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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계]현대디자인의 생태학

인터페이스 또는 피부로서의 디자인

최범

2018-01-04

 

주체와 환경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
생태학의 창시자인 에른스트 헤켈의 이 말은 오늘날 더 이상 과학적으로 타당한 명제가 아니라고 한다. 현대 생물학의 관점과는 별개로, 내가 이 명제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개체와 계통이라는 상호 구조로 생물학적 발생을 설명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즉 계통을 통해서 개체를, 개체를 통해서 계통을 파악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개체를 주체로, 계통을 환경으로 치환해보면, 이 명제가 일단 형식적으로는 꽤 논리적인 구조를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나는 이 명제를 생물학적으로가 아니라 철학적으로 수용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주체의 관점에서 보면 환경은 세계이며 환경의 관점에서 보면 주체는 구성 요소이다. 이처럼 주체와 환경이 상호작용하면서 하나의 체계를 이루는 구조가 바로 생태계이다.
물론 이러한 구조는 근대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서구의 근대란 주체를 단위로 삼고, 세계를 환경으로 설정함으로써 구축된 세계이다. 먼저 주체는 데카르트의 정의대로 정신적으로는 사유(Les Cogitans)를, 물질적으로는 일정한 연장(Les Extensa)을 가진 존재이다. 그러한 주체에 대응되는 세계 또한 일정하게 한정되는데 그것이 바로 뉴턴에 의해 정식화된 기계적 세계관이다. 이에 따르면 세계는 비록 양적으로는 무한할지라도 질적으로는 유한하다. 칸트는 ‘세계 내 존재’인 인간이 세계 자체를 알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세계 자체는 우리의 인식 범위를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칸트는 그러한 궁극적 실체로서의 세계를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종교적 믿음의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철학적 인식의 영역에는 포함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근대 세계는 이러한 인식적, 구조적 틀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리학적으로 유한하며, 철학적으로 인식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세계이다.

 
  • 서구 근대의 기계론적 세계관의 토대를 마련한 물리학자 뉴턴과 철학자 데카르트서구 근대의 기계론적 세계관의 토대를 마련한 물리학자 뉴턴과 철학자 데카르트

그러므로 근대인에게 세계는 일정한 한계를 가진 세계이다. 이것은 내적 세계이든 외적 세계이든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세계 내 존재’인 것은 우리가 ‘주체 내 존재’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세계는 주체의 외연적 반복이며 주체는 세계의 내재적 반복이다. 헤켈의 명제는 이렇게 철학적으로 해석할 때 구원될 수 있다. ‘개체 발생이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는 말을 주체와 환경의 관계로 번역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개체 개념은 계통 개념과 동시에 발생하며 상호작용한다. 우리가 한정된 만큼 세계도 한정된 것이라는 이야기는 사실상 근대적인 주객 동일성이자 신인동형동성론(神人同形同性論, Anthropomorphism)이며 상응이론(Correspondence Theory)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동양적인 세계관, 즉 삼라만상, 무궁무진, 억조창생의 세계와는 다르다. 동양적인 세계에는 주체도, 객체도 없다. 그것은 서로 침투하며 무한하다. 하지만 근대 세계는 한정된 주체이며 환경이고, 생태이며 우주이다.

현대디자인의 세계관
“신은 자연을 만들었고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
다른 한편으로 근대적 세계관은 신과 인간의 영역을 구분함으로써 성립된다. 신의 영역은 신성한 것이고 인간의 영역은 세속적인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영역, 즉 인공적인 세계가 디자인의 세계이다. 물론 자연은 인공의 외부, 즉 인식론적 외부로서 항시 존재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연이 그대로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근대 세계는 바로 그러한 자연마저 인공화함으로써 성립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 보드리야르는 오늘날 순수한 의미에서의 자연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 독일 데사우 바우하우스(1926년)
  • 울름조형대학(1953년)
    독일 데사우 바우하우스(1926년)와 울름조형대학(1953년)

마찬가지로 현대디자인은 인간을 주체로, 세계를 환경으로 인식함으로써 성립한다. 그런데 흔히 현대디자인의 출발로 보는 바우하우스에서는 아직 이러한 관점이 명료하지 않았다. 바우하우스는 출발 당시 전통적인 공예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만큼 당시의 세계에 대한 이해가 다소 막연하였다. 『바우하우스 선언문』(1919년)은 회화, 조각, 건축의 통일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러한 종합예술로서의 건축이 자리할 세계에 대한 인식은 아직 뚜렷하지 않았다. 나중에 ‘예술과 기술의 새로운 통일’(1923년)이라는 명제를 통해서야 마침내 산업사회라는 환경과의 조우를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2차대전 이후 서독에서 등장한 울름조형대학(Hochschule für Gestaltung Ulm)은 디자인을 환경으로부터 정의하였다. ‘환경조형(Umweltgestaltung)’이 그것이다. 바우하우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뉴 바우하우스’라고 불린 울름조형대학은 그 점에서 바우하우스와 달랐다. 초대 교장인 막스 빌(Max Bill)에 의해 제시된 ‘환경조형’이라는 개념에는 ‘스푼에서 도시까지’라는 설명이 따라붙었다. ‘환경조형’에서 ‘환경(Umwelt)’이란 우리를 둘러싸고(Um) 있는 세계(Welt)를 가리키며, 조형(Gestaltung)은 디자인의 독일식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우하우스가 20세기 전반에 디자인이 처했던 상황을 보여준다면, 울름조형대학은 2차대전 이후 달라진 디자인의 위상을 증명한다. 이리하여 오늘날 디자인은 주체를 중심으로 환경을 조형하는 행위가 되었다.

 
  • 로그너바드 블루마우 호텔 /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 훈데르트바서 타워 / 쿤스트하우스 빈훈데르트바서의 건축물. (왼쪽상단부터) 로그너바드 블루마우 호텔©Intentionalart /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 훈데르트바서 타워 / 쿤스트하우스 빈©Schwingenschloegl

인터페이스 또는 피부로서의 디자인
“인터페이스는 물질적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신체, 도구로서의 대상, 특정 목적을 지닌 행위가 상호작용하는 차원이다. 이것은 물질적 인공물뿐만 아니라 기호학적 인공물, 이를테면 커뮤니케이션 정보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디자인의 본질적 영역이다.”(기 본지페, 『인터페이스』 중에서)

울름조형대학 교수를 지낸 기 본지페(Gui Bonsiepe)는 디자인을 이렇게 정의한다. 그에 의하면 디자인은 주체와 환경 사이의 인터페이스이다. 그런 점에서 근대적인 인간관과 세계관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현대디자인의 그러한 성격을 가장 흥미롭고 시적으로 표현한 사람은 오스트리아의 미술가인 훈데르트바서(Hundertwasser)이다. 그는 인간에게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피부가 있다고 주장했다.

제1의 피부: 표피
제2의 피부: 의복
제3의 피부: 집
제4의 피부: 사회적 환경과 정체성
제5의 피부: 글로벌 환경과 생태주의

훈데르트바서는 오늘날 예술이 이러한 피부를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디자인을 피부 또는 껍질로 보는 관점은 디자인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말했다시피 피부는 주체와 환경 사이의 인터페이스로서의 디자인을 가장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현대 소비사회에서 그것은 장 보드리야르의 말마따나 하나의 기호 가치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디자인의 인식론적 구조와 사회 윤리적 문제는 일단 별도의 논의가 필요한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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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최범
최범

디자인 평론가. 홍익대 산업디자인과와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하고 <월간 디자인> 편집장을 역임했다. 현재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PaTI) 디자인인문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며, 『한국 디자인을 보는 눈』 『한국 디자인 어디로 가는가』 등 여러 권의 평론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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