화 매개자는 UX(User Experience, 사용자 경험), Tech(기술), Business(사업)를 모두 아우르는 PM(Production Manager) 역할과 집단 제작 시스템에서의 콘텐츠 결정, 제작, 협업에 필수적인 설계도 작성에까지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때 설계도는 결국 스토리이며, 실감 콘텐츠는 수용자의 경험을 통해 스토리텔링화된다. 물론, 실감 콘텐츠의 이야기 설계는 콘텐츠의 이야기 설계를 기초로 하고 있다. 그것에 경험의 구성요소인 ‘오감’을 융합한 것이 실감 콘텐츠다. 따라서 실감 콘텐츠 스토리를 기획할 시공간 문화 매개자는 콘텐츠의 이야기 설계에 대한 기획과 연구를 먼저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실감 콘텐츠에서도 수용자 혹은 소비자로 하여금 신체와 정신을 몰입하도록 하는 것이 콘텐츠가 추구하는 궁극의 목표이고, 이때의 몰입은 실감 콘텐츠에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오히려 실감 콘텐츠는 수용자가 몰입에 들어가기까지의 도킹(docking) 시간과 몰입 상태에서 콘텐츠가 요구하는 방식에 반응하는 것 등의 새로움이 있기에 이 부분을 더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
진정한 실감 콘텐츠의 목표가 ‘현상’을 뛰어넘은 이야기를 만드는 데 있다면, 시공간 문화 매개자는 수용자의 실감 경험이 곧 콘텐츠이며, 새로운 위치 관점을 만들어 낼 가상세계를 구현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기술진보 보다 중요한 건 삶의 활력소 되느냐 여부
이야기의 주체
시공간 문화 매개자는 실감 콘텐츠를 경험하는 ‘객체’와 그것을 기획하는 ‘주체’ 사이에서 ‘실감 콘텐츠’가 나의 삶에 어떤 발전과 에너지가 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그리고 내가 나의 삶에서 실감 콘텐츠를 통한 변화를 모색하고, 시도하는 것은 결국 현실의 삶을 더욱 의미 있게 살아가기 위한 많은 방법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기술의 진보를 논하기 이전에 실감 콘텐츠가 현실의 내가 겪는 결핍을 해결하는 촉매의 수단이 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결국 가상세계에서 작가의 역할을 수행할 시공간 문화 매개자는 실감 콘텐츠라는 콘텐츠에 담을 영상을 기획하는 스토리 기획이 이중의 기획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실감 콘텐츠를 기획하는 것(공간과 기술)과 실감 콘텐츠 내의 영상 기획(스토리-내용) 말이다. 이것에 경험자의 몰입이 이뤄질 때, 진정한 가상세계의 스토리텔링이 완성되는 것이다.
시공간 문화 매개자는 현재의 실감 콘텐츠가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을 살아가기 위한 어떠한 동력으로 작용하는가에 그 목표를 두어야 한다. 우리는 실감 콘텐츠에 대해 말할 때, 첨단의 기술만 주목하면 안 된다. 우리에게 존재하는 현실의 긍정적인 변화와 발전은 첨단의 기술 속에 담아내야 하는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스토리’가 없는 상태에서 ‘스토리텔링’은 첨단 기술에만 집착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스토리텔링’은 순간적으로는 놀라움을 이끌어내지만, 지속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눈부시게 변하는 첨단의 실감 콘텐츠가 오래 지속되기 위해서는 ‘스토리’에 주목하라. 스토리텔링이 아닌, 스토리! 그것이 시공간 문화 매개자가 만드는 가상세계이며 이 안에서 펼쳐지는 K 컬처를 이끄는 주인공이다.
시나리오 작가, 감독
추계예술대학교 대학원 영상 시나리오 석사 졸업. 상명대학교 글로벌콘텐츠학 박사 수료. 현재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영화 <아이 캔 스피크> <난폭한 기록> <그녀를 모르면 간첩> <두사부일체> 등에 각본, 각색, 연출 등으로 참여.한국콘텐츠진흥원, 한국저작권위원회, 한국국학진흥원, 영화진흥위원회, 경북문화콘텐츠 진흥원 등에서 각종 자문, 심사, 강의 등을 해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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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세계’,‘실감 콘텐츠’ 시대… 그럼에도 기술보다 스토리!
- K컬처로 인문하기 -
하원준
2022-03-22
시공간 문화 매개자는 실감 콘텐츠를 경험하는 ‘객체’와 그것을 기획하는 ‘주체’ 사이에서 ‘실감 콘텐츠’가 나의 삶에 어떤 발전과 에너지가 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그리고 내가 나의 삶에서 실감 콘텐츠를 통한 변화를 모색하고, 시도하는 것은 결국 현실의 삶을 더욱 의미 있게 살아가기 위한 많은 방법들 중에 하나일 뿐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기술의 진보를 논하기 이전에…….
〈오징어 게임〉 포스터(출처: 나무위키)
오늘날 K 컬처의 성공 요인 중 하나는 국내외를 구분하는 문화 국경선을 만들지 않았던 우리 창작자와 개발자들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예측되지 않았던 시장에서 요구하는 지점에 부합한 콘텐츠를 만들어내기 위해 헌신했다. 특히 세계화를 위해 우리 것을 잃지 않으면서도 현지 고객들의 취향을 담아내는 글로컬리제이션(glocalization)을 만들어왔다. 우리 창작자들이 펼친 창의적 노력은 뚜렷한 성과를 이뤄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2020년 한국의 문화 콘텐츠 산업 수출액은 약 12조 원이며, 이는 전년보다 8.2% 증가한 수치이다. 이 수치가 놀라운 점은 K 컬처가 우리나라의 주요 수출품목 내에서 섬유에 이은 12번째 품목이 되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소비자들이 특정 문화 상품에 대해 매력을 느끼는 경험은 해당 상품에 대한 지속적인 수요 및 가치 창출로 이어진다. 이 점에서 보면 K 컬처의 수출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확장되는 현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K 컬처가 개척할 신대륙 ‘가상세계’
메타버스 가상세계
이런 가운데, K 컬처는 새로운 공간을 개척하는 초입에 도달해있다. 바로, 메타버스로 총칭하여 지칭되는 가상세계가 K 컬처가 개척할 신대륙이다. 이는 시대의 사명과도 같다. 전 세계가 메타버스라는 빅뱅이 임박하고 있음을 지켜보고 있고, 구글과 애플,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글로벌 IT 기업들은 이 메타버스의 기준을 선점하기 위해 사활을 걸고 있다. 물론, 가상세계가 현실에 사는 우리에게 미칠 영향력은 아직 속단하기 어렵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가상세계는 완전한 상태를 구현한 것이 아닌, 발전 과정에 있는 일시적인 경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만, 가상세계에서 K 컬처의 확장성은 특정 상황에 강한 실제감을 입히는 증강현실 세계의 구축 확장, 소셜 미디어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에 초점을 둔 라이프 로깅(life logging. 개인들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들을 온라인으로 수시로 기록하는 일)의 확장, 아이돌 팬카페의 효용과 확장에 초점을 둔 거울 세계의 확장, 시간과 공간에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여 현실과 다른 아바타 공간을 현실 경험자가 창조하는 가상적 공간 세계의 확장을 그 목표로 한다. 따라서 이러한 확장을 위해서는 가상세계 이야기 설계의 경험을 통해 가상세계의 완전한 가치를 도출해 내야 한다. 이는 스토리 전개 방식의 변화가 요구되고, 이를 실행할 새로운 작가가 필요하다는 점을 의미한다. 바로 가상세계의 K 컬처를 성공시키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작가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3막 이론(사건의 시작, 갈등 과정, 해결)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극작법에서는 특별한 시공간 내에서 특별한 사건을 해결하는 특별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했다. 이 주인공은 관객이라는 관찰자와의 동질화 현상을 통해 이야기를 이끌어갔고, 전통적인 극작법에서는 이를 이야기의 3요소로 칭했다. 이야기의 3요소는 결국 관찰자인 내가 주인공처럼 느끼기는 하지만, 결코 내가 주인공은 아니라는 뜻이다.
‘경험자 중심 스토리’, ‘실감 콘텐츠’ 설계할 전문작가
반면, 가상세계에선 경험하는 내가 주인공이다. 가상공간에 입장한 나는 그곳에서 능동적으로 특별한 경험을 만들어간다. 물론, 경험자의 교체와 변화를 통해 이야기의 진행이 매번 달라질 수도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바로 가상세계에서 추상적인 사물이나 개념을 구체적인 사물로 나타내는 표상(representation)이 변화되었고, 이를 위해서는 경험자 중심으로 이야기를 설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를 표상 처리 방식의 실감형 변화라고 한다.
실감형 변화를 담아낼 실감 콘텐츠는 정보통신기술(ICT)을 기반으로 인간의 오감을 극대화하여 실제와 유사한 경험을 제공하는 미디어 기반의 몰입형(immersive) 콘텐츠로 AR(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VR(가상현실/Virtual Reality), XR(확장 현실/Extended Reality)을 말한다. 이 콘텐츠들은 2차원의 기존 콘텐츠가 가진 한계에서 벗어나 시야, 각도, 형태 등을 극대화한 3차원처럼 구현된다. 이때, 이 콘텐츠들은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시각적 혼동을 이용하여 경험자를 자극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방법이 가상세계 산업을 확장하는데 어려움이 된다. 바로 기존의 콘텐츠와는 스토리 표현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상세계라는 새로운 공간에 K 컬처가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이를 다룰 전문작가의 양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현재 VR 영화의 경우, 필요한 시나리오는 과거부터 영화 시나리오를 써왔던 작가 또는 감독이 쓰고 있으며, 360도 카메라로 촬영하는 360도 콘텐츠도 다를 바 없다. 전시 콘텐츠의 경우, 콘텐츠의 스토리는 기존의 구성작가가 구성하고 있고, 최첨단의 버추얼 스튜디오를 활용한 XR 촬영에서도 스토리 창작 과정은 과거의 영화를 만드는 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필자가 보기에는 기존형 작가들이 가상공간에서 K 컬처를 이끌어 낼 실감 구현 작가로 활동하게 되면, 가상세계의 발전을 하드웨어적인 기술 발전을 활용해 표현하면 된다는 정도로 협소하게 바라보고, 실감형 콘텐츠의 취지나 내용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 듯하다.
기존형 작가의 실감 콘텐츠 스토리 창작에서 가장 큰 문제는 3차원적 깊이를 다룰 콘텐츠를 만들기 위한 영상 언어의 표현이 빈약하다는 것이다. 가상세계의 콘텐츠는 보통 벡터(vector)라는 방향과 모든 이미지의 단층이 선명한 초점 심도(deep focus), 공간과 입체를 특정한 순간에 특정한 위치에서 보이는 대로 묘사하는 지각적 표현법인 원근감(perspective)의 처리를 드라마틱 하게 구현할 수 있어야 하기에 심오한 표현이 요구된다. 그중, 벡터는 방향이 가진 힘이 다르다는 점 때문에 중요하다. 예를 들어 물방울이 한 지점으로 모이는 3차원 영상이 있다고 할 때, 이것은 방향의 집중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실감 콘텐츠 작가는 물방울이 어떤 지점에 어떤 방식으로 집중되는가에 대해 직관적인 표현을 해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첨단 기술로 정확하게 구현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세찬 불길이 솟구치는 영상이 있다고 하면, 이는 확산되는 힘이 매우 강한 영상이다. 이때 방향은 아래에서 위로 향하며, 작가는 불길이 가진 벡터(힘)을 제대로 표현해야, 그 뜨거움이 경험자에게 시각적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참고 그림 (이미지 출처: 필자제공)
위의 그림에서 z축(z-axis)은 수평, 수직의 축인 x축(x-axis)와 y축(y-axis)보다 심도와 원근법이 개입된 방향성을 만들어낸다. 실감형 콘텐츠 작가는 이러한 z축을 다루는 표현에 능숙하고, 직관적이어야 한다. 그러할 때, 가상세계에 어울리는 수준의 콘텐츠가 구현될 수 있다.
‘시공간 문화 매개자’라는 새로운 작가의 탄생
가상세계의 작가는 결국, 문화매개자이다. 문화매개자는 작가와 프로듀서의 역할을 종합적으로 수행하는 역할자일 것이다. 좀 더 자세하게 지칭한다면, 현실과 가상을 이어주는 ‘시공간 문화 매개자’가 바로 실감을 구현할 작가의 역할을 할 것으로 본다. 게임엔진에 속하는 언리얼(에픽게임즈에서 개발한 3차원 게임엔진) 또는 유니티(인터랙티브 콘텐츠 제작을 위한 통합 제작 도구)를 능숙하게 다루면서도 스토리를 짜는 작가의 영역까지 수행하는 역할자라고 하면 보다 쉽게 이해될 것이다. 과거의 서사가 작가에 의한 이야기 창조였다면, 실감 콘텐츠는 시공간 문화 매개자에 의한 이야기 창조라고 할 수 있다.
시공간 문화 매개자는 UX(User Experience, 사용자 경험), Tech(기술), Business(사업)를 모두 아우르는 PM(Production Manager) 역할과 집단 제작 시스템에서의 콘텐츠 결정, 제작, 협업에 필수적인 설계도 작성에까지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때 설계도는 결국 스토리이며, 실감 콘텐츠는 수용자의 경험을 통해 스토리텔링화된다. 물론, 실감 콘텐츠의 이야기 설계는 콘텐츠의 이야기 설계를 기초로 하고 있다. 그것에 경험의 구성요소인 ‘오감’을 융합한 것이 실감 콘텐츠다. 따라서 실감 콘텐츠 스토리를 기획할 시공간 문화 매개자는 콘텐츠의 이야기 설계에 대한 기획과 연구를 먼저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실감 콘텐츠에서도 수용자 혹은 소비자로 하여금 신체와 정신을 몰입하도록 하는 것이 콘텐츠가 추구하는 궁극의 목표이고, 이때의 몰입은 실감 콘텐츠에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오히려 실감 콘텐츠는 수용자가 몰입에 들어가기까지의 도킹(docking) 시간과 몰입 상태에서 콘텐츠가 요구하는 방식에 반응하는 것 등의 새로움이 있기에 이 부분을 더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
진정한 실감 콘텐츠의 목표가 ‘현상’을 뛰어넘은 이야기를 만드는 데 있다면, 시공간 문화 매개자는 수용자의 실감 경험이 곧 콘텐츠이며, 새로운 위치 관점을 만들어 낼 가상세계를 구현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기술진보 보다 중요한 건 삶의 활력소 되느냐 여부
이야기의 주체
시공간 문화 매개자는 실감 콘텐츠를 경험하는 ‘객체’와 그것을 기획하는 ‘주체’ 사이에서 ‘실감 콘텐츠’가 나의 삶에 어떤 발전과 에너지가 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그리고 내가 나의 삶에서 실감 콘텐츠를 통한 변화를 모색하고, 시도하는 것은 결국 현실의 삶을 더욱 의미 있게 살아가기 위한 많은 방법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기술의 진보를 논하기 이전에 실감 콘텐츠가 현실의 내가 겪는 결핍을 해결하는 촉매의 수단이 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결국 가상세계에서 작가의 역할을 수행할 시공간 문화 매개자는 실감 콘텐츠라는 콘텐츠에 담을 영상을 기획하는 스토리 기획이 이중의 기획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실감 콘텐츠를 기획하는 것(공간과 기술)과 실감 콘텐츠 내의 영상 기획(스토리-내용) 말이다. 이것에 경험자의 몰입이 이뤄질 때, 진정한 가상세계의 스토리텔링이 완성되는 것이다.
시공간 문화 매개자는 현재의 실감 콘텐츠가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을 살아가기 위한 어떠한 동력으로 작용하는가에 그 목표를 두어야 한다. 우리는 실감 콘텐츠에 대해 말할 때, 첨단의 기술만 주목하면 안 된다. 우리에게 존재하는 현실의 긍정적인 변화와 발전은 첨단의 기술 속에 담아내야 하는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스토리’가 없는 상태에서 ‘스토리텔링’은 첨단 기술에만 집착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스토리텔링’은 순간적으로는 놀라움을 이끌어내지만, 지속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눈부시게 변하는 첨단의 실감 콘텐츠가 오래 지속되기 위해서는 ‘스토리’에 주목하라. 스토리텔링이 아닌, 스토리! 그것이 시공간 문화 매개자가 만드는 가상세계이며 이 안에서 펼쳐지는 K 컬처를 이끄는 주인공이다.
[K컬처로 인문하기] ‘가상세계’,‘실감 콘텐츠’ 시대… 그럼에도 기술보다 스토리!
- 지난 글: [K컬처로 인문하기] 콘텐츠 성공 방식의 급변… 한류에도 차례가 왔다
시나리오 작가, 감독
추계예술대학교 대학원 영상 시나리오 석사 졸업. 상명대학교 글로벌콘텐츠학 박사 수료. 현재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영화 <아이 캔 스피크> <난폭한 기록> <그녀를 모르면 간첩> <두사부일체> 등에 각본, 각색, 연출 등으로 참여.한국콘텐츠진흥원, 한국저작권위원회, 한국국학진흥원, 영화진흥위원회, 경북문화콘텐츠 진흥원 등에서 각종 자문, 심사, 강의 등을 해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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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가상세계’,‘실감 콘텐츠’ 시대… 그럼에도 기술보다 스토리!'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잘난 이들의 몰락, 혹은 예측 가능한 실패담
하창수
시간과 기억에 위태롭게 매달린 우리의 자아를 바라보다
안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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