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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소셜클럽 : 우연한 우정

신기주

2016-12-22

우연한 우정


절교했다. 조용히 연락처를 지웠다. 카톡을 차단했다. 페이스북을 언팔했다. 그와는 몇 년 전에 우연히 만났다. 학교 동창도 동네 친구도 아니었다. 이른바 사회 친구였다. 처음엔 곧잘 연락도 주고받았다. 속내 없이 호의를 보이는 상대가 고마웠다. 그렇게 수년 동안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지인 사이로 지냈다.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함께 일을 좀 해보자고 했다. 같이 사업을 하자거나 각별히 돈을 빌려달라는 말은 아니었다. 서로의 재능을 합쳐서 재미있는 콘텐츠를 만들어보자고 했다. 마다하지 않았다. 이러려고 그동안 인연을 이어왔던 건가도 싶었다. 콘텐츠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통해 만들어진다. 감독과 배우가 만나면 영화가 만들어지고 가수와 프로듀서가 만나면 음반이 나온다. 이렇듯 네트워크에서 콘텐츠가 생겨난다. 재미있겠다 싶었다.

그가 물었다. “생년월일시를 좀 알려줘.” 또 그런다 싶었다. 몇 년 전 처음 만났을 때 생각이 났다. 그때도 같은 걸 물었다. 그는 운명론자였다. 인간의 미래는 정해져 있고 신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식의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의미의 거창한 운명론자는 아니었다. 인생의 대소사를 친한 역술인한테 물어보고 결정하는 점중독자였다. 처음 생년월일시를 물어볼 땐 왜 그러나 싶었다. 아는 역술인한테 물어봐서 사주풀이를 해주겠다고 말했을 땐 그저 재미로 그러려니 싶었다. 아니었다. 진지했다. 그가 가장 중시하는 건 자신과의 궁합이었다. 속궁합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함께 친교를 맺거나 사업을 했을 때 서로한테, 특히 자신한테 얼마나 좋을지 진지하게 궁금해했다. 그가 말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너랑 나랑 잘 맞는대. 다행이다.”

 

펼쳐진 타로카드들

 

기분이 알쏭달쏭했다. 잘 맞는다니 다행이긴 했다. 그런데 안 맞는다고 나왔다면? 그가 어떤 표정과 태도를 보였을지 궁금했다. 그땐 그런가 보다 했다. 자주 만나는 사이도 아니어서 금세 잊고 지냈다. 이번에 다시 사주를 물었을 때도 여전하구나 싶었다. 별 뜻 없이 생년월일시를 알려줬다. 반나절 정도 지났을 때였다.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역시 너랑 나랑 잘 맞는대. 그런데 말이야, 내가 요즘 일이 너무 많거든. 우리 함께하기로 한 건 조금만 미루자.”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땐 또 그런가 보다 했다. 일을 도모하다 무산되는 경우가 어디 한두 번인가.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러자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역술인이 함께 일하지 말라고 조언한 건 아니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진실이 궁금해졌다. 다시 그에게 카톡을 보냈다. “웃자고 묻는 건데 말이야, 사주풀이 해주시는 분이 함께 일하지 말라고 했던 건 아니고?” 즉시 부인했다. “아니야. 아니야. 그냥 내가 요즘 너무 바쁘네.” 처음엔 자기와 함께 일하자고 연락했던 사람이 갑자기 돌변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있었다. 그렇다고 수사를 할 수도 청문회를 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그렇게 찝찝한 채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기분이 별로였다. 일이야 하자고 했다가 말자고 할 수도 있다. 그 이유가 한낱 역술인의 조언 탓이었다면 더는 볼 것도 없다 싶었다. 당장 인연을 끊었다. 연락처를 정리하고 SNS를 단절했다. 그러면서 사주나 관상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는 자와는 친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정말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었다. 솔직히 그건 자신에 대한 거짓말이었다. 재수없다고 여겨진 것이 불쾌했다. 수년 전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사주로 우정 궁합을 보고 “우리 잘 맞는다더라”라고 말했을 때만 해도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안 궁금한 척 궁금한 걸 물어봤다. 그래봤자 연애운 같은 수준이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번엔 뭔가 석연찮은 이유로 같이 일을 하지 않으려고 들자 필요 이상으로 불쾌해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랬다. 믿지 않는 척 믿고 있었고 궁금해하지 않는 척 궁금해하고 있었다.

자문했다. 그와 잠시나마 친해졌던 건 운명이었을까. 절교한 것도 운명이었을까. 역술인의 조언을 믿어서였을까. 역술인의 조언을 믿지 않아서였을까. 역술인의 조언을 믿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그와의 인연이 운명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사람과 사람의 인연은 대부분 우연으로 시작되기 마련이다. 운명이란 우연에 의미를 부여할 때 생겨나는 감정일 뿐이다. 절교한 것도 운명 탓인지는 모른다. 인간의 인연이 끝나는 건 인간의 자유의지가 개입되는 선택이다. 자유의지를 믿는 한 운명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결국 우리의 인연들이 우연인지 운명인지는 각자 자유의지를 믿는지 운명론을 믿는지에 달린 것 뿐 실제 일어나는 현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믿는 대로 살아갈 뿐이다. 우연이든 운명이든 말이다.

그런데 우리의 인연에 역술인이 개입할 때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역술인이 운명을 명분으로 인연에 개입하는 순간 인연은 왜곡되기 시작한다. 개인과 개인의 자유의지가 만들어낸 인연에 제3자의 또 다른 자유의지가 점이나 예언 같은 형태로 개입하는 셈이다. 그와 절교한 건 점괘를 믿든 안 믿든 역술인의 조언 탓이었다. 그는 역술인의 조언을 믿어서 함께 일을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역술인의 조언을 믿지 않아서 그와 절교했다. 어떤 경우든 역술인의 운명론이 둘의 인연에 개입한 꼴이 된다.

생각하는 대로 살게 된다는 말이 있다. 역술인의 권능은 미래를 예언하는 데 있지 않다. 점을 보러 온 사람의 마음속에 언어를 통해 생각을 심는다는 데 있다. 영화 <인셉션>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그들은 주인공의 마음속에 영원히 제자리를 도는 팽이를 심는다. 그 언어의 팽이는 번식한 끝에 그의 인생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역술인에게 점을 친다는 건 마음속 금고의 문을 열어주는 것과 같다. 역술인이 넣어놓는 언어의 팽이에 따라 자유의지가 틀어진다.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말이다. “동쪽으로 가면 귀인을 만날 것”이라고 역술인이 말해주면 그때부터 우리는 동쪽 방향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이 운명이 아닌지 생각하기 시작한다. 점을 믿지 않는 사람조차 벗어날 수 없다. 이미 역술인의 말이 사고의 편향성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예측은 자기실현성을 지닌다. 그와의 사업운이 좋지 않다는 역술인의 예언은 결과적으로 둘이 절교하면서 이뤄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일 정도로 절교할 사이라면 어차피 일을 함께하기엔 서로 간의 신뢰가 없다는 뜻이 된다. 결과적으로 역술인의 말이 맞은 셈이다. 그렇게 예측은 실현됐다. 예측의 자기실현성은 비단 철학원에서만 발견되는 건 아니다. 미래를 예측해야 하는 거의 모든 경제 활동에서 발견된다. 증시 예측이 대표적이다. 시장 참여자들 사이에서 비관적인 전망이 컨센서스를 이루면 주가가 하락세로 반전된다. 주가가 하락세로 반전되는 순간 자신의 예측이 맞았다고 믿는 시장 참여자들은 확신을 얻고 매도세로 돌아선다. 사실 증시를 하락시킨 건 다름 아닌 자신들의 편향성이었는데도 말이다. 마찬가지다. 그와의 인연이 끝난 건 운명이 아니라 운명의 탈을 쓴 선택이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먹고 자라는 시장의 거의 모든 분야에선 이런 운명적 우연들이 발생한다.


철 구조물

 

우리가 운명적 우연을 부르는 이름이 있다. 필연이다. 우리는 자유의지에 의한 결과이거나 우리의 자유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우연인데도 결과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 운명이 미래를 일컫는 단어라면 필연은 과거를 부르는 말이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운명을 예측할 수도 없다. 정보와 논리로 경우의 수를 줄여보지만 완벽한 예측이란 어차피 불가능하다. 이것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우리의 두뇌는 사물의 유사성을 찾아내고 논리정합성을 추구하게 설계돼 있고, 예외적인 상황에선 극심한 불안을 느낀다. 미래가 불안한 우리는 과거로 회귀한다. 과거의 사건들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그 안에서 우연적 사건과 자유의지의 선택들을 꿰어 맞춰서 필연성을 부여한다.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는 필연적 태도는 다소나마 우리를 안심시켜주는 게 사실이다. 이유 있는 필연은 무작위적인 우연보다 받아들이기가 쉽기 때문이다. 우연은 잔인하다. 길을 가다 우연히 죽을 수 있다면 우리에게 인생은 공포스러운 여정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인생의 예측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기를 쓴다. 모든 걸 필연적으로 만든다. 현대문명은 그런 필연의 결합체다. 신호등이 켜지고 길을 건너고 컴퓨터를 켜면 인터넷에 연결되는 필연적 결과들로만 이뤄진 사회다. 우연 가득한 자연과는 다르다.
며칠이 지났다. 그와 연락할 일은 이제 없었다. 문득 그와의 절교가 필연적이었단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주풀이로 살아가는 친구를 가까이 둬봐야 심란하기만 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의 단점들도 생각났다. 잠시나마 그와 친분이 생겼던 게 후회스러웠다. 그동안 괜한 사담을 나눴던 건 아닌가 싶었다. 그렇게 마음속에서 우연은 운명이 되고 선택은 필연이 돼가고 있었다. 미래를 알지 못하며 세상사 모든 걸 설명할 재간이 없는 우리는 이런 사고의 윤회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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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신기주
신기주

(기자)「에스콰이어」 피처 디렉터. 경제, 사회, 정치, 문화, 대중매체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통섭적인 기사를 쓰고 있다. O tvN <비밀독서단>에 출연 중이며 「시사IN」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저서로 『우리는 왜』 『장기보수시대』 『사라진 실패』 『남자는 무엇으로 싸우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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