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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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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습관 따윈 없다

-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

by 김언수 / 2020.10.22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좋은 습관 따윈 없다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차마 말 못 하는 당신께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은?


 

리가 자기 자신이라고 믿는 것들을 한번 살펴보라. 거기에 우리가 믿는 ‘나’는 없다. 오로지 습관이라는 복잡한 장치들이 얽혀 있을 뿐이다. 흡연이 흡연을 하며 술이 술을 마신다. 심장은 심장이 알아서 뛴다. 화가 화를 낸다. 분노가 분노를 하고, 우울이 우울을 한다. 고정된 관념과 이데올로기의 패턴이 생각을 대신해서 생각하는 척......

 


나 아닌 다른 존재가 된다는 것

 


탄트라 불교에는 의식적으로 자기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는 특이한 명상법이 있다. 먼저 수행자는 탄트라의 여러 신들 중 하나를 고른다. 그리고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신의 형상을 계속 쳐다보면서 철저한 시각화를 통해 자신이 그 신이 된다. 수행자의 의식이 자신의 정체성 혹은 에고를 버리고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면 그는 이제 신의 형상뿐만 아니라 다른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나무도 될 수 있고, 나비가 될 수 있고, 돌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사람이 실제로 나비가 되거나 돌이 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저 기분이 그렇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 탄트라 명상의 이 기법은 마치 옷을 갈아입듯 자신의 정체성을 갈아입는 훈련과 같다. 그나저나 대체 이따위 짓거리를 왜 하냐고? 이 명상법의 본질은 우리가 자아라고 믿는 것의 허상을 깨트려 세계의 실재를 보기 위함이지만 의외로 이 명상의 부수적인 효과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꽤나 유용하고 실질적인 팁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이 기술을 배운다면 당신은 무엇이든 될 수 있으니까. 목수가 될 수도 있고, 멋진 요리사가 될 수도 있고, 여행가가 될 수도 있으며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드는 도공이 될 수도 있다. 



소설을 쓰지 말고 소설을 살라 



탄트라니 뭐니 하는 말을 전혀 몰라도 작곡가, 소설가, 배우, 연주자, 춤꾼, 가수 등등의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따금 자신과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상태를 경험하거나 본능적으로 이 기술을 활용하곤 한다. 예를 들어 소설가는 아주 가끔(내 경험에 따르면 십 년에 한두 번 정도) 의식이 실제 세상을 떠나 자기가 쓰고 있는 소설 속 공간으로 쑥 들어갈 때가 있다. 정말로 자기가 그저 상상으로 만든 소설 속 공간으로 쑥 하고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그리고 탄트라 명상법에서 말하는 것처럼 실제의 자신을 잃어버리고 알코올 중독자나 킬러, 삼류건달 같은 자기가 쓰고 있는 소설 주인공과 완전히 동일시된다. 일단 의식이 소설 속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으면 실제의 세상이 몽롱해지고 소설 속의 세계가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기묘한 상태가 된다. 그곳에도 실제의 세상과 똑같이 자동차가 지나다니고 건물과 가로등이 있으며 사람들이 부대끼고, 지지고 볶고, 사랑하고 싸우며 산다. 마치 눈을 뜬 채 장자가 말한 생생한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다. 작가는 주인공의 전두엽 근처 혹은 심장 혹은 척추신경의 어디쯤에서 세포나 바이러스처럼 조용히 숨어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모든 감각기관은 활짝 열려있어 주인공의 안과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실제보다 훨씬 생생하게 알아차릴 수 있다. 주인공의 감정이 민감한 관측기 바늘처럼 꿈틀거리는 것을, 신경을 따라 올라오는 불안과 고막을 예민하게 흔드는 초파리의 날갯짓 소리 같은 것을 들을 수 있다. 주인공이 분노할 때 혈관이 수축하는 것을, 망가진 과거를 쳐다보고 길게 한숨을 내쉴 때 호흡 속에 섞여 있는 미세한 알코올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사랑을 잃고 고통받는 그 심장 소리와 누군가에게 모욕을 받고 피부에서 솟아나는 땀방울을 느낄 수 있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날마다 세상이 잘도 돌아가듯이 이쯤 되면 이제 소설 속의 주인공과 캐릭터들은 자기들이 알아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기들이 알아서 배신을 하고, 암살을 하고, 추적을 하고, 사랑을 한다. 소설가는 그저 이 모든 걸 지켜보기만 하며 실로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적당한 때가 되면 소설가는 아무 생각 없이(정말로 일절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키보드를 두드리며 그 주인공의 내면과 외부의 세상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마치 뚜르뚜루트 뚜르뜨루트 뚜르뜨우루 따라야, 같은 문장을 하염없이 쳐대고 있는 기분이다. 소설은 장난처럼 쉽게 써진다. 주인공의 몸속에 들어앉아 하염없이 그 꿈을 훔쳐보고 있노라면 소설의 작법이니 창작 이론이니 문장을 잘 쓰는 기술 따위가 얼마나 부수적이고 하찮은 것들인지 알게 된다. 나의 선생은 입버릇처럼 “소설을 쓰지 말고, 소설을 살아라.”라고 말씀하셨다. 오랫동안 그 말의 비밀을 몰랐다. 핵심은 소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내가 주인공 자체가 되는 것이고 소설 속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쉬워진다. 나머지는 전부 잡다한 것들이다. 



흉내가 아닌 캐릭터 자체가 되는 배우들 

 


영화 악마를 보았다 영화 포스터

▲ <악마를 보았다> 포스터(이미지 출처 : 쇼박스)



배우들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배우는 자신이 맡은 배역에 완전히 몰입한다. 그러면 실제의 자신은 사라지고 대신 영화 속의 캐릭터 그 자체가 된다. 영화배우 최민식은 <악마를 보았다>에서 완전 몰입하여 연쇄살인마 연기를 했다. 하지만 촬영이 끝난 뒤 그 악마 캐릭터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몇 달이나 고생을 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최민식은 정말 좋은 배우다. 그는 영화 속에(서) 캐릭터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 자체가 되어버린다. 그는 <악마를 보았다>에서 정말로 악마가 되며, <올드보이>에서 억울한 동네 아저씨가 되고, <파이란>에서 삼류건달이 되어서 영화 속의 삶을 ‘산다’. 내가 보기에 공효진이나 류승범 같은 배우들도 그렇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공효진은 사랑에 빠진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사랑에 빠진 것처럼 보이고, 류승범은 배우가 양아치 연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진짜 양아치가 어쩌다 배우를 하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한마디로 그네들의 연기는 살아서 숨을 쉰다. 그리고 남들이 보기에 아주 대단한 일들을 쉽게쉽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론은 간단하다. 의식이 정말로 다른 무엇이 되면 실제로도 그렇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는 혹은 어떤 일을 잘 하기 위해서는 그 일의 외곽을 오랫동안 빙빙 돌며 뭔가를 충분히 배우고 연습한 후에, 혹은 커다란 자격증 같은 거라도 하나 딴 후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일단 뭐라도 좀 알아야 시작을 하지.” “기초부터 차근차근 시작하려고요.” 하고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신과 삶에 대한 큰 오해다. 말하자면 상황을 거꾸로 이해하고 있는 것, 전후를 잘못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부와 연습이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다. 머리를 밀어 넣고 들어가는 것이 먼저고, 배우고 되는 것은 나중이라는 말이다. 자격증을 따야지 요리사가 되는 게 아니라 할 줄 아는 요리라고는 개뿔, 계란후라이와 라면밖에 없다 하더라도 자신을 진심으로 요리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엔 훌륭한 요리사가 된다. 마치 우리가 대학이나 연구소 같은 전문기관에서 오랫동안 운전을 배웠기 때문에 운전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잘 하든 못 하든 그저 자동차 핸들을 잡은 ‘운전자’가 되었기 때문에 결국엔 능숙한 드라이버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옷을 갈아입는 법과 똑같다. 먼저 입고 있는 옷을 벗는다. 그리고 옷장에서 오늘에 어울리는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는다. 그리고 밖으로 나간다. 우리의 의식이 새로운 정체성이라는 옷을 입기만 하면 우리는 매일 새로운 사람이 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밖에서 볼 때는 그토록 난해하고 어렵게 보이는 것들이 대상의 내부로 들어가면 환하게 보인다. 그 속은 쓸모없는 이론들과 견해들의 황무지가 아니라 비언어적인 체험으로 가득 찬 연결과 진동의 장이며 진짜 경험과 체득의 장이다.



내 삶의 주인은 ‘나’가 아닌 ‘습관’ 



물론 말이야 언제나 쉽고 간단하다. 하지만 실제로 막상 다른 정체성으로 갈아타고 다른 존재가 되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다.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뭔지도 모르겠고, 뭘 갈아입어야 할지 어떻게 갈아입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소설 속으로 들어가는 법을 완전히 모른다. 모르고 잘되지 않는다. 그냥 소설 속으로 딱 들어가기만 하면 삼천 매짜리 긴 장편소설도 서너 달이면 뚝딱 써낼 것 같은데, 여긴가? 싶어서 올라가 보면 ‘이 산이 아난가베’ 싶고, 저긴가? 싶어서 올라가면 ‘저 산도 아닌가베’다. 솔직히 환장한다. 


무엇 때문일까? 바로 자아의 딱딱함 때문이다. 자기가 이런 사람이라고 내면에서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에고의 완고한 신념과 고집 때문이다. 나는 성격이 이렇고, 나는 스타일이 이렇고, 나는 학력이 이렇고, 체력이 이렇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은 꼭 지켜야 하고 뭐 이런 것들 말이다. 힌두교에서는 정체성, 자아감, 혹은 에고를 그저 습관을 반복하려는 광적인 집착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실제로 우리의 정체성을 만드는 것들은 대부분 습관으로 이뤄져 있다. 신지학(神智學)*에 따르면 보통의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은 육체에 대한 인식, 감정에 대한 인식, 정신에 대한 인식 이렇게 세 가지이다. 육체, 감정체, 멘탈체 이 세 개를 통합해서 우리는 이것이 자신의 자아라고 굳게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자아 정체성이 일단 형성되고 나면 이제 그 틀은 좀처럼 깨지지 않는다. 

* 신지학(神智學) 우주와 자연의 불가사의한 비밀, 특히 인생의 근원이나 목적에 관한 여러 가지 의문을 신(神)에게 맡기지 않고 깊이 파고들어 가, 학문적 지식이 아닌 직관에 의하여 신과 신비적 합일을 이루고 그 본질을 인식하려고 하는 종교적 학문. 출처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의 육체, 감정, 생각 이런 것들을 구성하고 작동시키는 것은 습관이라고 부르는 자동화된 프로그램이다. 믿기지 않겠지만 정말 그렇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에서 우리의 깨어있는 의식이 주인으로 활동하는 영역은 실제로 아주 미미하거나 거의 없다. 우리 삶의 주인은 우리가 철썩같이 믿고 있는 ‘나’가 아니고 습관이다. 일단 우리는 자기 몸의 주인이 아니다. 우리는 자기 의지대로 다리를 움직이고 팔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이 육체의 소유자이며 동시에 육체의 통제자라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의 육체를 움직이는 것은 대부분 자율신경계의 작동이다. 우리는 심장을 뛰게 할 수도 없고, 위나 장을 연동시킬 수도 없다. 심장은 자율신경계가 지시하는대로 심장이 알아서 뛴다. 그리고 걷거나 밥 먹거나 하는 일상의 움직임들은 대부분 무의식적이고 습관적인 동작들이다. 우리는 걸음이라는 복잡한 관절과 근육의 메커니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며, 설령 안다고 해도 너무나 복잡해서 우리의 의식 수준으로는 그 메커니즘을 통제할 수 없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20세 전후가 되면 좋아하고, 싫어하고, 무관심한 것에 대한 감정이 대체로 고정된다. 그 이후로는 좋아하는 것을 더 움켜쥐려 하고, 싫어하는 것을 더 거부하려 하며, 무관심한 것들에 더더욱 무관심해지려고 하는 집착의 반복이다. 이 세 가지의 무한 반복은 결국 고정된 감정적 패턴을 만들며 이 패턴을 우리는 자신의 성격이라고 부른다. 한번 어떤 상황이나 조건에서 화를 낸 사람은 대체로 그다음 같은 조건에서도 화를 낸다. 그렇게 습관이 탄생한다. 이제 그는 그 조건을 만날 때마다 화를 내는 사람이 될 것이고 그게 그 사람의 성격이 될 것이다. 우리가 생각이라고 부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자유롭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뇌는 이미 오래 전에 학습하거나 무의식 중에 세뇌되고 채택된 고정화된 관념, 사상, 편견,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 그대로 생각한다. 마치 우리가 도시를 자유롭게 맘껏 활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신호등과 횡단보도 설계자가 만들어 놓은 몇 개의 조합 속에 결국 갇히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태극기 부대는 누가 뭐라고 해도 계속 태극기를 흔들어야 하며, 종교인은 자신이 믿는 것 이외의 신앙들을 전부 이단이라고 불러야 한다. 야당은 뭔 정책이 나오건 일단 비판을 해야하고, 여당은 야당에서 무슨 비판이 나오건 모두 개소리라고 말한다. 


그러니 우리가 자기 자신이라고 믿는 것들을 한번 살펴보라. 거기에 우리가 믿는 ‘나’는 없다. 오로지 습관이라는 복잡한 장치들이 얽혀 있을 뿐이다. 흡연이 흡연을 하며 술이 술을 마신다. 심장은 심장이 알아서 뛴다. 화가 화를 낸다. 분노가 분노를 하고, 우울이 우울을 한다. 고정된 관념과 이데올로기의 패턴이 생각을 대신해서 생각하는 척한다. 그리고 이 모든 습관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패턴들을 모아 우리는 그것을 자신, 혹은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다른 무엇의 노예가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낸 습관의 노예이며 습관이라는 거대한 엔진의 주동력인 집착의 노예이다. 

 


황홀한 변신...나비가 될래, 멍게가 될래



우리가 위대하고 황홀한 변신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집착과 습관 때문에 도저히 지금 입고 있는 에고(ego)라는 단단한 청동 갑옷을 죽을 때까지 벗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옷장에 멋진 옷을 수백 벌이나 놔두고도 평생 파란색 추리닝만 입고 다니는 것처럼 억울하고 웃긴 일이다. 우리는 다른 패턴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리의 몸이, 감정이, 생각이 본능적으로 다른 패턴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저 강박적으로 계속 반복하려는 에고의 본질적인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다른 이유는 없다. 에고는 계속 반복한다. 사실 그것은 수억년 동안 이 지구에서 생존해왔던 생물들이 가진 진화의 산물이다. 반복되는 것은 안전하며 에너지적인 측면에서 효율적이다. 삶이 습관적인 동작과 생각으로만 이뤄질 때 뇌는 가장 적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마치 멍게가 바위나 항구의 말뚝 같은 곳에 정착을 하고 나면 이제 쓸모없이 에너지만 많이 사용하는 뇌를 자기가 스스로 먹어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두 개의 선택지가 남는다. 냄새나는 파란색 추리닝을 던져 버리고 오늘은 바람이 되고 내일은 나비가 되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라면 습관에 짓눌려서 스스로 뇌를 잡아먹는 멍게가 되는 삶을 살 것인가, 이 둘 중에서 말이다.




김언수 소설가 악마를보았다 자아 정체성 습관 글쓰기
김언수
김언수
1972년 대한민국 부산에서 태어난 소설가이다. 장편소설 『캐비닛』, 『설계자들』, 『뜨거운 피』 와 소설집 『잽』이 있다. 작가의 작품들은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일본 등 전 세계 20개국에 번역 출간되었다. 『뜨거운 피』가 한국에서 영화로 제작되었고 『설계자들』이 할리우드에서 영화 제작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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