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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처럼 부드러운 그 무엇인가가

- 당신은 어떤‘가요’ -

임솔아

2021-10-26

당신은 어떤‘가요’는? 누구에게나 살면서 기쁘고 즐겁고 놀라고 슬프고 우울했을 때, 혹은 무심코 한 시절 건너가고 있을 때 가슴 한구석 갑자기 훅 들어와 자리 잡았던 노래 한 곡 있었을 터. 인생의 어느 순간에 우연히 만났지만 참 특별했던 자신만의 노래에 얽힌 추억과 이야기를 작가들의 목소리를 통해 들어보고자 한다.


<버스, 정류장> OST를 좋아해 준 친구는 안타깝게도 한 명도 없었다. 앨범을 돌려주며 친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노래가 어땠냐고 물으면, “이상한데?”라고 답했다. 자장가 같다고도 했다. 우리 반에서 인디 가수의 노래를 듣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나는 그 소외감을 홀로 즐겼다. “홀로 버려진 길 위에서 견딜 수 없이 울고 싶”었다는 이아립의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열한 살, 언니 때문에 H.O.T. 노래를 신물 나도록



구형 가세트

구형 카세트



꿈속으로 매일매일 노래가 파고들었다. 그때 나는 열한 살이었다. 어떤 꿈을 꾸었는지는 다 잊어버렸지만, 매일 같은 노래가 꿈을 비집고 들어와 괴로웠던 기억은 선명하다. 언니 때문이었다. 중학교에 입학하여 나보다 한 시간 남짓 일찍 등교 준비를 했던 언니는, 일어나자마자 카세트 플레이어의 재생 버튼부터 눌렀다. 볼륨을 MAX로 설정해둔 채로. 언니는 club H.O.T.의 대전지역 핵심멤버였다.


저녁이면 언니는 팬클럽 공지사항에 떠 있는 광고 스케줄을 확인했다. 공테이프를 비디오에 넣고 텔레비전 광고 시간에 맞춰 녹화 준비를 했다. 밤이면 H.O.T.의 멤버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었다. 왼쪽 카세트에는 DJ의 멘트를 녹음했고, 오른쪽 카세트에는 DJ가 소개한 노래를 녹음했다. 가끔은 이 일에 나를 동참시켰다. 잠시 자리를 비운 언니 대신 나는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노래가 시작되고 끝이 나는 타이밍에 맞춰 왼쪽과 오른쪽 카세트의 녹음 버튼과 정지 버튼을 번갈아 가며 눌렀다. 멘트를 잘라내지 않고 광고 소리가 끼어들지 않도록 깔끔하게 녹음에 성공하면 언니는 엄지를 추켜세우며 최고라고 말했다. 언니는 종종 방바닥에 쪼그려 앉아 그동안 모아온 팬아트나 앨범 재킷 같은 것들을 내게 보여주곤 했다. 지문이 찍히지 않도록 소중하게 한 장 한 장을 넘겼다. 내가 보기에 그 사진들은 영화 〈가위손〉 속 주인공인 에드워드 시저핸즈(조니 뎁 분)를 모방한 것 같았지만, 언니에게 내 생각을 말하지는 않았다. 언니가 소중하게 모아온 것을 내게 보여준다는 사실이 좋아 연신 감탄을 하고 멋지다고 말했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좋아하는 멤버를 거짓으로 골라 말하기도 했다. 언니의 세계에 소속감을 느끼는 게 좋았지만, 언니처럼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릴 수는 없었다.


매일 신물이 나도록 들었지만 나는 그 노래들의 가사를 알지 못한다. 언니는 내가 음치여서 가사도 잘 못 듣는 것 같다고 여겼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H.O.T.가 〈전사의 후예〉를 부르며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방과 후의 시간을 온전히 언니와 함께 보냈다. 내가 학습지를 푸는 것을 언니가 감독하고, 모르는 문제를 언니가 가르쳐주고, 함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을 보거나 보드게임 따위를 했다.



열다섯, 쪽지 건넨 같은 반 아이 통해 알게 된 노래



홈페이지에 접속하는 모습

홈페이지에 접속하는 모습



열다섯 살 때였다. 쉬는 시간에 같은 반 아이가 내 책상에 쪽지를 내려놓았다. 교과서 귀퉁이를 찢은 것이었는데,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웹주소만 적혀 있었다. 한 번도 대화를 나눠본 적 없는 애였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 창을 켜고 주소를 적었다. 엔터를 치자 새빨간 폰트에 보라색 바탕화면이 모니터에 펼쳐졌다. 하이텔과 천리안의 새파란 화면으로부터 벗어난 지 겨우 2년 남짓 지난 때였다. 말끔한 디자인의 포털 사이트에 겨우 익숙해진 시기였고, 네이버 블로그와 싸이월드 서비스가 시작되기 2년 전이었다. 메뉴 버튼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는 데에만 시간이 꽤 걸렸다. 그 아이가 직접 만든 자신의 홈페이지라는 것도 한참 뒤에야 알았다. 홈페이지는 자기 고백으로 가득했다. 특별한 사연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나도 재미있지 않은데 아이들이 웃을 때마다 따라 웃게 된다거나, 빈 가방도 가끔은 자기 몸무게보다 무겁게 느껴진다거나. 마치 나의 하루하루를 그 애가 옮겨 적은 것 같았다.


그 아이와 학교에서는 여전히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학년이 바뀌면서 반도 바뀌었다. 나는 홈페이지에 계속 접속했고 그 아이의 다음 게시물이 올라오길 기다렸다. 그 홈페이지가 나의 비밀 아지트처럼 느껴졌다. 어느 날부턴가 홈페이지에서 BGM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아립의 〈누구도 일러주지 않았네〉였다.



가수 이아립(좌)의 앨범 『버스, 정류장』(우) (이미지 출처: 멜론, 명필름)

가수 이아립(좌)의 앨범 『버스, 정류장』(우) (이미지 출처: 멜론, 명필름)



홀로 버려진 길 위에서, 견딜 수 없이 울고 싶은 이유를
나도 몰래 사랑하는 까닭을, 그 누구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네
왜 사랑은 이렇게 두려운지, 그런데 왜 하늘은 맑고 높은지
왜 하루도 그댈 잊을 수 없는 건지, 그 누구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까, 그냥 또 이렇게 기다리네
왜 하필 그대를 만난 걸까, 이제는 나는 또 어디를 보면서 가야 할까


-이아립, 〈누구도 일러주지 않았네〉, 부분



그 아이와는 졸업한 이후부터 만난 적이 없다. 그때 처음으로 나도 언니처럼 좋아하는 노래가 생겼다. 시내에 있는 ‘신나라 레코드’를 찾아갔지만, 내가 찾는 앨범은 없었다. 인터넷 서점에서 앨범을 구매했다. 집에는 가져오지 않았고 소니 CD 플레이어와 함께 사물함에 넣어두고 학교에서만 들었다. 가끔 무슨 음악을 듣느냐고 묻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나와 이야기가 통할 것 같은 아이, 내가 듣는 노래를 자기 이야기처럼 들을 것 같은 아이한테는 무작정 가서 내 앨범 재킷을 내밀었다. 예전에 그 아이가 내 책상에 무작정 쪽지를 내밀었던 것처럼. 어떤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지만 내 이야기처럼 들리고, 어떤 노래는 남의 목소리지만 타인과 나누고 싶어진다는 걸 알게 되었다.



루시드 폴 앨범 〈버스, 정류장〉 (이미지 출처: 멜론)

루시드 폴 앨범 〈버스, 정류장〉 (이미지 출처: 멜론)



푸른 바다와 버스 정류장과 아저씨의 뒷모습이 있는 <버스, 정류장> OST를 좋아해 준 친구는 안타깝게도 한 명도 없었다. 앨범을 돌려주며 친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노래가 어땠냐고 물으면, “이상한데?”라고 답했다. 자장가 같다고도 했다. 우리 반에서 인디 가수의 노래를 듣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나는 그 소외감을 홀로 즐겼다. “홀로 버려진 길 위에서 견딜 수 없이 울고 싶”었다는 이아립의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이아립과 루시드폴을 시작으로 인디 뮤지션들의 앨범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열여덟, 또래였던 프랑스 작가의 외로움에 공감한



프랑소와즈 사강 『슬픔이여 안녕』 책 표지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프랑수아즈 사강 『슬픔이여 안녕』 책 표지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나른함과 달콤함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이 낯선 감정들을 슬픔이라고 하는 엄청나게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러도 좋을지 나는 망설인다. 그 감정은 너무나도 자기 자신에게만 구애되는 이기적인 감정이며, 나는 그것을 매우 부끄러워하고 있다. 더구나 내게 있어 슬픔이란 언제나 고상한 것으로 비춰지고 있었으니만큼.


나는 이제 나른함, 뉘우침, 그리고 드물게는 양심의 가책까지도 알고 있었지만, 슬픔은 경험한 일이 없었다. 지금은 비단처럼 부드러운 그 무엇인가가 나를 덮어씌우고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갈라놓으려 한다.

그해 여름, 나는 열일곱 살이었다.


- 프랑수아즈 사강, 『슬픔이여, 안녕』, 부분.



그리고 프랑수아즈 사강이 열여덟 살에 썼다는 소설을 읽었다. 내 또래였던 사강의 외로움에 공감했던 것이 그 시작이었으나, 2주 만에 이 소설을 집필했다는 사강의 재능을 부러워하면서 나는 소설에 매료됐다. 책의 날개에는 유명한 베스트셀러라고 적혀 있었지만, 그 책을 읽는 사람이 마치 나 혼자인 것만 같았다. 수많은 사람이 사강에게 나와 흡사한 감정을 느꼈다는 건 아주 나중에야 알았다. 홍대에서는 이아립이 누구나 알 만한, 유명한 인디 가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즈음이었다. 사강의 책은 여전히 내 책장에 꽂혀 있다. 오랜만에 책을 꺼내 판권란을 펼쳐보았다. 1991년 9월 3일 소담출판사에서 발행된 것으로, 4,000원의 정가가 매겨져 있다.


친구의 홈페이지는 어느 날 폐쇄되었다. H.O.T.는 해체했다. 내 플레이리스트에는 여전히 이아립의 〈누구도 일러주지 않았네〉가 들어 있다. 지금도 가끔 언니와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언니는 그럴 때마다 H.O.T. 이야기를 한다. 순수한 첫사랑이었다 한다. 모든 용돈과 시간과 열정을 쏟아서 오직 좋아하기만 한 거라고. 그 목소리를 계속 듣고 그 모습을 계속 보기만을 원한 거라고. 그렇게 순수하게 마음을 다하는 사랑을 다시 또 할 수 있겠냐고.


그 말을 할 때 언니의 표정에서는 자신의 어린 날을 옹호하는 다부짐이 읽힌다.



1) 프랑수아즈 사강, 『슬픔이여, 안녕』, 정홍택 옮김, 소담출판사, 1991년, 9쪽.



[당신은 어떤‘가요’] 비단처럼 부드러운 그 무엇인가가

- 지난 글: [당신은 어떤‘가요’] 어쩔 수 없이 그때의 나를 닮은 노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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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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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장편소설 『최선의 삶』, 소설집 『눈과 사람과 눈사람』,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겟패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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