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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하나의 테마, 360도 관점

문학 사랑/연애 감성

지나간 삶, 가지 못한 삶, 가능성이 있던 삶

-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 윌리엄 트레버 단편집 <그 시절의 연인들> (현대문학)

by 김성중 / 2020.12.22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은? 세월을 견디고 오래 사랑받는 문학 작품들은 대개 성공보다 실패를, 대답보다는 질문을, 상식보다는 상식 밖을, 중심보다는 주변의 이야기를 다룬다. 놀랍고 기이한 것은 그 쓰라린 실패담, 난처한 질문, 보잘것없는 주변의 이야기가 우리의 인식과 지각을 깊이 파고들어 종내는 강력한 아름다움으로 남는다는 사실이다.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코너에서는 국내외 문학작품 속 인물들의 서툴고 아슬아슬하고 위태롭게 흔들리는 삶, 알고 보면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이야기들을 작가들의 소개로 만나본다.

 


할 수 없는 현실의 무게가 그녀를 짓누르지 않았다면 브리디는 사랑하지도 않는 도로 보수 인부의 결혼을 슬퍼하면서 길가 무도회장에 서 있지 않았을 것이다. 우두커니 서서 울버햄프턴에 사는 패트릭 그래디를 떠올리는 지금, 브리디는 잠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녀의 삶 속에도 농장에도 집에도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눈물은 사치였다.



하루 세 시간, 작업부팅용 독서-우산이 되어준 트레버



카페에서 책을 읽는 여성

카페에서 책을 읽는 여성



아이를 낳고 일 년이 되지 않아 펜을 잡았다. 운 좋게 ‘공식적인’ 일거리가 생겼고, 아이를 봐줄 사람이 있었다. 매일 세 시간 정도가 주어졌다. 마감, 마감! 그때만큼 원고 마감이 걸려 있다는 게 반가운 적이 없었다. 정오에 집에서 나와 가까운 카페로 갔다. 얼마나 사치스러운 시간인가. 초침 하나가 째깍거릴 때마다 모래시계에서 황금 알갱이가 떨어져 사라지는 것 같았다. 커피가 놓이면 서둘러 책을 펼쳤다. ‘작업부팅용 독서’로 고른 윌리엄 트레버 단편집이다. 


이 책에는 총 스물 세 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내리 네 편을 읽은 후 나는 불현듯 독서를 멈췄다. ‘이렇게 읽어버리면 안 돼.’ 경고음이 울렸다. ‘이렇게 읽는 책이 아니야.’ 한 편을 읽고 다음 편으로 넘어갈 때 반드시 긴 휴지기가 필요한 책이었다. 다음 날 작은 원칙이 하나 생겨났다. 카페에 와서 커피의 첫 모금을 넘기고, 트레버의 단편을 반드시 ‘한편만’ 읽는다. 밑줄 친 문장은 무수히 많은데 그 문장을 노트에 옮겨 적는다. 그다음에 어제 쓰다 만 내 글을 이어서 쓴다. 그렇게 그날의 작업을 시작하면 트레버의 영성--그렇다, 이렇게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이 작은 우산처럼 탁자 위에 생겨났다. 나는 보호받는 느낌이 들었다.



실패하는 보통 사람들



윌리엄 트레버 단편집 출처 알라딘

윌리엄 트레버 단편집(현대문학, 2015)(이미지 출처 : 알라딘)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은 한편만 읽어서는 그 진가를 알 수 없다. 채호프의 단편이 그러하듯 반드시 ‘세트로’ 읽어야 한다. 나처럼 하루에 한 편만 읽는 것도 추천한다. 그러면 지상 최고의 과일을 잘라 꼭 한 조각만 맛보는 금욕의 달콤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루에 한 편씩 읽는 ‘트레버 시간’은 그날의 절정이었고 그의 이야기에서 나의 글로 돌아가는 흐름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순간이었다. 트레버는 작가들 중에서도 가장 자신감을 상실한 작가-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엄마 소설가-에게 위로의 형태로 용기를 주었다.


이 책에는 실패하는 보통 사람들이 그득하다. 주인공은 평범한 가장자리의 인물들로 수줍음이 많고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럼에도 오해를 사고, 더 강한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짓밟히고, 저항을 해 보지만 보통은 소용이 없다. 작품의 분위기는 어둡지 않다. 이 부분이 트레버의 신비함이다. ‘실패하는 보통 사람들’이 나오는데 이상하게 밝은 느낌.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두 명의 인물을 소개하고 싶다. 

첫 번째는 <로맨스 무도장>에 등장하는 서른여섯의 노처녀 브리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농장에서 아버지와 단 둘이 살고 있다. 아버지가 다리를 다쳐 불구가 된 후 브리디는 이곳을 떠날 수 없게 되었다. 아버지는 선하고 따뜻한 사람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원망조차 할 수 없는 족쇄다.


농장과 하나가 되어 억세게 살아가는 브리디가 외로운 노동에서 해방되는 날은 일주일에 하루, 토요일 밤 무도장에 갈 때뿐이다. 브리디는 예쁜 드레스를 입고 색색의 알전구가 빛나는 이곳까지 18킬로미터나 되는 먼 길을 자전거를 타고 온다. 그리고 무도장에 단골로 오는 손님들과 어울린다. 이들은 제때 짝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인데 그렇기 때문에 격식을 갖추면서도 부지런히 결혼을 타진한다. 그 중에서도 산 속에서 살아가는 중년 남자들에 대한 묘사가 재미있다.


‘그들은 이미 흑맥주와 위스키와 게으름 그리고 산 속 어딘가에 살고 있는 세 명의 늙은 어머니와 결혼한 상태였다.’ 


그 중 하나인 바우저가 치근덕대지만 브리디는 내심 드럼을 치는 데이노에게 마음이 있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번 만나는 것만으로 그에게 호감을 미처 다 드러내지 못하는 사이에 데이노를 시내의 다른 여자에게 뺏길 위기에 처해있다. 이런 일은 그녀의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브리디는 한창 젊고 예뻤던 시절 서로 사랑했던 패트릭를 도시의 여자에게 뺏기고 수년간 눈물을 흘린 바 있다. 브리디에게는 지나간 삶, 갖지 못한 삶, 가능성이 있던 삶이 있었다. 농장에 틀어 박혀 있는 동안 도시가 그녀의 사랑을 박탈해 갔다.


무도장이 문을 닫을 무렵은 더욱 쓸쓸하다. 브리디는 한 명 한 명과 길게 작별을 나눈다. 불 꺼진 무도장은 초라하고 그녀는 집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야 한다. 아버지마저 돌아가시면 외로운 나머지 마음에 들지도 않는 술꾼 바우저 이건과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품은 채로 말이다.


두 번째 인물은 <그 시절의 연인들>에 나오는 노먼이다. 마흔 살에 여행사에서 일하는 노먼은 젊은 여자인 마리와 사랑에 빠졌다. 이 통속적인 불륜 서사는 낭만이 아니라 현실의 법칙대로 흘러간다. 지배적인 성향의 아내 힐다는 절대로 이혼해주지 않는다. 이 커플은 삼 년이나 질질 끌려 다니다가 마침내 합쳤지만 1년 후에는 백기를 들고 헤어진다. 마리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노먼은 아내에게 돌아간다.



인생의 한 때가 지나간 후의 미광



찬란한 과거의 추억

찬란한 과거의 추억



용기도 없고 대책도 없는 노먼이지만 찬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마리와 사랑에 빠진 시절, 그들은 점심시간밖에 만날 수 없었다. 그때 우연히 발견한 멋진 장소가 있다. 고급호텔 2층에 있는 목욕탕으로 아무도 오지 않는 공간이다. 호텔 객실마다 목욕시설이 있기 때문에 낮에는 이용객이 없는 탓이다. 노먼과 마리는 이 화려한 공간에서 몰래 만났다. 황동 놋쇠 수도꼭지와 비틀즈의 노래, 그리고 마리와 함께 있던 비현실적이고 관능적인 순간. 이 기억만은 숱한 모욕과 쓰라림 속에서도 박탈당하지 않는다.


브리디와 노먼은 둘 다 원하는 대로 살아가지 못한다. 현실에 붙들려 주저앉아 버렸다. 삶은 지금보다 더 나빠질 것이다. 그런데도 소설이 어둡지 않은 것은 작가가 이들의 마음 깊은 곳에 묻혀있는 빛나는 부분을 더없이 생생하게 그려냈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는 큰 인물을 다루지만 작은 이야기, 소설(小說)은 바로 이런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뻔하지만 뻔하지 않은 삶, 희미하지만 꺼지지 않는 미광. 여러 번 되풀이해 읽어도 여전히 나는 트레버의 우산 속에 있다.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지나간 삶, 가지 못한 삶, 가능성이 있던 삶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겨울 꿈을 꾸고 있는 그대

 

 

 

 

윌리엄트레버 그시절의연인들 문학 현대문학 인문 인문학 단편 단편집 사랑 인문360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김성중
김성중
소설가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8년 중앙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개그맨』 『국경시장』, 중편소설 『이슬라』가 있다. 2010년·2011년·2012년 젊은작가상, 2018년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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