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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다각도의 다양한 세상이야기

우리는 복수의 육체를 갖고 있다
철학

“우리는 복수의 육체를 갖고 있다”

몸의 발견

by 노태맹 / 2019.02.11


롤랑 바르트(1915-1980)는 한 책에서 “어떤 육체(corpus)? 우리는 복수의 육체를 갖고 있다. 나는 소화시키는 육체를 하나 갖고 있고, 욕지기가 나는 육체를 하나 갖고 있으며, 편두통을 일으키는 세 번째 육체를 갖고 있다... 만약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두 개의 지역적인 육체를 갖고 있다. (신경이 예민하고 피곤한) 파리(Paris)식 육체와 (휴식하고, 평온함을 느끼는) 시골 생활의 육체를.”이라고 썼다. ‘복수의 육체(몸)’를 우리는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복수의 육체



영혼을 담은 우주의 일부에서

의학적 시선 속 분절 대상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물어보자. 우리가 몸(corpus)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이 당연하게 보이는 질문이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몸에 대해 롤랑 바르트처럼 대답하는 것은 정당하고 올바른 것일까? 사실 많은 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몸에 대한 이해는 그 사회와 시대가 만들어내는 이해 양식에 따라 다르다. 각각의 시대와 사회는 몸에 서로 다른 의미와 가치를 새긴다. 이러할 때 ‘몸 자체’에 대한 일반적 이해라는 것은 불가능한 질문으로 보이고 바르트의 대답은 부당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과거로 돌아가 보자.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1908-2009)가 보여준 태평양 한 섬의 카나카 족의 예처럼, 고대 사회는 인간의 몸을 우주와 유기적으로 연관된 것으로 보았다. 카나카 족은 식물계의 상징 체계를 빌려와 인간의 피부는 나무 껍질로, 살과 근육은 과육과 씨로, 소장과 대장은 칡 뿌리와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인간의 몸을 자연과의 유비로써 이해한 것은 우리 전통 의학의 인식 체계이기도 했다. 음양 오행이나 사상(四象)의학은 그러한 유비에 바탕을 두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사고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현재적 이해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시선의 변화와 연관되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결정적인 기여는 서양 해부학의 발전과 생의학적 지식의 발전이었다.


음양오행(목>화>토>금>수 상생, 목>토>수>화>금>목 상극), 사상의학(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

▲ 몸을 자연계에 빗대어 인식한 한국 전통 의학 '음양 오행'과 '사상 의학'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몸의 발견’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몸은 늘 있어왔지만 자연과 우주의 한 부분으로서, 영혼이 스며든 그릇으로만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영혼은 말을 모는 기수(騎手)이고 몸은 말과 같다고 하였다. 몸이 있음으로써 영혼이 있지만 몸은 여전히 영혼에 종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근대의 몸은 해부대 위에 누운 몸으로 대상화되고 근대의 언어로 분절되기 시작했다.


미셸 푸코(1926-1984)는 『임상의학의 탄생』에서 18세기, 19세기 의학을 ‘시선의 권력’이 팽배하던 시기라고 부른다. “과거와 똑같은 인식의 대상을 놓고도 갑자기 의학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유기체의 질병이나 병리학적 형태 속에서 일정한 규칙성을 갖는 것에만 눈을 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질병의 고통은 인간의 육체 위에서 정확하게 분절되기에 이르고, 질병의 배치 또한 처음부터 엄밀한 해부학의 수술대 위에서 결정되기 시작한다.” 몸에 대한 이러한 ‘의학적 시선’은 자신만이 진리를 말한다고 세상에 주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의학적 지식의 영역으로 포섭되지 못한 대상들이 의사들의 시선과 언어에 포착되기에 이른 것을 푸코는 몸에 대해 새로운 '공간화(spatialisation)'와 ‘언어화(verbalisation)'가 이루어 졌다고 설명한다. 문제는 이러한 시선과 언어가 의사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반적 시선과 언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몸은 이제 자연의 한 부분이거나 영혼의 그릇이 아니라 분절화된 대상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질병은 ‘표 만들기’ ‘그림 그리기’를 통해 공간화하고, 그 후 하나의 표 안에서 자리 잡은 질병의 본질이 인간의 몸 위에서는 어떻게 분절되고, 그 질병이 어떤 경로를 통해 인간의 육체를 점유하는지를 과학은 밝히고자 한다고 푸코는 말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는 왜 일어난 것일까? 푸코에 따르면, 18세기 근대 국가 등장에 따른 인구의 증가와 그 인구의 관리를 통해 국가의 힘을 키우고자 했던 지배 권력의 사회경제적 요청 때문이었다. 의학은 질병의 정치학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최초 수용소에 불과했던 병원은 질병 치료뿐만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사람을 만들고, 노동력을 끌어내기 위해 사회구성원을 치료하고 교화시키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었다.



현대의학의 발전인가

몸을 도구로 한 마케팅 전략인가


몸에 대한 우리 자신의 배려는 이제 육체를 단련하는 스포츠, 등산, 혹은 다이어트, 성형, 화장하기 등등에 집중된다. 몸은 우리의 욕망이 지속되기 위하여 항상 쇄신되어야 할 것으로 사고된다. 자본은 이러한 욕망에 기생하는 동시에 그 욕망을 더욱 더 분화시킨다. 몸의 죽음과 노화, 그리고 질병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을 이용하여 제약 산업은 많은 돈을 긁어 모은다. 더 나아가 새로운 병을 만들거나 기존의 병을 더욱 더 과장한다. 두려움이 마케팅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가령 혈압 기준의 하향에 대해 일본의 한 의사는 "고혈압 기준의 하향 조정은 제약회사 농간"이라며 "일본에서 1988년 2000억엔이었던 혈압 강하제 매출이 2008년엔 1조엔을 넘어섰다"고 비판하고 있다. 많은 국제 학회에 제약사들이 돈을 대고 있고 세계보건기구(WHO) 예산의 70% 이상은 글로벌 제약사의 기부로 채워지고 있다고 한다. (매일경제 2017.11.15) 2005년 기준 세계 제약업의 시장규모는 5천억 달러였다. 이반 일리치(1926-2002)는 "날로 점증하는 의학 기술이 인간의 삶 자체를 의학화(medicalising)하며 이로 인해 고통과 죽음에 대처하는 인간의 수용력을 위태롭게 하고, 너무나도 많은 정상적인 사람들을 환자로 만들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몸의 의학화가 더 적절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운동하는 여자, 의료기기


이 글을 쓰면서 나는 하나의 장면을 지속적으로 떠 올리고 있다.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그 장면은 병원 침대 위에 자궁 속의 아이처럼 웅크린 채 숨만 쉬고 있는 한 할머니다. 자기를 표현할 수도 없고 소통도 할 수 없는, 의학적 시선으로도 더 이상 해 줄 것이 없는 그 할머니의 몸은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그 무엇’일 뿐이다. 또 하나의 장면을 떠 올려 보자. 100세가 다 되어가는 한 할머니는 치매도 없고 현재 큰 문제도 없지만 사는 것이 너무 지겨워 내가 회진 갈 때 마다 내 귀에다 대고 "조용히 죽여 달라"고 한다. 가벼운 그 육신마저도 또 같은 하루를 견디기에 너무 무거운 것이다.


맨 처음 글을 시작하면서 나는 우리가 몸(corpus)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이 당연하게 보이는 질문이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라고 의문을 제기했었다. 사실 몸은 우리의 정신이 질문할 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아플 때 우리의 정신에 바로 나타난다. 몸의 나타남은 질문이 아니라 대부분 고통으로부터 인 것이다. 감각의 주어짐 없이 오직 정신이 ‘몸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는 정신에 병이 들었거나 우리가 몸에 어떤 이데올로기적 변형을 기획할 때인지 모른다. 지금 우리는 너무 많은 몸을 가지고 있거나, 어떠한 몸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롤랑 바르트가 옳았다. 우리는 복수의 몸을 갖고 있다. 나는 소화시킬 음식을 향해, 욕지기를 퍼부을 누군가를 향해, 편두통을 일으키는 나 자신이나 그 누군가의 고통을 향해 열려 있는 여러 개의 몸을 갖고 있다. 몸은 타자를 통해서만 현현하는 것이다. 몸의 ‘의학화’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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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노태맹
노태맹
본업은 시인이라고 스스로 말하지만 시를 자주 쓰지는 않는다. 시는 시 이전이므로... 어쩌다가 영남대학교 의학과를 졸업하여 시골의 요양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또 어쩌다가 계명대학교와 경북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스피노자주의자라고 말하고 다니지만 정작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아직 모른다. 팔리지 않은 시집만 세 권 냈다. 『유리에 가서 불탄다』 『푸른 염소를 부르다』 『벽암록을 불태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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