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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들은 어떻게 여름에 얼음을 사용할 수 있었을까?

여름 사치품으로 사용된 얼음

박문국

2018-09-03


어떤 임금의 여름나기 방법


1504년 6월 25일, 창경궁에서는 대비의 생일을 맞이하여 큰 잔치가 열렸다. 이날의 잔치는 평소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는데. 더위가 한창인 7월임에도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더위를 느낄 수 없었다. 이유인즉슨, 임금의 명에 따라 경희루 사방에 각각 천 근이나 되는 구리 쟁반을 설치하고 그 위에 얼음을 가득 얹어 놓았기 때문이다.


얼음이 녹으면서 주변이 시원해지니, 현대로 치면 얼음이 일종의 에어컨 역할을 셈이다. 방 한 칸을 이렇게 열을 식힌 경우는 있었으나 누각 전체를 얼음으로 식힌 사치를 부린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왕은 이런 기행 외에도 얼음으로 쟁반을 만들어 승지들이 따다 주는 포도를 올려 먹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이때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얼음 채운 파란 알이 달고 시원해

옛 그대로인 성심에 절로 기쁘네

몹시 취한 주독만 풀어주는 게 아니라

병든 위 상한 간도 고쳐주네


이 임금의 이름은 연산군. 한국사의 폭군을 이야기할 때 빠짐없이 거론되는 인물이다. 시의 내용이 무상하게 연산군은 이 시를 쓰고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왕좌에서 쫓겨나게 된다.



조선 시대 과학 기술의 집약체, 빙고


냉장고가 없던 시절 연산군은 어떻게 얼음을 얻을 수 있었을까? 답은 바로 ‘빙고’에 있다. 빙고란 겨울에 얼음을 채취하여 가을까지 보관하는 얼음 창고를 뜻한다. 흔히 석빙고라 불리는 돌로 제작된 빙고가 유명하나 과거에는 제작상의 어려움 때문에 나무로 만든 목빙고가 더 흔히 쓰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목빙고는 재료의 한계상 현재까지 남아있는 게 거의 없다.


달성 현풍 석빙고

▲ 보물 제673호 달성 현풍 석빙고 (達城 玄風 石氷庫) ⓒ문화재청


빙고는 삼국시대부터 쓰였다. 《삼국사기》에 신라 지증왕 때 얼음을 저장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전통은 고려를 거쳐 조선으로 이어진다. 특히 조선 시대에는 《경국대전》에 따로 빙고에 관한 규정을 적어 놓을 정도로 체계적인 관리가 이뤄졌다. 한성에서는 주로 세 개의 빙고가 사용되었는데 왕실에서 사용하는 얼음을 보관하는 ‘내빙고’, 국가 제사 때 쓰는 얼음을 보관하는 ‘동빙고’, 그리고 신하들에게 나눠줄 얼음을 보관하는 서빙고였다.


이중 규모가 가장 큰 것은 서빙고였다. 이 한 구역에만 약 12만 정의 얼음을 보관했다고 한다. 1정의 크기가 정확히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보관하는 얼음은 최소 두께가 12cm, 둘레가 180cm는 되어야 했으니 결코 작은 크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충남대에서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빙고에 보관한 얼음은 6개월간 손실률이 0.4%에 불과할 정도로 보존 성능이 뛰어났다. 전근대 시절에 이처럼 완벽하게 얼음을 보관할 수 있었던 건 빙고의 과학적 구조에서 기인한다.


빙고의 천장은 아치형인데 아치 사이마다 움푹 들어간 공간을 만들어 두었다. 이 공간은 환기 구멍과 연결되어 있어 밖에서 문을 열 때마다 들어오는 더운 공기가 내부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빠르게 외부로 나가게 된다. 바닥은 경사가 지게 만들어 놓아 녹아내리는 수분이 바로바로 배수구를 통해 흘러나가게 했다. 또한, 저장할 얼음과 얼음 사이에 왕겨와 볏짚 등을 채워 넣어 보존 성능을 더욱 높였다.


달서현풍석빙고내부, 석빙고봉토위의환기구

▲ 석빙고 내부 ⓒ문화재청(좌), 석빙고 봉토 위의 환기구 ⓒ문화재청(우)


이처럼 빙고는 복합적인 상황을 고려해 과학적으로 지어진 창고였다. 단순히 외부의 열을 차단하는데 그치지 않고 냉방 역할을 톡톡히 해내 오랜 기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백성들의 눈물로 이뤄진 벌빙


빙고는 시대를 앞서간 과학적 구조를 자랑하지만, 얼음을 보관하는 최초의 과정, 겨울철 얼음을 빙고로 옮겨 보관하는 과정은 과학 기술과 거리가 멀었다. 하천의 얼음이 가장 단단하게 어는 엄동설한에 사람의 힘을 이용해 얼음을 잘라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천의 얼음을 잘라내는 작업을 ‘벌빙’이라 지칭했는데 이를 담당하는 것은 장빙군이라는 이름으로 징발된 백성들이었다. 벌빙 과정은 고되기 그지없었다. 얼음이 단단하게 얼 때까지 강가에서 노숙하는 건 기본이고 벌빙 과정에서 동상을 입는 경우도 허다했다. 심하게는 얼어 죽는 일도 적지 않았으니 장빙군으로 징발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때문에 겨울철이 되면 벌빙 부역을 피해 도망가는 남성들이 적지 않았고, 여기에서 빙고가 청상과부를 만든다는 ‘빙고청상(氷庫靑孀)’이란 사자성어가 유래하게 된다.


하천의 얼음을 잘라내는 벌빙

▲ 하천의 얼음을 잘라내는 벌빙 (안동 석빙고 장빙제) ⓒ안동축제관광재단 홈페이지 (http://www.aftf.or.kr/)


벌빙 작업에 대한 비판은 조선시대 내내 끊임없이 등장한다. 조선 전기, 세종대왕 때 특히 반발이 심했는데, 사간원은 다음과 같이 벌빙에 많은 백성들의 희생이 따르는 현실을 비판하고 고통을 경감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백성들의 원망하는 것은 춥고 더운 때에 더 절실하옵니다. 국가에서 얼음을 저장할 때 으레 기내의 백성들을 사역시키는데 (중략) 그 괴로움이 막심하옵니다. 대저 얼음을 저장하는 것은 음·양을 잘 조화시켜 화목함을 부르자는 것이온데, 그보다 앞서 백성들을 사역시켜 몹시 추운 날씨에 원망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옳겠사옵니까.

-《세종실록》, 세종 20년 11월 20일 기사


애민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세종대왕이 사간원의 간언을 가볍게 듣지는 않았겠으나 가혹한 벌빙의 현실은 개선되지 않았다. 장빙군에게 따로 술과 고기를 내리는 등 좀 더 나은 대우를 보여주기만 했을 뿐 노역의 강도 자체는 그대로였다. 여름철 제사나 사신 접대 등에 얼음의 존재가 너무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후로도 조선 시대 내내 장빙군과 벌빙에 대한 반대 의견이 이어졌으나 조선 멸망 직전까지 고통스러운 벌빙 작업은 쭉 이어졌다.



빈부격차를 드러낸 얼음


백성들의 땀과 눈물로 힘들게 채취한 얼음은 앞서 언급했듯 용도에 따라 각각 다른 곳에 보관되었다. 이중 서빙고에 보관된 얼음은 왕실 종친이나 고위 관료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임금이 하사한 빙표를 서빙고에 가져가 얼음과 교환하면 되었다. 이를 ‘반빙’이라 부른다.


얼음을 백성들의 눈물이라 생각해 누빙이라 부르며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관료들은 여름철에 얼음을 받아 각자 요긴하게 사용하였다.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얼음을 잘게 부수어 화채를 만들어 먹는 것이었다. 또 연산군만큼은 아니지만 나름의 사치를 부리는 형태도 존재했는데, 가장 유명한 방식은 얼음에 비단옷을 입혀 죽부인처럼 껴안고 자는 빙낭, 얼음으로 병풍을 만들어 방안을 식히는 빙병 등이 있었다. 이 정도로 얼음을 사용한다면 대단한 세도 가문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여름철 얼음의 가치가 높았던 점을 이용해 큰돈을 번 인물도 있었다. 계유정난의 공신 중 하나인 봉석주란 인물은 재산 불리기에 재능이 있었는데, 그가 돈을 버는 방법의 하나가 빙표를 민간에 파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빙표뿐 아니라 사정상 빙표를 사용하지 못하는 관료의 빙표까지 싸게 사서 시장에 내놓곤 했다. 이처럼 사적으로 얼음을 관리하는 일은 점차 늘어나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지는 임진왜란 이후에는 사빙고라 불리는 사설 빙고까지 등장하게 된다. 여름에 얼음을 즐기는 대상이 점차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여름철의 얼음은 어디까지나 부자들의 전유물이었다. 가난한 백성들은 정작 얼음 채취에 희생당하고 정작 사용할 수 없었다. 조선 후기의 학자 김창협이 지은 한시 〈착빙행〉 에서는 여름철 얼음의 양면성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전략)

고대광실 오뉴월 무더위 찌는 날에

여인의 하얀 손이 맑은 얼음을 내어오네

칼로 그 얼음 깨 자리에 두루 돌리니

멀건 대낮에 하얀 안개 피어나네

왁자지껄 이 양반들 더위를 모르고 사니

얼음 뜨는 그 고생을 누가 알아주리

그대는 못 보았나

길가에 더위 먹고 죽어 뒹구는 백성이

지난 겨울 강 위에서 얼음 뜨던 자들인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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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박문국
박문국

역사저술가. 숭실대학교에서 문예창작학과 사학을 전공했으며 저서로 『한국사에 대한 거의 모든 지식』 『박문국의 한국사 특강-이승만과 제1공화국』등이 있다. 통념에 따른 오류나 국수주의에 경도된 역사 대중화를 경계하며, 학계의 합리적인 논의를 흥미롭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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