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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방랑자 : 삶의 토양과 씨앗이 되어주는 우연과 필연의 힘

정여울

2016-12-13

삶의 토양과 씨앗이 되어주는 우연과 필연의 힘


어린 시절에는 우연의 힘을 잘 믿지 않았다. 행운은 주로 철저한 계획과 성실한 준비를 마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한편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는 멋진 우연이 나에게도 찾아오기를 빌었다. 하지만 우연을 가만히 기다리는 것보다는 내 힘으로 내 꿈을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만들고 싶은 열망이 더 컸다. 절대로 주어진 환경에 안주하거나, 환경 때문에 꿈을 포기하지는 말아야지 하고 다짐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 보니 우연과 필연을 결정하는 것조차 인간의 주관적인 판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엄청난 우연의 확률 속에서 태어나지 않는가. 우리는 우리가 태어나는 시간을 결정할 수도 없고, 태어나는 부모를 결정할 수도 없고, 태어나는 나라를 결정할 수도 없으니. 인간은 탄생하는 순간부터 거대한 우연의 토양에 발을 디디고 있다.

 

특히 여행을 다니다 보면 아무리 철저히 준비하고 계획해도 우연의 행로를 따라 여행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가 있다. 예전에 그리스 신화를 그린 그림들을 찾아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에 전시된 <에로스의 교육>이라는 작품이 꼭 보고 싶어 길을 물어 그곳을 찾아갔다. <에로스의 교육>은 사랑스런 아기 큐피드가 아프로디테와 헤르메스의 사이에서 행복하게 웃음 짓는 그림인데, 책에서 이 그림을 처음 본 뒤부터 머릿속에 자꾸 그 이미지가 떠올라 꼭 한 번 보고 싶은 그림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그림은 다른 미술관에 대여 중이었다. 다른 그림은 다 있는데, 하필 내가 찾는 딱 그 그림만 없었던 것이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그 다음 날 예정된 일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른 도시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에로스의 교육> Antonio Allegri Corregio, 1528

▲ <에로스의 교육> Antonio Allegri Corregio, 1528

 

며칠 뒤 로마의 베로네세 미술관에 그야말로 ‘우연히’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그림이 바로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대여 중’이라는 미술관이 다름 아닌 베로네세 미술관이었던 것이다. 나는 뛸 뜻이 기뻤고,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그 그림을 바라보며 벅찬 감동에 젖어 들었다. 돌이켜보면 그 사건은 ‘우연과 필연’의 행복한 결합으로 이루어진 빛나는 행운이었다. 그리스 신화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던 시간은 필연적인 계획에 따른 것이었지만, 그 그림은 어느 책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이었다. 또 이 그림을 마음속에 담아놓고 열심히 찾아 다닌 것은 필연이었지만, 이 그림을 최종적으로 찾은 것은 뜻밖의 우연에 따른 것이었다.

 

1년에 한 번씩 떠나는 배낭여행에서 나는 처음에는 ‘필연’을 메인 요리로 하고, ‘우연’은 디저트처럼 즐기는 여행을 선호했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이런 ‘우연’이 더욱 좋아진다. ‘우연’을 메인 요리로 하고, 필연을 디저트처럼 즐기는 여행도 가능하지 않을까. 예를 들면 이런 일이 있었다. 기차를 타고 목적지로 가는데 다른 사람이 내리는 곳을 보고 ‘여기가 어딘가’ 싶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왠지 이곳에 내리고 싶다’는 충동에 아무런 계획도 없이 덜컥 그 낯선 기차역에서 내렸다. 그곳은 ‘던디’라는 도시였는데, 여행책자에도 나오지 않는 곳이었다. 관광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볼거리는 없었지만, 우연히 지나다가 마주친 이 작은 도시에서 나는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영국의 우울한 겨울 날씨 때문에 몸이 잔뜩 움츠려져 있었는데, 던디에서 햇살 가득한 겨울 바다의 낭만을 즐길 수 있었다.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불고 추운 인버네스나 에딘버러과는 달리 던디는 봄이 일찍 찾아온 것처럼 따스했다. 이렇듯 계획에 없던 곳이 계획 속 공간보다 더 짜릿한 행복을 전해줄 때가 있다. 마치 출장처럼 계획에 맞춰 여행을 하다 보면 이런 눈부신 우연을 즐길 수 없다. 내 첫 유럽여행은 시간 단위로 계획이 빼곡하게 짜여 있는 여행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런 여행은 마치 숙제를 하듯이 ‘계획과 실천’으로만 이루어져 있어 즐거움이 덜했던 것 같았다. 예전에는 비행기는 물론 중간의 여러 숙소까지 철저히 예약했지만, 지금은 오가는 비행기와 출발일과 도착일의 숙소만 예약해둔다. 여행 중간에 목적지를 어디로 바꿀지 나 자신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도시에는 며칠 더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며칠 더 묵어도 되고, ‘여긴 좀 빨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언제든 떠나면 된다. 숙소를 예약했기 때문에, 교통편을 예약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머무르거나 떠나야 하는 속박된 여행을 하지 않아도 좋은 것이다. 그렇게 우연을 메인메뉴로 하는 여행을 즐기다 보면, 시간에 쫓기는 일 없이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우연의 흐름에 몸을 맡길 수가 있다.

 

기차역

 

계획과 열심이야말로 삶을 움직여가는 필연이겠지만, 때로는 우연의 가능성에 자신을 활짝 열어두는 것이 삶을 좀 더 윤기 있고 따뜻하게 만들어주곤 한다. 며칠 전 지방 강연을 하고 돌아오다가 서울역에서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을 우연히 만났다. 거기서 만날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더더욱 반가운 만남이었다. 기차역이야말로 단지 ‘지나가는 곳’이 아닌 여행의 중요한 목적지이자 이런 반가운 우연이 폭발하는 장소가 아닐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우연의 기차역을 지나왔을까. 돌이켜보면 기차역에서 만난 그 수많은 여행자가 내 여행의 보이지 않는 동지들이었던 것 같다. 기차역에서 헤어지며 아쉬워서 눈물짓는 가족들,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드디어 만나 뜨겁게 포옹하는 연인들, 세상에서 가장 신난다는 표정으로 뛰노는 아이들. 그 모든 우연의 풍경들이 모여 나의 끝없는 여행을 밝혀주는 마음의 등대가 되어준 것 같다. 지금도 지방 강연을 떠나는 기차 안에서 글을 쓰고 있다. 이 여행은 ‘목적’이 있는 것이지만, 오늘 강연에서는 또 어떤 재미있는 질문을 만날지, 얼마나 따스한 미소들을 보게 될지, 또 어떤 ‘우연의 힘’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도로 위 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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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정여울
정여울

작가. 네이버 오디오클립 <월간 정여울> 진행자. 저서로 『내가 사랑한 유럽top10』,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월간 정여울』,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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