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위에서는 이공계 학생들이 덤으로 가지는 부가적 탤런트를 일러 ‘인문학적 소양’이라고 부르기를 즐겨한다. 이러한 명명은, 없어도 큰일 아니지만 있으면 더욱 빛을 발한다는 ‘고명 효과’로 인문학을 소비하는 대표적 사례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크고 깊고 지속적인 능력을 집약한 용어인 ‘인문학적 역량’이 훨씬 적합한 말이다. 우리는 이제 인문학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어떤 힘을 ‘소양’이 아니라 ‘역량’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대학교 강의
대학이라는 근대적 교육 제도는 그 목표를 ‘교양인’과 ‘전문인’ 양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에 맞춘 채 출발하였다. 그것이 교육 형식으로 반영된 것이 ‘교양’과 ‘전공’이라는 분법(分法)이었을 것이다. ‘교양’이 상식과 합리성에 기초하여 살아갈 수 있는 반듯한 시민을 길러내는 데 목표를 두는 개념이라면, ‘전공’은 특정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전문인을 길러 낸다는 뜻이 담겨 있다. 대학 교육이 이 두 가지 요구의 긴장과 균형 속에서 발원하고 전개되어 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그 결과는 직장, 사회, 국가, 인류 등 크고 작은 공동체에 대한 생산적 기여로 이어져 갔다. 그런데 최근 우리 대학은 취업 지상주의와 경제 논리의 우위에 따라 현저하게 교양 교육의 성격이 약화되었다. 최상의 수행성과 효율성을 강조하는 취업과 경제 논리는 대학을 삶의 현장이 아닌, 취업 현장으로 나아가는 단계적이고 한시적인 수단으로 생각하게끔 만들어 버린 것이다. 자연스럽게 교양 교육의 핵심이었던 인문학도 그 지위와 영향력에서 약세를 면치 못하게 되었고, 심지어 전공 교육 구성원들도 덩달아 그 위기를 첨예하게 받아들이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대학에서의 인문학의 역할 변화
인문학을 핵심 자산으로 하는 ‘교양’은 19세기 독일에서 창안한 ‘빌둥(Bildung)’이라는 개념에서 유래하였다. 이는 인간다움을 닦고 형성해 가는 과정에서부터, 전문 기능인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직업 교육 과정과 구별되는 보편적 시민 교육의 일환이라는 뜻까지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그런데 그러한 교육 시스템에 가장 중요한 근간을 이루어 왔던 인문학은, 우리의 경우 ‘근대’를 둘러싸고 나타난 미완의 과제들과 깊은 연관을 가지게 되었다. 가령 식민과 해방과 분단, 전쟁과 독재, 봉건적 가치로부터의 탈피와 근대화 추진 등의 과정에서 나타난 갈등과 충돌에 대해 인문학은 그것들을 상상적으로 교정하면서 삶의 대안적 지표를 마련하는 데 크게 공헌해 왔다. 세계사에 유례 없는 성장 속도를 보여 준 우리가 여전히 인간 중심의 의제를 놓치지 않고 살아온 것도 어쩌면 인문학이라는 최후의 보루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 미디어의 일상화 이후 세계는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으로 급변하였고, 인문학은 그러한 근대적 과제들에 대한 대체 질서 마련이라는 고유 역할에서 한 걸음 비껴나게 되었다. 그리고 인문학의 위상이 달라진 만큼, 대학에서 생산하고 수용되는 인문학 역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존재 조건에 처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대학 교육의 역할 변화가 확연한 이 시점에, 인문학의 위상에 대해 성찰하면서 동시에 인문학이 새롭게 견지해야 할 지표들을 생각해 볼 필요와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두루 알다시피 인문학은 생활에 직접적으로 소용이 되는 실용적인 지식을 지향하지 않고 그것들을 해석하고 판단한 후 세계를 향해 정신적 가치를 부여하려는 목적을 취한다. 그것은 전통적 범주인 문사철로부터 인간의 자기실현을 추구하는 다양한 파생 학문까지를 모두 포괄한다. 그리고 여전히 인문학은 전문 분야를 횡단하는 통합적 지식 및 태도와 깊이 연관된다. 그만큼 인문학은 단순히 지식과 기술을 터득하는 것이 아니고, 또 기존의 사회 질서와 규범을 수동적으로 계승하는 것도 아니고, 개개의 인간들이 성숙한 인격을 형성해 가게끔 하는 데 진력한다. 사회 상황과 연결되는 지점에서 그 모순을 타개하기 위하여 과학적, 합리적, 기술적인 지식을 중시하면서도, 실제적 경험이나 지식 획득의 과정을 성찰하고 의미화하는 재귀(再歸)의 과정을 필연적으로 수반하게 되는 것이다.
‘인문학적 소양’에서 ‘인문학적 역량’으로
정보 분석
지금 세계는 기술의 발달로 공간적, 시간적 제약이 현저하게 극복됨에 따라 국가와 국가, 문화와 문화의 만남이 점점 더 넓게, 빠른 속도로 확장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문화들 간의 이해관계를 따지는 만남과 경험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의견의 차이에서 오는 마찰과 갈등은 더욱 증가해 가고 있다. 또한 서로 다른 국가나 문화 간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한 사회 안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현상이 되어 가고 있다. 우리 사회에도 기존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그룹들 사이의 갈등이 끝없이 생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 지식, 연령, 이념 등을 달리하는 계층과 세대 사이에서 점점 더 세분화되어 가고 있는데, 그룹별 세분화가 이루어지고 이해관계의 편차가 커질수록 사회 곳곳에서 마찰이 생기는 것은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군(群)에 대하여 인문학은 그 진단과 처방을 통해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려는 지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 점에서 인문학 다음에 와야 할 말은 ‘소양’이 아니라 ‘역량’이다. 우리 주위에서는 이공계 학생들이 덤으로 가지는 부가적 탤런트를 일러 ‘인문학적 소양’이라고 부르기를 즐겨한다. 이러한 명명은, 없어도 큰일 아니지만 있으면 더욱 빛을 발한다는 ‘고명 효과’로 인문학을 소비하는 대표적 사례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크고 깊고 지속적인 능력을 집약한 용어인 ‘인문학적 역량’이 훨씬 적합한 말이다. 우리는 이제 인문학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어떤 힘을 ‘소양’이 아니라 ‘역량’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앞으로의 정보 자본 사회에서는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큰 빈부격차가 생겨날 것이다. 이른바 ‘정보의 바다’에서 중요한 정보를 찾아내고 정보가 소통되는 경로를 관리하고 그것을 판매하는 능력에 따라 빈부격차는 점점 더 심화되어 갈 것이다. 또한 생명공학이나 유전공학이 치밀하게 상품화된다면, 인간의 자산이나 가치는 온통 수치로만 확연하게 환산되어 갈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인간에 대한 기존 가치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거의 무의미해질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우리의 대응 방안은 과학적, 자본적 변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역기능들을 감당할 수 있는 사회 안전보장 장치를 마련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는 것이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변화와는 질적으로 다른 변화의 물결 속에서 그것을 주도할 수 있는 집단은, 생명과 윤리 같은 인문학이 조율하고 정립해 가야 하는 문제의식들을 철저하게 점검해야 한다. 개인들 역시 자신의 존엄과 자율성을 지켜 나가기 위해 자신의 삶과 행동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끊임없이 수행해 가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방향 설정에, 말할 것도 없이, 공동체의 공감적 동의를 얻는 인문학적 지남(指南)들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중심과 목표는 인간
베를린홈볼트대학(좌)의 창립자 빌헬름 폰 홈볼트(우)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2세기 전 베를린홈볼트대학의 창립자 빌헬름 폰 훔볼트(Wilhelm von Humboldt, 독일 철학자, 1767~1835)는 성숙한 지성을 갖춘 전인적 인간 양성을 위하여 인문학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당연하게도 근대 초기 ‘인간을 위한 교육’을 지향했던 인문학의 중요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커진다. 신자유주의 경쟁 체제와 첨단 과학 기술이 득세함에 따라 인문학이 지향하는 성숙의 지표들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은 부와 권력과 지식과 정보를 향한 무한 경쟁의 최고 피해자는 결국 인간 자신일 것이다. 모든 것을 단일한 기준으로 재단하는 경제 논리에서나 전문화 과정에서나 인간 존엄성은 철저히 배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도와 인간의 관계에서 배려되지 않고 버려지는 것들을 ‘인간’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다시 묶고 연결하는 작업이 우리에게는 필수적으로 요청될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인문학이 담당해야 할 대안적 몫이 아닐 수 없다.
인문학은 세상이 크게 변해도 세상의 중심은 마땅히 인간이어야 하고, 모든 학문과 예술의 최고 목적 역시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을 본질로 한다. 그 점에서 인문학적 지성은, 어느 분야에서건 전문성을 자신만의 스케일과 디테일로 살려 가려는 인재들에게 필요한 자산이 되어줄 것이고, 대학을 비롯한 공동체에서는 인문 교육의 중요성과 첨예한 현재성을 다시 구체화해 갈 것이다. 국가나 공동체의 위기 때마다 그 극복 방향을 암시하고 거기에 윤리적 명분을 실어준 인문학적 지성은 다시 위기에 빠진 공동체를 살려 내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공동체를 살려 내는 인문학적 지성
- 공동체 회복을 위한 인문 탐색 -
유성호
2022-02-23
우리 주위에서는 이공계 학생들이 덤으로 가지는 부가적 탤런트를 일러 ‘인문학적 소양’이라고 부르기를 즐겨한다. 이러한 명명은, 없어도 큰일 아니지만 있으면 더욱 빛을 발한다는 ‘고명 효과’로 인문학을 소비하는 대표적 사례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크고 깊고 지속적인 능력을 집약한 용어인 ‘인문학적 역량’이 훨씬 적합한 말이다. 우리는 이제 인문학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어떤 힘을 ‘소양’이 아니라 ‘역량’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대학교 강의
대학이라는 근대적 교육 제도는 그 목표를 ‘교양인’과 ‘전문인’ 양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에 맞춘 채 출발하였다. 그것이 교육 형식으로 반영된 것이 ‘교양’과 ‘전공’이라는 분법(分法)이었을 것이다. ‘교양’이 상식과 합리성에 기초하여 살아갈 수 있는 반듯한 시민을 길러내는 데 목표를 두는 개념이라면, ‘전공’은 특정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전문인을 길러 낸다는 뜻이 담겨 있다. 대학 교육이 이 두 가지 요구의 긴장과 균형 속에서 발원하고 전개되어 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그 결과는 직장, 사회, 국가, 인류 등 크고 작은 공동체에 대한 생산적 기여로 이어져 갔다. 그런데 최근 우리 대학은 취업 지상주의와 경제 논리의 우위에 따라 현저하게 교양 교육의 성격이 약화되었다. 최상의 수행성과 효율성을 강조하는 취업과 경제 논리는 대학을 삶의 현장이 아닌, 취업 현장으로 나아가는 단계적이고 한시적인 수단으로 생각하게끔 만들어 버린 것이다. 자연스럽게 교양 교육의 핵심이었던 인문학도 그 지위와 영향력에서 약세를 면치 못하게 되었고, 심지어 전공 교육 구성원들도 덩달아 그 위기를 첨예하게 받아들이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대학에서의 인문학의 역할 변화
인문학을 핵심 자산으로 하는 ‘교양’은 19세기 독일에서 창안한 ‘빌둥(Bildung)’이라는 개념에서 유래하였다. 이는 인간다움을 닦고 형성해 가는 과정에서부터, 전문 기능인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직업 교육 과정과 구별되는 보편적 시민 교육의 일환이라는 뜻까지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그런데 그러한 교육 시스템에 가장 중요한 근간을 이루어 왔던 인문학은, 우리의 경우 ‘근대’를 둘러싸고 나타난 미완의 과제들과 깊은 연관을 가지게 되었다. 가령 식민과 해방과 분단, 전쟁과 독재, 봉건적 가치로부터의 탈피와 근대화 추진 등의 과정에서 나타난 갈등과 충돌에 대해 인문학은 그것들을 상상적으로 교정하면서 삶의 대안적 지표를 마련하는 데 크게 공헌해 왔다. 세계사에 유례 없는 성장 속도를 보여 준 우리가 여전히 인간 중심의 의제를 놓치지 않고 살아온 것도 어쩌면 인문학이라는 최후의 보루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 미디어의 일상화 이후 세계는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으로 급변하였고, 인문학은 그러한 근대적 과제들에 대한 대체 질서 마련이라는 고유 역할에서 한 걸음 비껴나게 되었다. 그리고 인문학의 위상이 달라진 만큼, 대학에서 생산하고 수용되는 인문학 역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존재 조건에 처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대학 교육의 역할 변화가 확연한 이 시점에, 인문학의 위상에 대해 성찰하면서 동시에 인문학이 새롭게 견지해야 할 지표들을 생각해 볼 필요와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두루 알다시피 인문학은 생활에 직접적으로 소용이 되는 실용적인 지식을 지향하지 않고 그것들을 해석하고 판단한 후 세계를 향해 정신적 가치를 부여하려는 목적을 취한다. 그것은 전통적 범주인 문사철로부터 인간의 자기실현을 추구하는 다양한 파생 학문까지를 모두 포괄한다. 그리고 여전히 인문학은 전문 분야를 횡단하는 통합적 지식 및 태도와 깊이 연관된다. 그만큼 인문학은 단순히 지식과 기술을 터득하는 것이 아니고, 또 기존의 사회 질서와 규범을 수동적으로 계승하는 것도 아니고, 개개의 인간들이 성숙한 인격을 형성해 가게끔 하는 데 진력한다. 사회 상황과 연결되는 지점에서 그 모순을 타개하기 위하여 과학적, 합리적, 기술적인 지식을 중시하면서도, 실제적 경험이나 지식 획득의 과정을 성찰하고 의미화하는 재귀(再歸)의 과정을 필연적으로 수반하게 되는 것이다.
‘인문학적 소양’에서 ‘인문학적 역량’으로
정보 분석
지금 세계는 기술의 발달로 공간적, 시간적 제약이 현저하게 극복됨에 따라 국가와 국가, 문화와 문화의 만남이 점점 더 넓게, 빠른 속도로 확장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문화들 간의 이해관계를 따지는 만남과 경험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의견의 차이에서 오는 마찰과 갈등은 더욱 증가해 가고 있다. 또한 서로 다른 국가나 문화 간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한 사회 안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현상이 되어 가고 있다. 우리 사회에도 기존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그룹들 사이의 갈등이 끝없이 생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 지식, 연령, 이념 등을 달리하는 계층과 세대 사이에서 점점 더 세분화되어 가고 있는데, 그룹별 세분화가 이루어지고 이해관계의 편차가 커질수록 사회 곳곳에서 마찰이 생기는 것은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군(群)에 대하여 인문학은 그 진단과 처방을 통해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려는 지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 점에서 인문학 다음에 와야 할 말은 ‘소양’이 아니라 ‘역량’이다. 우리 주위에서는 이공계 학생들이 덤으로 가지는 부가적 탤런트를 일러 ‘인문학적 소양’이라고 부르기를 즐겨한다. 이러한 명명은, 없어도 큰일 아니지만 있으면 더욱 빛을 발한다는 ‘고명 효과’로 인문학을 소비하는 대표적 사례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크고 깊고 지속적인 능력을 집약한 용어인 ‘인문학적 역량’이 훨씬 적합한 말이다. 우리는 이제 인문학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어떤 힘을 ‘소양’이 아니라 ‘역량’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앞으로의 정보 자본 사회에서는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큰 빈부격차가 생겨날 것이다. 이른바 ‘정보의 바다’에서 중요한 정보를 찾아내고 정보가 소통되는 경로를 관리하고 그것을 판매하는 능력에 따라 빈부격차는 점점 더 심화되어 갈 것이다. 또한 생명공학이나 유전공학이 치밀하게 상품화된다면, 인간의 자산이나 가치는 온통 수치로만 확연하게 환산되어 갈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인간에 대한 기존 가치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거의 무의미해질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우리의 대응 방안은 과학적, 자본적 변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역기능들을 감당할 수 있는 사회 안전보장 장치를 마련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는 것이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변화와는 질적으로 다른 변화의 물결 속에서 그것을 주도할 수 있는 집단은, 생명과 윤리 같은 인문학이 조율하고 정립해 가야 하는 문제의식들을 철저하게 점검해야 한다. 개인들 역시 자신의 존엄과 자율성을 지켜 나가기 위해 자신의 삶과 행동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끊임없이 수행해 가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방향 설정에, 말할 것도 없이, 공동체의 공감적 동의를 얻는 인문학적 지남(指南)들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중심과 목표는 인간
베를린홈볼트대학(좌)의 창립자 빌헬름 폰 홈볼트(우)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2세기 전 베를린홈볼트대학의 창립자 빌헬름 폰 훔볼트(Wilhelm von Humboldt, 독일 철학자, 1767~1835)는 성숙한 지성을 갖춘 전인적 인간 양성을 위하여 인문학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당연하게도 근대 초기 ‘인간을 위한 교육’을 지향했던 인문학의 중요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커진다. 신자유주의 경쟁 체제와 첨단 과학 기술이 득세함에 따라 인문학이 지향하는 성숙의 지표들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은 부와 권력과 지식과 정보를 향한 무한 경쟁의 최고 피해자는 결국 인간 자신일 것이다. 모든 것을 단일한 기준으로 재단하는 경제 논리에서나 전문화 과정에서나 인간 존엄성은 철저히 배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도와 인간의 관계에서 배려되지 않고 버려지는 것들을 ‘인간’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다시 묶고 연결하는 작업이 우리에게는 필수적으로 요청될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인문학이 담당해야 할 대안적 몫이 아닐 수 없다.
인문학은 세상이 크게 변해도 세상의 중심은 마땅히 인간이어야 하고, 모든 학문과 예술의 최고 목적 역시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을 본질로 한다. 그 점에서 인문학적 지성은, 어느 분야에서건 전문성을 자신만의 스케일과 디테일로 살려 가려는 인재들에게 필요한 자산이 되어줄 것이고, 대학을 비롯한 공동체에서는 인문 교육의 중요성과 첨예한 현재성을 다시 구체화해 갈 것이다. 국가나 공동체의 위기 때마다 그 극복 방향을 암시하고 거기에 윤리적 명분을 실어준 인문학적 지성은 다시 위기에 빠진 공동체를 살려 내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공동체 회복을 위한 인문 탐색] 공동체를 살려 내는 인문학적 지성
- 지난 글: [공동체 회복을 위한 인문 탐색] 다른 자리에도 앉고 천천히 옆으로도 뒤로도 가보기!!
국문과 교수
연세대학교 국문과 및 같은 대학원 졸업. 현재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인문대학장. 저서로는 『서정의 건축술』, 『문학으로 읽는 조용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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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역사가 아닌데…, 사람 닮은 인형이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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