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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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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물에서 창작과 왜곡
예술

역사물에서 창작과 왜곡

역사를 소재로 한 대중예술의 딜레마

by 박병성 / 2019.04.08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역사가와 시인의 차이를 “역사가는 일어난 일을 기술하지만 시인은 일어날 법한 일을 이야기한다”고 했다. 시인의 작업은 개연성 있는 현실의 모방이며 여기서 예술의 미메시스 이론1이 등장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실을 기술하는 역사가보다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는 시인이 더 위대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오늘날 역사가는 과거의 사실을 기록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더 중요하게 부여받는다. E.H 카가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말했듯 역사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역사가나 시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역사를 다루는 소설이나 영화, 공연에서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태도에 대한 논란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역사물은 예술이기 때문에 개연성에 따라 역사적 사실을 재가공해도 되는 것일까? 아니면 예술이라 해도 역사적 사실은 철저히 고증하여 밝혀야 하는 것일까? 정답이 있을 수 없는 질문이지만 각자의 판단에 근거가 될 만한 사례들을 제시해 보려고 한다.


1 그리스어로 춤 · 몸짓 · 얼굴표정 등에 의해서 인간 · 신 · 사물 등을 모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예술을 모방이라고 하였다.



모든 역사물은 허구이다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을 부르는 말은 다양하다. 역사물, 시대물, 팩션(Faction)2, 퓨전 사극, 역사 판타지 등. 이는 역사적인 소재를 취하는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역사물과 시대물이 비교적 역사적인 사실에 기인해 그 시대를 고증하는 데 힘쓰는 작품이라면, 팩션은 역사적인 사실보다 작가의 상상력이 깊이 반영된 장르이고, 퓨전 사극이나 역사 판타지에 이르게 되면 역사적인 사실은 그저 작품의 배경이나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수단일 뿐 역사적 고증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2 사실(Fact)와 허구(Fiction)의 합성어, 문화예술계에서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한 새로운 장르를 뜻한다. 

 

일반적으로 드라마 <정도전> 같은 작품이 정통 역사물이라면, 드라마 <허준>이나 <대장금>처럼 기존 역사의 주변부에 머문 인물을 부각해 일부의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진행되는 작품을 팩션이라고 한다.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말투나 정서, 배경음악을 현대적인 감성으로 접근한 드라마 <다모>나, 현대에도 입헌군주제가 이어진다는 설정 하에 왕가의 사랑 이야기를 펼치는 <궁> 같은 작품이 대표적인 퓨전 사극, 또는 역사 판타지이다.


거칠게 정의해 봤지만 각 세부 역사물 장르에 대해서는 평자에 따라 이견이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기본적으로 모든 역사물은 허구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드라마 <정도전> 포스터(KBS 대하드라마 이 나라의 진정한 주인은 백성이다. 정도전), <대장금>의 이영애(iMBC.com)

▲ KBS 드라마 <정도전> ⓒKBS, MBC 드라마 <대장금>ⓒimbc.com


역사를 고증하려고 힘쓴 전통 역사물이라고 하더라도 역사적 사실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소설이든, 드라마든 영화든 또는 연극이든 역사를 소재로 할 경우 역사적인 인물들과 그가 만나는 사람들, 그들과 나눈 대화들까지 그대로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경우는 드물다. 역사물의 대부분은 매우 적은 역사적 사실과 그것을 토대로 한 작가의 상상력으로 이루어진다. 전통 사극으로 꼽히는 드라마 <정도전>만 해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지만 드라마 안에서 나누는 대사와 주변 인물, 작품에 나오는 구체적인 장소 등은 상당 부분 작가의 추측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물은 허구이다. 대중서사장르연구회에서는 사극부터 역사 판타지까지 모든 역사물을 역사허구물로 부른다. 이처럼 모든 역사물은 역사적 사실과 작가적 상상력으로 결합되어 있다. 역사물의 다양한 장르는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작가의 태도로 나뉜다.



역사 왜곡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역사물이 기본적으로 작가적 상상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장르라면 역사적 고증의 필요성이나 왜곡 논란은 무의미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역사허구물은 역사적 정보 자체가 매우 적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역사적 정보들 사이의 간극을 작가적 상상력으로 메웠다는 의미이지 역사적 정보를 다르게 바꾸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역사 판타지나 퓨전 사극은 역사적 사실보다는 상상력에 방점을 찍어 왜곡 논란에서 피해간다. 역사 왜곡은 역사 판타지 장르가 아님에도 말 그대로 역사적 사실을 다르게 서술하여 기존 역사에 대한 시각에 혼란을 주는 경우에 발생한다. 그러나 학술 영역이 아닌 창작에서 역사 왜곡을 논하는 것은 어려움이 따른다. 앞서 말한 대로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취한다고 해도 예술 작품은 창작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는 보는 관점에 따라 역사적 해석은 달라질 수 있다. 역사의 왜곡인지, 아니면 역사의 새로운 해석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생길 수 있다.

 

2013년 상영한 드라마 <기황후> 역시 역사 왜곡 논란이 일었던 작품이다. 기황후는 원나라에 공녀로 바쳐졌지만 원나라 혜종의 눈에 들어 황후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러나 드라마 <기황후>에서는 혈혈단신으로 이국에 버려져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입지적인 인물로 그렸다. 당시 고려의 왕은 폭군인 충혜왕이었으나 드라마에서는 왕유라는 인물로 바꾸고 미화했다. 드라마는 이것이 기황후의 이야기를 모티프로 했으며 실제 역사와 다른 팩션임을 밝혔다. 그러나 기황후라는 인물이 실제로 존재했고 모티프만을 따왔다고 보기에는 드라마상에서 너무나 유사한 설정과 전개가 이루어져 실제 역사와 혼동할 여지가 있다. 기황후라는 인물이 워낙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대중들의 눈높이에서 이를 판단할 능력이 확보되었다고 보기 힘들다. <기황후>는 팩션 사극을 표방했지만 이런 이유로 왜곡 문제를 피해가지 못했다.


드라마 <기황후> 포스터(대륙을 품은 철의 여인 가장 높이 가장 아름답게 핀 꽃)

▲ MBC 드라마 <기황후>ⓒimbc.com


명성황후는 더욱 복잡하다. 현재 대중들에게 명성황후는 구한말 일본과 러시아, 미국 등 열강 등의 틈바구니에서 외교술을 발휘하다가 일본 낭인들의 칼에 무참히 목숨을 잃은 국모의 이미지가 강하다. 이는 1995년 초연한 이후 지금까지도 국민 뮤지컬로 자리 잡은 뮤지컬 <명성황후>나, 2001년 이미연 주연의 드라마 <명성황후>가 만들어낸 이미지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명성황후의 역사학계 평가는 이와는 많이 다르다. 명성황후는 민씨 외척을 강화하여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었으며, 부국을 위한 외교가 아니라 철저히 자신과 자신의 일파들에게 유리한 정치로 백성들을 곤란에 빠뜨렸다. 무속에 빠져 무녀를 궁에 들여 국고를 탕진하여 국력을 약화한 인물로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뮤지컬이나 드라마 <명성황후>를 역사 왜곡으로까지 보기 어려운 이유는 당시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를 남긴 자료를 보면 영민한 외교가로서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비록 주류 역사가의 평가는 아니지만 난세에 균형 외교를 펼친 인물로서 명성황후를 평가하기도 한다.


뮤지컬 <명성황후> 공연컷

▲ 뮤지컬 <명성황후> 사진제공: 에이콤



현재와 긴밀하게 연결된 역사


이 외에도 역사적 사실을 다룬 작품들은 심심치 않게 역사 왜곡의 문제가 불거진다. 최근 개봉한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은 마치 엄복동의 우승이 한국 독립에 영향을 주었다고 암시했고, <군함도>는 하시마섬 한국인 징용 문제를 역사의식 없이 극적 장치로만 이용했다고 해서 역사 왜곡 논란에 휘말렸다. 배우 손예진의 연기가 빛났던 영화 <덕혜옹주> 역시 조선의 마지막 황녀 이덕혜를 독립지사로 그려 사실과 다르다는 학계의 비난을 받았다.


이처럼 역사 왜곡 논란을 일으킨 사례들을 보면 일본강점기 또는 해방 후의 역사적 사건을 다룬 작품들이 많다. 일반적으로 역사물과 현대물을 나눌 때 세 세대 정도를 기준으로 삼는다. 그 이전의 사건을 다루는 것을 역사물, 그 이후의 작품을 현대물로 본다. 한 세대를 30년이라고 한다면 대략 100년 정도가 지난 시대를 다루어야 역사물에 포함된다. 중요한 것은 물리적인 시간으로서의 삼대가 아니라 삼대를 규정한 이유이다. 그 이유는 적어도 세 번의 세대가 흘러가야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연관성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역사적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 포스터(이천만 조선이 열광한 위대한 승리 자천자왕 엄복동 일제강점기,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한일전이 있었다!), 영화 <군함도> 포스터(1945년, 지옥섬 군함도 그곳에 조선인들이 있었다 류승완 감독 작품 군함도)

▲ 일제강점기를 다루고 있는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 ⓒ(주)셀트리온엔터테인먼트, 군함도 ⓒ(주)외유내강, CJ 엔터테인먼트


한때 경성 시대를 다룬 연극을 연이어 선보이던 연출가 성기웅은 1930년대를 주목하는 이유에 대해서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의 근원이 이 시기에 비롯된 것 같아서라고 답했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일본과의 역사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전근대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회에 근대가 뒤섞이면서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1930년대 경성 풍경이 지금과 다르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본강점기부터 해방 후의 역사물에 좀 더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이 현재 우리에게 밀접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고 아직도 우리 주변에 그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된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물에서 창작의 자유는 중요하다. 그러나 현재와 연결된 사건을 다룰 때는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더욱 예민하고 신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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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박병성
박병성
공연 칼럼니스트.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연극학을 전공하고,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 편집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국장으로 있다. 음악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방식에 관심이 많다. 160여 년간 발전시켜온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극과 음악의 유기적인 결합 방식을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방식을 실험하는 작품을 좋아한다. 판소리를 세계적이고 모던한 예술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활용한 극에 관심이 많다. 공연을 보고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고 각종 매체에 공연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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