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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페이지 필사] 맥주 첫 잔

장석주

2015-11-26

한 페이지 필사

‘꼭꼭’ 마음으로 읽고 ‘꾹꾹’ 손으로 써보는 시간


맥주 첫 잔


맥주 첫 잔이 주는 기쁨은 하나의 문장처럼 모두 기록된다. 이상적인 미끼 역할을 하는 것은 지나치게 많지도 지나치게 적지도 않은 적당한 맥주의 양이다. 맥주를 들이켜면, 숨소리가 나고, 혀가 달싹댄다. 그리고 침묵은 이 즉각적인 행복이라는 문장에 구두점을 찍는다. 무한을 향해서 열리는, 믿을 수 없는 기쁨의 느낌……. 동시에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가장 좋은 기쁨은 벌써 맛보아 버렸다는 것을. 우리는 술잔을 내려놓는다. 네모 난 압지로 만들어진 컵 받침 위에 올려놓은 뒤, 저만치 밀어 놓기까지 한다. 우리는 맥주 색깔을 음미한다. 가짜 꿀, 차가운 태양. 우리는 모든 지혜와 기다림을 동원해서 지금 막 이루었다가 또 지금 막 사라져 버린 기적을 손에 넣고 싶어한다. 우리는 유리잔 바깥에 씌어 있는 맥주 이름을 만족스럽게 읽어 본다. 컵과 내용물이 서로 질문을 던져대고, 텅빈 심연 속에서 서로 무언가 말을 주고받을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우리는 순금의 비밀을 간직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 비밀을 주문으로 만들어 영원히 소유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태양이 와서 빛의 방울을 흩뿌려 놓은 하얀색 작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실패한 연금술사는 황금의 외양만을 건져낼 수 있을 뿐이다. 이제 맥주를 마실수록 기쁨은 더욱더 줄어든다. 그것은 쓰라린 행복이다. 우리는 첫 잔을 잊기 위해서 마시는 것이다. 필립 들레름, 『첫 맥주 한 모금 그리고 다른 잔잔한 기쁨들』, 김정란 옮김, 도서출판 장락, 1998, 37~38쪽.

 

더무슨 말이 필요하랴! 맥주 첫 잔을 가득 따라 목구멍으로 넘겨보아야만 알 수 있다. 맥주 첫 잔이 주는 황금빛 기쁨을! 짜릿한 맥주 첫 잔은 “가짜 꿀, 차가운 태양”이다. 맥주 첫 잔의 쾌락은 첫 잔으로 끝난다. 인생이 그렇듯이 두 번은 없다. 두 번 째 들이키는 맥주는 더 이상 아무 기쁨도 자극도 없다. 그것은 다만 미지근하고 씁쓸한 액체일 뿐이다. 우리는 맥주 첫 잔에서 그것의 정수를 다 들이켜버린 것이다.
장석주/시인

 

맥주 첫잔 필사 원고1


맥주 첫잔 필사 원고2


맥주 첫잔 필사 원고3


맥주 첫잔 필사 원고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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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장석주

(기획자문위원)시인. 인문학 저술가. 『월간 문학』 신인상에 당선해 문단에 나오고,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당선, 같은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입선하여 시와 평론을 겸업한다. 스물 다섯에 편집자로 첫 발을 내딛은 이후, 13년 간 직접 출판사를 경영한 바 있다. 1993년 출판사를 접은 뒤에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방송진행자로도 활동했다. 시집 『몽해항로』, 『오랫동안』, 『일요일과 나쁜 날씨』 를 포함해 『마흔의 서재』, 『새벽예찬』, 『일상의 인문학』, 『불면의 등불이 너를 인도한다』, 『글쓰기는 스타일이다』 등 다수의 저서를 냈으며 최근 필사에 관한 저서인 『이토록 멋진 문장이라면』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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