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사람들의 취미 목록에서 독서는 맨 아랫단에 위치한 듯하다. 취미가 독서라고 하면 벌써 고지식하고 재미없고 따분한 기운이 스멀스멀하다. 나도 그렇다. 직업이 책을 만들고 글을 쓰는 사람이기에 독서가 더 이상 취미가 될 수 없다. 취미라 하면 야구 보기 정도. 누군가의 취미는 인터넷 쇼핑일 것이고 누구는 넷플릭스 시청이고 누구는 마라톤이나 산악자전거일 것이다. 독서는, 그 중에서도 문학은 이제 여럿이 즐기는 보통의 취미는 아니게 되었다.
문학으로 범주를 좁혀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원래 많은 이가 평범하게 즐기는 취미는 아니었던 듯하다.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까지 인류에게 문학을 읽는 일이란 극히 일부의 상류층에게만 가능했다. 본격적으로 기계식으로 책이 찍혀 나오는 시절에 한 자리에서 진득하게 시와 소설을 즐기는 것은 중산층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지구상의 많은 나라는 아직도 문맹률이 높고, 일각에서는 우리나라조차 ‘실질’ 문맹률은 상당히 높은 편에 속한다고 한다. 그러니 문학이 보통의 취미가 아닌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인간이 즐기는 여러 콘텐츠의 중심에 오래 위치해 있었다. 영화와 텔레비전, 게임과 SNS의 공습에도 문학은 끈질기게 버티고 버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취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취미는 개인의 성향이 가장 강하게 구현되는 활동이며, 그런 이유로 다양하게 분포하기 마련이다. 그것을 즐기는 사람의 숫자가 적더라도, 심지어 적으면 적을수록 조금 더 가치 있는 체험이 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의 문학 공동체는 영상 매체와 같은 곳에서 얻는 ‘보통의 체험’을 넘어선 취미를 공유한 취향 공동체인 것이다.
같은 이유로 문학은 소수자의 위치에 놓인다. 취미로 즐기는 사람은 즐거운 상황일 수 있지만, 업으로 삼는 사람에게 이는 끝나지 않는 위기의 반복일 뿐이다. 문학 취미 공동체, 즉 독자의 수는 점점 줄어들거나 정체되었다. 지금 남은 독자 또한 고급 취향의 공동체로서 남다른 취향과 가치를 저자와 출판사, 서점에 요구한다. 작품의 퀄리티, 책의 시각적 디자인, 작품과 유통 과정에 있어 정치적 올바름……. 유사 이래 가장 줄어들었고, 그래서 가장 응집된 취향의 공동체가 요구하고 있는 것들이다.
취미는 물론 기쁨을 얻기 위해 향유하는 것이다. 문학 또한 아직까지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고 있다는 데 나름의 보람을 느낄 것이다. 여기 문학의 기쁨을 말하는 두 젊은이가 있다. 누구보다 문학을 취미로서 즐겼을 사람들이고, 이제 문학을 업으로 삼게 되어 버린 이들이다. 서평가 금정연, 소설가 정지돈이 그들이다. 둘은 문학에 대해 취미와 업으로서 대화를 나눴고 그것을 모아 새로운 스타일의 평론집 『문학의 기쁨』을 냈다.
일반적인 평론집과는 다르다. 책을 소개하는 방식의 에세이집도 아니다. 이것을 하이브리드 평론집이라 불러도 될까. 전기 모터와 내연 기관, 둘로 달리는 하이브리드 차량처럼 『문학의 기쁨』은 취미/취향으로서의 문학과 업/일로서의 문학이 책을 달리게 한다. 금정연의 사무침과 정지돈의 뻣뻣함이 일본산 하이브리드 차량처럼 문장의 코너웍을 부드럽게 한다. 무엇보다 좁은 취향의 공동체에서 더 이상 기쁨을 주기 포기한 문학을 강력하게 추동하는, 연비가 좋은 책이다.
둘은 일단 취미로서 문학을 즐기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레퍼런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들이 말하는 로베르토 볼라뇨, 롤랑 바르트, 오한기, 이상우 등등은 끝내 취미로 남는 듯하다. 그것은 그들에 기쁨을 준다. 그들은 그것들에 기쁨을 받음을 전혀 기쁘지 않은 어투로 말한다. 예컨대 이런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랑인지도 모릅니다. 저도 오늘만큼은 자기혐오를 멈추고 선생님의 진심 어린 충고를 따라 밤 수영이라도 해야겠습니다.” “싫은 소설은 싫기 때문에 설명하기 싫습니다. 좋은 소설은 좋기 때문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릅니다. 좋거나 혹은 싫거나. 저는 이런 좋고 싫음이 유전자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의 기쁨이란 무엇인가. 둘은 (아닌 척하지만) 문학에 대한 상당한 전문가로서 한국문학의 현재와 미래를 논한다. 이런 책들은 유사 이래 많았다. 지금도 두꺼운 평론집은 꾸준히 나오고 있다. 사람들의 관심이 없을 뿐. 책을 취미로 삼은 사람은 현저히 줄어들었는데, 그 취미를 전문적으로 다룬 책을 볼 사람이 없는 것이 당연지사. 이쯤 되면 이 책의 존재 이유를 되물을 수밖에 없다. 대체 문학의 기쁨이란 게 뭔가. 그런 게 있기는 한가?
금정연과 정지돈의 불만이나 불안은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그 기쁨에 대한 범용적 선언이나 성실한 대답도 없다. 우리는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취미로서의 문학이 가능한지, 나의 취미가 문학이 될 수 있는지 가늠할 뿐이다. 영민한 청년 둘의 화려한 레퍼런스에서 모종의 호기심이 일어난다면, 당신은 문학을 취미 삼을 수 있다. 날로 희귀해지는 고급 취미인 문학, 그것의 기쁨을 스스로 찾는 존재, 즉 독자가 되는 것이다. 그 가능성을 이 프리스타일 하이브리드 평론집 『문학의 기쁨』에서 살펴도 좋을 것 같다.
시인, 에세이스트, 출판편집자. 2006년 <시인세계>로 등단했으며 2011년에는 제30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여수』, 산문집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잘 왔어 우리 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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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문文紋 : 취미로서의 문학의 가능성 - 금정연, 정지돈 『문학의 기쁨』
서효인
2017-04-18
취미로서의 문학의 가능성
금정연, 정지돈 『문학의 기쁨』
어느덧 사람들의 취미 목록에서 독서는 맨 아랫단에 위치한 듯하다. 취미가 독서라고 하면 벌써 고지식하고 재미없고 따분한 기운이 스멀스멀하다. 나도 그렇다. 직업이 책을 만들고 글을 쓰는 사람이기에 독서가 더 이상 취미가 될 수 없다. 취미라 하면 야구 보기 정도. 누군가의 취미는 인터넷 쇼핑일 것이고 누구는 넷플릭스 시청이고 누구는 마라톤이나 산악자전거일 것이다. 독서는, 그 중에서도 문학은 이제 여럿이 즐기는 보통의 취미는 아니게 되었다. 문학으로 범주를 좁혀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원래 많은 이가 평범하게 즐기는 취미는 아니었던 듯하다.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까지 인류에게 문학을 읽는 일이란 극히 일부의 상류층에게만 가능했다. 본격적으로 기계식으로 책이 찍혀 나오는 시절에 한 자리에서 진득하게 시와 소설을 즐기는 것은 중산층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지구상의 많은 나라는 아직도 문맹률이 높고, 일각에서는 우리나라조차 ‘실질’ 문맹률은 상당히 높은 편에 속한다고 한다. 그러니 문학이 보통의 취미가 아닌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인간이 즐기는 여러 콘텐츠의 중심에 오래 위치해 있었다. 영화와 텔레비전, 게임과 SNS의 공습에도 문학은 끈질기게 버티고 버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취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취미는 개인의 성향이 가장 강하게 구현되는 활동이며, 그런 이유로 다양하게 분포하기 마련이다. 그것을 즐기는 사람의 숫자가 적더라도, 심지어 적으면 적을수록 조금 더 가치 있는 체험이 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의 문학 공동체는 영상 매체와 같은 곳에서 얻는 ‘보통의 체험’을 넘어선 취미를 공유한 취향 공동체인 것이다. 같은 이유로 문학은 소수자의 위치에 놓인다. 취미로 즐기는 사람은 즐거운 상황일 수 있지만, 업으로 삼는 사람에게 이는 끝나지 않는 위기의 반복일 뿐이다. 문학 취미 공동체, 즉 독자의 수는 점점 줄어들거나 정체되었다. 지금 남은 독자 또한 고급 취향의 공동체로서 남다른 취향과 가치를 저자와 출판사, 서점에 요구한다. 작품의 퀄리티, 책의 시각적 디자인, 작품과 유통 과정에 있어 정치적 올바름……. 유사 이래 가장 줄어들었고, 그래서 가장 응집된 취향의 공동체가 요구하고 있는 것들이다. 취미는 물론 기쁨을 얻기 위해 향유하는 것이다. 문학 또한 아직까지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고 있다는 데 나름의 보람을 느낄 것이다. 여기 문학의 기쁨을 말하는 두 젊은이가 있다. 누구보다 문학을 취미로서 즐겼을 사람들이고, 이제 문학을 업으로 삼게 되어 버린 이들이다. 서평가 금정연, 소설가 정지돈이 그들이다. 둘은 문학에 대해 취미와 업으로서 대화를 나눴고 그것을 모아 새로운 스타일의 평론집 『문학의 기쁨』을 냈다.
일반적인 평론집과는 다르다. 책을 소개하는 방식의 에세이집도 아니다. 이것을 하이브리드 평론집이라 불러도 될까. 전기 모터와 내연 기관, 둘로 달리는 하이브리드 차량처럼 『문학의 기쁨』은 취미/취향으로서의 문학과 업/일로서의 문학이 책을 달리게 한다. 금정연의 사무침과 정지돈의 뻣뻣함이 일본산 하이브리드 차량처럼 문장의 코너웍을 부드럽게 한다. 무엇보다 좁은 취향의 공동체에서 더 이상 기쁨을 주기 포기한 문학을 강력하게 추동하는, 연비가 좋은 책이다. 둘은 일단 취미로서 문학을 즐기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레퍼런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들이 말하는 로베르토 볼라뇨, 롤랑 바르트, 오한기, 이상우 등등은 끝내 취미로 남는 듯하다. 그것은 그들에 기쁨을 준다. 그들은 그것들에 기쁨을 받음을 전혀 기쁘지 않은 어투로 말한다. 예컨대 이런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랑인지도 모릅니다. 저도 오늘만큼은 자기혐오를 멈추고 선생님의 진심 어린 충고를 따라 밤 수영이라도 해야겠습니다.” “싫은 소설은 싫기 때문에 설명하기 싫습니다. 좋은 소설은 좋기 때문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릅니다. 좋거나 혹은 싫거나. 저는 이런 좋고 싫음이 유전자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의 기쁨이란 무엇인가. 둘은 (아닌 척하지만) 문학에 대한 상당한 전문가로서 한국문학의 현재와 미래를 논한다. 이런 책들은 유사 이래 많았다. 지금도 두꺼운 평론집은 꾸준히 나오고 있다. 사람들의 관심이 없을 뿐. 책을 취미로 삼은 사람은 현저히 줄어들었는데, 그 취미를 전문적으로 다룬 책을 볼 사람이 없는 것이 당연지사. 이쯤 되면 이 책의 존재 이유를 되물을 수밖에 없다. 대체 문학의 기쁨이란 게 뭔가. 그런 게 있기는 한가? 금정연과 정지돈의 불만이나 불안은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그 기쁨에 대한 범용적 선언이나 성실한 대답도 없다. 우리는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취미로서의 문학이 가능한지, 나의 취미가 문학이 될 수 있는지 가늠할 뿐이다. 영민한 청년 둘의 화려한 레퍼런스에서 모종의 호기심이 일어난다면, 당신은 문학을 취미 삼을 수 있다. 날로 희귀해지는 고급 취미인 문학, 그것의 기쁨을 스스로 찾는 존재, 즉 독자가 되는 것이다. 그 가능성을 이 프리스타일 하이브리드 평론집 『문학의 기쁨』에서 살펴도 좋을 것 같다.
시인, 에세이스트, 출판편집자. 2006년 <시인세계>로 등단했으며 2011년에는 제30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여수』, 산문집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잘 왔어 우리 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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