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광이 폐쇄되고 마을이 사라지면서 거리로 나오게 된 펀은 동정의 대상으로 그려진다. 마트에서 만난 이웃은 펀에게 언제든 함께 살아도 좋다는 제안을 한다. 친언니 역시 돈을 빌리러 온 펀에게 함께 살자고 말한다. (…) 하지만 펀은 이웃의 제안도, 친언니의 호의도 거절한다. 펀에게 간절했던 것은 정착할 집이 아니었던 것이다.
유랑민, 집시, 유목민, 부랑자… 이들은 항상 동정의 대상이 된다. 돌아갈 집이 없기 때문이다. 집이 없다는 것은 보호받을 수 있는 울타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집이 있는 사람들은 항상 떠남을 꿈꾼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집에서 상처를 받으면 우리는 가장 먼저 여행을 떠올린다. 이 영화 속에 나오는 사람들 역시 각자 삶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유랑의 삶을 택한다. 왜 사람들은 끊임없이 정착할 곳을 찾아 헤매면서도, 또다시 떠남을 꿈꾸는가?
영화 〈노매드랜드〉 스틸컷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노매드랜드(Nomadland)〉(2021, 클로이 자오 감독)에서 노매드(Nomad)는 유목민, 유랑자라는 뜻이다.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집을 잃고 차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들은 각자의 아픔을 지닌 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정주민의 공간, 즉 도시에서 탈주한 사람들이다.
생존과 안전의 욕구, 그리고 국가의 탄생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T. Hobbes, 1588~1679)(좌)의 대표작 『리바이어던』 표지(우)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우리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정주민을 꿈꾼다. 일정한 테두리 안에서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살아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를 보호할 테두리가 없다는 것은 불안이요, 공포다. 영국의 철학자 홉스(T. Hobbes, 1588~1679)는 이를 ‘자연 상태’라고 표현한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매순간 생명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자신의 생존과 안전을 위해 일정한 권리를 국가에 양도하게 된다. 그것이 홉스가 생각하는 국가 탄생의 이유이다.
이런 생각의 연장선 위에 증명, 자격, 신분보장, 정규직 등과 같은 사회적 제도들이 있다. 우리 사회의 청년들은 정규직 일자리를 위해 20대의 삶을 오롯이 포기한다. 정규직 일자리가 이후 수십 년의 삶을 보장해주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길에 오르지 못한 삶은 실패한 삶이 된다. 이 영화의 주인공 펀(프랜시스 맥도먼드 분) 역시 마찬가지이다. 석고보드 수요 감소로 탄광이 폐쇄되고 마을이 사라지면서 거리로 나오게 된 펀은 영화 초반부터 동정의 대상으로 그려진다. 마트에서 만난 이웃은 펀에게 언제든 본인들과 함께 살아도 좋다는 제안을 한다. 이후 친언니 역시 돈을 빌리러 온 펀에게 자기 집에서 함께 살자고 말한다. 집을 잃고 떠도는 펀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하지만 펀은 이웃의 제안도, 친언니의 호의도 거절한다. 펀에게 간절했던 것은 정착할 집이 아니었던 것이다.
유목민 vs 정주민, 누가 삶의 주인인가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J. Deleuze, 1925~1985)(좌)의 책 『천개의 고원』 표지(우) (이미지 출처: Wikipedia / YES24)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J. Deleuze, 1925~1985)는 삶의 방식을 유목민과 정주민으로 나눈다. 정주민은 하나의 체계 안으로 정착하는 자를 일컫는다. 이 속에는 일정한 규칙과 테두리가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학교를 다녀야 하고, 직업을 가져야 하며, 국가가 부여하는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으며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치러야 하는 대가이다. 국가가 정한 테두리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끝없는 광야 속에 내던져진다. 이 막연한 두려움을 견디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마저도 하나의 체계 안으로 구속시켜 버린다. 이를 들뢰즈는 ‘영토화’라고 표현한다. 영토화는 매끄러운 공간 위에 홈을 파는 것이다. 유목민은 이 매끄러운 공간 위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개척한다. 하지만 정주민은 그렇지 않다. 영토화되어 버린 사람들은 매끄러운 공간 위에 패인 홈을 통해서만 이동한다. 이를 우리는 길(road)이라고 말한다. 길이 아닌 공간은 위험하고 금지된 공간이 된다.
국가의 기본적인 임무 중의 하나는 지배가 미치고 있는 공간에 홈을 파는 것, 즉 매끈한 공간을 홈이 패인 공간을 위한 교통수단으로 이용하는 데 있다. 단순히 유목민을 정복할 뿐만 아니라 이주를 통제하고, 좀 더 일반적으로 “외부” 전체, 세계 공간을 가로지르는 흐름의 총체에 대해 법이 지배하는 지대가 군림하도록 하는 것은 모든 국가의 사활적인 관심사이다.
질 들뢰즈 외, 『천개의 고원』, 2003, 새물결, p.741.
하지만 유목민은 이러한 영토화의 공간에서 탈주한다. 이들은 날카롭게 파인 홈이 아닌 매끄러운 공간에서 스스로 자신의 길을 만든다.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럼 주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기 삶의 저자(author)가 되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근대의 주체 중심 철학을 비판하면서 ‘저자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저자는 절대적, 보편적, 총체적 진리를 이야기한다. 마치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모든 인간 존재와 삶을 설명할 수 있는 거대 진리를 찾아다닌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에 의하면 그런 저자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각자 자기 삶의 저자가 되는 길밖에 없다. 이를 니체는 ‘가치의 창조자’ 즉 초인이라 불렀다.
창작을 하는 자, 수수께끼를 푸는 자, 그리고 우연을 구제하는 자로서 나 저들에게 미래를 창조할 것을, 그리고 이미 존재했던 모든 것을 새로운 창조를 통하여 구제하도록 가르쳤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000, 책세상, p.327.
자기 삶의 저자이며 가치의 창조자가 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끝없는 문제 상황이 주는 불안에 마주해야 한다. 영화에서 펀은 집에서 나와 밴에서 생활하면서 용변 처리, 밴 고장, 타이어 펑크, 추위, 좁은 잠자리 등 많은 문제 상황을 맨몸으로 겪어야 했다. 정주민이었다면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사소한 것들이 전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주인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자기가 택한 길이 주는 시련을 묵묵히 견뎌내야 한다. 누군가의 보호를 받는 삶이 노예의 삶이라면, 이에 당당히 직면하는 것은 주인의 삶이다.
매번 달라지는 접속, 끊임없는 만남과 헤어짐
만남과 헤어짐에 대한 고민
영화에서 밥 웰스는 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생활을 하면서 제일 좋은 건 영원한 이별이 없다는 거예요. 여기서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난 그들에게 작별 인사는 안 해요. 늘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하죠”
유목민에게 만남은 영원하지 않다. 하나의 만남이 또 다른 만남으로 이어지지만 만남 자체가 지속되지는 않는다. 다시 길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펀 역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진다. 직장 역시 일정하지 않다. 패스트푸드점, 아마존 쇼핑몰의 포장 업무, 캠핑 공원 관리 등 돈이 필요할 때마다 가리지 않고 일을 한다. 물건의 소유 역시 마찬가지이다. 캠핑족들은 자유롭게 서로의 물건을 바꾸고 공유한다. 유목의 삶에서 영원성, 지속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아도 마찬가지이다.
들뢰즈는 인간을 비롯된 모든 사물과 사태를 기계(machine)로 묘사한다. 이 기계는 다양한 접속을 통해 작동된다. 어떤 망에서 어디에 접속해 있는가에 따라서 기계의 속성은 달라진다. 개체들은 각자 변치 않는 단일한 속성을 지닌 단독체가 아니라 다른 것들과 어떤 식으로 연결되느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는 존재이다. 예를 들어 동일한 기계라 할지라도 전쟁에서 총, 칼 등과 연결되면 전쟁 기계가 되지만, 정원을 돌보기 위해 가위, 톱, 나무와 연결되면 정원 기계가 될 수도 있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어떤 만남, 어떤 체계 속에 있는가에 따라서 그 정체성은 달라질 수 있다. 한국인, 회사원, 아버지, 어머니, 아들 등과 같이 말이다.
유목민들은 일정한 만남과 관계, 자아에 집착하지 않는다. 관계는 수시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만남, 접속, 헤어짐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법이다. 기존의 배치에서 벗어나 울타리 바깥을 꿈꾸는 것을 들뢰즈는 탈주라고 했다. 이러한 탈주가 다시금 새로운 관계로 만들어져 영토화되면, 유목민은 또다시 탈주를 꿈꾼다. ‘OO사람’ 이전에 ‘OO되기(becoming)’라는 과정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유목민들은 광활한 대지에서 복잡하게 뻗은 나무뿌리처럼 수많은 관계망 속에서 우연히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구분과 차이를 넘어 치유와 창조의 길로
영화 〈노매드랜드〉 스틸컷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왜 사람들은 떠남을 꿈꾸는가? 그리고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왜 노매드의 삶을 택했을까? 주인공 펀은 집을 잃고 남편마저 잃은 후, 낡은 밴에 의지해 길을 떠난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서서히 내면의 아픔을 치유한다. 이 영화는 그런 펀의 모습을 담담히 보여준다. 그 외에도 아들을 잃은 슬픔을 치유하는 밥, 항암 치료를 포기하고 여행하는 스완키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여행과 떠남 속에서 자신의 아픔을 치유해간다.
모든 여행은 강렬하기에, 여행은 자신이 진화하는 장소이자 자신이 건너가는 장소인 강렬함의 문턱에서 치러지기에, 사람들은 강렬함을 통해서 여행한다.
질 들뢰즈 외, 『천개의 고원』, 2003, 새물결, p. 111.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직장에서 괴로운 일이 있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모든 것을 던지고 떠나고 싶어진다. 이러한 스트레스의 대부분은 어떤 관계와 차이에서 비롯된다. 상사와 부하의 관계, 부모의 자식의 관계, 연인 관계, 교사와 학생의 관계 등이 대표적이다.
떠남이 치유를 주는 것은 그러한 구분과 차이를 넘어서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해진 구분선을 넘어 차이를 뚫는 저항과 창조의 행위가 곧 탈주요, 떠남이다. 탈주야말로 다수자와 소수자, 부자와 빈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비장애인과 장애인, 여자와 남자, 상사와 부하, 아버지와 아들, 삶과 죽음 등의 차이를 넘어 서로의 아픔과 삶에 대해 공감하고 환대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떠남을 통해 펀이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밥이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데이브가 아들의 마음을 받아들이듯 차이에 대한 환대야말로 치유를 향한 길임을 기억해야 한다.
교사
부산대학교 윤리교육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평소 아이들과 철학적 탐구공동체에 기반한 도덕 수업을 추구하였다. 울산 매곡중학교 소속으로 현재 교육정책연구소에 파견 중이다. 전국도덕교사모임과 한국철학적탐구공동체연구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2015 개정교육과정의 도덕 교과서 집필에 참여하였다. 그 외 저서로는 『바이러스 철학을 만나다』가 있으며, 공저로는 『십대들을 위한 생각연습』(공저), 『생각하는 교실 철학하는 아이들』(공저), 『도덕 수업, 윤리로 묻고, 독서로 답하다』(공저), 『도덕적 시민의 눈으로 세상 읽기』(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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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남과 떠남은 우리에게 무엇을 만나게 해줄까
- 영화 <노매드랜드>, 유목의 길에서 마주한 절망과 희망의 교차점 - 철학자,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
박상욱
2021-07-21
탄광이 폐쇄되고 마을이 사라지면서 거리로 나오게 된 펀은 동정의 대상으로 그려진다. 마트에서 만난 이웃은 펀에게 언제든 함께 살아도 좋다는 제안을 한다. 친언니 역시 돈을 빌리러 온 펀에게 함께 살자고 말한다. (…) 하지만 펀은 이웃의 제안도, 친언니의 호의도 거절한다. 펀에게 간절했던 것은 정착할 집이 아니었던 것이다.
유랑민, 집시, 유목민, 부랑자… 이들은 항상 동정의 대상이 된다. 돌아갈 집이 없기 때문이다. 집이 없다는 것은 보호받을 수 있는 울타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집이 있는 사람들은 항상 떠남을 꿈꾼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집에서 상처를 받으면 우리는 가장 먼저 여행을 떠올린다. 이 영화 속에 나오는 사람들 역시 각자 삶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유랑의 삶을 택한다. 왜 사람들은 끊임없이 정착할 곳을 찾아 헤매면서도, 또다시 떠남을 꿈꾸는가?
영화 〈노매드랜드〉 스틸컷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노매드랜드(Nomadland)〉(2021, 클로이 자오 감독)에서 노매드(Nomad)는 유목민, 유랑자라는 뜻이다.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집을 잃고 차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들은 각자의 아픔을 지닌 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정주민의 공간, 즉 도시에서 탈주한 사람들이다.
생존과 안전의 욕구, 그리고 국가의 탄생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T. Hobbes, 1588~1679)(좌)의 대표작 『리바이어던』 표지(우)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우리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정주민을 꿈꾼다. 일정한 테두리 안에서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살아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를 보호할 테두리가 없다는 것은 불안이요, 공포다. 영국의 철학자 홉스(T. Hobbes, 1588~1679)는 이를 ‘자연 상태’라고 표현한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매순간 생명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자신의 생존과 안전을 위해 일정한 권리를 국가에 양도하게 된다. 그것이 홉스가 생각하는 국가 탄생의 이유이다.
이런 생각의 연장선 위에 증명, 자격, 신분보장, 정규직 등과 같은 사회적 제도들이 있다. 우리 사회의 청년들은 정규직 일자리를 위해 20대의 삶을 오롯이 포기한다. 정규직 일자리가 이후 수십 년의 삶을 보장해주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길에 오르지 못한 삶은 실패한 삶이 된다. 이 영화의 주인공 펀(프랜시스 맥도먼드 분) 역시 마찬가지이다. 석고보드 수요 감소로 탄광이 폐쇄되고 마을이 사라지면서 거리로 나오게 된 펀은 영화 초반부터 동정의 대상으로 그려진다. 마트에서 만난 이웃은 펀에게 언제든 본인들과 함께 살아도 좋다는 제안을 한다. 이후 친언니 역시 돈을 빌리러 온 펀에게 자기 집에서 함께 살자고 말한다. 집을 잃고 떠도는 펀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하지만 펀은 이웃의 제안도, 친언니의 호의도 거절한다. 펀에게 간절했던 것은 정착할 집이 아니었던 것이다.
유목민 vs 정주민, 누가 삶의 주인인가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J. Deleuze, 1925~1985)(좌)의 책 『천개의 고원』 표지(우) (이미지 출처: Wikipedia / YES24)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J. Deleuze, 1925~1985)는 삶의 방식을 유목민과 정주민으로 나눈다. 정주민은 하나의 체계 안으로 정착하는 자를 일컫는다. 이 속에는 일정한 규칙과 테두리가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학교를 다녀야 하고, 직업을 가져야 하며, 국가가 부여하는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으며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치러야 하는 대가이다. 국가가 정한 테두리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끝없는 광야 속에 내던져진다. 이 막연한 두려움을 견디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마저도 하나의 체계 안으로 구속시켜 버린다. 이를 들뢰즈는 ‘영토화’라고 표현한다. 영토화는 매끄러운 공간 위에 홈을 파는 것이다. 유목민은 이 매끄러운 공간 위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개척한다. 하지만 정주민은 그렇지 않다. 영토화되어 버린 사람들은 매끄러운 공간 위에 패인 홈을 통해서만 이동한다. 이를 우리는 길(road)이라고 말한다. 길이 아닌 공간은 위험하고 금지된 공간이 된다.
국가의 기본적인 임무 중의 하나는 지배가 미치고 있는 공간에 홈을 파는 것, 즉 매끈한 공간을 홈이 패인 공간을 위한 교통수단으로 이용하는 데 있다. 단순히 유목민을 정복할 뿐만 아니라 이주를 통제하고, 좀 더 일반적으로 “외부” 전체, 세계 공간을 가로지르는 흐름의 총체에 대해 법이 지배하는 지대가 군림하도록 하는 것은 모든 국가의 사활적인 관심사이다.
질 들뢰즈 외, 『천개의 고원』, 2003, 새물결, p.741.
하지만 유목민은 이러한 영토화의 공간에서 탈주한다. 이들은 날카롭게 파인 홈이 아닌 매끄러운 공간에서 스스로 자신의 길을 만든다.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럼 주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기 삶의 저자(author)가 되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근대의 주체 중심 철학을 비판하면서 ‘저자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저자는 절대적, 보편적, 총체적 진리를 이야기한다. 마치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모든 인간 존재와 삶을 설명할 수 있는 거대 진리를 찾아다닌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에 의하면 그런 저자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각자 자기 삶의 저자가 되는 길밖에 없다. 이를 니체는 ‘가치의 창조자’ 즉 초인이라 불렀다.
창작을 하는 자, 수수께끼를 푸는 자, 그리고 우연을 구제하는 자로서 나 저들에게 미래를 창조할 것을, 그리고 이미 존재했던 모든 것을 새로운 창조를 통하여 구제하도록 가르쳤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000, 책세상, p.327.
자기 삶의 저자이며 가치의 창조자가 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끝없는 문제 상황이 주는 불안에 마주해야 한다. 영화에서 펀은 집에서 나와 밴에서 생활하면서 용변 처리, 밴 고장, 타이어 펑크, 추위, 좁은 잠자리 등 많은 문제 상황을 맨몸으로 겪어야 했다. 정주민이었다면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사소한 것들이 전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주인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자기가 택한 길이 주는 시련을 묵묵히 견뎌내야 한다. 누군가의 보호를 받는 삶이 노예의 삶이라면, 이에 당당히 직면하는 것은 주인의 삶이다.
매번 달라지는 접속, 끊임없는 만남과 헤어짐
만남과 헤어짐에 대한 고민
영화에서 밥 웰스는 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생활을 하면서 제일 좋은 건 영원한 이별이 없다는 거예요. 여기서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난 그들에게 작별 인사는 안 해요. 늘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하죠”
유목민에게 만남은 영원하지 않다. 하나의 만남이 또 다른 만남으로 이어지지만 만남 자체가 지속되지는 않는다. 다시 길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펀 역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진다. 직장 역시 일정하지 않다. 패스트푸드점, 아마존 쇼핑몰의 포장 업무, 캠핑 공원 관리 등 돈이 필요할 때마다 가리지 않고 일을 한다. 물건의 소유 역시 마찬가지이다. 캠핑족들은 자유롭게 서로의 물건을 바꾸고 공유한다. 유목의 삶에서 영원성, 지속성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아도 마찬가지이다.
들뢰즈는 인간을 비롯된 모든 사물과 사태를 기계(machine)로 묘사한다. 이 기계는 다양한 접속을 통해 작동된다. 어떤 망에서 어디에 접속해 있는가에 따라서 기계의 속성은 달라진다. 개체들은 각자 변치 않는 단일한 속성을 지닌 단독체가 아니라 다른 것들과 어떤 식으로 연결되느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는 존재이다. 예를 들어 동일한 기계라 할지라도 전쟁에서 총, 칼 등과 연결되면 전쟁 기계가 되지만, 정원을 돌보기 위해 가위, 톱, 나무와 연결되면 정원 기계가 될 수도 있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어떤 만남, 어떤 체계 속에 있는가에 따라서 그 정체성은 달라질 수 있다. 한국인, 회사원, 아버지, 어머니, 아들 등과 같이 말이다.
유목민들은 일정한 만남과 관계, 자아에 집착하지 않는다. 관계는 수시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만남, 접속, 헤어짐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법이다. 기존의 배치에서 벗어나 울타리 바깥을 꿈꾸는 것을 들뢰즈는 탈주라고 했다. 이러한 탈주가 다시금 새로운 관계로 만들어져 영토화되면, 유목민은 또다시 탈주를 꿈꾼다. ‘OO사람’ 이전에 ‘OO되기(becoming)’라는 과정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유목민들은 광활한 대지에서 복잡하게 뻗은 나무뿌리처럼 수많은 관계망 속에서 우연히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구분과 차이를 넘어 치유와 창조의 길로
영화 〈노매드랜드〉 스틸컷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왜 사람들은 떠남을 꿈꾸는가? 그리고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왜 노매드의 삶을 택했을까? 주인공 펀은 집을 잃고 남편마저 잃은 후, 낡은 밴에 의지해 길을 떠난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서서히 내면의 아픔을 치유한다. 이 영화는 그런 펀의 모습을 담담히 보여준다. 그 외에도 아들을 잃은 슬픔을 치유하는 밥, 항암 치료를 포기하고 여행하는 스완키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여행과 떠남 속에서 자신의 아픔을 치유해간다.
모든 여행은 강렬하기에, 여행은 자신이 진화하는 장소이자 자신이 건너가는 장소인 강렬함의 문턱에서 치러지기에, 사람들은 강렬함을 통해서 여행한다.
질 들뢰즈 외, 『천개의 고원』, 2003, 새물결, p. 111.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직장에서 괴로운 일이 있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모든 것을 던지고 떠나고 싶어진다. 이러한 스트레스의 대부분은 어떤 관계와 차이에서 비롯된다. 상사와 부하의 관계, 부모의 자식의 관계, 연인 관계, 교사와 학생의 관계 등이 대표적이다.
떠남이 치유를 주는 것은 그러한 구분과 차이를 넘어서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해진 구분선을 넘어 차이를 뚫는 저항과 창조의 행위가 곧 탈주요, 떠남이다. 탈주야말로 다수자와 소수자, 부자와 빈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비장애인과 장애인, 여자와 남자, 상사와 부하, 아버지와 아들, 삶과 죽음 등의 차이를 넘어 서로의 아픔과 삶에 대해 공감하고 환대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떠남을 통해 펀이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밥이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데이브가 아들의 마음을 받아들이듯 차이에 대한 환대야말로 치유를 향한 길임을 기억해야 한다.
[철학자,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벗어남과 떠남은 우리에게 무엇을 만나게 해줄까
- 지난 글: [철학자, 영화(드라마)에 빠지다] 삶의 형식을 공유하지 못하는 외계인과 소통이 가능할까
교사
부산대학교 윤리교육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평소 아이들과 철학적 탐구공동체에 기반한 도덕 수업을 추구하였다. 울산 매곡중학교 소속으로 현재 교육정책연구소에 파견 중이다. 전국도덕교사모임과 한국철학적탐구공동체연구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2015 개정교육과정의 도덕 교과서 집필에 참여하였다. 그 외 저서로는 『바이러스 철학을 만나다』가 있으며, 공저로는 『십대들을 위한 생각연습』(공저), 『생각하는 교실 철학하는 아이들』(공저), 『도덕 수업, 윤리로 묻고, 독서로 답하다』(공저), 『도덕적 시민의 눈으로 세상 읽기』(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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