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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자유와 안전한 통제 사이

- 이달의 답변 -

표정훈

2021-12-03

인문쟁점은? 우리 시대가 마주하고 있는 여러 인문학적 과제들을 각 분야 전문가들의 깊은 사색, 허심탄회한 대화 등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더 깊은 고민을 나누고자 만든 코너입니다. 매월 국내 인문 분야 전문가 두 사람이 우리들이 한번쯤 짚어봐야 할 만한 인문적인 질문(고민)을 던지고 여기에 진지한 답변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생각 같아서는 그런 콘텐츠들의 유해성, 해악을 판단하여 어떤 조치를 내리고 싶습니다만, 역시 문제는 그 판단과 조치를 누가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곧 정당성 문제입니다. 제가 든 사례들은 유해성, 해악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다만 어떤 책의 유해성, 해악이라는 것을 자의적으로 판단할 가능성이 얼마나 큰지, 또한 정치적 의도에 따라, 인종적, 종교적 편향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판단할 수 있는지 보여 줍니다…



출판의 자유vs 권리에 따른 책임



도서관에 비치된 많은 책들

도서관에 비치된 많은 책들



2020년 우리나라에서 발행된 신간은 65,792종이었습니다. (대한출판문화협회 〈출판연감〉) 이 많은 책 가운데 말씀하신 다음과 같은 책이 과연 없을까요?. 없다고 보는 건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범죄자들의 책, 혹은 존재 자체가 범죄의 영역에 가닿아 있는 책,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가 담긴 책, 건강과 안전에 위협이 될 만큼 비과학적인 내용이 담긴 책, 사이비 종교 책, 2차 가해를 하는 책. ’ 요컨대 사회적 해악 그 자체인 책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것이 아닐까 합니다. 어떤 책의 해악, 유해성을 누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판단한 다음에는 역시 누가 어떻게 어떤 조치를 해당 책이나 저자, 출판사에 대해 내릴 수 있는가? 우리나라 헌법 제2장(국민의 권리와 의무)제21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②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

③ 통신·방송의 시설기준과 신문의 기능을 보장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

④ 언론·출판은 타인의 명예나 권리 또는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하여서는 아니된다. 언론ㆍ출판이 타인의 명예나 권리를 침해한 때에는 피해자는 이에 대한 피해의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제1항과 제2항이 자유 및 권리에 관한 조항이라면 제4항은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에 관한 조항이라 하겠지요. 자유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 조건들 가운데에서도 특히 언론·출판의 자유는 중요합니다. 신문·방송 매체나 출판 매체에 국한된 사항이 아닙니다. 그것은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공표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뜻합니다. 물론 그러한 자유와 권리에도 제한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헌법은 그것을 ‘타인의 명예나 권리를 침해한 때,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한 때’로 규정했습니다.


우리나라는 군사 독재 정권 시절 언론·출판의 자유가 심하게 억압당했습니다. 정부를 비판하는 연설, 출판물 내용, 언론 보도 등이 허용되지 않았음은 물론, 공표(公表) 전에 이루어지는 검열을 통해 비판적인 내용이 삭제되기도 했습니다. 가요나 영화 등 예술 분야에서도 사전 검열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억압에 굴복하지 않고 비판하거나 의견을 공표하는 사람들을 연행하기 일쑤였습니다. 권력을 쥔 소수 지배 세력의 이익에 봉사하는 목소리가 아니면 제대로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습니다.



출판허가법을 위반하며 책을 펴낸 존 밀턴



영국의 시인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영국의 시인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영국 문학사 최고의 서사시인으로 평가받는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의 1644년 저작 『아레오파기티카(Areopagitica)』에서는 ‘언론자유의 경전’이라는 수식어가 붙곤 합니다. 밀턴이 책을 저술한 직접적인 목적은, 영국 의회가 출판 규제 정책으로 1643년 6월 14일에 공포한 출판허가법의 철회를 촉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이 책의 부제목은 ‘검열 없는 출판의 자유를 위해 영국 의회를 상대로 작성한 존 밀턴의 연설문’입니다.


제목 ‘아레오파기티카’는 전쟁의 신을 뜻하는 그리스어 아레이오스와 지역을 뜻하는 파고스의 합성어로, 말로써 다투는 곳 즉 법정 또는 의회를 뜻하는 아레오파고스에서 빌려 온 말입니다. 부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영국의 아레오파고스, 즉 영국 의회를 상대로 한 글이었기 때문에 그런 제목을 붙인 것이지요.


이 책이 출간되기까지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습니다. 밀턴은 1643년부터 1645년 사이에 이혼을 옹호하는 네 편의 팸플릿을 잇달아 출간했습니다. 그는 정신과 기질이 불일치할 경우 이혼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밀턴은 결혼의 일차적 목적이 육체적 결합이 아니며 상호간 우의를 도모하고 고독을 위로하는 데 있다고 보았습니다. 가톨릭 교회법에서 발전한 영국의 법률은 이혼을 육체적인 측면에서만 다루고 있었습니다.


특히 1644년 초에 밀턴은 교회와 국가가 시민의 결혼과 이혼을 제한하는 것에 반대하는 내용을 담은 ‘이혼의 교의와 질서’를 간행했고, 의회는 그것을 불태워야 할 내용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교회 당국자들은 출판업자 조합을 뒤에서 조종하여 밀턴의 팸플릿이 출판허가법을 위반했다고 고발했습니다. 결국 밀턴은 1644년 11월 23일 『아레오파기티카』를 출간했습니다. 이 책 역시 출판허가법을 위반했습니다. 인쇄업자 이름도, 판매업자 이름도 싣지 않았고 검열과 등록 절차도 거치지 않았습니다. 출판업자 조합, 종교 당국, 의회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습니다.



출판물의 유해성 여부 판단은 누가?



“진리와 이해는 허가와 규제에 의해 독점되거나 거래되는 그런 상품이 아닙니다. 전 국민을 신뢰와 믿음이 결여된 규제하에 둘 경우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치욕인가 하는 것은 명백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검열관의 파이프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신앙과 분별력이 형편없는 상태에 놓인, 지각없고 사악하고 근본 없는 국민으로 혹평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아레오파기티카』(존 밀턴 지음, 박상익 옮김, 인간사랑, 2016)에서 인용)



〈천국의 신화: 天國의 神話〉 제 1부 하늘과 땅

유해성 문제로 많은 논란이 있었던 이현세 만화 〈천국의 신화〉 (이미지 출처: 네이버)



검열제에서는 진리 및 진리에 대한 이해를 극소수 검열관들이 독점함으로써 국민의 건전한 판단력과 상식을 무시한다는 주장입니다. 1998년 인기 만화가 이현세 씨의 작품 〈천국의 신화〉가 청소년에게 유해하다는 판결이 내려진 적 있습니다. 6년 만에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 6년 동안 작가는 심신이 피폐해져 갔습니다. 청소년에 대한 유해성 여부 전에, 그것이 유해한지 아닌지 여부를 법원이 판단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1996년 9월 만화계는 ‘청소년보호를 위한 유해 매체물 규제 등에 관한 법률안 제정을 저지하기 위한 범 만화인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공동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대책위는 시대착오적 법 제정 철회,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폐지 등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1996년 11월 3일 ‘만화 심의 철폐를 위한 범 만화인 결의대회’를 여의도 광장에서 열었습니다. 이 날을 기념하여 나중에 11월 3일이 ‘만화의 날’로 제정되기도 하였습니다.


밀턴의 주장에 따른다면, 이 경우에 유해성 여부에 대한 판단은 일반 시민들의 손에 맡겨져야 할 것입니다. 시민들의 건전한 판단력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가리켜서 ‘문화의 자정 능력’이라고도 하지요. 검열을 통한 일방적 규제나 법원의 판단에 따른 규제가 아니라 시민이 자율적으로 유해성 여부를 판단할 때, 오히려 유해한 문화를 물리칠 수 있는 한 사회의 힘이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밀턴의 말을 더 들어보겠습니다.


“나쁜 풍속은 비단 책이 아니더라도 제지할 수 없는 수천 가지의 다른 경로를 통해 완벽하게 습득되며, 사악한 교리는 책이나 교사의 안내 없이도 썩 잘 전파되므로, 교사는 굳이 글을 쓰지 않더라도 그것을 퍼뜨릴 수 있으며 따라서 이를 막을 길도 없습니다. 나는 검열이라는 교묘한 계획이 어떻게 해서 수많은 헛되고 불가능한 시도들 중의 하나로 여겨지지 않는지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검열을 시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공원 문을 닫음으로써 까마귀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무모한 사람과 다를 것이 별로 없습니다.”(『아레오파기티카』(존 밀턴 지음, 박상익 옮김, 인간사랑, 2016)에서 인용)



우리가 목격했던 국가의 검열과 탄압 사례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1986년 3월 12일 저녁, 경찰은 서울 대학가 14개 사회과학서점에 대해 압수수색을 벌여 서적 51종 1천2백여 권을 압수하고, 연행한 서점주인 9명 중 5명을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습니다. 서점 주인들에게 이른바 이념서적을 판매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을 적용한 첫 사례였지요. 서점주들에게 적용한 국가보안법 규정은 제7조제5항 ‘허위사실을 날조 유포 또는 사실을 왜곡해 전파할 목적으로 문서 도서 기타의 표현물을 제작 수입 복사 소지 운반 반포 판매 또는 취득한 자’였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군사정권의 탄압 대상이 되었던 책들과 질문 주신 책들은 맥락이 다릅니다. 전자는 특정 정치 세력이 자신의 권력 유지, 강화를 위해 사실상 금서로 탄압하는 경우니까요. 그럼에도 이걸 되짚어 보는 이유는, ‘책의 유해성, 해악을 누가 어떻게 판단하고, 어떤 조치를 어떻게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만큼은 과거 저런 사례도 하나의 참고가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왼쪽부터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숨어 있는 한국현대사 1』, 『칼날 위의 역사』, 『글자전쟁』, 『만화로 읽는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국방부에서 퇴출된 도서 5권 (이미지 출처: 한겨레)



비슷한 사례를 안타깝게도 비교적 가까운 시기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2016년 5월말 우리나라 국방부가 군대 내 마트에서 판매하고 있던 도서 5종을 갑자기 퇴출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국방부가 밝힌 판매 중지 이유는 이랬습니다. “해당 도서들은 군의 사기를 저해하거나 정부 정책 및 국방 정책을 비난하고, 군의 정훈 교육 내용과 배치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국방부는 퇴출 도서 가운데 하나인 『만화로 읽는 피케티의 21세기 자본』(고야마 카리코 그림, 오상현 옮김, 스타북스, 2015)이 ‘한국 등 아시아 각국의 경제성장이 외국의 거액 투자 혜택을 받은 덕’이라고 서술한 것이 군의 정훈 교육 방향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를 댔는데,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설명입니다. 사실은 빈부격차를 경제 발전 저해 요인으로 지목한 피케티의 분석이 보수 우파 정권의 눈에 불온해 보인 것이 이유라면 이유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압력단체의 항의, ‘출간 정지’, ‘광고 취소’ 요청도



당시 발행된 〈마르코 폴로〉 1995년 2월호 표지 (이미지 출처: 일본 문예춘추사)

당시 발행된 〈마르코 폴로〉 1995년 2월호 표지 (이미지 출처: 일본 문예춘추사)



다른 나라를 살펴보겠습니다. 2007년 2월, 반(反)유대 활동 감시단체 사이먼 위젠탈(편집자 주: 유대계인권옹호가. 젊은 시절 나치에게 일가 친척 89명을 잃고 부인과 단 둘만 살아남은 뒤 건축설계업을 접고 나치 전범을 색출하는 데 평생을 바친 인물. 1977년에는 로스앤젤레스에 사이먼 위젠탈 센터를 설립해 인종 차별과 인권 침해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 센터가 일본 출판사 도쿠마쇼텐(徳間書店)의 신간 『유대·기독교 세계 지배의 장치』에 대해 발행 정지를 요구했습니다. 아울러 이 책의 광고가 실린 아사히신문사에도 항의했습니다. 도쿠마쇼텐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스튜디오 지브리 설립을 도운 것으로도 유명하지요. 하야오 감독은 자신의 모든 저서를 도쿠마쇼텐에서 출간해왔습니다. 여하튼 사이먼 위젠탈 센터는 이원복의 『먼 나라 이웃나라』가 반유대주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항의한 적도 있습니다.


일본 문예춘추사에서 발행하던 시사 교양 월간지 〈마르코 폴로〉가 폐간에 이르도록 한 적도 있습니다. 1995년 일본의 한 신경의학자가 이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나치 정권이 유대인을 대량 학살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강제 수용소의 악명 높은 가스실은 부풀려진 허구일 수도 있다”고 언급했던 것입니다. 당시 사이먼 위젠탈 센터를 중심으로 실력 행사에 나선 유대인 단체들은 굵직한 광고주들을 움직였습니다. 까르티에, 폭스바겐, 미쓰비시, 필립 모리스 등이 〈마르코 폴로〉에 실으려 했던 광고를 취소했습니다.



어렵겠지만 자율과 자유가 최우선이 아닐지



사상의 자유

사상의 자유



제시해 주신 중요한 질문을 되새겨 봅니다. “많은 사람에게 해가 되리라고, 장기적으로 공동체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예상되는 콘텐츠들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저도 생각 같아서는 그런 콘텐츠들의 유해성, 해악을 판단하여 어떤 조치를 내리고 싶습니다만, 역시 문제는 그 판단과 조치를 누가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곧 정당성 문제입니다.


제가 든 사례들은 유해성, 해악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다만 어떤 책의 유해성, 해악이라는 것을 자의적으로 판단할 가능성이 얼마나 큰지, 또한 정치적 의도에 따라, 인종적, 종교적 편향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판단할 수 있는지 보여 줍니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민관 합동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는 2018년 5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산하 간행물윤리위원회 폐지’를 권고했습니다. 이후 문체부는 간행물윤리위원회 제도 개선 TF를 구성해 논의를 시작했지만 3년이 지나도록 지지부진합니다. 큰 방향은 민간 자율 심의라고 합니다만, 구체적인 방안은 나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위험한 자유가 안전한 통제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존 밀턴의 말을 다시 들어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는 악덕에 관한 지식과 관찰이 사람의 미덕을 이루는 데 반드시 필요하며, 오류를 자세히 살피는 것이 진리를 확립하는 데 꼭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온갖 책들을 읽고 온갖 논거를 귀담아 듣는 것 이상으로 안전하게 그리고 위험이 적게 죄악과 거짓의 나라를 탐색할 수 있는 방법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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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훈 작가 사진
표정훈

출판평론가, 번역가, 작가
서강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며 한양대학교 특임교수,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 강사로 일했다. 『책의 사전』, 『혼자 남은 밤, 당신 곁의 책』, 『탐서주의자의 책』 등을 썼고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 『중국의 자유 전통』, 『젠틀 매드니스』(공역)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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