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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소실-‘나’를 지우는 병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겼다고 하는 건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단기기억이 상실된 것이다. 그래도 우린 필름이 끊긴 상태에서도 집은 잘 찾아간다

박재용

2017-10-10

기억의 소실-‘나’를 지우는 병

기억의 형태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겼다고 하는 건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단기기억이 상실된 것이다. 그래도 우린 필름이 끊긴 상태에서도 집은 잘 찾아간다. 왜냐면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단기 기억은 상실되지만 장기 기억 저장소는 문제가 없어 택시나 버스를 타고 혹은 지하철을 타고 집까지 가는 과정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술이 단기 기억을 방해하기 때문에 내가 술집에서 계산을 했는지 안 했는지, 누군가와 왜 시비가 붙었는지 등은 기억하지 못한다.

 

사람, 사물, 상황, 감정 등에 대해 우리의 뇌는 두 가지 형태로 기억한다.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이다. 이 둘은 뇌에서 기억하는 체계가 서로 다르다. 단기기억은 그야말로 잔상이다. 뇌의 신경세포 말단에서 신경전달물질이 좀 더 많이 나올 뿐이다. 그러나 단기기억이 장기기억으로 전환될 때는 뇌세포에서 회로를 만드는 유전자가 활성화되어 새로운 신경 회로가 생긴다. 단기기억은 우리의 뇌 속에 새로운 회로를 만들지 않지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아주 강렬한 자극이나 반복되는 기억은 뇌에 새로운 회로를 만든다. 당신이 오늘 만난 이가 특별하고 그와의 즐거울 앞날을 생각하면, 생각하는 만큼 뇌는 자극을 받고, 이러한 지속적인 자극은 새로운 회로를 만든다. 잠시 스친 타인이 당신에게 의미가 없다면, 당신은 그에 대해 지속해서 생각하지 않고, 뇌는 자연히 그를 위한 회로를 만들지 않음으로써 기억을 증발시킨다. 그래서 단기기억은 쉽게 잘 사라지고 장기기억은 뇌 속에 오래 자리 잡게 된다.

 

뇌모양 사진

▲ © Martin420

 

뇌가 이렇게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을 나눈 것은 스스로 유한함을 알기 때문이다. 스쳐 지나간 모든 것을 영원히 기억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단기기억은 증발한다. 그러나 장기기억조차도 우리 뇌에는 너무 많다. 인간관계를 끝없이 넓힐 수 없듯이, 뇌도 장기기억을 무한히 보관할 순 없다. 그래서 뇌는 장기기억 중 근래 자주 떠올리지 않는 일들을 삭제한다. 마치 컴퓨터 하드 디스크의 파일을 정리하듯이 소거하는 것이다. 당신이 지금의 행복함에 취해 과거의 사랑을 떠올리지 않을수록 그와 걷던 거리의 풍경이 사라지고, 그와 마시던 맥주의 이름이 사라지고, 그의 입술과 손가락이 사라진다. 어느 날 그를 다시 떠올리고 그때의 행복을 복기하면 그와 연관된 기억들이 하나씩 다시 떠오르기도 한다. 뇌 깊은 곳의 잠재된 추억들이 기억의 줄에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억들은 예전처럼 선명하진 않다. 그의 얼굴도 선명하게 기억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두리뭉실해진다. 그리하여 우연히 그 때의 사진을 찾아 얼굴을 보면 당신의 기억과 다른 모습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날이 쌓일수록 장기기억도 쌓이고, 그중 먼지가 내려앉은 오래된 기억들이 어느새 사라지면 그 자리를 다른 기억들로 채워간다.

 

거리에 앉아 있는 노인

 

치매, 나를 조금씩 지우는 병

 

이런 장기 기억이 급격히 소실되는 것을 우리는 치매라 한다. 가장 많은 원인으로는 알츠하이머병이 있고 그 외에도 다른 원인이 있을 수 있다. 치매 증상은 초기에는 단기기억 상실로 시작하다가 악화되면 혼란, 격한 행동, 조울증, 언어장애, 장기기억상실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그중 핵심적인 증상은 기억력의 감퇴다. 슬픈 일이다.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기억에서 찾는다. 내 몸을 이루는 세포가, 내 몸을 이루는 원자들이 무수히 교체된 후에도 내가 나일 수 있는 것은 스스로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매는 이런 기억을 사라지게 한다. 내가 누구의 자식인지, 내 자식이 누군지, 가장 친한 친구가 누구고 사랑하는 이가 누군지를 잊는다. 심해지면 옷 입는 법, 밥 먹는 법 등 수천 일의 시간 동안 매일 해왔던 일의 기억까지도 사라진다.

 

그리하여 나의 삶은 단속적이게 된다. 사실 우리의 삶은 원래 단속적이다. 느끼기에는 연속된 나로 살아온 것 같지만, 사는 동안 하나둘 잊히다가 차마 잊히지 못한 기억들만 앨범에 갇힌 사진처럼 우리의 머릿속에 머문다. 그리고 우리의 뇌는 그 스냅사진과 같은 단절된 기억들을 엮어 영화를 보여준다. 영화가 1초에 24프레임을 보여주어 단절된 사진의 연속을 하나의 이어지는 영상으로 속이는 것처럼, 우리의 뇌는 단절된 기억의 파편을 이어 우리의 삶이 강물이 흐르듯 이어져 온 것처럼 속인다.

 

필름

 

사진첩

 

치매는 우리의 생을 관통하는 영상에서 사진을 하나씩 지우는 것이다. 어제는 일 년 전 아들과의 저녁을 지우고, 오늘은 10년 전 남편과의 사별을 지운다. 매일 하나씩 지워지는 사진으로 인해 이제 나의 인생은 중간중간 덜컥거리는 영상이 되고, 마침내 더 이상 영상이 아닌 사진첩이 된다. 그리고 그 사진첩에서도 하나씩 사진이 사라지고 몇 장 남은 사진만 빈 여백 사이 점점이 박혀있게 된다. 그리하여 내가 얼마나 오래 살아왔는가도 모르게 된다. 삶이 모두 지워져 마치 어린 아이와도 같아진다.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고 아주 먼 옛날 고왔던 시절의 어머니만 기억나 어릴 적 어머니와 같이 부르던 동요를 나이든 입으로 부르기도 하고, 주름진 얼굴로 걱정스레 나를 보는 옆지기는 알아보지 못하지만, 수십 년 전 연애 시절 그와의 추억은 가끔씩 살아나 지금 옆에 있는 그 대신 젊은 시절의 그를 그리기도 한다.

 

치매에 걸리면 장기기억 중에서도 얇은 기억들이 먼저 사라진다. 남는 건 아주 두껍고 촘촘한 그물 같은 기억들이다. 기억의 순간이 너무도 강력했기에, 매번 되돌려 떠올렸기에, 다른 기억과 계속 이어졌기에 아주 촘촘한 기억만이 남아서 나를 ‘나’이게끔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그 기억들마저 하나씩 사라지고, 나도 사라진다.

 

불행하게도 알츠하이머병은 완치가 되지 않고, 병의 진행을 멈추는 것도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다만 증상을 완화하는 약물치료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약 8~10년간의 긴 시간 동안 진행되면서 환자의 가족까지도 힘들게 한다. 다른 병과 마찬가지로 가장 좋은 것은 예방이고, 50대 후반부터는 조기 발견을 위한 검진이 중요하다. 자신을 위해서도 그리고 가족을 위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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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박재용
박재용

(과학 커뮤니케이터)과학을 공부하고 쓰고 말한다.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 과학문화위원회 회원이다. 『나의 첫 번째 과학 공부』 『모든 진화는 공진화다』 『멸종 생명진화의 끝과 시작』 『짝짓기 생명진화의 은밀한 기원』 『경계 배제된 생명들의 작은 승리』 등을 썼다. '인문학을 위한 자연과학 강의' '생명진화의 다섯 가지 테마' '과학사 강의'의 강연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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