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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하나의 테마, 360도 관점

한옥 담벼락과 지붕의 조화
건축

새로운 살림의 공간을 위하여

"아파트조차도 우리의 주거 문화를 송두리째 바꾸지는 못했다"

by 함성호 / 2019.09.16


한옥 담벼락과 지붕의 곡선


아무리 한 나라, 혹은 한 민족의 문화가 강력한 것이라 할지라도 온전히 다른 한 민족이 오랫동안 지켜온 고유의 문화를 통째로 바꿀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의 삶이 아무리 예전과 달라졌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것을 가지고 있고 그 삶을 통해 외래적인 것들을 끊임없이 변형, 변화시키고 있다. 일례로 우리는 지금의 서울이 완전히 서구의 모습과 같다고 생각하지만 서구인들이 보기에 서울은 너무나도 신기하고 흥미진진한 모습이다. 간혹 외국에서 온 손님들을 안내하다보면 그들은 서울의 거리에 열광한다. 그 열광이 우리에게 전적으로 탐탁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워 할 이유는 없다. 그들과 우리는 근대화의 과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도시를 보는 서구인들의 열광에는 그들이 근대를 이루면서 합리화할 수 없었던 미덕이 분명 존재한다. 우리 도시가 그 미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단지 우리가 지금 완전한 근대를 이루지 못했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이질감은 서구의 근대와 우리의 근대가 갈라지는 부분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과거와 현대가 아무 맥락 없이 공존하고, 붉은 간판이 무분별하게 난무하며, 고층아파트가 부유층의 전유물인(서구에서 아파트가 있는 곳은 빈민층의 거주지역이다) 우리의 도시적 삶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우리만의 이유가 있다. 



전통공간의 파괴 



18세기 중엽 목재의 부족으로 석탄이 새로운 대안에너지로 떠오르면서 서구는 산업혁명의 회오리에 휘말리게 된다. 영국에서 시작된 동력 혁명의 제조건이 재편되면서 가장 먼저 일어난 산업혁명이 영국의 전통적인 산업인 모직물 공업이 아니라 면공업이었다는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산업혁명의 본질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즉 영국의 면공업은 인도라는 식민지 자원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고, 결국 산업혁명은 제국주의적인 지배 논리에 의해 그 생명력을 공급받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제국주의의 피지배자로서 한국의 근대는 시작된다. 


산업혁명 당시 면직물 공장 내부 풍경

"Interior of magnolia cotton mills spinning room" ⓒLewis Hine

산업혁명기 면공업 현장 

 

서구에서는 일찍부터 활발한 중상주의 정책으로 모직물 공업이 봉건적 질서에서 탈피한 자유 농민층에 의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따라서 16세기 중엽부터 그때까지의 주요 동력원이었던 목재자원이 고갈되기 시작했고, 그로인한 에너지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했다. 또한 제국주의의 팽창 정책으로 여러 식민지에서 약탈한 자원을 효과적으로 제품화할 필요가 있었다. 동력과 막대한 자원의 효과적인 가공을 위해서 기계가 등장했고, 서구의 삶은 이 기계의 효율성에 힘입어 삶의 지형을 새로 그리기 시작했다. 자원의 원활한 수송을 위해 철도가 놓이게 되고, 건설 난이도가 높은 역사 건물이 등장하며, 대형 창고와 제품을 대량으로 판매하고 전시할 수 있는, 백화점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건물이 등장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아직은 농경 중심 사회였고, 따라서 기계를 동원한 생산 방식이 그렇게 절실히 요구되지는 않았다. 그런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서구를 모방한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강점되면서 우리의 삶은 급격히 식민지 수탈 체제로 변화해 갔다. 우리의 철도는 우리의 생산성 제고를 위해 부설된 것이 아니라 일본의 대륙 침략을 위해 놓였고, 항만 개발이나 농촌 경제의 근간인 토지 정책도 군사 시설과 물자를 확보를 위해 개악되었다. 말하자면 우리의 근대에는 우리의 삶이 몽땅 빠져버린 것이다. 

 

조선은 신분사회였지만 엄격한 사회규범으로 도덕성을 유지했다. 주거의 형태와 형식, 규모에도 그런 도덕성은 철저하게 스며들어 있다. 기둥 형태 마감재에도 제한을 두었고, 잘 지켜지지는 않았지만 종가를 제외한 사대부의 집은 단지 세 칸으로 족하다는 삼칸지제(三間之制)의 규범이 존재했다. 물론 이 삼칸에는 마루와 방 2개가 전부였지만 부엌 살림 같은 서비스 공간은 당연히 하인이나 노비들이 담당해야 했다. 말하자면 삼칸지제는 조선 사대부의 최소주의 원칙의 상징이었지 실질적인 삶의 문제는 아니었다. 


결국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도가 폐지되면서 상공업으로 부를 축적한 중인계층이 신흥 세력으로 떠오르면서 집치장의 열풍이 불기 시작하고, 당연히 중인계층이 채택한 주거형식은 부산, 원산, 인천의 개항지에 정착한 일본 거류민들의 양옥주택이 모범이 되었다. 복식도 달라졌다. 서구의 부르주아가 지금의 남성 복장의 주류인 ‘테일러드 수트’로 이전 시대의 귀족계급과 자신들을 차별화했다면 조선의 중인들은 받아들여야 할 선진 문물로서 테일러드 수트를 입었다. 그것은 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공간의 충돌은 부단히 일어났다. 

 

 

공간의 충돌 



갑오경장 이후 여성의 지위 향상도 주거 변화에 큰 몫을 담당했다. 특히 남성 중심의 농사였던 논농사의 수확 못지않게 상대적으로 여성의 농사라 할 수 있는 밭농사의 수확이 큰 환금성을 갖게 되면서, 소채류의 생산과 판매를 담당하는 여성의 행동반경이 확대되었다. 또한 산업화의 영향으로 많은 농촌 여성들이 도시로 진출하여 공장 노동자로서 농촌 가구 경제의 일익을 담당하면서 여성을 둘러싸고 있던 폐쇄적 경계선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1 


이러한 여성의 지위 변화는 먼저 복식에서 나타났다. 한복의 개량과 양장의 착용으로 대표되는 이 시기의 여성의 복식은 저고리의 길이가 길어지고 치마는 무릎 아래까지 짧아지면서 통치마가 등장했다. 이는 모두 여성의 사회 진출에 따라 활동성을 감안한 패션인데 주거에서도 여성 공간의 합리적인 해결이 요구되었다. 이제는 더이상 전통적인 내외법에 따른 남녀의 영역 구분이 불필요했다. 여성들의 생활공간인 안채와 남성들의 생활공간인 사랑채의 구분이 무너지고 여성 공간을 남성의 시선으로부터 차단하기 위한 내외담이나 내외벽과 같은 구조물도 사라지게 되었다. 


1 박부진 공간구조의 변화와 性差』 


외래의 공간과 전통 공간의 충돌을 받아들이는 모습도 계층에 따라 다양했다. 사대부 사회에서도 개화기 인사들은 기존의 전통주거에 달라진 생활 양식에 따라 차양을 설치하고, 입식 생활에 맞춰 공간을 개조해 나갔다. 신축의 경우에도 청나라 양식을 널리 따랐지 일본의 집을 모방한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중인 계급을 중심으로 자본가가 된 상류계층은 달랐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일본이 해석한 서구의 주택양식을 따랐다. 그러다가 1920년대 후반 이들의 수요에 맞춘 소위 ‘문화주택’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마루를 통한 집의 진입이 일본식처럼 복도를 통하게 되고, 화장실이 집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한편 경제적으로 중산층에 속한 계층은 사대부 집을 간소화시킨 ‘개량 한옥’이라는 주거 형식을 만들어냈다. 이들에게 있어 사대부의 권위는 계속해서 선망의 대상이었고, 1930년대에 이런 중산층의 욕망을 읽은 집장사들은 전국적으로 개량 한옥을 퍼뜨리게 된다. 지금의 가회동 일대의 한옥들은 모두 이 시기의 집장사들이 지은 개량 한옥이다. 


가회동의 한옥들

북촌 한옥마을 ⓒDavid Baron


그러고보면 전통주거 양식을 과감히 탈피한 계층은 역시 중인들이다. 오랫동안 지배계급의 하수인으로 경제적 부를 축척한 이들에게 있어 구한말의 사대부들은 허위의식에 가득찬 전근대적인 착종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서구의 주거 형식에서 자신들의 차별성을 확보하려 했다. 그에 반해 정치 경제적인 지각 변동으로 부를 축적한 중산층은 여전히 구시대적인 가치에 근거해 자신의 신분 상승 욕구를 충족하려 했고, 집장사들이 그 욕구를 부추기며 결국에는 개량 한옥이라는 엉거주춤한 주거를 낳았다. 

그러나 서민들의 주거환경은 그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1920년대부터 본격화 된 식민지 수탈로 인해 농촌 경제는 무너졌고, 결국 농민들은 농촌을 떠나 도시빈민으로 편입되었다. 이것은 당시 심각한 도시 주택난의 원인이 된다. 



아파트와 전통주거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는 1930년대 건축된 충정로 유림아파트다. 아파트 건설 열풍과 정치 사회 경제적 변동은 밀접한 함수관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주택난은 크게 4번이었다. 첫 번째는 앞서도 말했듯이 일제의 수탈로 농촌경제가 피폐해져 이농 인구의 도시 유입으로 주택난이 발생한 것이다. 이에 총독부는 1941년 '조선주택영단'을 설립하고 주택 2만 호 건설을 목표로 주택건설계획을 실시한다. 그 결과 1945년까지 모두 1만2184호가 건립되었다. 그러나 이는 집 없는 서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로 일본 관리나 직원용으로 공급된 것이었고, 나머지를 노무자 숙소로 임대했을 뿐이다. 다다미 방에 온돌방이 하나뿐이고 작은 복도 양쪽에 방을 배치한 일본식 주거 양식이었다. 지금 우리의 거실 중심형 평면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두 번째는 해방 이후 외국에서 몰려든 동포들과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들로 주택이 절대 부족했을 때고, 세 번째는 한국전쟁으로 집이 60만 채나 파괴된 때였다. 이 시기에는 그야말로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그나마 유엔의 원조를 받아 전국적으로 방 두 칸 마루 한 칸, 부엌 한 칸의 9평짜리 흙벽돌집인 '재건 주택'을 건설했다. 계획 수립 당시 100만 호였던 것이 1953년부터 1956년까지 지어진 주택 수는 19만여 호에 불과했다. 그 후 1958년 서울 종암동에 17평형 5층짜리 3개동 1백52가구의 아파트가 건설됐지만 일반인들의 아파트에 대한 거부감으로(지금 분위기와는 사뭇 달라 격세지감을 느낀다) 분양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일반인의 아파트에 대한 인식을 바꾼 것은 주택영단이 확대 개편되면서 대한주택공사가 발족한 후 1962년에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단지 개념 아파트인 마포아파트 때부터다. 


그리고 네 번째는 1970년대의 중공업 정책에 따라 이농현상이 극에 달하면서 순전히 군부의 체제유지 목적으로 이루어진 강남의 아파트 건설 붐과 새마을 운동 시기다. 그렇게 지금까지 그 열기가 식지 않고 있는 아파트는 1962년 마포아파트가 건설되기까지는 별 호응을 얻지 못했다. 방이 복도로 연결된 일본식 아파트인 영단주택도 그렇고, 1958년의 종암동 아파트도 그랬다. 아파트가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마포 형무소에서 농장으로 사용하던 자리에 건설된 마포아파트 때부터다. 건설 당시 "기름 한 방울 나지 않고 먹을 물도 모자라는 나라에서 무슨 기름보일러에 엘리베이터며 수세식 화장실이냐"는 비난이 쏟아지는 통에 애초의 설계를 수정하긴 했지만, 대학교수나 예술인, 상류층 자제들이 잇달아 입주하면서 바야흐로 아파트 시대를 연다. 


아파트로 대표되는 한국 도시의 풍경


우리는 왜 이렇게 아파트를 선호하는가? 과연 아파트는 부정적이기만 한 것인가? 우선 아파트는 전통 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로 여성에게 효율성을 부여한다.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점점 증대해 가는 현실에 비추어 이것은 가정 경제나 사회 경제에 있어서도 대단한 강점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향후에도 계속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동산 가치를 보장해 준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치 아파트에 사는 것이 지옥에 사는 것처럼 얘기한다. 지옥의 부동산 가치가 천국보다 높다면 마치 기꺼이 지옥에서 살겠다는 듯이. 


그러나 아파트를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에는 우리의 마당 중심의 전통주거의 정서가 면면히 자리하고 있다. 마당에서 대청으로, 방으로 독립적으로 들어가는 조선 주거의 형식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외국의 아파트는 우리식 아파트와는 완전히 다르다. 복도로 연결되어 있거나 거실, 주방, 식당 같은 공용공간과 방이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다. 영국의 빈민층 주거인 소셜 하우징(social housing)이 우리와 비슷한 평면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아마도 우리 아파트는 작은 공간에서 많은 방을 얻기 위해 이 모델을 차용한 게 아닌가 추정된다. 우리 아파트에서 거실은 서구적 개념의 거실이 아니라 실은 마당이다. 우리는 현관을 통해 마당으로 일단 진입하고 거기에서 다시 주방으로, 방으로, 화장실로 들어간다. 심지어 무더운 여름에 온 식구가 함께 거실로 나와 잔다. 


다시 전통주거의 평면으로 돌아가서, 아마도 서구인에게 우리의 전통주거를 보여주고 어디에서 자겠냐고 물으면 행랑채나, 곳간을 택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안채는 마치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소셜 하우징과 흡사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파트는 결코 서구의 산물만은 아니다. 아파트는 50년 동안 우리가 검증하며 때로는 거부하고, 때로는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때로는 비판하면서 가꾸어 온 우리의 문화다. 어떤 문화도 다른 문화를 통째로 바꿀 수는 없다고 할 때, 아파트조차도 우리의 주거 문화를 송두리째 바꾸지는 못했다고 말해야 한다. 


아파트는 철저히 이해득실의 대차대조표에 의해서 건설된다. 이 엄정한 경제성을 무시하고서는 새로운 살림의 공간을 위한 아무런 시도도 할 수 없다. 일단 우리의 현실을 긍정하고 거기에서 의미를 찾고 연후에 부정하고 인정하는 작업이야말로 새로운 살림의 공간을 위한 첫 번째 걸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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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평론가
함성호
1990년 <문학과 사회>여름호에 시를 발표. 1991년 <공간>건축평론신인상. 시집으로 <56억 7천만년의 고독>, <성타즈마할>, <너무 아름다운 병>, <키르티무카>가 있으며, 티베트 기행산문집 <허무의 기록>, 만화비평집 <만화당 인생>, 건축평론집 <건축의 스트레스>, <당신을 위해 지은 집>, <철학으로 읽는 옛집>, <반하는 건축>, <아무것도 하지않는 즐거움>을 썼다. 현재 건축실험집단 대표. 이미지 출처 ⓒ백다흠(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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