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항적인 범죄자가 갱생하여 영웅이 되는 이야기에는 분명히 매력이 있다. 문제는 이 매력적인 소재가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데 있다. 실제 기록을 확인하면, 이 학도병들은 포항이 아니라 대구에서 모였다. 7월 14일, 대구에서 〈대한학도의용대〉를 결성한 학생들이 대원 87명을 모아 육군본부에 공산당과 싸우겠다는 결의서를 제출한 것이 시작이다.
개연성 없는 허구로 포장한 학도병의 환상
영화 〈포화 속으로〉 포스터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70년 전에 일어난 한국 전쟁에는 수많은 비극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아직 책을 펴고 연필을 쥐어야 할 어린 나이에 총을 들고 싸움터에 나간 학도병이다. 중고등학생 나이의 학생을 소년병으로 전장에 내보낸 것은 비인도적인 행동이지만, 국가의 존망 앞에서는 어떤 수단도 용인되었다.
과거 군사 정권 시절에는 학도병을 국가와 민족을 위해 떨쳐 일어선 영웅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자 이런 면모보다는 비극적인 모습이 강조되었다. 2010년에 개봉해서 333만 명의 관객을 모은 영화 〈포화 속으로〉나 2019년에 개봉해 110만 명의 관객을 모은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이 그런 사례다.
많은 관객을 모으는 데에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영화 속 역사적 사실은 많은 부분 왜곡되었다. 상황을 더 극적으로 만들어서 학도병의 영웅성을 비장하게 묘사하려 했겠지만, 영화 내용을 실제 있었던 일로 받아들인 관객에게는 잘못된 역사 인식을 심어 준 격이다.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기 위한 무리한 설정
〈포화 속으로〉는 1950년 8월 11일에 벌어진 포항여중 전투에 참전한 학도병 71명이 주인공인 영화이다. 당시 포항 시내로 진입하는 북한군을 맞아 새벽부터 싸운 학도병들은 장장 11시간 가까이 적을 막아 냈다. 그 덕분에 포항여중에 있던 3사단 사령부가 철수할 수 있었고, 포항 시민들은 피난 갈 시간을 벌었다.
영화에서는 이 학도병 사이에 구갑조(권상우 분)를 비롯한 불량배 세 사람을 섞었다. 이들은 교복을 입었을 뿐이지 학생이 아니며, 살인미수 혐의로 소년원에 갈 위기에 처하자 이를 피하려고 학도병에 지원한다.
이 세 사람은 반항적이며 이기적인 태도로 부대 분위기를 망가뜨리고 긴장감을 조성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태도를 달리하여 다른 부대원들과 협력하고 끝에 가서는 수많은 북한군을 쓰러트리며 분투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한다. 전형적인 ‘회개하는 악당 출신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죄를 지은 후 처벌을 피하려는 범죄자를 모은 부대에 특수한 임무를 부여하는 영화는 예전부터 많았다. 이 분야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더티 더즌(The Dirty Dozen, 1967)〉(국내 개봉명 〈특공 대작전〉)부터 시작하여 이 학도병 영화들보다 조금 먼저 제작한 〈실미도(2003)〉까지 이어지는 무수한 영화가 그것이다.
〈더티 더즌〉(좌)과 〈실미도〉(우) 영화 포스터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더티 더즌〉은 완전한 창작이므로 문제될 게 없지만, 〈실미도〉는 실제로 범죄자가 아니라 일반인이었던 특수부대원들을 범죄자로 묘사하여 〈포화 속으로〉와 같은 왜곡을 했다.
반항적인 범죄자가 갱생하여 영웅이 되는 이야기에는 분명히 매력이 있다. 문제는 이 매력적인 소재가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일단 학도병들이 모집되는 부분(경위)부터 틀렸다. 영화에서는 학도병 대부분이 포항여중 전투 직전에 포항 인근에서 급하게 모인 것처럼 묘사하지만, 실제로는 모두 대구에서 왔다.
학도병 모집 경위 및 배치 과정도 사실과 달라
이들은 7월 14일, 대구에서 〈대한학도의용대〉를 결성했다. 인원은 총 87명, 중학생(16세)에서 대학생(24세)까지 있었다. 육군본부에 공산당과 싸우겠다는 결의서를 제출한 학도병들은 출전 선서를 마친 뒤 희망에 따라 안동에서 싸우고 있던 수도사단의 김석원(1893~1978) 준장 휘하로 간다.
이는 김석원이 1949년 개성에 주둔한 1사단 사단장으로 재직할 당시 38선 방어에서 용명을 떨쳤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학도병 중에는 김석원이 설립한 성남중학교 학생들도 있었다. 이들은 김석원에게 연락하여 수도사단에 넣어주겠다는 약속도 미리 받아두었다.
학도병을 맞이한 김석원은 무기와 군복을 지급했고, 현역 군인들을 교관으로 붙여 기초적인 훈련도 시킨다. 제식과 총기 조작 훈련, 분대/소대/중대 단위 공격 및 방어 훈련까지 받았으며 사상자는 없었으나 가벼운 실전도 치렀다. 이 기간에 학도병들은 투표를 통해 중대장과 소대장, 소대 향도(부소대장) 등의 지휘부도 정식으로 선출한다.
그런데 이들이 수도사단에 온 지 열흘째 되던 날 이변이 생겼다. 이들을 받아준 김석원이 포항에 있는 3사단장으로 전임되고 백인엽(1923~2013) 대령이 새 사단장으로 취임한 것이다.
백인엽은 민간인이 군복을 입고 싸우는 것을 좋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학도병들에게 입대해서 정식으로 군인이 되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학생으로서 스스로 전장에 나섰다는 자부심이 있던 대부분의 학도병은 그 제안을 거부했다. 그러자 백인엽은 이들에게 군복과 무기를 반납하고 떠나라고 명령한다.
학도병 87명 중 16명은 백인엽의 제안에 따라 수도사단에 입대한다. 그러나 나머지 71명은 김석원이 있는 3사단으로 가기로 했다. 김석원은 자신을 따르기로 결정한 학도병들을 환영하며 비교적 안전한 사단 후방 지휘소 경비를 맡겼고, 소총과 탄약도 새로 지급해 주었다. 여기서 학도병은 간부를 새로 선출하는데, 이미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전임자들이 전원 다시 뽑혔다. 그리고 하루 뒤에 북한군이 쳐들어오면서 영화의 소재가 된 포항여중 전투가 시작된다.
하지만 영화의 설정은 전혀 다르다. 3사단을 따라다니며 전투를 이미 경험한 학도병 3명에 포항 인근에서 새로 모집해서 훈련을 전혀 받지 못한 68명을 추가해서 71명을 편성한 것으로 나온다. 중대장과 소대장 등 지휘부도 학도병 스스로 선출한 것이 아니라 학도병 관리를 맡은 강석대 대위(김승우 분)가 기존 학도병 세 명을 임의로 임명한다.
이 세 명이 낙하산으로 간부가 된 이유는 전투를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도 군대를 그저 따라다녔을 뿐 제대로 훈련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주변에서 급하게 모은 인원에 제대로 된 교관도 없으니, 말 그대로 오합지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부대를 구성하니 실제 역사에는 없었던 온갖 황당한 모습이 펼쳐진다. 밤이 되었는데 취침 지시를 따르지 않고 춤추고 노래하며 노는가 하면, 깡패 출신 대원은 중대장에게 칼부림까지 하며 기싸움을 벌인다. 훈련을 받지 않은 학도병들은 적군 주력이 나타나기도 전에 북한군 전초 부대와의 충돌만으로 30%나 되는 손실을 내고, 심지어 싸우기 무섭다고 탈영하는 대원까지 나온다.
학도병 중대장을 맡은 오장범(최승현 분)을 칼로 위협하는 가짜 학도병 구갑조(권상우 분) (이미지 출처: 태원엔터테인먼트)
‘학도병만으로 포항 방어’는 실제와 다른 엉터리 지시
오합지졸 그 자체였던 학도병이 갑자기 잘 싸우는 장면이야 영화적인 과장이라고 치자. 하지만 적과 싸우게 된 배경에 관해서도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과 전혀 다른 설정을 깔고 있다.
“우리 3사단은 지금 즉시 낙동강 전선으로 투입된다. 북한군 5사단과 12사단과 15사단은 지금 낙동강 전선으로 결집하고 있어. 그걸 분쇄하라는 상부의 명령이야. 낙동강 전투는 피바다가 될 것이야. 더 이상 후퇴할 수도 없고, 밀릴 수도 없는 마지막 방어선이니까.”
“그러면 여기 포항은 어느 부대가 지킵니까?”
영화에서 사단장은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야 한다며 포항 방어를 순전히 학도병에게만 맡긴다. 그리고 이들을 맡아서 관리하던 강석대 대위는 사단장의 지시에 당연한 의문을 제기한다. 하지만 사단장은 강 대위를 외면하고 사단 병력 전체를 낙동강 전선으로 이동시킨다. 그리고 학도병만 남은 포항에서 북한군의 공격에 맞닥트리게 된다.
하지만 이는 당시 전선 상태를 볼 때 성립할 수 없는 상황이다. 당시 북한군의 공격에 맞서는 한국군과 미군의 배치는 아래 지도와 같다.
포항여중 전투 시점에서 전선 상황과 국군 및 미군 배치 상황 모사본 (이미지 출처: 칠곡호국평화관 기념관)
이른바 ‘낙동강 방어선’이 낙동강에 면한 부분에서만 형성된 것은 아니다. 미군이 담당한 대구 이서 지역 방어선만 실제 낙동강을 끼고 있고, 한국군이 맡은 경상북도 내륙 방면 방어선은 산악지대다. 하지만 포항까지 이어지는 이 동쪽 방어선도 엄연히 ‘낙동강 방어선’의 일부였다.
이런 상황에서 3사단이 포항을 비워 놓고 다른 사단의 담당 구역으로 간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 영화에서 북한군 766부대 사령관 박무량(차승원 분)이 언급했듯, 포항을 점령하고 해안을 따라 남진하면 그대로 부산이다. 그런 상황을 모를 수 없는데 3사단을 ‘낙동강 방어선’에 보내는 국군 수뇌부나, 박무량에게 ‘낙동강으로 가라’고 명령하는 북한군 수뇌부나 똑같은 수준의 머저리다.
영화 속에서 3사단장은 이런 말이 안 되는 지시에 따라 학도병만 포항에 남기고 나머지 병력과 함께 ‘겨우 2시간’ 거리에 있는 ‘낙동강 방어선’으로 간다. 장비도 부족하고 훈련은 아예 받지 않은 학도병을 북한군 앞에 내던져 놓고서 말이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3사단장 김석원은 학도병을 전선에 내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김석원이 처음 학도병을 받은 의성, 안동 방면에서부터 그들의 임무는 후방 경비였고, 포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방 지휘소에 가 있던 김석원은 학도병을 보호하려고 일부러 포항여중에 소재한 사단 후방 지휘소 경비를 맡겼다.
문제는 전방에 나가 있던 3사단 주력 부대 2개 연대가 북한군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해안으로 밀려 포위당하고, 이에 돌파구를 연 북한군이 포항 시내로 밀려든 데 있었다. 안전해야 할 후방 지휘소에 적이 몰려들자 학도병까지도 군악대원이나 행정병들과 함께 나서서 싸워야 했다. 그리고 이들은 새벽 3시경부터 무려 11시간이나 버티며 적을 막는 초인적 위업을 달성한다.
포항여중 전투 당시 포항 일대 상황 (이미지 출처: 국방부 전사편찬연구소)
장사동 해안으로 몰린 3사단 주력과 3, 8사단 사이의 돌파구로 밀려드는 북한군 5사단, 12사단, 766부대. 영화에서 국군 3사단장은 “지금 포항을 걱정할 때가 아니”라고 단언하지만, 사실 포항이야말로 북한군이 작정하고 달려든 목표였다.
학도병의 실제 실력, 역할, 공헌 모두 축소
영화 〈포화 속으로〉 스틸컷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학도병이 버텨준 덕분에 3사단 후방 지휘소는 막대한 물자와 함께 안전하게 철수했고, 아직 시내에 남아 있던 포항 시민들도 피난할 수 있었다. 북쪽에서 해안에 고립되었던 3사단 주력 부대도 해로로 철수해서 포항시 남쪽에 새로 방어선을 구축할 틈을 얻었다.
하지만 영화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모조리 생략하거나 왜곡했다. 적에게 포위되어 꼼짝할 수 없었던 3사단장과 주력 부대는 자기 담당 구역을 버리고 다른 곳에 싸우러 가는 생각 없는 군대가 되었고, 11시간 중 9시간 동안 학도병과 함께 싸운 3사단 행정병과 군악대원 또한 생략되었다.
정규군의 역할이 삭제된 만큼 학도병의 공헌은 왜곡되었다. 속성이기는 해도 상당한 훈련을 받은 학도병들은 졸지에 전혀 훈련받지 않은 오합지졸이 되었다. 게다가 원래는 새벽이었던 전투 시간도 낮으로 바뀌고 북한군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던 전차를 끌고 오기까지 했다. 이러니 학도병의 무장이 되려 강화되었음에도 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실제로 학도병들은 11시간이나 포항여중을 사수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북한군의 공세를 단 한 번도 버텨내지 못하고 순식간에 전멸당한다. 그저 주인공 두 사람만 할리우드 영화 주인공 람보처럼 영웅적으로 싸우다 죽었을 뿐이다.
영화에서는 그래도 마지막 순간에 강석대 대위의 지원 부대가 도착해서 북한군을 몰아내고 학도병들의 시신을 수습한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더 비극이었다. 주력이 북쪽에서 포위된 3사단은 학도병들을 전혀 도울 수 없었기 때문에, 전투 초기에 부상을 당해 후송된 6명을 제외하고 48명이 전사, 4명은 실종되었으며 13명은 탄약이 떨어져 더 싸우지 못하고 포로가 되었다. 이들 중 미군의 공습을 틈타 탈출한 11명만이 다행스럽게도 돌아왔을 뿐이다. 고로 총 생존자는 17명이다.
해상으로 철수했던 3사단이 병력을 정비해서 포항을 탈환하고 전사자 48명의 시신을 수습한 것은 전투가 벌어지고 보름이나 지난 뒤였다. 이미 시신이 부패하고 신분증도 비에 젖어 망가져서,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던 전사자는 10명뿐이었다.
‘실화 재구성 영화’ 한 줄 자막이 면죄부 될까
영화 〈포화 속으로〉와 비슷한 상황의 전투가 벌어졌던 화개장터 전투(하동전투) (이미지 출처: Wikipedia)
학도병이 전투에 투입된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리고 그 양상이 영화와 정말 비슷했던 사례도 있다. 1950년 7월 25일에 벌어진 화개장터 전투가 그렇다.
이 전투에 참여한 학도병 183명은 여수-순천 지역에서 모였다. 이들이 학도병에 지원한 것은 7월 10~13일이었으나, 총은 22일에나 받았고 훈련은 거의 받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상부의 지시에 따라 여기저기 오가기만 하다가 25일 새벽에 화개장터에 도착했다.
여기서 학도병은 경찰 부대와 협력하여 화개장터를 방어하라는 임무를 받는다. 그런데 이들이 도착한 지 단 3시간 만에 북한군이 나타나면서 새벽부터 전투가 시작된다.
이들을 쫓아온 북한군은 6사단으로, 호남 지역을 석권하고 경상도로 진입하려는 참이었다. 6사단은 중국에서 팔로군 소속으로 실전 경험을 쌓고 북한군으로 편입되어 최정예 부대로 꼽히는 사단이었다. 사단장 방호산 역시 팔로군 출신이다.
화개장터에서 싸운 학도병이 전멸한 것은 아니다. 3시간가량 싸우다가 더 버티지 못하고 하동 방면으로 후퇴했다. 이 부분만 빼면 이 전투가 포항여중 전투보다 〈포화 속으로〉의 시놉시스와 훨씬 흡사하다.
물론 상업영화가 다큐멘터리처럼 모든 역사적 사실을 담을 필요는 없고 그것이 가능하지도 않다. 관객의 흥미를 끌자면 캐릭터나 상황을 더 극적으로 만드는 과정도 필요할 수 있다. 이 영화도 시작하면서 “이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영화입니다.”라는 자막을 걸기는 했다.
하지만 재구성에도 적절한 개연성이 있어야 한다.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가 이토록 사실과 다른 데다 개연성까지 부족하다면, 과연 자막 한 줄이 면죄부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적어도 “71명 학도병의 전쟁 실화”라는 홍보 문구를 내세우는 것은 곤란하지 않은가.
역사작가
1979년 경북 영주 출생. 서강대 사학과, 생물학과, 동 대학 대학원 역사교육과를 졸업했다. 2001년부터 소설을 썼으며 주된 소재는 역사의 분기점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에 지금과 다른 역사가 되는 대체 역사이다. 펴낸 책으로 『이순신의 나라』, 『봉황의 비상』 등의 소설과 『청소년을 위한 파닥파닥 세계사 교과서』, 『한국 전쟁 전략+전술+무기』 등의 교양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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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포화 속으로> 신파적 서사 속에서 사라진 역사적 사실
-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
임영대
2021-08-10
반항적인 범죄자가 갱생하여 영웅이 되는 이야기에는 분명히 매력이 있다. 문제는 이 매력적인 소재가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데 있다. 실제 기록을 확인하면, 이 학도병들은 포항이 아니라 대구에서 모였다. 7월 14일, 대구에서 〈대한학도의용대〉를 결성한 학생들이 대원 87명을 모아 육군본부에 공산당과 싸우겠다는 결의서를 제출한 것이 시작이다.
개연성 없는 허구로 포장한 학도병의 환상
영화 〈포화 속으로〉 포스터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70년 전에 일어난 한국 전쟁에는 수많은 비극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아직 책을 펴고 연필을 쥐어야 할 어린 나이에 총을 들고 싸움터에 나간 학도병이다. 중고등학생 나이의 학생을 소년병으로 전장에 내보낸 것은 비인도적인 행동이지만, 국가의 존망 앞에서는 어떤 수단도 용인되었다.
과거 군사 정권 시절에는 학도병을 국가와 민족을 위해 떨쳐 일어선 영웅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자 이런 면모보다는 비극적인 모습이 강조되었다. 2010년에 개봉해서 333만 명의 관객을 모은 영화 〈포화 속으로〉나 2019년에 개봉해 110만 명의 관객을 모은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이 그런 사례다.
많은 관객을 모으는 데에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영화 속 역사적 사실은 많은 부분 왜곡되었다. 상황을 더 극적으로 만들어서 학도병의 영웅성을 비장하게 묘사하려 했겠지만, 영화 내용을 실제 있었던 일로 받아들인 관객에게는 잘못된 역사 인식을 심어 준 격이다.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기 위한 무리한 설정
〈포화 속으로〉는 1950년 8월 11일에 벌어진 포항여중 전투에 참전한 학도병 71명이 주인공인 영화이다. 당시 포항 시내로 진입하는 북한군을 맞아 새벽부터 싸운 학도병들은 장장 11시간 가까이 적을 막아 냈다. 그 덕분에 포항여중에 있던 3사단 사령부가 철수할 수 있었고, 포항 시민들은 피난 갈 시간을 벌었다.
영화에서는 이 학도병 사이에 구갑조(권상우 분)를 비롯한 불량배 세 사람을 섞었다. 이들은 교복을 입었을 뿐이지 학생이 아니며, 살인미수 혐의로 소년원에 갈 위기에 처하자 이를 피하려고 학도병에 지원한다.
이 세 사람은 반항적이며 이기적인 태도로 부대 분위기를 망가뜨리고 긴장감을 조성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태도를 달리하여 다른 부대원들과 협력하고 끝에 가서는 수많은 북한군을 쓰러트리며 분투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한다. 전형적인 ‘회개하는 악당 출신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죄를 지은 후 처벌을 피하려는 범죄자를 모은 부대에 특수한 임무를 부여하는 영화는 예전부터 많았다. 이 분야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더티 더즌(The Dirty Dozen, 1967)〉(국내 개봉명 〈특공 대작전〉)부터 시작하여 이 학도병 영화들보다 조금 먼저 제작한 〈실미도(2003)〉까지 이어지는 무수한 영화가 그것이다.
〈더티 더즌〉(좌)과 〈실미도〉(우) 영화 포스터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더티 더즌〉은 완전한 창작이므로 문제될 게 없지만, 〈실미도〉는 실제로 범죄자가 아니라 일반인이었던 특수부대원들을 범죄자로 묘사하여 〈포화 속으로〉와 같은 왜곡을 했다.
반항적인 범죄자가 갱생하여 영웅이 되는 이야기에는 분명히 매력이 있다. 문제는 이 매력적인 소재가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일단 학도병들이 모집되는 부분(경위)부터 틀렸다. 영화에서는 학도병 대부분이 포항여중 전투 직전에 포항 인근에서 급하게 모인 것처럼 묘사하지만, 실제로는 모두 대구에서 왔다.
학도병 모집 경위 및 배치 과정도 사실과 달라
이들은 7월 14일, 대구에서 〈대한학도의용대〉를 결성했다. 인원은 총 87명, 중학생(16세)에서 대학생(24세)까지 있었다. 육군본부에 공산당과 싸우겠다는 결의서를 제출한 학도병들은 출전 선서를 마친 뒤 희망에 따라 안동에서 싸우고 있던 수도사단의 김석원(1893~1978) 준장 휘하로 간다.
이는 김석원이 1949년 개성에 주둔한 1사단 사단장으로 재직할 당시 38선 방어에서 용명을 떨쳤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학도병 중에는 김석원이 설립한 성남중학교 학생들도 있었다. 이들은 김석원에게 연락하여 수도사단에 넣어주겠다는 약속도 미리 받아두었다.
학도병을 맞이한 김석원은 무기와 군복을 지급했고, 현역 군인들을 교관으로 붙여 기초적인 훈련도 시킨다. 제식과 총기 조작 훈련, 분대/소대/중대 단위 공격 및 방어 훈련까지 받았으며 사상자는 없었으나 가벼운 실전도 치렀다. 이 기간에 학도병들은 투표를 통해 중대장과 소대장, 소대 향도(부소대장) 등의 지휘부도 정식으로 선출한다.
그런데 이들이 수도사단에 온 지 열흘째 되던 날 이변이 생겼다. 이들을 받아준 김석원이 포항에 있는 3사단장으로 전임되고 백인엽(1923~2013) 대령이 새 사단장으로 취임한 것이다.
백인엽은 민간인이 군복을 입고 싸우는 것을 좋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학도병들에게 입대해서 정식으로 군인이 되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학생으로서 스스로 전장에 나섰다는 자부심이 있던 대부분의 학도병은 그 제안을 거부했다. 그러자 백인엽은 이들에게 군복과 무기를 반납하고 떠나라고 명령한다.
학도병 87명 중 16명은 백인엽의 제안에 따라 수도사단에 입대한다. 그러나 나머지 71명은 김석원이 있는 3사단으로 가기로 했다. 김석원은 자신을 따르기로 결정한 학도병들을 환영하며 비교적 안전한 사단 후방 지휘소 경비를 맡겼고, 소총과 탄약도 새로 지급해 주었다. 여기서 학도병은 간부를 새로 선출하는데, 이미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전임자들이 전원 다시 뽑혔다. 그리고 하루 뒤에 북한군이 쳐들어오면서 영화의 소재가 된 포항여중 전투가 시작된다.
하지만 영화의 설정은 전혀 다르다. 3사단을 따라다니며 전투를 이미 경험한 학도병 3명에 포항 인근에서 새로 모집해서 훈련을 전혀 받지 못한 68명을 추가해서 71명을 편성한 것으로 나온다. 중대장과 소대장 등 지휘부도 학도병 스스로 선출한 것이 아니라 학도병 관리를 맡은 강석대 대위(김승우 분)가 기존 학도병 세 명을 임의로 임명한다.
이 세 명이 낙하산으로 간부가 된 이유는 전투를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도 군대를 그저 따라다녔을 뿐 제대로 훈련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주변에서 급하게 모은 인원에 제대로 된 교관도 없으니, 말 그대로 오합지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부대를 구성하니 실제 역사에는 없었던 온갖 황당한 모습이 펼쳐진다. 밤이 되었는데 취침 지시를 따르지 않고 춤추고 노래하며 노는가 하면, 깡패 출신 대원은 중대장에게 칼부림까지 하며 기싸움을 벌인다. 훈련을 받지 않은 학도병들은 적군 주력이 나타나기도 전에 북한군 전초 부대와의 충돌만으로 30%나 되는 손실을 내고, 심지어 싸우기 무섭다고 탈영하는 대원까지 나온다.
학도병 중대장을 맡은 오장범(최승현 분)을 칼로 위협하는 가짜 학도병 구갑조(권상우 분) (이미지 출처: 태원엔터테인먼트)
‘학도병만으로 포항 방어’는 실제와 다른 엉터리 지시
오합지졸 그 자체였던 학도병이 갑자기 잘 싸우는 장면이야 영화적인 과장이라고 치자. 하지만 적과 싸우게 된 배경에 관해서도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과 전혀 다른 설정을 깔고 있다.
“우리 3사단은 지금 즉시 낙동강 전선으로 투입된다. 북한군 5사단과 12사단과 15사단은 지금 낙동강 전선으로 결집하고 있어. 그걸 분쇄하라는 상부의 명령이야. 낙동강 전투는 피바다가 될 것이야. 더 이상 후퇴할 수도 없고, 밀릴 수도 없는 마지막 방어선이니까.”
“그러면 여기 포항은 어느 부대가 지킵니까?”
영화에서 사단장은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야 한다며 포항 방어를 순전히 학도병에게만 맡긴다. 그리고 이들을 맡아서 관리하던 강석대 대위는 사단장의 지시에 당연한 의문을 제기한다. 하지만 사단장은 강 대위를 외면하고 사단 병력 전체를 낙동강 전선으로 이동시킨다. 그리고 학도병만 남은 포항에서 북한군의 공격에 맞닥트리게 된다.
하지만 이는 당시 전선 상태를 볼 때 성립할 수 없는 상황이다. 당시 북한군의 공격에 맞서는 한국군과 미군의 배치는 아래 지도와 같다.
포항여중 전투 시점에서 전선 상황과 국군 및 미군 배치 상황 모사본 (이미지 출처: 칠곡호국평화관 기념관)
이른바 ‘낙동강 방어선’이 낙동강에 면한 부분에서만 형성된 것은 아니다. 미군이 담당한 대구 이서 지역 방어선만 실제 낙동강을 끼고 있고, 한국군이 맡은 경상북도 내륙 방면 방어선은 산악지대다. 하지만 포항까지 이어지는 이 동쪽 방어선도 엄연히 ‘낙동강 방어선’의 일부였다.
이런 상황에서 3사단이 포항을 비워 놓고 다른 사단의 담당 구역으로 간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 영화에서 북한군 766부대 사령관 박무량(차승원 분)이 언급했듯, 포항을 점령하고 해안을 따라 남진하면 그대로 부산이다. 그런 상황을 모를 수 없는데 3사단을 ‘낙동강 방어선’에 보내는 국군 수뇌부나, 박무량에게 ‘낙동강으로 가라’고 명령하는 북한군 수뇌부나 똑같은 수준의 머저리다.
영화 속에서 3사단장은 이런 말이 안 되는 지시에 따라 학도병만 포항에 남기고 나머지 병력과 함께 ‘겨우 2시간’ 거리에 있는 ‘낙동강 방어선’으로 간다. 장비도 부족하고 훈련은 아예 받지 않은 학도병을 북한군 앞에 내던져 놓고서 말이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3사단장 김석원은 학도병을 전선에 내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김석원이 처음 학도병을 받은 의성, 안동 방면에서부터 그들의 임무는 후방 경비였고, 포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방 지휘소에 가 있던 김석원은 학도병을 보호하려고 일부러 포항여중에 소재한 사단 후방 지휘소 경비를 맡겼다.
문제는 전방에 나가 있던 3사단 주력 부대 2개 연대가 북한군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해안으로 밀려 포위당하고, 이에 돌파구를 연 북한군이 포항 시내로 밀려든 데 있었다. 안전해야 할 후방 지휘소에 적이 몰려들자 학도병까지도 군악대원이나 행정병들과 함께 나서서 싸워야 했다. 그리고 이들은 새벽 3시경부터 무려 11시간이나 버티며 적을 막는 초인적 위업을 달성한다.
포항여중 전투 당시 포항 일대 상황 (이미지 출처: 국방부 전사편찬연구소)
장사동 해안으로 몰린 3사단 주력과 3, 8사단 사이의 돌파구로 밀려드는 북한군 5사단, 12사단, 766부대. 영화에서 국군 3사단장은 “지금 포항을 걱정할 때가 아니”라고 단언하지만, 사실 포항이야말로 북한군이 작정하고 달려든 목표였다.
학도병의 실제 실력, 역할, 공헌 모두 축소
영화 〈포화 속으로〉 스틸컷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학도병이 버텨준 덕분에 3사단 후방 지휘소는 막대한 물자와 함께 안전하게 철수했고, 아직 시내에 남아 있던 포항 시민들도 피난할 수 있었다. 북쪽에서 해안에 고립되었던 3사단 주력 부대도 해로로 철수해서 포항시 남쪽에 새로 방어선을 구축할 틈을 얻었다.
하지만 영화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모조리 생략하거나 왜곡했다. 적에게 포위되어 꼼짝할 수 없었던 3사단장과 주력 부대는 자기 담당 구역을 버리고 다른 곳에 싸우러 가는 생각 없는 군대가 되었고, 11시간 중 9시간 동안 학도병과 함께 싸운 3사단 행정병과 군악대원 또한 생략되었다.
정규군의 역할이 삭제된 만큼 학도병의 공헌은 왜곡되었다. 속성이기는 해도 상당한 훈련을 받은 학도병들은 졸지에 전혀 훈련받지 않은 오합지졸이 되었다. 게다가 원래는 새벽이었던 전투 시간도 낮으로 바뀌고 북한군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던 전차를 끌고 오기까지 했다. 이러니 학도병의 무장이 되려 강화되었음에도 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실제로 학도병들은 11시간이나 포항여중을 사수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북한군의 공세를 단 한 번도 버텨내지 못하고 순식간에 전멸당한다. 그저 주인공 두 사람만 할리우드 영화 주인공 람보처럼 영웅적으로 싸우다 죽었을 뿐이다.
영화에서는 그래도 마지막 순간에 강석대 대위의 지원 부대가 도착해서 북한군을 몰아내고 학도병들의 시신을 수습한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더 비극이었다. 주력이 북쪽에서 포위된 3사단은 학도병들을 전혀 도울 수 없었기 때문에, 전투 초기에 부상을 당해 후송된 6명을 제외하고 48명이 전사, 4명은 실종되었으며 13명은 탄약이 떨어져 더 싸우지 못하고 포로가 되었다. 이들 중 미군의 공습을 틈타 탈출한 11명만이 다행스럽게도 돌아왔을 뿐이다. 고로 총 생존자는 17명이다.
해상으로 철수했던 3사단이 병력을 정비해서 포항을 탈환하고 전사자 48명의 시신을 수습한 것은 전투가 벌어지고 보름이나 지난 뒤였다. 이미 시신이 부패하고 신분증도 비에 젖어 망가져서,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던 전사자는 10명뿐이었다.
‘실화 재구성 영화’ 한 줄 자막이 면죄부 될까
영화 〈포화 속으로〉와 비슷한 상황의 전투가 벌어졌던 화개장터 전투(하동전투) (이미지 출처: Wikipedia)
학도병이 전투에 투입된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리고 그 양상이 영화와 정말 비슷했던 사례도 있다. 1950년 7월 25일에 벌어진 화개장터 전투가 그렇다.
이 전투에 참여한 학도병 183명은 여수-순천 지역에서 모였다. 이들이 학도병에 지원한 것은 7월 10~13일이었으나, 총은 22일에나 받았고 훈련은 거의 받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상부의 지시에 따라 여기저기 오가기만 하다가 25일 새벽에 화개장터에 도착했다.
여기서 학도병은 경찰 부대와 협력하여 화개장터를 방어하라는 임무를 받는다. 그런데 이들이 도착한 지 단 3시간 만에 북한군이 나타나면서 새벽부터 전투가 시작된다.
이들을 쫓아온 북한군은 6사단으로, 호남 지역을 석권하고 경상도로 진입하려는 참이었다. 6사단은 중국에서 팔로군 소속으로 실전 경험을 쌓고 북한군으로 편입되어 최정예 부대로 꼽히는 사단이었다. 사단장 방호산 역시 팔로군 출신이다.
화개장터에서 싸운 학도병이 전멸한 것은 아니다. 3시간가량 싸우다가 더 버티지 못하고 하동 방면으로 후퇴했다. 이 부분만 빼면 이 전투가 포항여중 전투보다 〈포화 속으로〉의 시놉시스와 훨씬 흡사하다.
물론 상업영화가 다큐멘터리처럼 모든 역사적 사실을 담을 필요는 없고 그것이 가능하지도 않다. 관객의 흥미를 끌자면 캐릭터나 상황을 더 극적으로 만드는 과정도 필요할 수 있다. 이 영화도 시작하면서 “이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영화입니다.”라는 자막을 걸기는 했다.
하지만 재구성에도 적절한 개연성이 있어야 한다.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가 이토록 사실과 다른 데다 개연성까지 부족하다면, 과연 자막 한 줄이 면죄부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적어도 “71명 학도병의 전쟁 실화”라는 홍보 문구를 내세우는 것은 곤란하지 않은가.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영화 〈포화 속으로〉 신파적 서사 속에서 사라진 역사적 사실
- 지난 글: [그 장면 전후사의 재인식] ‘작가적 상상력’을 빙자한 또 다른 역사 폭력의 가능성
역사작가
1979년 경북 영주 출생. 서강대 사학과, 생물학과, 동 대학 대학원 역사교육과를 졸업했다. 2001년부터 소설을 썼으며 주된 소재는 역사의 분기점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에 지금과 다른 역사가 되는 대체 역사이다. 펴낸 책으로 『이순신의 나라』, 『봉황의 비상』 등의 소설과 『청소년을 위한 파닥파닥 세계사 교과서』, 『한국 전쟁 전략+전술+무기』 등의 교양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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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는 더 이상 로맨스가 아니다
손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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