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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대한 생각 : 취미와 아름다운 세계

이성민

2017-03-30

취미와 아름다운 세계


1
국어사전에서 ‘취미’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뜻풀이를 볼 수 있다. 


1.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
2. 아름다운 대상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힘. 


영어에서는 이 두 가지 뜻에 별도의 단어가 상응한다. 첫째는 ‘hobby’라고 하고, 둘째는 ‘taste’라고 한다. 일상에서 ‘취미’라고 하면 전자를 뜻할 것이다(취미1). 후자는 주로 철학에서, 그리고 철학의 분과 가운데서도 특히 미학에서 다루는 주제다(취미2).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뜻이 서로 무관하다고 볼 수만은 없다. 아름다운 대상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것은 분명 다른 실용적 목적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순전히 즐기기 위해서 하는 일일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물론 순전히 즐기기 위한 일이 모두 아름다움과 관련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아름답지 않은 일 가운데는 분명 사람을 죽이는 일이 있다. 뤽 베송의 영화 <레옹>의 주인공 레옹은 전문적으로 살인을 하는 사람이다. 살인은 그의 전문적인 직업이다. 그런 그는 항상 화분을 들고 다니는데, 그것은 그의 직업이 아니라 취미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그는 화분에 심어진 식물을 정성껏 돌보는데, 이는 추한 것이 아니라 분명 아름다운 것과 관련이 있는 일이다. 직업적인 살인자는 어쩌면 멋있어 보일 수도 있다. <레옹>이라는 영화에 환호했던―젊은 시절 나의 아내를 포함하는―관객들에게 레옹이 어쩌면 바로 그랬을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즐기기 위해 살인을 한다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우리는 무언가 섬뜩하고 사악한 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분명 살인을 즐기기 위해 하지만, 우리는 이를 취미로 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가 “나는 살인이 취미다”라는 말을 할 때, 물론 그 말을 즐기기 위해 살인을 한다는 뜻으로 이해는 할 수 있겠지만, 취미 자체와 그 가치에 대한 지독한 전도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취미의 이와 같은 전도가 드문 것만은 아니어서 한국어에 ‘악취미’라는 말이 따로 있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살인은 악취미여도 너무 악취미일 것이다.

 

식물을 정성껏 돌보는 레옹 장면

▲ 식물을 정성껏 돌보는 레옹


여하튼 취미1만을 생각할 때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이라는 뜻풀이에는 분명 문제가 있어 보인다. 즐기기 위해 하는 일이 다 취미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우리가 보았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혹시 취미1도 아름다움과 관련된 것은 아닐까? 혹시 취미1은 취미2를 전제로 하는 것 아닐까? 어쩌면 “아름다운 대상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힘”(취미2)을 가진 사람만이 바로 그 힘에 근거하여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 즉 취미(2)를 가질 수 있는 것 아닐까? 즉 전문적 직업에 그에 상응하는 능력이 요구되듯, 여가 활동으로서의 취미에도 그에 상응하는 능력이 요구되는 것 아닐까?

2
활동으로서의 취미가 힘 내지는 능력으로서의 취미를 전제하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취미에 대한 한 가지 사전적 정의(“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를 수정하고 보충할 수 있으며, 동시에 취미활동의 대상과 범위를 좀 더 엄밀하게 제한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추가로 우리는 한국어가 취미의 활동과 능력을 동일한 용어로 지칭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취미활동의 대상이 아름다운 것들이라고 할 때, 아름다운 것들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아름다움의 제공자 가운데 하나는 분명 자연이다. 아렌트가 말하듯이, 자연에는 꽃이나 수정이나 무지개처럼 “그 형태가 아름답다는 것 외에는 글자 그대로 전혀 쓸모없는 것들이 그토록 많다.” 취미는 일상의 여가활동이므로, 수정이나 무지개보다는 꽃이 취미에 적합한 대상일 것이다. 실로 정원을 가꾸고 화초를 키우는 것은 잘 알려진 취미기도 하다.
아름다움은 자연만 제공하는 게 아니라 문화도 제공한다. 문화 속에서 아름다움을 전문적으로 제공하는 기능을 갖는 사람들을 우리는 ‘예술가’라고 부른다. 그들은 아름다운 문학작품이나 회화나 음악을 제공한다. 건축가는 예술가와 좀 다른 범주지만, 아름다운 건물을 짓는 사람을 우리는 예술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아름다운 새로운 건축물을 찾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지만 말이다. 능력으로서의 취미가 아름다운 것을 자주 봄으로써 길러지는 것이라면, 오늘날 우리의 거주 환경은 분명 취미의 발달에 불리한 점이 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분명 문학작품이나 회화나 음악을 감상하는 일은 정원을 가꾸는 것만큼이나 잘 알려진 취미들이다. 물론 오늘날 예술가들이 과연 아름다운 것만을 생산하는지 의혹이 제기될 수 있겠지만 말이다.
문화 가운데 오늘날 대중문화라 불리는 것도 아름다움을 제공할까? 아렌트는 이와 관련해 아주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견해를 제시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대중문화는 심지어 진정한 의미에서 ‘문화’라고 불릴 수도 없다. “대중사회는 문화가 아니라 오락을 원한다. 그리고 오락산업이 제공하는 물품들은 실로 사회에 의해 여느 다른 소비자 상품과 마찬가지로 소비된다.” 문제는 이 오락산업이 문화를 건드릴 때 생긴다. 그때 대중문화라고 하는 것이 생겨난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오락산업은 엄청난 식욕들과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오락산업의 물품들은 소비 속에서 사라지기 때문에, 오락산업은 새로운 상품을 항상 제공해야만 한다. 이러한 곤궁 속에서 대중매체를 위해 생산하는 자들은 적합한 재료를 찾고자 희망하면서 과거와 현재의 전 영역의 문화를 뒤진다. 더 나아가 이 재료는 있는 그대로 제공될 수 없다. 그것은 오락이 되기 위해 변경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쉽게 소비되도록 준비되어야만 한다. 대중사회가 문화적 대상들을 엄습할 때 대중문화가 생겨난다. 


오늘날 이러한 견해가 대중문화에 대한 지나치게 야박한 평가처럼 보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대중문화가 오락이 아니라 취미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TV를 시청하거나 스마트폰으로 대중음악을 듣거나 게임을 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 취미생활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활동으로서의 취미가 능력으로서의 취미를 전제하고 있다는 관점을 유지할 때, 취미의 대상과 범위는 제약될 수밖에 없다. 이게 과연 취미 자신한테도 좋은 일일까?

3
취미의 철학자 칸트는 아름다움에서 느끼는 즐거움 내지는 쾌감이 특정한 이해관심이나 유용성과는 무관하다는 주장을 했다. 실제로 우리가 아름다운 그림을 보고 쾌감을 느낄 때 우리는 거기서 아무런 유용성도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아름다움이 유용성과 무관하다는 생각은 서양에서 매우 오래된 생각이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노동하고 전쟁할 줄도 알아야겠지만 더더욱 평화도 유지하고 여가도 즐길 수 있어야 하고, 필요하거나 유용한 것도 할 수 있어야겠지만 더더욱 아름다운 것도 할 수 있어야 한다.” 흥미롭게도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필요하고 유용한 것을 아름다운 것과 구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아름다운 것을 여가와 연결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삼항조 연결물을 생각해볼 수 있다: 아름다움-취미-여가.
칸트는 취미에서 유용성과 이해관심을 배제했지만, 또한 인간의 삶에서 아름다움은 오로지 사회에서만 관심거리가 된다고 말한다.

   무인도에 버려진 사람은 그 자신 홀로는 자기의 움막이나 자기 자신을 꾸미거나 꽃들을 찾아내거나 하지 않으며, 더구나 단장하기 위해 꽃들을 재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직 사회에서만 그에게 한낱 인간이 아니라 자기 나름으로 세련된 인간이고자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이것이 문명화의 시작이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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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Internet Archive Book Images
2.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그렇다고 한다면, 취미생활이란 분명 홀로 즐기기 위한 생활이 아니다. 비사교적인 사람, 즐거움을 나누는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정의상 취미가 없는 사람이다. “취미가 타인들의 찬성과는 전적으로 독립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몰취미한 사람이다.” 앞선 인용문의 괄호 안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칸트는 사교성이 없고 몰취미하고 세련되지 못한 사람을 또한 문명에서 배제한다. 취미와 모임의 연관성은 실로 우리에게 그렇게 낯선 것은 아니다. 알다시피 세상에는 수많은 취미모임이 있다. 그만큼 즐겁고 세련되고 아름다운 것을 공유하려는 사람들은 많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항조 연결물을 자연스럽게 생각해볼 수 있다: 아름다움—취미—여가—사교성.
예를 들어 꽃꽂이 모임이 있다고 해보자. 꽃 자체도 아름다울 테지만, 사람들은 상대방의 솜씨도 보아가면서 각자의 솜씨로 다양한 꽃들을 가지고 아름다운 꽃꽂이를 만들 것이다. 그러면서 “이 꽃은 아름답다”나 “이 꽃꽂이는 아름답다” 같은 칸트가 말하는 취미판단을 언표하면서, 혹은 그보다 더 전문적인 꽃꽂이 비평적 판단을 하면서, 아름다움에서 오는 쾌감을 서로에게 전달하고 공유할 것이다. 꽃꽂이 취미 모임에는 꽃과 꽃꽂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꽃을 다루는 사람들의 행위도 있으며, 작품을 음미하고 평가하는 사람들의 말도 있다. 칸트는 주목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주목해보자. 이 행위와 말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

사람들의 말과 행위가 아름다울 수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아름다움의 제공자에 자연과 문화만이 아니라 인간 자신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취미는 이제까지 발굴되지 않았던 새로운 자원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취미의 대상을 아름다운 대상이라고 했던 우리의 앞선 가정은 취미의 대상을 다만 제한하는 결과만을 가져오는 게 아니라 오히려 확장할 가능성을 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위 역시 필요하고 유용한 것과 아름다운 것으로 나뉜다”라고 말한다. 아렌트는 이 행위에 말을 추가한다. 아테네의 장례식에서 했던 페리클레스의 연설은 아름다운 연설이었다. 사람들의 말과 행위가 아름다워지면, 우리는 분명 아름다운 삶을 갖게 될 것이고, 더 나아가 아름다운 세계를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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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성민
이성민

철학자. 서울대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했으며, 중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하다가 교직을 접고 오랫동안 철학, 미학, 정신분석 등을 공부했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신나게 놀 수 있는 세상, 어른들이 동료들과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세상이 주된 관심사다. 저서로 『사랑과 연합』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이 있으며, 번역한 책으로 슬라보예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를 비롯해 1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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