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제야 알아차렸다. 나는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원’에 ‘입소’하면서 벌어지는 스토리, 즉 ‘K-입소물’을 좋아했던 것이다! (내가 방금 만든 용어다) 돌이켜보니 나 역시 그런 소설을 쓴 적이 있다. 취업 준비생들이 이름난 대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여러 단계의 면접을 거치다 마침내 최종 합숙 면접의 일환으로 ‘연수원’에 입소하게 되고, 그곳에서 장기 자랑 무대를 준비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넌 왠지 안 좋아할 것 같은데…”
넷플릭스 작품들 / STRANGER THINGS, CROWN NASCOS …
올 가을, 국내에서 제작된 한 웹드라마 시리즈가 넷플릭스 플랫폼을 통해 공개된 직후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그런데 유독 내 주변의 사람들은 그 작품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하지 않았다. 어쩐지 찝찝하고 ‘불쾌’한 이야기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재미있어서 두 번이나 봤다는 친구도 있었지만 그 역시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난 재밌게 봤지만 넌 왠지 안 좋아할 것 같아.”
주변의 그런 인상평 때문인지 나는 그 작품에 큰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심상치 않은 흥행가도를 달리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전 세계 넷플릭스 시청 랭킹을 휩쓸고 있다는 소식마저 들려왔다. 어느새 세상에는 그 작품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고 여기저기서 모두가 그 이야기뿐이었다. 이쯤되자 나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했던 친구에게 대체 어떤 내용인지를 물었다. 대략의 줄거리와 주요 인물, 사건, 배경, 스포일러까지 다 듣고 나서야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 이거…… 내가 좋아할 것 같은데?’
나는 뒤늦게 넷플릭스에 접속해 문제의 웹드라마를 1편부터 보기 시작했고 단번에 마지막화까지 다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뭐야, 나 이런 거 좋아하네’. 그리고 남들보다 이 작품을 늦게 본 것이 조금 억울해졌다. ‘대체 왜 내가 안 좋아할 것 같다고 한 거야? 나 이런 거 좋아해!’ 뒤이어 의문이 생겼다. 그런데…… ‘이런’ 게 뭘까?
데스게임물과는 다른데…, 무엇이 나를?
대표적인 ‘데스게임’ 장르 콘텐츠들. 왼쪽부터 〈카이지〉, 〈배틀로얄〉, 〈신이 말하는 대로〉 포스터 (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이 작품에는 분명 내가 좋아할 만한 요소가 있었다. 그것이 분명 나를 첫 화부터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 명확히 잡히지가 않았다. 찾아 보니 많은 사람들이 이 시리즈가 ‘데스게임물’이라고 불리는 장르의 한 종류라고 설명했다. 대표적인 예로 〈카이지〉, 〈배틀로얄〉, 〈신이 말하는 대로〉 등등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데스게임물’을 좋아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위에 언급된 영화와 그 원작 만화들을 포함해 ‘데스게임물’로 분류되는 장르를 거의 보지 못했고 그간 특별히 좋아해 본 적도 없다. 나를 사로잡은 건 그게 아닌 다른 요소였다. 나는 분명 이 작품과 겹치는 특징을 지녔으나 조금 더 먼저 세상에 나온 비슷한 이야기들을 좋아해 왔다. 그런데 그게 대체 뭘까?
스스로의 취향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1화부터 다시 주의 깊게 보기 시작했다. 작품의 도입부부터 날 빠져들게 만들었던 요소들을 하나하나 곱씹어 봤다. 참가 번호가 붙은 똑같은 단체복, 단체 침상, 아침마다 울려 퍼지는 기상송, 그리고 때가 되면 따박따박 식판에 나오는 조식, 중식, 석식…… 밖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데 그 안에서만 엄격히 통제·통용되는 각종 규율들…… 온갖 종류의 ‘이상함’으로 가득 찬 공간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상한 것들을 다 지키기로 약속하고 참여한 사람들이 다름 아니라 제발로 걸어 들어왔다는 점…….
아, 그제야 알아차렸다. 나는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원’에 ‘입소’하면서 벌어지는 스토리, 즉 ‘K-입소물’을 좋아했던 것이다! (내가 방금 만든 용어다) 돌이켜보니 나 역시 그런 소설을 쓴 적이 있다. 취업 준비생들이 이름난 대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여러 단계의 면접을 거치다 마침내 최종 합숙 면접의 일환으로 ‘연수원’에 입소하게 되고, 그곳에서 장기 자랑 무대를 준비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단편 소설이었다. 나의 졸작 역시 모두가 자기 이름이 크게 적힌 하늘색 츄리닝을 똑같이 받아 입고 최후의 승자 정규직 신입 사원가 되기 위해 협심과 반목이 교차하는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나 역시 ‘K-입소물’이라 칭해도 좋을 만한 소설을 써 놓고도 그게 뭔지 몰랐던 것이다. 마침내 그걸 깨닫고 나자, 그리고 이렇게 이름까지 지어 붙이고 나자 내가 좋아해 온 다른 문학 작품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이 지면을 빌려 내가 그간 좋아해 여러 번 읽었던 한국 문학의 ‘K-입소물’ 몇 편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천운영 작가의 단편 소설 〈금연캠프〉에는 평생을 펴 온 담배와 이별하기 위해 금연캠프에 입소하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나는 지금 당장 담배를 피우고 싶다’ 같은 설문의 문장에 ‘매우 그렇다’를 연달아 체크한, ‘매우 그러한’ 여성들. 수십 년째 해온 사업의 스트레스를 담배로 풀다가, 신장 수술 이후 건강을 생각해 끊어야 하는데 자제가 안 되어서, 손주 건강에 안 좋다고 아들 내외가 발길을 끊어서, 누구는 입덧 때 또 누구는 산후 우울증이 왔을 때 피우기 시작했는데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아서, 할아버지 담배를 훔쳐 피우다가 중독이 되어 쓰레기통의 장초를 뒤져가며 피우게 되어서, 그런 스스로를 쓰레기라고 생각해서……. 읽는 내내 어쩐지 입속 ‘쩐 내’가 전해져올 것만 같은 생생한 인물들과 대사가 압권인 작품이다. 이들이 서로의 흡연 역사를 고백하며 우리 모두의 흡연 기간을 합하면 어마어마한 기간이 될 거라고 하자 한 입소자가 “한 오백 년…….”이라고 읊조린다. 나는 그 자조적인 장면을 너무나 좋아해서 읽을 때마다 매번 처음 읽는 사람처럼 새로이 웃어버리고 만다.
권여름 작가(좌)와 장편 소설 〈내 생의 마지막 다이어트〉 책 표지(우) (이미지 출처: 채널예스, 교보문고)
담배말고 또 다른 무언가를 절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캠프도 있다. 권여름 작가의 장편 소설 〈내 생의 마지막 다이어트〉에서는 ‘건강하게’ 살을 빼게 해 준다는 단식원에 입소하는 인물들이 나온다. 먼저 전교 1등의 우수한 성적을 자랑했지만 뚱뚱한 몸 때문에 입시와 취업에 실패하고 단식원에 들어오게 된 봉희. 물마저 스무 번 이상 천천히 씹어 삼켜야 하는 혹독한 매뉴얼을 따라 결국 다이어트에 성공한 봉희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단식원의 코치로 취업까지 한다. 어느덧 베테랑 코치가 되었을 무렵 운남이라는 인물이 봉희네 팀으로 입소한다. 운남은 이른바 단식원의 ‘에이스’로 불리며 모두가 주목하는 다이어트 방송의 주인공으로 낙점되었지만 촬영 전날 돌연 종적을 감춘다. 독자들은 봉희와 함께 사라진 운남의 행방을 좇으며 책장을 넘기게 되는데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운남의 행방뿐 아니라 그가 애초에 왜 단식원에 입소할 마음을 먹게 되었는지 그 이유 역시 함께 좇게 된다. 운남이 어떤 마음으로 단식원 입소를 결심했는지는 책의 말미에 밝혀지는데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먹먹한 마음은 언제 떠올려도 감출 길이 없다.
소설가 박형서(좌)와 〈쓸모에 대하여〉가 실린 현대문학 2019년 3월호 표지(우) (이미지 출처: 중앙일보, 현대문학)
한편 아주 조금은 더 따뜻한 결의 이야기도 있다. 현대문학 2019년 3월호에 실린 박형서 작가의 단편 〈쓸모에 대하여〉에서는 자신이 가진 것의 전부로 여겼던 카센터가 망해 직원 월급도 주지 못할 형편에 처한, 그야말로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화자가 등장한다. 화자는 어느 날 대출 상담을 받으러 가다가 이상한 예감이 들어 본가에 들르게 되고 폐병에 걸린 누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를 막아내고 급하게 누이를 구출해 차를 몰고 밤길을 정처 없이 질주한다. 문자 그대로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 속을 도망치듯 달리다 급정거하게 된 곳은 허술한 대형 철문 앞. 기도원인지 교도소인지 모를 의문의 연수원 입구를 향해 서서히 다가가다 역시 의문의 안내 직원에 의해 117번 방에 자연스레 배정받은 남매는 기절하다시피 잠든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그곳이 ‘전국여객자동차운송사업지원인력연수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버스 안내양들이 ‘죽을 만큼 노력해서 새 출발을 준비하는 곳’이었다. 뜻밖에 누나 역시 버스 안내양이 되기 위한 각종 훈련―빠꾸 스톱 오라이 외치기, 교통법규 및 버스비 암산 교육, 차곡차곡 승객 밀어넣기, 달리는 차에 매달리기, 미아 찾기와 소매치기 제압하기 등등―을 받게 되고 남성인 화자는 실습에 사용되는 차를 손보는 정비창 일을 하게 된다. 그곳에서 여러 날, 여러 시간들을 겪은 화자는 다시 카센터를 살려보기로, 자신이 있던 자리로 돌아가기로, 닥쳐온 난관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기로 결심할 힘을 얻게 된다. 처음에는 칼같이 각 잡힌 안내양들 사이에서 적응하지 못해 눈에 도드라지기만 했던 누이. 그러나 화자가 연수원을 퇴소할 즈음엔 누나의 ‘오라잇’ 소리를 찾아낼 수 없었다는 마지막 문장은 내가 너무나 사랑해 마지않는 장면이다. 개인이 군중 속에 섞여 들어가 결국은 알아차릴 수 없게 되었다는, 이토록 씁쓸한 종류의 문장을, 그 씁쓸함을 유지한 채로 기쁘게 읽을 수 있게 하다니. 나는 이것이 바로 멋진 이야기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현실 닮은 엉뚱한 원리 작동 공간 들여다보다 스스로를…
‘K-입소물’의 대표적인 드라마인 〈오징어게임〉 중 한 장면 (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나는 왜 유독 이런 ‘K-입소물’을 좋아하는 걸까?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우선 창작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모두가 똑같은 옷을 입고 제한된 공간에 갇힌 상태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설정이 다른 변인(變因)들을 통제해 캐릭터 고유의 개성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어 주기 때문인 것 같다. 입체적인 캐릭터는 언제나 이야기에 감칠맛을 부여하니까. 그렇다면 이야기 소비자의 관점에서는 어떨까. 스스로 자유를 내려놓고 이상하고 말도 안 되는 규율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분명 유쾌한 경험일 리 없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딱 그렇게 생겼다. 세상은 하나도 공정하지 않고 날 때부터 불리한 위치에 있던 사람들은 관성에 따라 자기도 모르게 계속 불리한 쪽으로만 굴러간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즈음에서야, 주저앉고 나서야, 어떻게든 다시 살아남아 보려 무릎에 묻은 흙먼지를 털고 일어나 유니폼을 입고 번호표를 달고 배식을 받는 곳으로 걸어 들어간다. 하지만 그렇게 입소한 곳 역시 공정이나 규율과는 하등 상관없는 엉뚱한 원리로 굴러가긴 매한가지. 나는 은유든 직유든 그걸 고스란히 보여 주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가 겪어온 세상은 ‘쾌’보다는 ‘불쾌’에 더 가까웠으므로. 현실과 닮은 곳을 실감나게 들여다보는 일을 마치고 나면, 그 속에서 그것을 보고 있는 자신에 대해 돌이켜보게 만들어 주므로.
내가 사랑한 ‘K-입소물’들
- 불쾌해도 현실 고스란히…, 나를 돌아보게 해 필요한 -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
장류진
2022-01-06
아, 그제야 알아차렸다. 나는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원’에 ‘입소’하면서 벌어지는 스토리, 즉 ‘K-입소물’을 좋아했던 것이다! (내가 방금 만든 용어다) 돌이켜보니 나 역시 그런 소설을 쓴 적이 있다. 취업 준비생들이 이름난 대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여러 단계의 면접을 거치다 마침내 최종 합숙 면접의 일환으로 ‘연수원’에 입소하게 되고, 그곳에서 장기 자랑 무대를 준비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넌 왠지 안 좋아할 것 같은데…”
넷플릭스 작품들 / STRANGER THINGS, CROWN NASCOS …
올 가을, 국내에서 제작된 한 웹드라마 시리즈가 넷플릭스 플랫폼을 통해 공개된 직후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그런데 유독 내 주변의 사람들은 그 작품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하지 않았다. 어쩐지 찝찝하고 ‘불쾌’한 이야기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재미있어서 두 번이나 봤다는 친구도 있었지만 그 역시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난 재밌게 봤지만 넌 왠지 안 좋아할 것 같아.”
주변의 그런 인상평 때문인지 나는 그 작품에 큰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심상치 않은 흥행가도를 달리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전 세계 넷플릭스 시청 랭킹을 휩쓸고 있다는 소식마저 들려왔다. 어느새 세상에는 그 작품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고 여기저기서 모두가 그 이야기뿐이었다. 이쯤되자 나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했던 친구에게 대체 어떤 내용인지를 물었다. 대략의 줄거리와 주요 인물, 사건, 배경, 스포일러까지 다 듣고 나서야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 이거…… 내가 좋아할 것 같은데?’
나는 뒤늦게 넷플릭스에 접속해 문제의 웹드라마를 1편부터 보기 시작했고 단번에 마지막화까지 다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뭐야, 나 이런 거 좋아하네’. 그리고 남들보다 이 작품을 늦게 본 것이 조금 억울해졌다. ‘대체 왜 내가 안 좋아할 것 같다고 한 거야? 나 이런 거 좋아해!’ 뒤이어 의문이 생겼다. 그런데…… ‘이런’ 게 뭘까?
데스게임물과는 다른데…, 무엇이 나를?
대표적인 ‘데스게임’ 장르 콘텐츠들. 왼쪽부터 〈카이지〉, 〈배틀로얄〉, 〈신이 말하는 대로〉 포스터 (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이 작품에는 분명 내가 좋아할 만한 요소가 있었다. 그것이 분명 나를 첫 화부터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 명확히 잡히지가 않았다. 찾아 보니 많은 사람들이 이 시리즈가 ‘데스게임물’이라고 불리는 장르의 한 종류라고 설명했다. 대표적인 예로 〈카이지〉, 〈배틀로얄〉, 〈신이 말하는 대로〉 등등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데스게임물’을 좋아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위에 언급된 영화와 그 원작 만화들을 포함해 ‘데스게임물’로 분류되는 장르를 거의 보지 못했고 그간 특별히 좋아해 본 적도 없다. 나를 사로잡은 건 그게 아닌 다른 요소였다. 나는 분명 이 작품과 겹치는 특징을 지녔으나 조금 더 먼저 세상에 나온 비슷한 이야기들을 좋아해 왔다. 그런데 그게 대체 뭘까?
스스로의 취향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1화부터 다시 주의 깊게 보기 시작했다. 작품의 도입부부터 날 빠져들게 만들었던 요소들을 하나하나 곱씹어 봤다. 참가 번호가 붙은 똑같은 단체복, 단체 침상, 아침마다 울려 퍼지는 기상송, 그리고 때가 되면 따박따박 식판에 나오는 조식, 중식, 석식…… 밖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데 그 안에서만 엄격히 통제·통용되는 각종 규율들…… 온갖 종류의 ‘이상함’으로 가득 찬 공간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상한 것들을 다 지키기로 약속하고 참여한 사람들이 다름 아니라 제발로 걸어 들어왔다는 점…….
아, 그제야 알아차렸다. 나는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원’에 ‘입소’하면서 벌어지는 스토리, 즉 ‘K-입소물’을 좋아했던 것이다! (내가 방금 만든 용어다) 돌이켜보니 나 역시 그런 소설을 쓴 적이 있다. 취업 준비생들이 이름난 대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여러 단계의 면접을 거치다 마침내 최종 합숙 면접의 일환으로 ‘연수원’에 입소하게 되고, 그곳에서 장기 자랑 무대를 준비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단편 소설이었다. 나의 졸작 역시 모두가 자기 이름이 크게 적힌 하늘색 츄리닝을 똑같이 받아 입고 최후의 승자 정규직 신입 사원가 되기 위해 협심과 반목이 교차하는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나 역시 ‘K-입소물’이라 칭해도 좋을 만한 소설을 써 놓고도 그게 뭔지 몰랐던 것이다. 마침내 그걸 깨닫고 나자, 그리고 이렇게 이름까지 지어 붙이고 나자 내가 좋아해 온 다른 문학 작품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이 지면을 빌려 내가 그간 좋아해 여러 번 읽었던 한국 문학의 ‘K-입소물’ 몇 편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내가 좋아했던 ‘K-입소물’한국 문학 작품들
- 천운영 〈금연캠프〉, 권여름 〈내 생의 마지막 다이어트〉, 박형서 〈쓸모에 대하여〉
천운영 작가(좌)와 〈금연캠프〉가 실린 창비 2019 가을호 표지(우) (이미지 출처: 채널예스, 창비)
천운영 작가의 단편 소설 〈금연캠프〉에는 평생을 펴 온 담배와 이별하기 위해 금연캠프에 입소하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나는 지금 당장 담배를 피우고 싶다’ 같은 설문의 문장에 ‘매우 그렇다’를 연달아 체크한, ‘매우 그러한’ 여성들. 수십 년째 해온 사업의 스트레스를 담배로 풀다가, 신장 수술 이후 건강을 생각해 끊어야 하는데 자제가 안 되어서, 손주 건강에 안 좋다고 아들 내외가 발길을 끊어서, 누구는 입덧 때 또 누구는 산후 우울증이 왔을 때 피우기 시작했는데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아서, 할아버지 담배를 훔쳐 피우다가 중독이 되어 쓰레기통의 장초를 뒤져가며 피우게 되어서, 그런 스스로를 쓰레기라고 생각해서……. 읽는 내내 어쩐지 입속 ‘쩐 내’가 전해져올 것만 같은 생생한 인물들과 대사가 압권인 작품이다. 이들이 서로의 흡연 역사를 고백하며 우리 모두의 흡연 기간을 합하면 어마어마한 기간이 될 거라고 하자 한 입소자가 “한 오백 년…….”이라고 읊조린다. 나는 그 자조적인 장면을 너무나 좋아해서 읽을 때마다 매번 처음 읽는 사람처럼 새로이 웃어버리고 만다.
권여름 작가(좌)와 장편 소설 〈내 생의 마지막 다이어트〉 책 표지(우) (이미지 출처: 채널예스, 교보문고)
담배말고 또 다른 무언가를 절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캠프도 있다. 권여름 작가의 장편 소설 〈내 생의 마지막 다이어트〉에서는 ‘건강하게’ 살을 빼게 해 준다는 단식원에 입소하는 인물들이 나온다. 먼저 전교 1등의 우수한 성적을 자랑했지만 뚱뚱한 몸 때문에 입시와 취업에 실패하고 단식원에 들어오게 된 봉희. 물마저 스무 번 이상 천천히 씹어 삼켜야 하는 혹독한 매뉴얼을 따라 결국 다이어트에 성공한 봉희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단식원의 코치로 취업까지 한다. 어느덧 베테랑 코치가 되었을 무렵 운남이라는 인물이 봉희네 팀으로 입소한다. 운남은 이른바 단식원의 ‘에이스’로 불리며 모두가 주목하는 다이어트 방송의 주인공으로 낙점되었지만 촬영 전날 돌연 종적을 감춘다. 독자들은 봉희와 함께 사라진 운남의 행방을 좇으며 책장을 넘기게 되는데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운남의 행방뿐 아니라 그가 애초에 왜 단식원에 입소할 마음을 먹게 되었는지 그 이유 역시 함께 좇게 된다. 운남이 어떤 마음으로 단식원 입소를 결심했는지는 책의 말미에 밝혀지는데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먹먹한 마음은 언제 떠올려도 감출 길이 없다.
소설가 박형서(좌)와 〈쓸모에 대하여〉가 실린 현대문학 2019년 3월호 표지(우) (이미지 출처: 중앙일보, 현대문학)
한편 아주 조금은 더 따뜻한 결의 이야기도 있다. 현대문학 2019년 3월호에 실린 박형서 작가의 단편 〈쓸모에 대하여〉에서는 자신이 가진 것의 전부로 여겼던 카센터가 망해 직원 월급도 주지 못할 형편에 처한, 그야말로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화자가 등장한다. 화자는 어느 날 대출 상담을 받으러 가다가 이상한 예감이 들어 본가에 들르게 되고 폐병에 걸린 누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를 막아내고 급하게 누이를 구출해 차를 몰고 밤길을 정처 없이 질주한다. 문자 그대로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 속을 도망치듯 달리다 급정거하게 된 곳은 허술한 대형 철문 앞. 기도원인지 교도소인지 모를 의문의 연수원 입구를 향해 서서히 다가가다 역시 의문의 안내 직원에 의해 117번 방에 자연스레 배정받은 남매는 기절하다시피 잠든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그곳이 ‘전국여객자동차운송사업지원인력연수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버스 안내양들이 ‘죽을 만큼 노력해서 새 출발을 준비하는 곳’이었다. 뜻밖에 누나 역시 버스 안내양이 되기 위한 각종 훈련―빠꾸 스톱 오라이 외치기, 교통법규 및 버스비 암산 교육, 차곡차곡 승객 밀어넣기, 달리는 차에 매달리기, 미아 찾기와 소매치기 제압하기 등등―을 받게 되고 남성인 화자는 실습에 사용되는 차를 손보는 정비창 일을 하게 된다. 그곳에서 여러 날, 여러 시간들을 겪은 화자는 다시 카센터를 살려보기로, 자신이 있던 자리로 돌아가기로, 닥쳐온 난관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기로 결심할 힘을 얻게 된다. 처음에는 칼같이 각 잡힌 안내양들 사이에서 적응하지 못해 눈에 도드라지기만 했던 누이. 그러나 화자가 연수원을 퇴소할 즈음엔 누나의 ‘오라잇’ 소리를 찾아낼 수 없었다는 마지막 문장은 내가 너무나 사랑해 마지않는 장면이다. 개인이 군중 속에 섞여 들어가 결국은 알아차릴 수 없게 되었다는, 이토록 씁쓸한 종류의 문장을, 그 씁쓸함을 유지한 채로 기쁘게 읽을 수 있게 하다니. 나는 이것이 바로 멋진 이야기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현실 닮은 엉뚱한 원리 작동 공간 들여다보다 스스로를…
‘K-입소물’의 대표적인 드라마인 〈오징어게임〉 중 한 장면 (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나는 왜 유독 이런 ‘K-입소물’을 좋아하는 걸까?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우선 창작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모두가 똑같은 옷을 입고 제한된 공간에 갇힌 상태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설정이 다른 변인(變因)들을 통제해 캐릭터 고유의 개성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어 주기 때문인 것 같다. 입체적인 캐릭터는 언제나 이야기에 감칠맛을 부여하니까. 그렇다면 이야기 소비자의 관점에서는 어떨까. 스스로 자유를 내려놓고 이상하고 말도 안 되는 규율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분명 유쾌한 경험일 리 없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딱 그렇게 생겼다. 세상은 하나도 공정하지 않고 날 때부터 불리한 위치에 있던 사람들은 관성에 따라 자기도 모르게 계속 불리한 쪽으로만 굴러간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즈음에서야, 주저앉고 나서야, 어떻게든 다시 살아남아 보려 무릎에 묻은 흙먼지를 털고 일어나 유니폼을 입고 번호표를 달고 배식을 받는 곳으로 걸어 들어간다. 하지만 그렇게 입소한 곳 역시 공정이나 규율과는 하등 상관없는 엉뚱한 원리로 굴러가긴 매한가지. 나는 은유든 직유든 그걸 고스란히 보여 주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가 겪어온 세상은 ‘쾌’보다는 ‘불쾌’에 더 가까웠으므로. 현실과 닮은 곳을 실감나게 들여다보는 일을 마치고 나면, 그 속에서 그것을 보고 있는 자신에 대해 돌이켜보게 만들어 주므로.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내가 사랑한 ‘K-입소물’들
- 지난 글: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사랑해, 트레이시… 네가 얼마나 무겁든”
소설가
2018년 창비 신인소설상을 받으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 장편 소설 『달까지 가자』가 있다. 제11회 젊은작가상, 제7회 심훈문학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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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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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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