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 전쟁은 국내외 학계에서도 관심이 높아 다양한 분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음은 물론, 일반 대중에게도 치열한 논쟁거리 중 하나입니다. 특히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어야 했다’, ‘당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인 신라는 민족의 배신자다’, ‘신라는 백제 영토만 차지했으므로 통일이 아니다’라는 등의 주장은 제 주변에서도 술자리 안줏거리로 심심찮게 올라오는 편입니다.
한국사의 대변혁, 삼국통일 전쟁
7세기 중반에 발생한 삼국통일 전쟁은 임진왜란과 더불어 한국사는 물론 동아시아사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온 전쟁입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외에 직간접적으로 참전한 국가 및 종족만 하더라도 탐라‧당‧왜‧말갈‧거란‧해‧돌궐‧철륵‧토번 등으로 동아시아 국제 대전의 면모를 띱니다.
7세기 중반 삼국통일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관계된 여러 종족과 국가. (이미지 출처: 노태돈,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9, 4쪽.)
삼국통일 전쟁은 국내외 학계에서도 관심이 높아 정치, 외교, 전쟁 등 다양한 분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음은 물론, 일반 대중에게도 여전히 치열한 논쟁거리 중 하나입니다.
특히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어야 했다’, ‘당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인 신라는 민족의 배신자다’, ‘신라는 백제 영토만 차지했으므로 통일이 아니다’라는 등의 주장은 제 주변에서도 술자리 안줏거리로 심심찮게 올라오는 편입니다. 공교롭게도 사실 관계에는 기반을 두지 않은 이야기이지요. 신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적지 않지만, 그만큼 관심이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삼국통일 전쟁의 클라이맥스! 신라-당 전쟁의 그 시작과 끝
645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당은 고구려를 협공할 파트너로서 신라와 동맹을 맺습니다. 이때 신라와 당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후 평양 남쪽 백제 영토를 신라가 차지하기로 밀약을 맺습니다.
신라-당 연합군은 660년 백제,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이내 양국은 전쟁에 돌입하며 동맹은 파탄이 나버립니다. 당이 신라까지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내면서 밀약을 이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기존에는 신라-당 전쟁의 주요 배경을 백제의 옛 영토를 둘러싼 분쟁으로 보는 시각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보고되어 학계와 역사동호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풍사훈비」의 존재로 인해 전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제기되었습니다. 1974년 중국 섬서성에서 발견된 이 묘지명의 문구를 통해 백제의 옛 영토를 둘러싼 분쟁으로 보았던 시각을 재고하게 됨은 물론 김유신을 신격화하려는 목적으로 보였던 『삼국사기』 김유신전(傳)을 재평가하게 된 것입니다.
「풍사훈비」에 따르면 당 고종(당나라의 제3대 황제, 628~683)은 백제 멸망 이전인 659년에 소정방을 계림도대총관으로 임명했다고 합니다. 계림은 신라의 왕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당이 신라를 침공하는 군대를 편성한 것입니다. 이는 660년 백제 멸망 직후 당의 소정방이 신라까지 공격하려 했으나, 신라가 이를 간파하여 무위에 그쳤다는 『삼국사기』 김유신전(傳)의 내용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당은 백제로부터 신라를 구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출정했지만 실제로는 백제는 물론 신라까지 정복하고자 시도한 것으로 동맹국이었던 신라를 기만한 것입니다.
일찍이 당은 이미 당 태종(당나라의 제2대 황제, 599~649) 때부터 신라의 독립성을 무시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당 고종도 650년대에 들어 팽창일로의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그 연장선에서 고구려, 백제는 물론 신라까지 지배하고자 한 듯합니다. 이는 신라-당 전쟁의 원인이 단순히 백제의 옛 영토 지배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 백제 멸망 이전부터 당이 가졌던 야욕에서 비롯되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러나「풍사훈비」과 『삼국사기』 김유신전(傳)의 내용만으로는 백제 멸망기에 당이 신라를 침공하려 한 정확한 배경은 물론 당이 신라를 멸망시킴으로써 얻을 수 있는 실익이 무엇인지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다음으로 신라-당 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한 절대적 원인을 토번으로 볼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토번은 오늘날 중국의 청해성 서장 자치구에 위치했던 국가로, 당이 25년 동안 고구려와의 전쟁에 모든 국력을 쏟는 사이 급성장했습니다.
「풍사훈비」(좌)와 『삼국사기』 김유신전(우) (이미지 출처: Jingwei sina blog, 국사편찬위원회)
토번의 발흥으로 서북 전선이 위태로워지자 당은 상대적으로 약소국인 신라와의 전쟁에 전력을 투입하지 않고 사실상 방기하였기에 신라가 그 이득을 보아 신라-당 전쟁이 종결되었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전쟁 준비 과정 및 진행 양상에서 보여준 신라 나름의 의지와 저력을 낮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또한 국제 정세상 운이 좋아 얻어걸린 승리라고 강조하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신라가 고구려, 백제보다 열세였음에도 삼국을 통일하고 세계 최강국이었던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한 사실은 오늘날에도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이는 오늘날 4대 강대국들 사이에서 생존 전략과 통일 전략을 구사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국제 정세와도 부합하는 측면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존경하는 이상훈 교수님께 질문을 드립니다.
[이달의 질문] 삼국통일 전쟁기, 약소국 신라는 어떻게 최후의 승자가 되었나? / 질문자 - 이민수(역사 연구자)
Q. 당은 어째서 동맹국이었던 신라를 기만하면서까지 침공하려 했던 것일까요? 과연 토번은 신라-당 전쟁의 종결에 있어 절대적인 역할을 했을까요? 삼국통일 전쟁에서 신라가 보여준 생존 전략은 치열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역사연구자. ㈜ 문화랑 역사문화연구소 연구원
한국전통문화대학교에서 「659년 당의 신라 침공 계획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 「‘3세기 옥저 지역 동부여 건국설’에 대한 검토」, 「이타인의 당 투항과 부여성의 고구려 복국운동 진압에 대한 분석」, 「645년 당의 고구려 원정군 규모 추산」 등이 있으며, 공저로 『고대 군사사와 동아시아』(경인문화사)가 있다. 주로 7세기 중반에 발발한 고구려-당 전쟁에 대해 공부하고 있으며, 한국사를 소재로 한 콘텐츠 제작에도 관심이 있어 웹툰을 준비 중이다.
댓글(0)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삼국통일 전쟁기, 약소국 신라는 어떻게 최후의 승자가 되었나?'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삼국통일 전쟁기, 약소국 신라는 어떻게 최후의 승자가 되었나?
- 이달의 질문 -
이민수
2021-09-01
삼국통일 전쟁은 국내외 학계에서도 관심이 높아 다양한 분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음은 물론, 일반 대중에게도 치열한 논쟁거리 중 하나입니다. 특히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어야 했다’, ‘당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인 신라는 민족의 배신자다’, ‘신라는 백제 영토만 차지했으므로 통일이 아니다’라는 등의 주장은 제 주변에서도 술자리 안줏거리로 심심찮게 올라오는 편입니다.
한국사의 대변혁, 삼국통일 전쟁
7세기 중반에 발생한 삼국통일 전쟁은 임진왜란과 더불어 한국사는 물론 동아시아사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온 전쟁입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외에 직간접적으로 참전한 국가 및 종족만 하더라도 탐라‧당‧왜‧말갈‧거란‧해‧돌궐‧철륵‧토번 등으로 동아시아 국제 대전의 면모를 띱니다.
7세기 중반 삼국통일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관계된 여러 종족과 국가.
(이미지 출처: 노태돈,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9, 4쪽.)
삼국통일 전쟁은 국내외 학계에서도 관심이 높아 정치, 외교, 전쟁 등 다양한 분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음은 물론, 일반 대중에게도 여전히 치열한 논쟁거리 중 하나입니다.
특히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어야 했다’, ‘당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인 신라는 민족의 배신자다’, ‘신라는 백제 영토만 차지했으므로 통일이 아니다’라는 등의 주장은 제 주변에서도 술자리 안줏거리로 심심찮게 올라오는 편입니다. 공교롭게도 사실 관계에는 기반을 두지 않은 이야기이지요. 신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적지 않지만, 그만큼 관심이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삼국통일 전쟁의 클라이맥스! 신라-당 전쟁의 그 시작과 끝
645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당은 고구려를 협공할 파트너로서 신라와 동맹을 맺습니다. 이때 신라와 당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후 평양 남쪽 백제 영토를 신라가 차지하기로 밀약을 맺습니다.
신라-당 연합군은 660년 백제,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이내 양국은 전쟁에 돌입하며 동맹은 파탄이 나버립니다. 당이 신라까지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내면서 밀약을 이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기존에는 신라-당 전쟁의 주요 배경을 백제의 옛 영토를 둘러싼 분쟁으로 보는 시각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보고되어 학계와 역사동호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풍사훈비」의 존재로 인해 전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제기되었습니다. 1974년 중국 섬서성에서 발견된 이 묘지명의 문구를 통해 백제의 옛 영토를 둘러싼 분쟁으로 보았던 시각을 재고하게 됨은 물론 김유신을 신격화하려는 목적으로 보였던 『삼국사기』 김유신전(傳)을 재평가하게 된 것입니다.
「풍사훈비」에 따르면 당 고종(당나라의 제3대 황제, 628~683)은 백제 멸망 이전인 659년에 소정방을 계림도대총관으로 임명했다고 합니다. 계림은 신라의 왕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당이 신라를 침공하는 군대를 편성한 것입니다. 이는 660년 백제 멸망 직후 당의 소정방이 신라까지 공격하려 했으나, 신라가 이를 간파하여 무위에 그쳤다는 『삼국사기』 김유신전(傳)의 내용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당은 백제로부터 신라를 구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출정했지만 실제로는 백제는 물론 신라까지 정복하고자 시도한 것으로 동맹국이었던 신라를 기만한 것입니다.
일찍이 당은 이미 당 태종(당나라의 제2대 황제, 599~649) 때부터 신라의 독립성을 무시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당 고종도 650년대에 들어 팽창일로의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그 연장선에서 고구려, 백제는 물론 신라까지 지배하고자 한 듯합니다. 이는 신라-당 전쟁의 원인이 단순히 백제의 옛 영토 지배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 백제 멸망 이전부터 당이 가졌던 야욕에서 비롯되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러나「풍사훈비」과 『삼국사기』 김유신전(傳)의 내용만으로는 백제 멸망기에 당이 신라를 침공하려 한 정확한 배경은 물론 당이 신라를 멸망시킴으로써 얻을 수 있는 실익이 무엇인지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다음으로 신라-당 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한 절대적 원인을 토번으로 볼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토번은 오늘날 중국의 청해성 서장 자치구에 위치했던 국가로, 당이 25년 동안 고구려와의 전쟁에 모든 국력을 쏟는 사이 급성장했습니다.
「풍사훈비」(좌)와 『삼국사기』 김유신전(우) (이미지 출처: Jingwei sina blog, 국사편찬위원회)
신라-당 전쟁과 토번의 발흥
(이미지 출처: KBS1 역사저널 그날: 신라, 당과의 전쟁을 선포하다, 2015.11.29. 방영분)
토번의 발흥으로 서북 전선이 위태로워지자 당은 상대적으로 약소국인 신라와의 전쟁에 전력을 투입하지 않고 사실상 방기하였기에 신라가 그 이득을 보아 신라-당 전쟁이 종결되었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전쟁 준비 과정 및 진행 양상에서 보여준 신라 나름의 의지와 저력을 낮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또한 국제 정세상 운이 좋아 얻어걸린 승리라고 강조하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신라가 고구려, 백제보다 열세였음에도 삼국을 통일하고 세계 최강국이었던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한 사실은 오늘날에도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이는 오늘날 4대 강대국들 사이에서 생존 전략과 통일 전략을 구사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국제 정세와도 부합하는 측면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존경하는 이상훈 교수님께 질문을 드립니다.
[이달의 질문] 삼국통일 전쟁기, 약소국 신라는 어떻게 최후의 승자가 되었나? / 질문자 - 이민수(역사 연구자)
Q. 당은 어째서 동맹국이었던 신라를 기만하면서까지 침공하려 했던 것일까요? 과연 토번은 신라-당 전쟁의 종결에 있어 절대적인 역할을 했을까요? 삼국통일 전쟁에서 신라가 보여준 생존 전략은 치열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9월 [이달의 질문] 삼국통일 전쟁기, 약소국 신라는 어떻게 최후의 승자가 되었나?
- 지난 글: 8월 [이달의 답변] 작가와 작품은 한 몸, 그래도 상상력이라는 분리 가능한 공간이
- 다음 글: 9월 [이달의 답변] 신라의 철저한 준비와 과감한 대처가 당의 한반도 장악 욕심 좌절시켜
역사연구자. ㈜ 문화랑 역사문화연구소 연구원
한국전통문화대학교에서 「659년 당의 신라 침공 계획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 「‘3세기 옥저 지역 동부여 건국설’에 대한 검토」, 「이타인의 당 투항과 부여성의 고구려 복국운동 진압에 대한 분석」, 「645년 당의 고구려 원정군 규모 추산」 등이 있으며, 공저로 『고대 군사사와 동아시아』(경인문화사)가 있다. 주로 7세기 중반에 발발한 고구려-당 전쟁에 대해 공부하고 있으며, 한국사를 소재로 한 콘텐츠 제작에도 관심이 있어 웹툰을 준비 중이다.
댓글(0)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삼국통일 전쟁기, 약소국 신라는 어떻게 최후의 승자가 되었나?'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알지 못하는 것을 마주할 용기와 도전
추미경
신라의 철저한 준비와 과감한 대처가 당의 한반도 장악 ...
이상훈
관련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