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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하나의 테마, 360도 관점

미국 횡단 여행
여행

고래를 닮은, 나의 미국 횡단

여행은 여전히 계속된다

by 이장희 / 2020.01.13

 

자동차로 떠난 미국횡단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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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단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건 언제부터였을까. 어릴 적 시골에 가면 겁도 없이 낯선 동네를 누비거나 동산을 올라 반대편까지 둘러보아야 직성이 풀렸던 기억들은 나이를 더해가면서 조금씩 범위를 넓혀갔다. 서울 곳곳은 물론이고 외국의 도시들을 쏘다니는 방랑 정신은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에 대한 궁금함을 주던 골목길의 모퉁이를 사랑하게 만들었고, 산속 오솔길의 굴곡을 따라 지칠 줄 모르고 전진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런 호기심이 미국 횡단 여행이라는 거대한 불길의 불쏘시개가 된 것은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길 위에서


하지만 세상 모든 일들이 그러하듯 불이라는 것도 조건이 맞아야 발화가 되고 번지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천운의 충분조건이 갖추어졌으니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에 집어 던진 사표는 성냥이요, 그 결과 만들어진 여유 자금과 시간은 장작과도 같았다. 불을 피워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큰불을 만드는 필수 요소에는 바람이 빠질 수 없는데, 그런 존재가 바로 미국에서 공부 중이던 친구였다. 그는 당시 마지막 학기에 지쳐 있었고 곧 다가올 방학에는 그야말로 제대로 쉬겠다는 단단한 각오를 한 터였다. 


그렇게 미국 횡단이라는 불이 붙자 타오르는 건 순식간이었다. 어쩌면 이 여행, 아주 오래 전부터 준비됐던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순조로워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우리는 첫 구상을 전화로 주고받은 몇 주 후, 오하이오주의 주도, 콜럼버스의 국제공항에서 해후했다. 공교롭게도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서 이름을 따온 도시라니, 대륙 횡단 시작에 의미마저 따라주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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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터카 업체에서 인수한 SUV는 운행거리가 1000km도 안 되는 새 차였다. 렌터카 회사는 그때 이 차의 주행거리가 약 30일 뒤에 15,000km가 훌쩍 넘는 상태로 반납되리라는 걸 짐작이나 했을까. 떠나던 날 아침에는 가볍게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시기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겨울여행이 되었지만 결론적으로는 더운 서부나 남부를 고려하면 아주 나쁜 선택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미국횡단을 가능하게 했던 렌터카 안 풍경

하지만 역시 북미 대륙의 겨울은 만만치 않았다. 출발 이후 일리노이주의 시카고를 지날 때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괜찮았던 날씨는 중부를 지나며 혹한으로 돌변해 눈까지 뿌려대며 우리를 괴롭혔다. 차에서 내릴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여러 마을을 지나쳤다. 도로마다 사고나 고장으로 쩔쩔매는 차들이 목격됐다. 염화칼슘이나 흙탕물로 질척해진 길들은 워셔액이 기름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마실 물보다 워셔액이 절실했던 우리는 앞유리의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차에 실린 모든 액체를 들이붓거나 도로의 눈을 사용하기도 했고 심지어 고개를 내밀고 운전하는 묘기까지 부려가며 가까스로 가게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잔뜩 구매한 워셔액은 훗날 고스란히 애물단지가 되어버렸다. 


록키산맥을 넘어 서부에 들어서자 풍경은 본격적으로 변했다. 건조한 사막 기후가 시작되었는데 미국에서 가장 많은 국립공원들이 산재한 곳이었다. 그 장대한 자연 위에서 느낀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가 네바다 주 어느 사막을 가로지르던 밤길이었다. 어두운 하늘과 그보다 더 검은 지평선의 경계뿐인 곳. 어쩌면 우주를 항해하는 기분이 이렇지는 않을까. 문득 맞은편에서 작은 불빛이 나타났다. 그 빛은 마치 별빛처럼 한동안 그 자리에서 깜빡였다. 얼마나 곧은 도로이고, 얼마나 먼 거리였던 것일까. 그렇게 서로 시속 100km로 가까워지던 차는 스치면서 사이드 미러와 룸 미러에 붉은 미등의 잔상만을 남긴 채 아득히 멀어졌다. 그리고 다시 어둠, 변하지 않는 풍경. 우리는 그 길에 멈춰 엔진과 불을 모두 끄고 밤의 사막에 한동안 누워 있었다. 별빛과 어둠, 적막 그리고 존재라는 단어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세상이었다. 


한밤에 길 위에서 만난 차, 그리고 스침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로 가던 길의 안개도 강렬한 기억이다. 4시간이 넘도록 짙은 안개 속을 달렸다. 이 정도일줄 알았다면 결코 시작도 하지 않았을 길이었다. ‘곧 끝나겠지, 곧 끝날 거야’ 거듭 낙관하며 달리고 또 달렸다. 하지만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고, 나중에는 온 세상이 안개로 뒤덮여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절망감마저 들었다. 휴게소로 대피한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한마음으로 안개를 성토했다. 그러다 서로의 행운을 빌며 다시금 길을 떠나던, 짙은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차량의 행렬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우리들은 왜 험난한 길 위에서 멈추지 못하고 전진해야 했던 걸까. 


미국 대륙 횡단의 가장 극적인 감동은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찾아왔다. 무슨 배짱으로, 분위기 좋아 보인다는 이유 하나로, 지도에도 없는 비포장도로를 들어섰던 것일까. 처음의 상쾌하던 들판과 숲의 풍경은 주유 경고등이 들어오면서 으레 떠올릴 법한 온갖 좋지 않은 시나리오의 배경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나온 길의 거리와 시간을 알았기에 되돌아 갈 수도 없었다. 인적도 지나는 차도 없었다. 하지만 지옥과 천당은 담 너머 이웃 사이였다. 길은 포장된 국도로 이어졌고 저 멀리 우리 앞에 천국의 문처럼 등장한 주유소 간판은 인류 문명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상징처럼 여겨졌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바치고 싶을 정도의 경외감이라니!


경외감이 들던, 반가운 주유소


미국 대륙 횡단 중에서도 길 위에서의 에피소드만 조금 모아 보았다. 지금 떠올려보면 스마트폰도 내비게이션도 없던 시절, 두꺼운 미국 지도책 한권 들고 떠났기에 맞닥뜨릴 수 있던 이야기들이다. 그런 아날로그적인 추억들을 맛볼 수 있었던 시대를 거친 것에 대해 다행스럽고 행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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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어 보이지만 알고 보면 그렇지 못한 곳이 또 미국인 것 같다. 광활한 대지에 도로는 끝 모르게 이어져있지만 막상 도로 밖으로 벗어날 수 있는 곳이 생각보다 그리 많지는 않았다. 낮은 철조망이 길 양 옆으로 자주 끊임없이 이어져 있는 탓이다. 그 사유지 안을 들어가 볼 만용은 누구에게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여행자는 거대한 유리 통로를 따라 목적지로 밀려가는 한낱 컨베이어 벨트 위의 소화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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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횡단이라 하면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이동을 말하지만, 우리에겐 출발점으로 돌아와야 하는 이유가 있었기에 미국을 한 바퀴 도는 순환 여행이 되었다. 돌아오는 길은 출발할 때와 같지 않았지만, 왠지 더 짧게 느껴졌다. 여행은 이미 중반을 넘은 상태였고, 남부지방의 겨울은 더없이 쾌적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가는 곳마다 꿈을 꾸듯 시간이 흘렀다. 그래서 남부를 지나 동부에 이르렀을 때의 여행은 여유로움을 넘어 일상이 되었다. 서부의 수많은 국립공원과 태평양 연안의 도시들에서 품었던 호기심과 기대감은 어느덧 마트에 들러 생필품을 차에 보충하거나 외식을 하고 모텔에서 잠을 자는 일상으로 변해 있었다. 

 

외로움을 맞닥뜨리는 여행의 순간


물론 유명 관광지를 찾고 박물관에 들르고 도심을 걷는 일을 마다한 건 아니다. 모든 건 처음 그대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낯선 곳이 더 이상 모험이 아닌 익숙한 일상이 되어 버리자, 역설적으로 우리의 여행은 의미를 잃어버린 듯했다. 뉴욕을 지나며 다시금 추운 날들이 이어졌다. 오하이오주가 가까워지고 펜실베니아주의 피츠버그에서 며칠 지내며 근처를 돌아보려던 우리는 계획을 바꾸어 그냥 종착지까지 내처 달리기로 했다. <분노의 포도>를 쓴 존스타인벡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여행이란 정확히 여행을 한 시간들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때로 여행 전의 설렘과 여행 다음 후유증이 모두 여행일 수도 있고, 반대로 여행 도중에 여행이 끝날 수도 있다고. 


우리의 여행은 피츠버그 언덕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문을 나서는 순간 끝이 났다는 걸 알았다. 도시의 야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식당 주차장을 향해 걸으며, 거대한 평원 너머 캐나다 북부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맞는 가슴속에는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시내에서 집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하이웨이를 찾으며 그동안 수많은 낯선 도시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심각한 혼란을 경험했다. 시내를 몇 바퀴나 돈 후에야 집으로 가는 이정표에 대한 확신이 들었다. 길을 잃던 즐거움도 더 이상 없었다. 새벽에 도착한 집엔 온기라고는 없었고,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취해 그대로 뻗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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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차에서 짐을 내려 방으로 옮기고 여행에 사용했던 물건들을 정리했다. 몇 통이나 남은 워셔액이 우리의 여행이 끝났음을 알리고 있었다. 친구는 여행지마다 구입한 자석들을 냉장고에 붙였다. 우리가 지나온 모든 곳들이 하얀 철판 위에 가득했다. 커다란 미국 전도를 거실에 펴놓고 파란 펜으로 지나온 길들을 표시해 나갔다. 여기에선 이런 일들이 있었지. 저기는 어떠했지. 서로 이 길이 맞다 우기기도 했고, 노숙한 곳과 잠을 잔 마을도 대략 표시했다. 체크가 끝나자 미국 전도 위에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드는 커다랗고 어설픈 고래가 꿈틀댔다. 그동안 우리가 고래와 함께 넓은 바다를 항해했구나. 


고래모양을 한 미국횡단 경로


렌터카 반납을 위해 주유소에 들러 차에 마지막 식사를 주고 있는데, 점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무료 스프가 사무실에 있으니 원하는 것을 떠서 드세요. 그런데 어디 다녀오는 중인가 봐요. 차가 많이 지저분한데 세차라도 해야겠는걸요?""예. 여기저기 조금 돌아다녔어요."형식적인 말을 던지며 미소 짓는 그를 따라 우리도 웃었다. 따스한 스프를 먹고, 깨끗하게 세차를 했다. 렌터카 회사에 자동차를 돌려주고, 모퉁이를 돌아 주차장 뒤편으로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작별인사를 했다.


며칠간 그의 집에서 지내며, 여행하면서 모은 기념품과 팸플릿들을 정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문득 잠에서 깼다. 꿈에서 사막이라도 횡단하고 있었던 걸까? 태평양도 마실 수 있을 듯한 심한 갈증을 느꼈다. 컵 가득 물을 채워 연거푸 세 잔을 들이켰다. 블라인드 사이로 내다본 창밖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여행을 떠나던 날 새벽처럼. '너무 긴 꿈이었어.' 


하지만, 꿈을 깨면 과거 어느 지점에 있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냉장고에는 한가득 자석이 붙어 있었고, 거실 한구석에 펼쳐 놓은 미국 전도에는 여전히 푸른 고래가 느리게 몸을 틀고 있었다. 꿈은 아니었다. 그래, 우리의 생각이 틀렸다. 여행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 글, 그림 _ 이장희

*친구는 펭귄으로 바꾸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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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희
이장희
도시계획을 전공했으며 각종 매체에 일러스트와 칼럼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아메리카, 천 개의 자유를 만나다』,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사연있는 나무이야기』 등이 있다.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스케치여행을 다니며, 사라져 가는 풍경들을 그림으로 남기기 위한 작업도 지속적으로 진행 중이다.

이미지 제공_ⓒ이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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