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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간의 역사적 화해는 가능한가

백승종

2020-08-14

 


가 내리는 차가운 날씨였다. 브란트는 폴란드를 방문 중이었다. 그는 바르샤바의 유대인 거주구역인 게토 앞에서 두 무릎을 꿇고 사죄하였다. 본래는 화환을 바치기로 예정되었는데, 그가 침통한 표정으로 참회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온 세계가 깜짝 놀랐고, 폴란드와 독일 양국의 시민들은 앞다퉈 화해를 촉구했다. 2년 뒤 서독과 폴란드는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기로......



국가 간 화해의 세 가지 측면



진정한 화해는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이미지 출처 : pixabay)

▲ 진정한 화해는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이미지 출처 : pixabay)



국가들끼리의 화해란 무엇인가? 정설은 없다고 하는데, 벨기에 루뱅대학교의 발러리 로조우(Valerie Rosoux) 교수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그는 국가 간 화해의 세 가지 측면을 강조하였다. 첫째는 구조적인 화해로, 당사국이 상대의 군사적 안보를 보장하고, 정치 및 경제적으로도 협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국가 간의 갈등이 완전히 극복될 수 없다.


나라들끼리 화해하는 과정은 시간도 많이 걸리고, 그 과정도 복합적이다. 그런 점에서 로조우 교수는 사회심리적 화해를 강조한다. 국가 간 화해의 두 번째 측면이다. 끝으로, 국가 간 화해는 양국 시민의 집단적 ‘회복’이라고도 한다. 로조우 교수에 따르면, 피해 국가뿐만 아니라 가해 국가의 재활도 필요하다.


한 마디로, 국가 간의 화해는 정치사회적인 활동인 동시에 도덕적인 각성이다. 이는 양국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필요로 한다. 일방의 강요로 화해가 이뤄질 수는 없다. 그럼 이와 같은 화해 이론에 비추어보아도 손색이 없는 국가 간 화해가 실제로도 일어났을까.



폴란드와 독일, 원한의 실타래 풀기



독일과 폴란드의 관계와 경우는 로조우 교수의 이론에 근접한 것 같다. 최근 2020년 6월 17일에 보도된 국제뉴스 한 장면이 생각난다. 독일이 폴란드 남부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를 보존하려고 기금을 증액하였다는 소식이었다. 작년(2019)에 독일은 6천만 유로(818억 원)를 비용으로 지원했는데, 금년에는 그 두 배를 약속했다.


하이코 마스 독일 외무장관의 발언이 인상적이었다. “유대인 학살에 대한 독일의 책임은 끝나지 않았다. 그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독일은 앞으로도 계속 지원하겠다. ” 문제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는 악명 높은 곳으로, 거기서 나치는 120만 명을 학살했다. 그 대다수는 유대인이었으나 폴란드 사람도 많았다.


이런 뉴스 하나만 보아도 폴란드와 독일의 화해가 상당한 수준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1960년부터 그들은 화해의 길을 나란히 함께 걸었다. 쉬운 일이 절대 아니었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이미지 출처 pixabay)

▲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이미지 출처 : pixabay)



까마득한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독일은 폴란드를 침략해 약탈을 거듭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양국 관계는 절망적이었다. 나치 독일은 폴란드에서 6백만 명을 살해했다. 그 절반은 유대인이요, 나머지는 폴란드인이었다. 이 밖에도 나치 독일은 수백만 명의 폴란드인을 강제노동으로 내몰았다. 약탈과 파괴도 도를 넘었다. 1943년 바르샤바 시민들이 나치 독일의 부당한 지배에 항거했으나 나치는 이 도시가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짓밟았다.


나치가 일으킨 전쟁 때문에 폴란드는 동쪽 영토 절반을 구 소련, 현재의 러시아에게 빼앗겼다. 그 대신 오데르-나이세 강의 동쪽에 있던 독일 영토 11만 평방킬로미터를 얻었다. 복수심에 불타던 폴란드는 그곳에 거주하던 독일인 1200만 명을 강제 추방했다. 전후 독일과 폴란드의 관계는 얼어붙었다.


설상가상으로, 권력을 쥔 폴란드의 공산정권은 독일에 대한 민족적 반감을 조장함으로써 정치적 반사이익을 얻으려 했다. 1950년대까지도 두 나라의 화해는 불가능한 일로 보였다. 그런데 지난 60여 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두 나라는 고도 수준의 화해에 이른 것일까.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낸 두나라의 교회



화해의 물꼬를 연 것은 양국의 교회였다. 한편에는 독일개신교협의회(EKD)가 있었고 다른 편에는 폴란드의 가톨릭교회가 자리를 지켰다.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양국 시민들이 겪은 비극을 사실적으로 기록한 집단 전기를 공동으로 편찬했다, 두 나라 국민의 전쟁 트라우마를 공유한 것이다.

 

1965년 독일개신교협의회는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를 솔직히 밝혔다. 독일의 옛 영토를 포함한 폴란드의 새 국경선을 인정하고, 폴란드와 독일 당국은 솔직한 대화를 나누라고 권고했다. 폴란드의 가톨릭 교회는 독일개신교협의회의 입장을 환영하고 한 발짝 더 나아갔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가 끝날 무렵, 폴란드 주교단은 독일인들에게 공개서한을 보냈다. “우리도 용서하니 당신들도 우리를 용서하라"는 내용으로 전쟁 중에 양 국민이 서로에게 끼친 죄악을 용서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분노한 폴란드 공산정권은 자국의 주교들을 탄압했다. 그런데도 폴란드의 가톨릭 평신도들은 주교들의 선언을 지지했다.

 

폴란드 가톨릭교회의 활발한 움직임과는 달리 독일 가톨릭 주교단의 태도는 미온적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독일의 가톨릭 평신도들이 나섰다. 그들은 폴란드와 화해하기 위해서 교회가 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양국 간에 화해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었고, 결국 양국 관계에도 곧 현저한 변화가 일어났다.



빌리 브란트가 남긴 아름다운 유산. 진심 어린 참회



1980년대 폴란드 자유연대노조운동을 이끈 레흐 바웬사(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 빌리 브란트 전 총리의 사죄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조형물(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빌리 브란트(Willy Brandt)라는 독일 총리를 기억할 것이다. 한 장의 사진이 유명한데, 1970년 12월 7일 초겨울에 찍은 것이다. 그날은 비가 내리는 차가운 날씨였다. 브란트는 폴란드를 방문 중이었다. 그는 바르샤바의 유대인 거주구역인 게토 앞에서 두 무릎을 꿇고 사죄하였다. 본래는 화환을 바치기로 예정되었는데, 그가 침통한 표정으로 참회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온 세계가 깜짝 놀랐고, 폴란드와 독일 양국의 시민들은 앞다퉈 화해를 촉구했다. 2년 뒤 서독 1990년 통일이 이뤄지기 전까지 독일은 서독과 동독 두나라로 분단된 상태였다. 편집자주과 폴란드는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기로 합의했다. 양국은 다양한 층위에서 교류 협력을 확대했다. 두 나라의 도시들도 자매결연을 맺었고, 학자들도 교류의 장을 열었다. 두 나라는 ‘자문 포럼’까지 열어서 현안을 폭넓게 논의했다. 그 당시 동독은 서독과 폴란드의 관계 정상화를 못마땅해했으나, 대세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 1990년 통일이 이뤄지기 전까지 독일은 서독과 동독 두나라로 분단된 상태였다. 편집자주


이런 분위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독일 가톨릭 주교단이 폴란드 가톨릭교회와 협력을 강화했다. 역사상 최초로 동구권에서 폴란드 교황이 선출되는 이변이 연출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요한 바오로 2세(1978년 8월)가 선출된 배경이다.



1980년대 폴란드 자유연대노조운동을 이끈 레흐 바웬사(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 1980년대 폴란드 자유연대노조운동을 이끈 레흐 바웬사(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서독 시민사회는 민주화를 바라던 폴란드의 양심세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981년 12월 13일, 폴란드 공산정권이 노조운동을 탄압하고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그때 서독 시민사회(일부 동독 시민도 포함)는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폴란드 자유연대노조인 ‘솔리다르노시치’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했다.


알다시피 1989년에는 동구권이 스스로 붕괴되었다. 폴란드는 소련의 사슬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었고, 1990년 독일은 재통일의 꿈을 이루었다. 폴란드와 독일의 화해협력은 이제 자연스런 일이 되었고, 유럽의 평화를 위한 디딤돌로 평가 받았다. 이후 폴란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했고, 유럽연합(EU)의 정식회원국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든든한 조력자는 독일이었다.


양국은 다양한 방법으로 정치, 경제 및 문화교류를 확대한다. 두 나라 관리들은 정기적으로 만나 양국의 현안을 협의하며, 양국 시민들이 함께 운영하는 공동기관도 여럿이다. 그들은 국경까지 완전히 개방하여 왕래에 걸림돌이 하나도 없다.


물론 어려움도 없지는 않았다. 1990년대 후반, 과거 나치 독일의 강제 동원을 어떻게 배상할지를 둘러싸고 양국의 긴장이 조성된 적이 있었다. 1999년 12월 17일, 요하네스 라우 독일 대통령은 취임 연설을 통해 이 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독일 국가와 기업은 과거의 범죄로 인해 발생한 연대책임을 질 것이며, 도덕적 의무도 성실히 수행할 것을 선언합니다. ”


“오늘 저는 독일의 지배 아래서 노예노동과 강제노동을 한 모든 사람을 기억하며, 독일 민족의 이름으로 용서를 빕니다. ”


한 마디 덧붙이자면, 두 나라는 여러 해 전에 중고등학교에서 교재로 사용할 역사 교과서도 공동으로 편찬하였다(2016년 6월 23일). 양국의 화해가 완벽하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겠으나, 대단히 높은 수준의 화해에 이른 것은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일제강점기 겪은 한-일 양국은 어떻게 해야...



그런데 일제강점기를 마친 한일 양국의 관계는 어떠한가. 독도 문제도 여전히 미해결이요, ‘위안부’ 갈등도 끝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과거사 문제는 일시적인 정치적 득실로만 따질 것이 아니다. 역사의 진실을 둘러싼 무지와 오해로 양국이 지금처럼 평행선을 긋는다면, 아마도 영원히 풀지 못할 난제일 것이다. 그런데 폴란드와 독일이 어떻게 역사의 짐을 벗어났는지를 곰곰 되새겨 본다면, 우리에게도 겨자씨만 한 희망은 발견할 수 있겠다.




국가 간의 역사적 화해는 가능한가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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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백승종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현 한기대 겸임교수. <도시로 보는 유럽사>(2020), <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2019), <상속의 역사>(2018 올해의 책, 교보문고-세계일보 선정), <신사와 선비>(2018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출판콘텐츠) 등 20여 권의 저서가 있음. 2012년 한국출판문화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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