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천황 일가와 관련한 인터넷 신문 기사에는 어김없이 ‘백제 후손’을 운운하는 댓글이 많이 등장한다. … 이는 일제 식민사학의 ‘일선동조론’ 또는 ‘동조동근론’과 같은 맥락이다. 또한 고조선이 대륙을 경영했다거나 고구려ㆍ백제ㆍ신라가 대륙에 있었다는 주장은 일제 식민사학의 ‘반도적 성격론’을 믿은 데서 나온 것이다. ‘우리 안의 식민사학’은 바로 이런 데 있다.
‘고대 한국은 일본 식민지’라는 가짜 역사를 믿은 일본 국학자들
임나일본부설 등 거짓 역사가 수록된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 (이미지 출처: Wikipedia)
지난(11회) 칼럼에서 일본이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 동경제국대학을 설립하고(1886년) 서구의 근대역사학을 기초로 황국사관을 정립, 그에 복무할 일본사 및 한국사 연구자를 길러냈음을 소개하였다. 일본이 한국사를 일본사 못지않게 연구하고자 한 것은 갑자기 생긴 경향이 아니다. 때는 국학(國學, 고쿠가쿠)운동이 일어나던 에도 막부(江戸幕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학운동은 일본 고유의 문화와 정신을 찾으려는 국수주의적 학문 경향으로, 역사 분야에서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크게 주목하였다. 5회 칼럼에서 살펴보았듯이, 『일본서기』에는 진구황후(신공황후, 神功皇后)가 신라를 정벌했다거나 가야 지역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지배했다거나 하는 거짓 역사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막부 시기 일본의 국학자들은 이를 사실로 받아들여 한국이 고대(古代) 일본의 식민지라 여기고 큰 관심을 가졌다. 즉, 우호적인 감정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 한반도가 일본의 고토(故土)라 여긴 데서 생긴 관심이었던 바, 막부 말기에 이르러서는 조선을 정벌하여 고대의 ‘그 찬란한 역사’를 재현하자는 목소리를 공공연히 내기 시작했다. 이른바 ‘정한론(征韓論)’ 또는 ‘정조론(征朝論)’이다.
‘정한론’은 단어 자체의 뜻대로 침략론이다. 그럼에도 메이지유신 이후에 ‘동양평화’, 만주사변 이후에는 ‘대동아공영’이라는 탈을 쓰고 미화되었다. ‘동양평화론’의 표면적인 논지는 일본의 선도로 아시아가 연대하여 서구의 침략을 막고 평화를 보전하자는 것이고, ‘대동아공영’은 동아시아가 함께 번영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역시 ‘정한론’과 같은 침략의 논리일 수밖에 없다. ‘동양평화’의 목소리를 낸 이들 대다수는 일본은 이미 강대국의 대열에 들어섰고 그 밖의 아시아 나라들은 약소국에 머물러 있으므로 연대를 위해서는 일본이 다른 나라를 병합 또는 지배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평화’와 ‘공영’은 말뿐이었다.
‘대동아공영’ 철석같이 믿었던 친일파
주목할 것은 ‘연대’(피지배)의 대상인 국가, 그중에서도 특히 조선의 정치‧사회를 주도하는 인물들에게 이러한 거짓 ‘평화’와 ‘번영’의 외침이 일부 먹혀들었다는 점이다. 이른바 친일파인데, 이들이 남긴 말과 글에는 약자인 우리가 강자인 일본에 돌라붙어야 평화를 유지하고 번영할 수 있다는 외침이 적지 않다. 문제는 그것이 생존을 위한 가식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해방이 되자 친일파들은 “살아남기 위해 친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라거나 “일제로부터 되도록 핍박받지 않기 위해 오명을 자처하고 친일했다.”라고 변명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동양평화’와 ‘대동아공영’을 철석같이 믿었거나 자신의 출세를 위해 친일에 앞장선 이가 대다수였다.1)
1) ‘동양평화론’ 및 ‘대동아공영론’이 필연적으로 침략의 논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과 구한말 우리가 일본의 태도를 어떻게 인식했는가에 대해 좀 더 공부하고 싶은 독자에게는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 임종국 선생이 출간한 『친일논설선집』(실천문학사, 1987)의 해제(13~26쪽)를 권한다. 이 글을 읽어보면 친일이 가식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13회) 칼럼에서 자세히 살펴보겠다.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인 임종국 선생(좌)의 『친일논설선집』 책 표지(우) (이미지 출처: 서울신문, 알라딘)
흔히 ‘친일파’라고 하면 친일을 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친일파 거두 가운데 대다수는 민족지도자 격이던 사람이다. 나는 이 주제로 수업할 때마다 학생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만약에 일제강점기 같은 상황이 온다면 나 같은 사람은 친일파가 되겠습니까?” 하고 물어보았다. 학생들은 매번 배시시 웃으며 “절대로 친일은 안 하실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소신껏 답하고 싶지만 선생인 내게 미운털이 박힐까 싶어 아부한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내가 어릴 때는 절대로 친일파가 안 되고 독립운동가가 되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런데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에 잡혀서 고문당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게 참 쉽지 않겠더라고요. 거꾸로 매달아 코로 뜨거운 물을 붓고, 손톱에 바늘을 넣고, 밥 안 주고 굶기고….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하잖아요. 매질을 하면 어찌어찌 한두 대는 참을 수 있겠는데 세 대 맞으면 나는 아마 안 물어본 것도 다 불지 싶어요. 게다가 나 같은 사람은 친일을 하더라도 일본 순사 앞잡이면 몰라도 언감생심 친일파 거두 대열에는 못 낍니다. 그런 사람이 되려면 장관이나 국회의원, 못해도 국립대학 총장쯤은 되어야 합니다.” 하고 말해 주었다.
친일파를 진심으로 만든 식민사학의 논리들
내선일체론을 홍보하기 위해 일제가 만든 홍보물 (이미지 출처: Wikipedia)
그러면 이쯤 되는 사람들이 본심으로 친일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사상적 토대를 놓은 것이 앞서 소개한 ‘동양평화론’과 ‘식민사학’이다. 일제가 조선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창안한 식민사학의 논리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체로 ①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② 타율성론(他律性論) ③ 정체성론(停滯性論)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일선동조론: 일본과 조선은 같은 할아버지의 후손이라는 주장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은 일본과 조선의 할아버지가 같다는 주장으로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이라고도 한다.이 이론(?)은 에도막부 시기 국학자의 시각 및 막부 말기 정한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01년 동경제국대학 교수들이 저술한 「국사안(國史眼)」(이후 일본사 교육의 저본으로 활용)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해서 조선 강점 이후 기다 사다키치(喜田貞吉, 1871~1939)의 ‘일한양민족동원론’으로 발전하였고, 만주사변 이후에는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내선일체(內鮮一體)’(일본을 내지(內地)로 표현, 일본과 조선이 일체라는 주장)라는 슬로건으로 등장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일본의 신이 조선의 신을 지배하였다거나 일본 신의 후손이 조선 신이 되었다는 식이다.하지만 겉으로는 일본과 조선이 같은 조상에서 출발해 친근 관계가 있다는 주장으로 포장하여 침략과 조선인 전쟁 동원을 용이하게 하려는 정치 술책이었다. 즉 일본인에게는 ‘뿌리가 같은’ 조선과의 ‘통일’을 적극 지지하게 하고, 조선인에게는 일제의 침략이 민족 내 왕조 교체와 별반 다를 바 없으므로 독립운동이 불필요함은 물론이고 일본을 위해 목숨까지 바쳐야 한다고 믿게 하려는 의도였다.
2) 타율성론: 조선은 고대부터 다른 나라의 식민지였다는 주장
‘타율성론(他律性論)’은 한국의 역사가 자주적인 역량이 아닌 북쪽(중국‧몽고 등)과 남쪽(일본)의 외세 간섭과 영향을 받아 타율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이다. 고조선의 역사는 기자, 위만과 같은 중국 이주민에 의해 시작되어(단군조선을 부정하지만, 반면 일선동조론에서는 단군이 일본 건국신 아마테라스 오오미가미(天祖大神)의 후손 혹은 아우라고 주장)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보낸 군대에 멸망하였으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식민지였고, 남쪽의 신라와 가야에는 ‘진구황후의 정벌’과 ‘임나일본부 설치’가 있었으므로 이 또한 식민지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대부터 다른 나라의 식민지였던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논리다.
이러한 주장은 너무나 조잡함에도 불구하고 지리적 환경결정론의 옷을 입고 학문의 모습으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환경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주장은 근자에 들어 설득력을 잃었지만, 과거에는 과학 이론처럼 크게 유행했으므로 그럴싸해 보였던 것이다. 일제 식민사가들이 한국사에 적용한 환경결정론은 ‘반도적 성격론’이다. 한국은 대륙의 끄트머리에 튀어나와 해양과 맞닿아 있는 ‘반도’라서 대륙과 해양 세력 양쪽의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고, 실제 역사도 그렇게 전개되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반도에서 제국으로 성장한 로마나 스페인의 사례만으로도 반증이 가능하다.2)
2) 이에 대해서는 이기백 교수가 『한국사 시민강좌』 1집(일조각, 1987)에 수록한 「반도적 성격론」을 추천할만하다. 한편, 나의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은 우리의 지리적 환경을 로마와 비교하여 반도에서 우리 민족이 대제국을 건설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이는 이기백 교수의 반론을 잘못 사용한 예라 하겠다. 이기백 교수는 로마나 스페인의 사례를 들어 ‘반도적 성격론’의 비합리성을 규명했다. 로마처럼 우리도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다는 주장은 반도의 특성을 일제 식민사가들과 정반대로 해석한 것일 뿐 여전히 지리적 환경결정론에 빠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기백 교수의 〈한국사 시민강좌〉 책 표지 (이미지 출처: 한국사 시민강좌)
3) 정체성론: 조선은 고대사회에 머물러 있는 나라라는 주장
‘정체성론(停滯性論)’의 ‘정체’는 “어떤 형편이나 상태가 진척되지 아니하고 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을 뜻한다. 서양이나 일본이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 중세 봉건 사회를 거쳐 근대 사회로 이행된 반면, 조선은 봉건 사회에 이르지 못했으므로 고대 사회에 머물러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앞서 살펴본 ‘일선동조론’과 ‘타율성론’의 조잡함에 비해 서양 근대역사학의 시대구분에서 비롯된 것이므로(구체적으로는 마르크스‧엥겔스의 역사이론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맹아론’과 ‘식민지근대화론’ 등의 심도 높은 논박이 있었다.(이에 대해서는 14회 칼럼에서 자세히 살펴보겠다.)
유사역사(사이비 역사)를 신봉하는 이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는 한 역사 평설가는 이러한 식민사학이 해방 후 서울대에서 교편을 잡은 이병도 교수를 거쳐 현재까지도 대학 교수와 연구자 들을 중심으로 계승되고 있다는 주장을 거듭한다. 그는 식민사학의 카르텔이 형성되어 있다는 이런 주장을 집대성(?)하여 책을 출간하면서 제목을 ‘우리 안의 식민사관’이라고 붙였다.(임나일본부, 삼국사기 초기기록, 동북아역사재단의 업무 관련 문제 등을 주로 거론했다. 이 가운데 삼국사기 초기기록 문제는 본 칼럼에서 추후 자세히 살펴볼 예정이다.)
정작 ‘우리 안의 식민사학’에 빠진 것은 누구인가
하지만 실제로 식민사학의 논리에 빠진 것은 연구자가 아니라 유사역사에 경도된 이들이다. 일본 천황 일가와 관련한 인터넷 신문 기사에는 어김없이 ‘백제 후손’을 운운하는 댓글이 많이 등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일본의 우익 정치인이 우리나라에 적대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 데 비해 천황이 비교적 온건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백제의 후손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누가 우위에 있냐는 것이 다를 뿐, 일제 식민사학의 ‘일선동조론’ 또는 ‘동조동근론’과 같은 맥락이다. 단순히 혈연관계만을 확인하는 차원이 아니라, 백제왕의 후예가 일본의 천황이 되어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으므로 일본 전체가 우리 영향을 받았다는 허튼 상상을 하고 있다.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창작과 비평사, 2002) (이미지 출처: 알라딘)
일본 천황가가 백제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유사역사 신봉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아키히토(明仁) 천황의 2001년 12월 기자회견이다.
“저 자신으로서는 캄무(환무, 桓武)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점에서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습니다. 무령왕은 일본과 관계가 깊었고, 이때 이래로 일본에 오경박사가 대대로 초빙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무령왕의 아들 성명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발언은 2002년 한일월드컵 공동 개최를 몇 달 앞둔 시점에서 양국의 신뢰와 협력 회복을 제안하는 취지에서 한 일종의 ‘립서비스’일 뿐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 천황가의 모계 가운데 한 사람이 백제왕의 후손인 점을 토대로 천황가가 백제 후손이라고 강조한다면, 원나라(몽골) 간섭기 이후 고려 국왕은 대를 이어 원나라 공주와 혼인했으므로 우리가 몽골인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젊은 역사학자 모임에서 펴낸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역사학』 (역사비평사, 2017) 책 표지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또한 한국 고대사 관련 서적의 베스트셀러 순위를 살펴보면, 상위권은 고조선이 대륙을 경영했다든가, 고구려‧백제‧신라가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유사역사학 도서가 대다수이다.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있고, 출판의 자유는 헌법으로 규정된 것이므로 그런 책이 출간되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유사역사학 도서가 수준 높은 연구서나 교양서를 제치고 불티나게 팔리는 것은 다소 의아한 현상이다. 사실 이런 주장은 일제 식민사학의 ‘반도적 성격론’을 믿은 데서 나왔다. 앞서 소개했듯이 이기백 교수는 이미 ‘반도적 성격론’이 허구임을 증명하였다. 하지만 유사역사학을 주장하는 이들은 조상 대대로 우리가 반도에서 살았던 것이 부끄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 역사를 대륙에 옮겨 놓았고, 유사역사를 신봉하는 독자들은 그것을 읽고 뿌듯해하는 것이다.3) ‘우리 안의 식민사학’은 바로 이런 데 있다.
3) 이에 대해서는 ‘젊은역사학자모임’에서 출간한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역사학』 (역사비평사, 2017)에 수록된 기경량 교수의 「사이비역사학과 역사파시즘」 및 강진원 교수의 「식민주의 역사학과 ‘우리’ 안의 타율성론」에서 지적한 바 있다.
역사학자.
계명대학교에서 철학과 사학을 복수전공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5~7세기 신라정치사를 연구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계명대학교 강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역사학 입문>,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서>, <한국사 사료읽기> 등의 과목을 담당하고 있다.
댓글(0)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12. 일제 식민사학과 그 영향'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12. 일제 식민사학과 그 영향
- 식민사학의 형성 배경과 ‘우리 안의 식민사관’ -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
윤진석
2021-08-13
일본 천황 일가와 관련한 인터넷 신문 기사에는 어김없이 ‘백제 후손’을 운운하는 댓글이 많이 등장한다. … 이는 일제 식민사학의 ‘일선동조론’ 또는 ‘동조동근론’과 같은 맥락이다. 또한 고조선이 대륙을 경영했다거나 고구려ㆍ백제ㆍ신라가 대륙에 있었다는 주장은 일제 식민사학의 ‘반도적 성격론’을 믿은 데서 나온 것이다. ‘우리 안의 식민사학’은 바로 이런 데 있다.
‘고대 한국은 일본 식민지’라는 가짜 역사를 믿은 일본 국학자들
임나일본부설 등 거짓 역사가 수록된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 (이미지 출처: Wikipedia)
지난(11회) 칼럼에서 일본이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 동경제국대학을 설립하고(1886년) 서구의 근대역사학을 기초로 황국사관을 정립, 그에 복무할 일본사 및 한국사 연구자를 길러냈음을 소개하였다. 일본이 한국사를 일본사 못지않게 연구하고자 한 것은 갑자기 생긴 경향이 아니다. 때는 국학(國學, 고쿠가쿠)운동이 일어나던 에도 막부(江戸幕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학운동은 일본 고유의 문화와 정신을 찾으려는 국수주의적 학문 경향으로, 역사 분야에서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크게 주목하였다. 5회 칼럼에서 살펴보았듯이, 『일본서기』에는 진구황후(신공황후, 神功皇后)가 신라를 정벌했다거나 가야 지역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지배했다거나 하는 거짓 역사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막부 시기 일본의 국학자들은 이를 사실로 받아들여 한국이 고대(古代) 일본의 식민지라 여기고 큰 관심을 가졌다. 즉, 우호적인 감정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 한반도가 일본의 고토(故土)라 여긴 데서 생긴 관심이었던 바, 막부 말기에 이르러서는 조선을 정벌하여 고대의 ‘그 찬란한 역사’를 재현하자는 목소리를 공공연히 내기 시작했다. 이른바 ‘정한론(征韓論)’ 또는 ‘정조론(征朝論)’이다.
‘정한론’은 단어 자체의 뜻대로 침략론이다. 그럼에도 메이지유신 이후에 ‘동양평화’, 만주사변 이후에는 ‘대동아공영’이라는 탈을 쓰고 미화되었다. ‘동양평화론’의 표면적인 논지는 일본의 선도로 아시아가 연대하여 서구의 침략을 막고 평화를 보전하자는 것이고, ‘대동아공영’은 동아시아가 함께 번영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역시 ‘정한론’과 같은 침략의 논리일 수밖에 없다. ‘동양평화’의 목소리를 낸 이들 대다수는 일본은 이미 강대국의 대열에 들어섰고 그 밖의 아시아 나라들은 약소국에 머물러 있으므로 연대를 위해서는 일본이 다른 나라를 병합 또는 지배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평화’와 ‘공영’은 말뿐이었다.
‘대동아공영’ 철석같이 믿었던 친일파
주목할 것은 ‘연대’(피지배)의 대상인 국가, 그중에서도 특히 조선의 정치‧사회를 주도하는 인물들에게 이러한 거짓 ‘평화’와 ‘번영’의 외침이 일부 먹혀들었다는 점이다. 이른바 친일파인데, 이들이 남긴 말과 글에는 약자인 우리가 강자인 일본에 돌라붙어야 평화를 유지하고 번영할 수 있다는 외침이 적지 않다. 문제는 그것이 생존을 위한 가식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해방이 되자 친일파들은 “살아남기 위해 친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라거나 “일제로부터 되도록 핍박받지 않기 위해 오명을 자처하고 친일했다.”라고 변명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동양평화’와 ‘대동아공영’을 철석같이 믿었거나 자신의 출세를 위해 친일에 앞장선 이가 대다수였다.1)
1) ‘동양평화론’ 및 ‘대동아공영론’이 필연적으로 침략의 논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과 구한말 우리가 일본의 태도를 어떻게 인식했는가에 대해 좀 더 공부하고 싶은 독자에게는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 임종국 선생이 출간한 『친일논설선집』(실천문학사, 1987)의 해제(13~26쪽)를 권한다. 이 글을 읽어보면 친일이 가식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13회) 칼럼에서 자세히 살펴보겠다.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인 임종국 선생(좌)의 『친일논설선집』 책 표지(우) (이미지 출처: 서울신문, 알라딘)
흔히 ‘친일파’라고 하면 친일을 할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친일파 거두 가운데 대다수는 민족지도자 격이던 사람이다. 나는 이 주제로 수업할 때마다 학생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만약에 일제강점기 같은 상황이 온다면 나 같은 사람은 친일파가 되겠습니까?” 하고 물어보았다. 학생들은 매번 배시시 웃으며 “절대로 친일은 안 하실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소신껏 답하고 싶지만 선생인 내게 미운털이 박힐까 싶어 아부한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내가 어릴 때는 절대로 친일파가 안 되고 독립운동가가 되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런데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에 잡혀서 고문당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게 참 쉽지 않겠더라고요. 거꾸로 매달아 코로 뜨거운 물을 붓고, 손톱에 바늘을 넣고, 밥 안 주고 굶기고….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하잖아요. 매질을 하면 어찌어찌 한두 대는 참을 수 있겠는데 세 대 맞으면 나는 아마 안 물어본 것도 다 불지 싶어요. 게다가 나 같은 사람은 친일을 하더라도 일본 순사 앞잡이면 몰라도 언감생심 친일파 거두 대열에는 못 낍니다. 그런 사람이 되려면 장관이나 국회의원, 못해도 국립대학 총장쯤은 되어야 합니다.” 하고 말해 주었다.
친일파를 진심으로 만든 식민사학의 논리들
내선일체론을 홍보하기 위해 일제가 만든 홍보물 (이미지 출처: Wikipedia)
그러면 이쯤 되는 사람들이 본심으로 친일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사상적 토대를 놓은 것이 앞서 소개한 ‘동양평화론’과 ‘식민사학’이다. 일제가 조선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창안한 식민사학의 논리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체로 ①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② 타율성론(他律性論) ③ 정체성론(停滯性論)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일선동조론: 일본과 조선은 같은 할아버지의 후손이라는 주장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은 일본과 조선의 할아버지가 같다는 주장으로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이라고도 한다. 이 이론(?)은 에도막부 시기 국학자의 시각 및 막부 말기 정한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01년 동경제국대학 교수들이 저술한 「국사안(國史眼)」(이후 일본사 교육의 저본으로 활용)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해서 조선 강점 이후 기다 사다키치(喜田貞吉, 1871~1939)의 ‘일한양민족동원론’으로 발전하였고, 만주사변 이후에는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내선일체(內鮮一體)’(일본을 내지(內地)로 표현, 일본과 조선이 일체라는 주장)라는 슬로건으로 등장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일본의 신이 조선의 신을 지배하였다거나 일본 신의 후손이 조선 신이 되었다는 식이다. 하지만 겉으로는 일본과 조선이 같은 조상에서 출발해 친근 관계가 있다는 주장으로 포장하여 침략과 조선인 전쟁 동원을 용이하게 하려는 정치 술책이었다. 즉 일본인에게는 ‘뿌리가 같은’ 조선과의 ‘통일’을 적극 지지하게 하고, 조선인에게는 일제의 침략이 민족 내 왕조 교체와 별반 다를 바 없으므로 독립운동이 불필요함은 물론이고 일본을 위해 목숨까지 바쳐야 한다고 믿게 하려는 의도였다.
2) 타율성론: 조선은 고대부터 다른 나라의 식민지였다는 주장
‘타율성론(他律性論)’은 한국의 역사가 자주적인 역량이 아닌 북쪽(중국‧몽고 등)과 남쪽(일본)의 외세 간섭과 영향을 받아 타율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이다. 고조선의 역사는 기자, 위만과 같은 중국 이주민에 의해 시작되어(단군조선을 부정하지만, 반면 일선동조론에서는 단군이 일본 건국신 아마테라스 오오미가미(天祖大神)의 후손 혹은 아우라고 주장)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보낸 군대에 멸망하였으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식민지였고, 남쪽의 신라와 가야에는 ‘진구황후의 정벌’과 ‘임나일본부 설치’가 있었으므로 이 또한 식민지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대부터 다른 나라의 식민지였던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논리다.
이러한 주장은 너무나 조잡함에도 불구하고 지리적 환경결정론의 옷을 입고 학문의 모습으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환경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주장은 근자에 들어 설득력을 잃었지만, 과거에는 과학 이론처럼 크게 유행했으므로 그럴싸해 보였던 것이다. 일제 식민사가들이 한국사에 적용한 환경결정론은 ‘반도적 성격론’이다. 한국은 대륙의 끄트머리에 튀어나와 해양과 맞닿아 있는 ‘반도’라서 대륙과 해양 세력 양쪽의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고, 실제 역사도 그렇게 전개되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반도에서 제국으로 성장한 로마나 스페인의 사례만으로도 반증이 가능하다.2)
2) 이에 대해서는 이기백 교수가 『한국사 시민강좌』 1집(일조각, 1987)에 수록한 「반도적 성격론」을 추천할만하다. 한편, 나의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은 우리의 지리적 환경을 로마와 비교하여 반도에서 우리 민족이 대제국을 건설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이는 이기백 교수의 반론을 잘못 사용한 예라 하겠다. 이기백 교수는 로마나 스페인의 사례를 들어 ‘반도적 성격론’의 비합리성을 규명했다. 로마처럼 우리도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다는 주장은 반도의 특성을 일제 식민사가들과 정반대로 해석한 것일 뿐 여전히 지리적 환경결정론에 빠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기백 교수의 〈한국사 시민강좌〉 책 표지 (이미지 출처: 한국사 시민강좌)
3) 정체성론: 조선은 고대사회에 머물러 있는 나라라는 주장
‘정체성론(停滯性論)’의 ‘정체’는 “어떤 형편이나 상태가 진척되지 아니하고 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을 뜻한다. 서양이나 일본이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 중세 봉건 사회를 거쳐 근대 사회로 이행된 반면, 조선은 봉건 사회에 이르지 못했으므로 고대 사회에 머물러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앞서 살펴본 ‘일선동조론’과 ‘타율성론’의 조잡함에 비해 서양 근대역사학의 시대구분에서 비롯된 것이므로(구체적으로는 마르크스‧엥겔스의 역사이론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맹아론’과 ‘식민지근대화론’ 등의 심도 높은 논박이 있었다.(이에 대해서는 14회 칼럼에서 자세히 살펴보겠다.)
유사역사(사이비 역사)를 신봉하는 이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는 한 역사 평설가는 이러한 식민사학이 해방 후 서울대에서 교편을 잡은 이병도 교수를 거쳐 현재까지도 대학 교수와 연구자 들을 중심으로 계승되고 있다는 주장을 거듭한다. 그는 식민사학의 카르텔이 형성되어 있다는 이런 주장을 집대성(?)하여 책을 출간하면서 제목을 ‘우리 안의 식민사관’이라고 붙였다.(임나일본부, 삼국사기 초기기록, 동북아역사재단의 업무 관련 문제 등을 주로 거론했다. 이 가운데 삼국사기 초기기록 문제는 본 칼럼에서 추후 자세히 살펴볼 예정이다.)
정작 ‘우리 안의 식민사학’에 빠진 것은 누구인가
하지만 실제로 식민사학의 논리에 빠진 것은 연구자가 아니라 유사역사에 경도된 이들이다. 일본 천황 일가와 관련한 인터넷 신문 기사에는 어김없이 ‘백제 후손’을 운운하는 댓글이 많이 등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일본의 우익 정치인이 우리나라에 적대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 데 비해 천황이 비교적 온건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백제의 후손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누가 우위에 있냐는 것이 다를 뿐, 일제 식민사학의 ‘일선동조론’ 또는 ‘동조동근론’과 같은 맥락이다. 단순히 혈연관계만을 확인하는 차원이 아니라, 백제왕의 후예가 일본의 천황이 되어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으므로 일본 전체가 우리 영향을 받았다는 허튼 상상을 하고 있다.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창작과 비평사, 2002) (이미지 출처: 알라딘)
일본 천황가가 백제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유사역사 신봉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아키히토(明仁) 천황의 2001년 12월 기자회견이다.
“저 자신으로서는 캄무(환무, 桓武)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점에서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습니다. 무령왕은 일본과 관계가 깊었고, 이때 이래로 일본에 오경박사가 대대로 초빙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무령왕의 아들 성명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발언은 2002년 한일월드컵 공동 개최를 몇 달 앞둔 시점에서 양국의 신뢰와 협력 회복을 제안하는 취지에서 한 일종의 ‘립서비스’일 뿐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 천황가의 모계 가운데 한 사람이 백제왕의 후손인 점을 토대로 천황가가 백제 후손이라고 강조한다면, 원나라(몽골) 간섭기 이후 고려 국왕은 대를 이어 원나라 공주와 혼인했으므로 우리가 몽골인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젊은 역사학자 모임에서 펴낸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역사학』 (역사비평사, 2017) 책 표지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또한 한국 고대사 관련 서적의 베스트셀러 순위를 살펴보면, 상위권은 고조선이 대륙을 경영했다든가, 고구려‧백제‧신라가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유사역사학 도서가 대다수이다.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있고, 출판의 자유는 헌법으로 규정된 것이므로 그런 책이 출간되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유사역사학 도서가 수준 높은 연구서나 교양서를 제치고 불티나게 팔리는 것은 다소 의아한 현상이다. 사실 이런 주장은 일제 식민사학의 ‘반도적 성격론’을 믿은 데서 나왔다. 앞서 소개했듯이 이기백 교수는 이미 ‘반도적 성격론’이 허구임을 증명하였다. 하지만 유사역사학을 주장하는 이들은 조상 대대로 우리가 반도에서 살았던 것이 부끄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 역사를 대륙에 옮겨 놓았고, 유사역사를 신봉하는 독자들은 그것을 읽고 뿌듯해하는 것이다.3) ‘우리 안의 식민사학’은 바로 이런 데 있다.
3) 이에 대해서는 ‘젊은역사학자모임’에서 출간한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역사학』 (역사비평사, 2017)에 수록된 기경량 교수의 「사이비역사학과 역사파시즘」 및 강진원 교수의 「식민주의 역사학과 ‘우리’ 안의 타율성론」에서 지적한 바 있다.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12. 일제 식민사학과 그 영향
- 지난 글: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11. 역사의 과학성을 강조한 실증주의 역사학
역사학자. 계명대학교에서 철학과 사학을 복수전공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5~7세기 신라정치사를 연구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계명대학교 강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역사학 입문>,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서>, <한국사 사료읽기> 등의 과목을 담당하고 있다.
댓글(0)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12. 일제 식민사학과 그 영향'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인문, 깜짝 퀴즈] 소설가 최진영(정답, 해설 포함)
최진영
3. 당신의 이름을 다르게 부르는 이유
이광호
관련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