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마지막 순간에 잡힌 주파수, 이 사회가 만들어낸 52헤르츠들은 백색소음처럼 많고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52헤르츠의 주파수가 우리 일상에 떠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소리는 내고 있으나 서로가 알아듣지 못해 어긋나고 비껴가는 소외와 무관심의 52헤르츠들이.
감지할 수 없는 소리 52헤르츠
신용카드 회사 콜센터 전화 상담원으로 일하는 여성이 있다. 이름은 진아. 매달 ‘이달의 사원’으로 뽑히는 이 능력자는 친구가 딱 둘이다. 스마트폰과 TV. 길을 걸어갈 때는 물론 매일 점심시간에 일본 라멘으로 ‘혼점’을 할 때, 버스로 출퇴근을 할 때도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일을 할 때는 헤드셋, 밖에서는 이어폰을 귀에 낀 채 소라고둥처럼 자신의 세계 안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아침에는 TV를 켜 놓은 채 출근한다. 퇴근해 돌아오면 화면 속 출연자들이 진아를 맞는다. 진아는 TV를 보며 밥을 먹고 TV를 보며 잠든다.
혼자 사는 옆집 남자는 아파트 난간에 기대 담배를 피우며 진아가 복도를 지나갈 때 혼잣말처럼 말을 건다.
“성냥으로 담뱃불을 붙이면 연기가 다른 거 아세요?”
“인사 좀 해주지.”
진아는 신경 쓰이지 않는 소음처럼 그의 말들을 지나친다. 옆집 남자는 고독사한다.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감독 홍성은)의 스토리를 이루는 하나의 구성단위다. 나는 옆집 남자의 혼잣말 신호가 진아에겐 ‘52헤르츠’의 말이라고 생각했다. 감지할 수 없는 소리 ‘52헤르츠’.
‘52헤르츠’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BTS의 곡 〈Whalien52〉를 듣고 나서였다. 주파수 ‘52헤르츠’의 소리를 표현하듯 음정을 한껏 높인 보컬이 배경으로 깔리는 곡 〈Whalien52〉는 외로움의 정서를 터치하는 가사로 진한 여운을 준다. 〈Whalien52〉는 ‘52헤르츠’라는 이름의 고래(Whale)와 외계인(Alien)을 합한 말로, 외딴 섬에서 혼자 대답 없는 노래를 부르며 그 노래가 내일에라도 가닿기를 바라는 외로운 존재를 뜻한다.
‘52헤르츠’는 북태평양에 사는 것으로 추정되는 고래로, 냉전 시대 미국이 소련의 잠수함을 탐지할 때 썼던 음향 감시 체계에 포착되었다. ‘52헤르츠’는 그 고래가 내는 소리의 주파수를 그대로 따서 붙인 이름이다. 보통 고래들은 12~25헤르츠로 의사소통을 하는데, 52헤르츠로 소리를 내는 이 고래는 다른 고래들과 소통이 불가능해서 어떤 무리에도 속하지 못한 채 홀로 바닷속을 떠돈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
그림책 『52헤르츠: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 (이미지 출처: YES24)
이후 ‘52헤르츠’를 다시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고래에 관해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눈에 띈 『52헤르츠: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글·그림/마르틴 발트샤이트). 그림책이었다. 암청색 바닷속을 짙은 회색 고래 한 마리가 헤엄치는 표지 그림은 말 그대로 깊은 외로움의 느낌이었다. 내 관심의 영역으로 들어와 있던 ‘52헤르츠’와 심해의 고독이 오래된 침묵처럼 다가오는 이미지, 이끌릴 수밖에 없는 조합이었다. 온라인 서점에서 바로 책을 주문했다.
『52헤르츠: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 짙은 청색, 때로는 검은색 심해와 암회색 고래가 그림책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52헤르츠’가 아기 고래로 엄마 아빠와 함께했던 짧은 시절, 후에 늙은 군인 거품 물고기를 만날 때, 무지개색으로 ‘나 여기 있어요’ 하듯 존재감을 나타날 때 등 그림책의 부분 부분 밝은 색감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검은 회색 고래가 어두운 바닷속을 유영하는 모습이었다. 그림책의 끝, 아름다운 감동과 함께 총천연색 바닷속이 와이드 스크린처럼 펼쳐지기 전까지는.
이야기는 적군의 잠수함을 찾아내는 일을 하던 한 늙은 군인의 상상으로 시작한다. 그는 젊은 시절 음향 탐지기로 포착하곤 했던, 특이하게 높은 소리로 노래하던 주파수 ‘52헤르츠’의 고래를 기억한다. 외로운 노인이 된 군인은 ‘52헤르츠’의 어린 시절을 상상해본다. 아기 고래가 태어나 푸른 바다와 만나고, 이모 고래들을 따라 바다 표면으로 올라가 첫 숨을 쉬고, 엄마 젖을 먹으며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하지만 아기 고래의 노랫소리는 부모의 귀에 들리지 않는다. 다른 고래들이 들을 수 없는 주파수의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어느 날 고래잡이배를 피해 산호초 속에 숨었던 아기 고래는 부모와 영영 헤어지고 만다. 엄마 아빠 앞에서 부르던 노래를 쉬지 않고 부르지만, 그 소리는 누구에게도 가닿지 않는다. ‘52헤르츠’는 늠름한 소년 고래가 되어도 외로움은 여전하다. ‘52헤르츠’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것은 그 소리를 듣고 도망가는 작은 물고기들과 해파리들, 그리고 고래잡이배뿐이다.
우리 곁 ‘52헤르츠’ 혹은 ‘고등어의 눈’이 된 사람들
소외와 무관심 속의 사람들
센시티브한 사람이라면 이쯤에서 이 세상이 깊은 바닷속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듣지 못하는 소리를 내는, 그러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사라지는 ‘52헤르츠’들이 고등어의 눈처럼 점점이 흩어져 있는……(아기 고래 52헤르츠를 수면으로 데려간 이모 고래들은 밤하늘에 총총히 빛나는 별들을 보고 ‘고등어의 눈’이라고 말해준다).
우리 곁에 있으나 누구도 듣지 못할(혹은 듣지 않는) ‘52헤르츠’의 소리를 내는 사람들, 그마저도 포기한 채 고등어의 눈이 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가. 단독주택 지하에 세 들어 살다 동반 자살한 세 모녀나 이웃에게 ‘남은 밥과 김치가 있으면 문을 두드려 달라’는 쪽지를 남긴 채 아사한 어느 영화감독, 양부의 잔악한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간 정인이 등은 수많은 고등어의 눈들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런 비극이 있기까지, 아무도 듣지 못했지만 그들은 조용히 ‘52헤르츠’의 소리를 내고 있었을 테다.
이처럼 어느 날 마지막 순간에 잡힌 주파수, 이 사회가 만들어낸 ‘52헤르츠’들은 백색소음처럼 많고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52헤르츠’의 주파수가 우리 일상에 떠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소리는 내고 있으나 서로가 알아듣지 못해 어긋나고 비껴가는 소외와 무관심의 ‘52헤르츠’들이.
들리지 않아도 들리고,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52헤르츠’가 더이상 외롭지 않기를 바라는 늙은 군인은 바닷속으로 들어간다. ‘52헤르츠’는 잠수복 입은 군인을 거품 물고기라 부르며 노래를 불러준다. 서로 주파수가 달라 알아들을 수는 없다. ‘52헤르츠’는 다시 군인을 위해 노래한다. “아마 넌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거품 물고기일지도 몰라. 하지만 언젠간 너도 네 노래를 들어주는 친구를 만날 거야.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하나쯤은, 하나쯤은 꼭 있을 거야.” 그러고는 다시 깊은 바다로 사라진다. 바다는 칠흑처럼 어두워진다. 이렇게 끝나나? 싶을 때 온갖 바다 생물들이 어울려 사는 색색의 바닷속 세상이 연속된 네 페이지에 향연처럼 펼쳐진다. 그곳으로 ‘52헤르츠’가 당당하게 진입하고, 저 멀리 수면 가까이로 올라간 늙은 군인 거품 물고기가 아름다운 바닷속 세상을 내려다본다. 꿈처럼.
외로운 늙은 군인을 향한 ‘52헤르츠’의 노래는 깊은 공감의 언어로 다가온다. 진심을 가지고 누군가의 내면을 들여다볼 때 이루어지는 소통, 들리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순간을 창조하는 기적 같은 소통이다. 소통의 불가능성으로부터 가능성으로 나아가는 순간이랄까.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 『대성당』 (이미지 출처: YES24)
레이먼드 카버(미국의 소설가, 1938~1988)의 단편 소설 「대성당」은 소통과 이해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놀라운 순간을 이야기한다. ‘나’와 아내가 사는 집에 어느 날 아내의 친구인 맹인이 찾아온다.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자로서 ‘나’는 줄곧 맹인을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 취급하며 불편한 장면들을 연출한다. 그러다 소설 후반부에 ‘나’의 단단한 편견을 깨는 순간이 찾아온다. TV에서 대성당이 나올 때였다. 대성당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해달라는 맹인에게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나’는 그 생김새를 제대로 전달할 재주가 없다. 보는 자와 볼 수 없는 자가 만들어내는 소통의 가능성은 그 지점에서 열린다.
맹인은 ‘나’에게 대성당을 그려달라고 부탁한다. 두꺼운 종이 쇼핑백을 펼쳐 펜으로 눌러 새기듯 대성당을 그려나갈 때, 맹인은 ‘나’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고 네모 집과 지붕과 첨탑과 창문을 움직임으로 따라간다. 두 사람은 끈덕지게 대성당을 그려나간다. 그러다 ‘나’는 맹인이 시키는 대로 눈을 감고 대성당을 이어 그린다. 그렇게 맹인의 손가락들이 ‘나’의 ‘손가락들을 타고’ 있는 동안, ‘나’는 인생에 처음으로 느끼는 감동을 경험한다. 이해와 공감, 소통의 엑스터시다. 편견은 멋지게 깨진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말한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사실 저 혼자서 아무것도 못 하는 것 같아요.”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 포스터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로 돌아가 보자. 옆집 남자가 고독사하고 다른 남자가 이사를 온다. 죽은 사람의 재떨이를 그대로 쓰며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던 남자는 진아에게 전단지 한 장을 건넨다. ‘제사에 함께해주세요.’ 한 인간의 외로운 죽음을 함께 애도하며 의식을 치르자는 것이다.
서로 몰랐던 이웃들이 모여 치르는 제사를 진아는 열린 문을 통해 들여다본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닐 수 있음을 알게 되는 순간, ‘52헤르츠’의 소리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진아에게 찾아온다. 시간 여행을 한다는 정신이상자 고객의 전화에 “저도 데려가 주심 안 돼요?” 했던 신입사원 수진의 말, 자신이 의아해했던 ‘52헤르츠’의 신호 역시 진아는 이해했을 것이다.
진아는 억지로 떠맡겨진 신입사원 교육이 싫어 건조하고 냉랭하게 대했던, 하여 상처를 입고 회사를 그만둔 수진에게 전화를 건다. 그제야 찾아낸 주파수 ‘52헤르츠’를 붙잡고 진아가 수진에게 전하는 고백과 작별 인사는 조금 작위적이어도 상관없다. 진아 스스로 자신이 또 다른 ‘52헤르츠’였음을 아는 것만으로도 따뜻한 먹먹함 속에 있을 수 있으므로.
당신의 주파수는 몇 헤르츠인가요?
-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
박선희
2021-07-02
어느 날 마지막 순간에 잡힌 주파수, 이 사회가 만들어낸 52헤르츠들은 백색소음처럼 많고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52헤르츠의 주파수가 우리 일상에 떠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소리는 내고 있으나 서로가 알아듣지 못해 어긋나고 비껴가는 소외와 무관심의 52헤르츠들이.
감지할 수 없는 소리 52헤르츠
신용카드 회사 콜센터 전화 상담원으로 일하는 여성이 있다. 이름은 진아. 매달 ‘이달의 사원’으로 뽑히는 이 능력자는 친구가 딱 둘이다. 스마트폰과 TV. 길을 걸어갈 때는 물론 매일 점심시간에 일본 라멘으로 ‘혼점’을 할 때, 버스로 출퇴근을 할 때도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일을 할 때는 헤드셋, 밖에서는 이어폰을 귀에 낀 채 소라고둥처럼 자신의 세계 안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아침에는 TV를 켜 놓은 채 출근한다. 퇴근해 돌아오면 화면 속 출연자들이 진아를 맞는다. 진아는 TV를 보며 밥을 먹고 TV를 보며 잠든다.
혼자 사는 옆집 남자는 아파트 난간에 기대 담배를 피우며 진아가 복도를 지나갈 때 혼잣말처럼 말을 건다.
“성냥으로 담뱃불을 붙이면 연기가 다른 거 아세요?”
“인사 좀 해주지.”
진아는 신경 쓰이지 않는 소음처럼 그의 말들을 지나친다. 옆집 남자는 고독사한다.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감독 홍성은)의 스토리를 이루는 하나의 구성단위다. 나는 옆집 남자의 혼잣말 신호가 진아에겐 ‘52헤르츠’의 말이라고 생각했다. 감지할 수 없는 소리 ‘52헤르츠’.
‘52헤르츠’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BTS의 곡 〈Whalien52〉를 듣고 나서였다. 주파수 ‘52헤르츠’의 소리를 표현하듯 음정을 한껏 높인 보컬이 배경으로 깔리는 곡 〈Whalien52〉는 외로움의 정서를 터치하는 가사로 진한 여운을 준다. 〈Whalien52〉는 ‘52헤르츠’라는 이름의 고래(Whale)와 외계인(Alien)을 합한 말로, 외딴 섬에서 혼자 대답 없는 노래를 부르며 그 노래가 내일에라도 가닿기를 바라는 외로운 존재를 뜻한다.
‘52헤르츠’는 북태평양에 사는 것으로 추정되는 고래로, 냉전 시대 미국이 소련의 잠수함을 탐지할 때 썼던 음향 감시 체계에 포착되었다. ‘52헤르츠’는 그 고래가 내는 소리의 주파수를 그대로 따서 붙인 이름이다. 보통 고래들은 12~25헤르츠로 의사소통을 하는데, 52헤르츠로 소리를 내는 이 고래는 다른 고래들과 소통이 불가능해서 어떤 무리에도 속하지 못한 채 홀로 바닷속을 떠돈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
그림책 『52헤르츠: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 (이미지 출처: YES24)
이후 ‘52헤르츠’를 다시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고래에 관해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눈에 띈 『52헤르츠: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글·그림/마르틴 발트샤이트). 그림책이었다. 암청색 바닷속을 짙은 회색 고래 한 마리가 헤엄치는 표지 그림은 말 그대로 깊은 외로움의 느낌이었다. 내 관심의 영역으로 들어와 있던 ‘52헤르츠’와 심해의 고독이 오래된 침묵처럼 다가오는 이미지, 이끌릴 수밖에 없는 조합이었다. 온라인 서점에서 바로 책을 주문했다.
『52헤르츠: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 짙은 청색, 때로는 검은색 심해와 암회색 고래가 그림책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52헤르츠’가 아기 고래로 엄마 아빠와 함께했던 짧은 시절, 후에 늙은 군인 거품 물고기를 만날 때, 무지개색으로 ‘나 여기 있어요’ 하듯 존재감을 나타날 때 등 그림책의 부분 부분 밝은 색감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검은 회색 고래가 어두운 바닷속을 유영하는 모습이었다. 그림책의 끝, 아름다운 감동과 함께 총천연색 바닷속이 와이드 스크린처럼 펼쳐지기 전까지는.
이야기는 적군의 잠수함을 찾아내는 일을 하던 한 늙은 군인의 상상으로 시작한다. 그는 젊은 시절 음향 탐지기로 포착하곤 했던, 특이하게 높은 소리로 노래하던 주파수 ‘52헤르츠’의 고래를 기억한다. 외로운 노인이 된 군인은 ‘52헤르츠’의 어린 시절을 상상해본다. 아기 고래가 태어나 푸른 바다와 만나고, 이모 고래들을 따라 바다 표면으로 올라가 첫 숨을 쉬고, 엄마 젖을 먹으며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하지만 아기 고래의 노랫소리는 부모의 귀에 들리지 않는다. 다른 고래들이 들을 수 없는 주파수의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어느 날 고래잡이배를 피해 산호초 속에 숨었던 아기 고래는 부모와 영영 헤어지고 만다. 엄마 아빠 앞에서 부르던 노래를 쉬지 않고 부르지만, 그 소리는 누구에게도 가닿지 않는다. ‘52헤르츠’는 늠름한 소년 고래가 되어도 외로움은 여전하다. ‘52헤르츠’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것은 그 소리를 듣고 도망가는 작은 물고기들과 해파리들, 그리고 고래잡이배뿐이다.
우리 곁 ‘52헤르츠’ 혹은 ‘고등어의 눈’이 된 사람들
소외와 무관심 속의 사람들
센시티브한 사람이라면 이쯤에서 이 세상이 깊은 바닷속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듣지 못하는 소리를 내는, 그러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사라지는 ‘52헤르츠’들이 고등어의 눈처럼 점점이 흩어져 있는……(아기 고래 52헤르츠를 수면으로 데려간 이모 고래들은 밤하늘에 총총히 빛나는 별들을 보고 ‘고등어의 눈’이라고 말해준다).
우리 곁에 있으나 누구도 듣지 못할(혹은 듣지 않는) ‘52헤르츠’의 소리를 내는 사람들, 그마저도 포기한 채 고등어의 눈이 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가. 단독주택 지하에 세 들어 살다 동반 자살한 세 모녀나 이웃에게 ‘남은 밥과 김치가 있으면 문을 두드려 달라’는 쪽지를 남긴 채 아사한 어느 영화감독, 양부의 잔악한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간 정인이 등은 수많은 고등어의 눈들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런 비극이 있기까지, 아무도 듣지 못했지만 그들은 조용히 ‘52헤르츠’의 소리를 내고 있었을 테다.
이처럼 어느 날 마지막 순간에 잡힌 주파수, 이 사회가 만들어낸 ‘52헤르츠’들은 백색소음처럼 많고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52헤르츠’의 주파수가 우리 일상에 떠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소리는 내고 있으나 서로가 알아듣지 못해 어긋나고 비껴가는 소외와 무관심의 ‘52헤르츠’들이.
들리지 않아도 들리고,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52헤르츠’가 더이상 외롭지 않기를 바라는 늙은 군인은 바닷속으로 들어간다. ‘52헤르츠’는 잠수복 입은 군인을 거품 물고기라 부르며 노래를 불러준다. 서로 주파수가 달라 알아들을 수는 없다. ‘52헤르츠’는 다시 군인을 위해 노래한다. “아마 넌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거품 물고기일지도 몰라. 하지만 언젠간 너도 네 노래를 들어주는 친구를 만날 거야.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하나쯤은, 하나쯤은 꼭 있을 거야.” 그러고는 다시 깊은 바다로 사라진다. 바다는 칠흑처럼 어두워진다. 이렇게 끝나나? 싶을 때 온갖 바다 생물들이 어울려 사는 색색의 바닷속 세상이 연속된 네 페이지에 향연처럼 펼쳐진다. 그곳으로 ‘52헤르츠’가 당당하게 진입하고, 저 멀리 수면 가까이로 올라간 늙은 군인 거품 물고기가 아름다운 바닷속 세상을 내려다본다. 꿈처럼.
외로운 늙은 군인을 향한 ‘52헤르츠’의 노래는 깊은 공감의 언어로 다가온다. 진심을 가지고 누군가의 내면을 들여다볼 때 이루어지는 소통, 들리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순간을 창조하는 기적 같은 소통이다. 소통의 불가능성으로부터 가능성으로 나아가는 순간이랄까.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 『대성당』 (이미지 출처: YES24)
레이먼드 카버(미국의 소설가, 1938~1988)의 단편 소설 「대성당」은 소통과 이해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놀라운 순간을 이야기한다. ‘나’와 아내가 사는 집에 어느 날 아내의 친구인 맹인이 찾아온다.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자로서 ‘나’는 줄곧 맹인을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 취급하며 불편한 장면들을 연출한다. 그러다 소설 후반부에 ‘나’의 단단한 편견을 깨는 순간이 찾아온다. TV에서 대성당이 나올 때였다. 대성당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해달라는 맹인에게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나’는 그 생김새를 제대로 전달할 재주가 없다. 보는 자와 볼 수 없는 자가 만들어내는 소통의 가능성은 그 지점에서 열린다.
맹인은 ‘나’에게 대성당을 그려달라고 부탁한다. 두꺼운 종이 쇼핑백을 펼쳐 펜으로 눌러 새기듯 대성당을 그려나갈 때, 맹인은 ‘나’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고 네모 집과 지붕과 첨탑과 창문을 움직임으로 따라간다. 두 사람은 끈덕지게 대성당을 그려나간다. 그러다 ‘나’는 맹인이 시키는 대로 눈을 감고 대성당을 이어 그린다. 그렇게 맹인의 손가락들이 ‘나’의 ‘손가락들을 타고’ 있는 동안, ‘나’는 인생에 처음으로 느끼는 감동을 경험한다. 이해와 공감, 소통의 엑스터시다. 편견은 멋지게 깨진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말한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사실 저 혼자서 아무것도 못 하는 것 같아요.”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 포스터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로 돌아가 보자. 옆집 남자가 고독사하고 다른 남자가 이사를 온다. 죽은 사람의 재떨이를 그대로 쓰며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던 남자는 진아에게 전단지 한 장을 건넨다. ‘제사에 함께해주세요.’ 한 인간의 외로운 죽음을 함께 애도하며 의식을 치르자는 것이다.
서로 몰랐던 이웃들이 모여 치르는 제사를 진아는 열린 문을 통해 들여다본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닐 수 있음을 알게 되는 순간, ‘52헤르츠’의 소리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진아에게 찾아온다. 시간 여행을 한다는 정신이상자 고객의 전화에 “저도 데려가 주심 안 돼요?” 했던 신입사원 수진의 말, 자신이 의아해했던 ‘52헤르츠’의 신호 역시 진아는 이해했을 것이다.
진아는 억지로 떠맡겨진 신입사원 교육이 싫어 건조하고 냉랭하게 대했던, 하여 상처를 입고 회사를 그만둔 수진에게 전화를 건다. 그제야 찾아낸 주파수 ‘52헤르츠’를 붙잡고 진아가 수진에게 전하는 고백과 작별 인사는 조금 작위적이어도 상관없다. 진아 스스로 자신이 또 다른 ‘52헤르츠’였음을 아는 것만으로도 따뜻한 먹먹함 속에 있을 수 있으므로.
“사실 저 혼자서 아무것도 못 하는 것 같아요. 그런 척하는 거지.”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당신의 주파수는 몇 헤르츠인가요?
- 지난 글: [서툰 인생을 위한 변명] 꽃들에게는 희망이 필요하다
작가
2002년 소설가라는 이름을 얻었다. 펴낸 책으로는 소설집 『미미』, 장편 소설 『베이비 박스』, 『고양이를 사랑하는 법』, 『그놈』, 『도미노 구라파식 이층집』, 『줄리엣 클럽』, 『파랑 치타가 달려간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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