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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 상상이 아닌 현실로

- 관람객과 함께 생기발랄 공간 실험 중인 한국의 박물관들 -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

박찬희

2021-12-15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은? 영화, 드라마 등 일반 시민들에게 익숙한 대중문화 콘텐츠를 통해 소개되고 있는 역사 속 특정 장면들은 그 앞뒤로  어떤 시대적 상황과 맥락, 역사적 진실과 논란 등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걸까. 역사 전문가들의 친절한 소개와 설명을 통해 그동안 피상적으로 접했던  역사적 사실에 대해 보다 구체적이고 가깝게 다가가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한다.


두 박물관 최고 인기 프로그램이 1박 2일 박물관 캠프다. 이 캠프를 서대문자연사박물관에서는 “공룡 발밑에서의 하룻밤”으로, 전곡선사박물관에서는 “선사의 법칙”으로 부른다. 박물관 누리집에 캠프 신청 소식이 올라가자마자 마감된다. 캠프 참가자도 “잊지 못할 하룻밤”, “최고의 경험”이라고 소감을 전한다. 참가자들은 어두운 전시실을 탐험하고 전시실에서 잔다. 이 순간 참가자들은 영화 속 주인공 래리 데일리가 된다…….



“박물관은 어떤 곳이 돼야 할까?”라는 질문



박물관을 소재로 만든 한국 영화는 뭐가 있을까?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한국만 그럴까? 외국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한눈에 들어올 정도다. 한국이나 외국이나 박물관이 영화 소재로는 매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



모두가 잠든 순간, 환상의 세계가 깨어난다! 벤 스틸러 〈박물관이 살아있다!〉 12월21일, 전세계 최초 개봉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1〉 포스터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2006년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1〉이 개봉되었다. 뜻밖에 이 영화는 오랫동안 큰 인기를 누렸다. 1편이 나온지 꽤 시간이 흘렀어도 이 영화를 기억하거나 아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 영화가 인기를 누린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 속 자연사박물관의 맥피 관장은 전시물을 만져보려는 아이를 보고 정색하며 소리친다.


“오, 전시품 노 터치. 여기는 박물관이에요. 놀이터가 아니라고요.”


박물관에 간 아이들이 자주 듣는 말이다. 박물관에서는 왠지 조용해야 할 것 같고 공부해야 할 것 같고 몰라도 아는 체해야 할 것 같다. 어쩐지 시끌벅적한 놀이터와 내내 평행선을 달릴 것만 같은 박물관.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마법을 부려 평행선을 교차시켰다. 주인공 래리 데일리(벤 스틸러 분)는 역사를 공부하는 박물관 가이드 레베카 허트먼에게 말한다.


“박물관에서는 역사가 되살아난다고 하죠.”


그러면서 이 박물관에서는 진짜 되살아난다고 하자 레베카는 놀리지 말라며 퇴근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영화를 개봉하면서 원래 제목인 〈박물관의 밤〉 대신 〈박물관이 살아있다〉로 제목을 바꾸었다. 신의 한수였다. 영화의 주제를 제대로 담은 제목이면서 사람들이 박물관을 고리타분하게 생각한다는 점을 꿰뚫은 역설적인 제목이다. 되살아난 박물관은 관객에게 신나는 놀이터가 되었다.


살아있는 듯 역동적인 박물관, 영화에서만 가능한 걸까?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사회와 동떨어져, 오랫동안 외딴 섬 같던 박물관이 어느 순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큐레이터는 물었다. 박물관은 어떤 곳이 되어야 할까,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박물관이 살아있다1〉에 나오는 고루한 맥피 관장이라면 묻지 않을 질문이다. 관람객이라고 조용히 관람만 했을까? 박물관이 재미있으면 안 되냐고 묻기 시작했다.



단단하던 빗장을 풀고…‘박물관 1박 2일 캠프’



살아있는 박물관을 만들기 위해 한국의 박물관은 어떻게 했을까? 〈박물관이 살아있다1〉에는 나오지 않지만 규모가 큰 박물관에서는 문 닫을 시간이 가까워오면 안내 방송을 내보낸다. 곧 문을 닫으니까 나갈 준비하라고. 관람객이 빠져나간 전시실은 순식간에 어둠에 잠긴다. 영화처럼 주인공이 아들을 데리고 들어온다는 건 영화에서나 가능하다. 전시실 안은 각종 보안 장비가 가득하다. 진열장 내부도 마찬가지다. 영화와 다르게, 조금만 움직여도 순식간에 경보가 울린다. 박물관의 밤은 정지된 시간이고 밤의 박물관은 금단의 공간이다. 궁금하지만 알 수 없는 세상이다.


만약 박물관이 그 시간에 문을 연다면? 단단하던 박물관의 빗장을 푼 곳이 서대문자연사박물관과 전곡선사박물관이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은 〈박물관이 살아있다1〉처럼 거대한 공룡이 박물관 입구에서 관람객을 맞는다. 갖가지 동물과 식물이 가득한 전시실은 다른 세상 같다. 전곡선사박물관은 구석기 대표 유물인 주먹도끼로 유명하다. 전시실에는 인류와 동물의 모형, 구석기 사람들의 생활을 그럴싸하게 전시했다.



전곡선사박물관 전시실

전곡선사박물관 전시실



두 박물관 최고 인기 프로그램이 1박 2일 박물관 캠프다. 이 캠프를 서대문자연사박물관에서는 “공룡 발밑에서의 하룻밤”으로, 전곡선사박물관에서는 “선사의 법칙”으로 부른다. 박물관 누리집에 캠프 신청 소식이 올라가자마자 마감된다. 캠프 참가자도 “잊지 못할 하룻밤”, “최고의 경험”이라고 소감을 전한다. 참가자들은 어두운 전시실을 탐험하고 전시실에서 잔다. 이 순간 참가자들은 영화 속 주인공 래리 데일리가 된다.


두 박물관이 부지런한 소수에게 극적인 경험을 제공한다면 국립중앙박물관은 많은 사람들에게 저녁 박물관의 맛을 보여 준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에는 저녁 9시까지 문을 연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관람 시간을 연장했다. 저녁에는 박물관을 보는 감각이 예민해진다. 낮 동안 긴장했던 감각이 여유를 찾아서인지 유물이 말을 건넨다는 기분이 들 정도다. 영화에서는 밤에 전시물이 살아나지만 밤에는 사람들의 감각도 살아난다.



급격한 기술 변화, 관람객 사로잡는 박물관 실감 영상



〈박물관이 살아있다1〉에는 모형과 디오라마(diorama, 풍경이나 그림 등을 뒷 배경으로 하고 축소 모형을 세운 후 특정 풍경이나 장면을 만드는 것)가 자주 나온다. 이것은 박물관에서 오랫동안 사용된 전시물로 여전히 인기가 높다. 하지만 이 영화가 2006년이 아니라 2021년에 개봉되었다면 다른 전시물이 등장해 관객을 사로잡았을지 모른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관객은 “오, 정말 박물관 실감 나는데. 박물관에 저런 게 있어?”라고 놀라 되물을 것이다. 박물관의 실감 영상 이야기다.


오랫동안 산업 기술과 박물관은 꽤 거리가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최근 산업 기술이 박물관으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박물관을 둘러싼 환경이 빠르게 바뀌면서 큐레이터들은 박물관이 가야할 길을 다양하게 모색했다. 그때 관람객에게 생생한 경험을 주는 특별한 영상이 큐레이터의 눈을 사로잡았다. 첨단 기술을 활용해 만든 영상은 관람객을 규모로 압도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로 사로잡았다. 옛날 냄새만 풀풀 날 것 같은 박물관에서 뜻밖에 최신 문물을 맞닥뜨린 관람객들은 깜짝 놀랐다.


변화를 이끈 진원지는 국립중앙박물관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한국의 대표적인 박물관답게 영상 콘텐츠로 활용할 유물이 많고 사용 가능한 공간도 넓고 예산 사정도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새로운 변화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높았다. 2020년 박물관 곳곳에 영상실이 들어섰다. 관람객을 압도하는 대규모 실감 영상관을 비롯해 가상 현실 체험실까지 다양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풍경이었다.



경천사 십층석탑 미디어 파사드

경천사 십층석탑 미디어 파사드



여러 영상 가운데 경천사 십층석탑 미디어 파사드(건축물 외벽에 다양한 영상을 투사하는 일) 가 돋보인다. 수요일과 토요일 저녁 경천사 십층석탑을 비추던 조명이 꺼지고 탑 이야기가 담긴 영상이 탑을 빛낸다. 관람객들은 12분 동안 영상이 새롭게 탑을 깨우는 장면을 눈앞에서 본다. 마법을 부리던 영상이 모두 사라질 때 관람객은 감동적인 영화라도 본 듯 너나없이 박수를 친다. 이때 경천사 십층석탑은 관람객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다시 살아난다.


여러 박물관에서 영상을 활용하면서 새로운 고민거리가 등장했다. 영상은 유물과 어떻게 조화를 이뤄야 할까.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안녕, 모란〉 특별전(2021. 7. 7.∼10. 31.)은 유물과 영상이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제대로 선보인 전시였다. 영상이 주인공인 공간에서는 영상이 맘껏 주인공 노릇을 했고 유물이 주인공인 공간에서는 유물이 돋보이도록 배경으로 물러났다. 관람객이 쉬는 공간에서는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박물관이 살아있다1〉에서 해가 뜨기 전 복작거리던 전시물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영상도 다양한 실험 끝에 새로운 자리를 만들어 가는 중이다.



대체 불가 본업인‘유물 전시’… 오래된 미래



〈박물관이 살아있다1〉에 나오는 것처럼 전시는 박물관의 기본이다. 공룡이나 사자처럼 진열장 밖에 전시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진열장 안에 전시된다. 진열장 밖에 있든 진열장 안에 있든 전시물은 박물관의 특성에 따라 일관성을 갖는다. 이 영화의 무대는 자연사박물관이다. 자연사박물관답게 공룡이나 동물이 나온다. 그런데 함께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은 자연사박물관보다 역사박물관에 더 제격이다. 영화의 무대는 자연사박물관이지만 극적으로 구성하기 위해 여러 시대의 인물을 등장시킨 것 같다.


전시는 오래된 미래다. 요즘은 박물관에 가지 않아도 누구나 손쉽게 유물을 검색해 볼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변화다. 그런데 이 일에 고무된 어떤 사람들은 앞으로 박물관에 갈 필요가 없는 시대가 올 수 있다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좀 더 생각해 보면 검색으로 만난 건 화면 속 이미지이지 유물이 아니다. 화면으로 본 금동반가사유상과 직접 본 금동반가사유상이 같을 수 있을까? 대체할 수 없는 박물관의 역할을 꼽자면 실제 유물을 전시한다는 점이다. 모나리자 그림은 누구나 알지만 사람들은 책이나 사진, 영상 등으로 만난 모나리자에 만족하지 않고 루브르박물관으로 몰려간다. 영화의 끝부분에서도 사람들은 뉴스에 나온 자연사박물관의 전시물을 보려고 박물관으로 몰려들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



박물관은 유물과 관람객이 잘 만나도록 여러 가지 시도를 한다. 유물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관람객의 취향이 바뀌면서 일어난 변화를 예민하게 포착해 전시에 반영한다. 2021년 11월 12일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이 문을 열었다. 이 방은 관람객이 금동반가사유상에 집중할 수 있도록 섬세하게 만들어졌다. 덕분에 전시실에 들어선 관람객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금동반가사유상의 미소와 사유에 빠져든다. 박물관이 전시를 묻고 바꾸려고 시도하는 만큼 박물관도 싱싱하게 살아난다. 영화에는 이집트의 파라오 아크멘라가 소유했던 황금 석판이 나온다. 박물관에 소장됐던 전시물들은 신비한 황금 석판의 힘으로 밤마다 부활했다. 살아있는 박물관을 만든 황금 석판은 영화에만 있는 건 아니었다.


고군분투하는 박물관을 보면서 기대를 건다. 머지않아 〈박물관이 살아있다〉 한국판이 만들어질 거라고.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 상상이 아닌 현실로

- 지난 글: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나 그런 사람 아니야!” 대하사극 〈천추태후〉를 고려 성종이 봤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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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희 필자 사진
박찬희

박찬희박물관연구소 소장
중학교 때 절터에서 깨진 기왓장을 주우면서 역사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역사를, 대학원에서 한국미술사를 공부하고, 박물관에서 11년 동안 학예연구원으로 일했다. 아내의 육아 휴직이 끝남과 동시에 아이를 자기 손으로 키우려고 박물관을 그만둔 뒤부터 박물관 연구자이자 이야기꾼이 되어 전국의 박물관과 유적을 두 발로 찾아다니고 있다. 쓴 책으로 『박물관의 최전선』, 『구석구석 박물관1』, 『아빠를 키우는 아이』, 『몽골 기행』, 『놀이터 일기』가 있으며 함께 쓴 책으로 『두근두근 한국사 1,2』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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