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쓰기 위한 장소를 찾아다닐 때 운전하던 차 안에서는 강산에의 〈너는 할 수 있어〉를 반복해서 들었다. 지금도 그 노래를 들으면 그 시기의 간절함과 불안이 떠오른다. 두려움과 체념과 갈망 같은 동시다발적인 감정이 표현돼 있는 슈프림팀의 〈나만 모르게〉는 글이 안 써질 때 책상에 앉아 멍하니 듣던 노래였다. 나의 복잡한 마음을 누군가 알아주는 듯해서 위안을 얻곤 했다.
팬데믹 시대의 술자리에 소환된 그 노래들
가수 박인희 〈내 사랑아〉가 수록된 ‘세월아’ 앨범 (이미지 출처: 지니뮤직)
남편과 나는 오래된 술친구이다. 팬데믹 시대에 그것은 다행이기도 하고 또 재앙(?)이기도 하다. 술친구가 집안에서 항시 대기하고 있는 건 환영이지만 너무 자주 마시기 때문이다. 며칠 전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화면에 청바지 차림의 여자 출연자가 등장하자 갑자기 내 입에서 노래 한 구절이 흘러나왔다.
‘하늘색 청바지 입고 가면 예쁘다고 손잡던 그이.’
고등학생 시절 즐겨 듣던 박인희의 〈내 사랑아〉였다. 머릿속에 어떤 단어가 떠오르면 거기에서 노래 가사를 연상하고, 온종일 같은 노래를 흥얼거리는 건 나의 오랜 버릇이었다.
가수 존 레논(John Lennon) (이미지 출처: 지니뮤직)
그런데 내 노래를 들은 남편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거 존 레논의 〈Oh My Love〉잖아. 왜 엉뚱한 가사를 붙여?” 남편은 중학생 때부터 팝 음악에 심취해 한국 가요를 거의 듣지 않았다. 그래서 그 노래가 번안곡으로 불렸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모양이었다. 나는 당장 인터넷 검색으로 ‘내 사랑아’를 찾아 들려주었다. 박인희의 담백한 목소리에 실린 순진한 가사가 없으면 그 노래의 절제된 아름다움이 결코 살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그러다가 내친김에 그 시절 좋아했던 가요들을 검색해 듣기 시작했다.
‘어젯밤 꿈속에서 보랏빛 새 한 마리 밤이 새도록 쫓아 헤매다 잠에서 깨어났지요. 나는 괴롭힐 사람 없는 조용한 여자랍니다’ 는 이연실의 〈조용한 여자〉이다.
‘어두운 비 내려오면 처마 밑에 한 아이 울고 서 있네. 그 맑은 두 눈에 눈물 고이면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이 노래는 현경과 영애의 〈아름다운 사람〉.
‘꽃잎은 바람결에 떨어져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데 떠나간 그 사람은 지금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는 전영의 〈어디쯤 가고 있을까〉의 한 구절이다.
가요에는 그 시절 대중들의 사회적 정서가
하나같이 담담한 듯 쓸쓸한 노래들이었다. 그런 노래들로 나는 들끓는 혼란과 불안을 잠재우며 청소년기를 통과했던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런 정서는 70년대 독재 정권 시절 한국 가요가 취할 수 있는 반항과 도피의 은유이기도 했다. 가요에는 그 시절 대중의 사회적 정서가 담기기 마련이다. 군사 정권이 끝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섰던 90년대 노래에는 개성적인 스타일과 자기주장이 담기기 시작했고 그것은 밀레니엄 시대가 다가오면서 한층 다양해졌다.
필자의 장편 소설 『소년을 위로해줘』 (이미지 출처: YES24)
내가 2010년에 쓴 장편 소설 『소년을 위로해줘』는 같은 제목의 힙합 가요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다. 남자다움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에 상처받는 섬세한 소년의 마음을 그린 노래이다. 그 소설을 준비하고 쓰는 동안 나는 한국의 힙합을 많이 들었다. 소설에 인용하기도 했던 〈Me vs People〉이라는 노래에서 가수 UMC는 기성세대를 향해 이렇게 외친다.
제발 걱정한다면서 조언하지 마 충고하지 마
이래라 저래라 한마디도 하지 마
잘해주지 마 누가 잘해달래
나에게 조언 충고 명령했던 모든 사람들
‘대세를 따르거라 남들 하는 대로 반만 가라
그건 무능력한 너한테는 아주 잘 어울린다’
랩퍼 UMC UW (이미지 출처: 지니뮤직)
나는 이처럼 자신만의 서사를 구현하고 강하게 표현하는 힙합 장르에 한껏 매료되었다. 자기 고백이나 비판, 고발이 실린 그 가사들 속에는 지금까지 내가 알던 문장의 경직성에서 벗어난 자유로움과 패기가 있었다. 그 덕분에 문법에 얽매이지 않는 언어와 감정 표현에 대해 유연해졌고 기성세대로서의 반성문을 한 권의 소설로 쓸 수 있었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데에도 조금 더 당당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좋아하는 노래엔 그 사람의 삶의 궤적이
지난날 좋아했던 노래들을 들으면 그 시절 나의 인생의 풍경도 함께 소환된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내 속마음이 가사 속에 담겨 있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좋아하는 노래의 흐름을 보면 그 사람 삶의 궤적이 보인다. 그것 또한 일종의 자서전이 될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웃음 뒤로 보이는 네게 나는 화가 났을 뿐, 싫었던 건 아냐. 내가 느끼는 그대로 표현 못 한 것뿐.’
강수지의 〈내 마음 알겠니〉 중에서
‘왜 내가 아는 저 많은 사람은 사랑의 과거를 잊는 걸까. 좋았었던 일도 많았었는데 감추려 하는 이유는 뭘까. 난 항상 내 과거를 밝혀왔는데 그게 싫어 떠난 사람도 있어.’
주주클럽의 〈나는 나〉 중에서
이 노래들은 내가 한때 노래방에서 자주 부르던 가요이다. 이런 노래 가사에 공감하던 시절 나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소설을 쓰기 위한 장소를 찾아다닐 때 운전하던 차 안에서는 강산에의 〈너는 할 수 있어〉를 반복해서 들었다. 지금도 그 노래를 들으면 그 시기의 간절함과 불안이 떠오른다. 두려움과 체념과 갈망 같은 동시다발적인 감정이 표현돼 있는 슈프림팀의 〈나만 모르게〉는 글이 안 써질 때 책상에 앉아 멍하니 듣던 노래였다. 나의 복잡한 마음을 누군가 알아주는 듯해서 위안을 얻곤 했다. 또 선우정아의 〈고양이〉를 들으면 언젠가 술집 이 층에서 그 노래에 맞춰 춤췄던 친구들이 그리워진다.
홀로 추웠던 생일, 나를 안심시켰던 노래
가수 이이언(좌)과 〈나의 기념일〉이 수록된 ‘GUILT-FREE’ 앨범(우) (이미지 출처: 지니뮤직)
나에게는 생일을 떠오르게 만드는 특별한 노래가 있다. 이이언의 〈나의 기념일〉이다.
매일매일 지나가는 하루하루 속에
오늘이 특별할 리는 없겠지만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오래전 어느 해
바로 이날에 내 모든 게 시작되었다고
매일 매일 하루씩 사라진 날들 이제
거울 속에 담긴 내 모습을 비추고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오래전 어느 해
첫 번째 파티와 첫 번째 기념일의 기념일
축하해요 고마워요 나에게 내가 말해요
나의 가장 아름다운 날들은 이미 지났어도
나를 웃게 나를 울게 하는 모든 것들과
잘 버티어준 날 기념하는 나의 기념일
스페인 말라가 해변
이 노래를 들은 것은 스페인 말라가에서였다. 작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 그곳에서 석 달을 보내는 동안 혼자 맞게 된 생일. 평소에는 생일이 와도 ‘오늘이 특별할 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그날은 다소 감상적이 되었던지 춥고 외로웠다. 실제로도 나는 방안에서 후드가 달린 파카를 뒤집어쓰고 털양말을 겹쳐 신고 이불 속에서 떨고 있었다. 코스타 델 솔(태양의 해변)을 끼고 있는 도시라서 10월 말까지 바다 수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실내에는 난방 장치가 없어 추웠던 것이다. 거기에다 내 생일이라는 시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장소라는 공간, 이 두 가지가 나를 더욱 춥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메일로 보내온 〈나의 기념일〉을 재생하는 순간 나는 불현듯 시공간에 얽매이지 않는 담담한 마음이 되었다.
‘매일 매일 하루씩 사라진 날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시를 떠오르게 했다.
‘첫 번째 파티와 첫 번째 기념일의 기념일’에서 느껴지는 일상의 반복과 시간의 무심한 흐름.
‘나의 가장 아름다운 날들은 이미 지났어도’ 우리는 잘 버티어준 스스로를 기념하며 그렇게 삶을 이어가는 것이다.
현실적이되 따뜻한 가사였고 담백하지만 마음을 흔드는 운율과 리듬이었다. 그 노래를 듣고 있으니 내 인생이 누군가에게 충분히 이해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웃게’ 하는 사람뿐 아니라 ‘나를 울게 하는’ 사람들까지 기억하며 함께 흘러가는 것이 삶이라는 것. 그 생각이 나를 조용히 안심시켰다. 마치 혼자 생일을 맞거나(그런 사람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생일 파티가 끝나고 혼자 남겨진 누군가와 함께 이 노래를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BTS가 초대하는 따뜻하고 쾌적한 세계
가수 BTS(좌)와 신규 앨범 〈Butter〉(우) (이미지 출처: 지니뮤직)
남편과 술잔을 기울이는 저녁 시간은 지친 하루의 마지막 시간이기도 하다. 하루분의 생활, 관계, 그리고 일과 문장에도 지쳐 더이상 심신에 아무것도 입력할 수 없을 때이다. 그렇다고 잠을 잘 만큼 기력이 바닥난 것은 아니다. 나를 각성시키는 외부 세계로부터 벗어나서 무장 해제의 방임 상태를 즐길 만한 기력은 남아 있다. 그런 기분으로 요즘 우리는 BTS의 노래를 자주 듣는다. 〈다이너마이트〉는 유쾌하고 신곡 〈버터〉도 산뜻하다. 대중의 감각을 공유하는 건 따뜻한 세계로의 진입이다. 편리하고 안전하며 쾌적하다. ‘국뽕’은 흐뭇한 덤이다. 때로 그 정서적 실감은 마치 한국 소설이 그렇듯이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상기시키지만 동시에 부인할 수 없는 애정의 연원이기도 하다. 다름 아닌 내가 속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소설가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타인에게 말걸기』,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중국식 룰렛』 등과 장편 소설 『새의 선물』, 『소년을 위로해줘』, 『태연한 인생』, 『빛의 과거』 등이 있음. 이상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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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이 그때의 나를 닮은 노래들
- 당신은 어떤‘가요’ -
은희경
2021-06-21
소설을 쓰기 위한 장소를 찾아다닐 때 운전하던 차 안에서는 강산에의 〈너는 할 수 있어〉를 반복해서 들었다. 지금도 그 노래를 들으면 그 시기의 간절함과 불안이 떠오른다. 두려움과 체념과 갈망 같은 동시다발적인 감정이 표현돼 있는 슈프림팀의 〈나만 모르게〉는 글이 안 써질 때 책상에 앉아 멍하니 듣던 노래였다. 나의 복잡한 마음을 누군가 알아주는 듯해서 위안을 얻곤 했다.
팬데믹 시대의 술자리에 소환된 그 노래들
가수 박인희 〈내 사랑아〉가 수록된 ‘세월아’ 앨범 (이미지 출처: 지니뮤직)
남편과 나는 오래된 술친구이다. 팬데믹 시대에 그것은 다행이기도 하고 또 재앙(?)이기도 하다. 술친구가 집안에서 항시 대기하고 있는 건 환영이지만 너무 자주 마시기 때문이다. 며칠 전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화면에 청바지 차림의 여자 출연자가 등장하자 갑자기 내 입에서 노래 한 구절이 흘러나왔다.
‘하늘색 청바지 입고 가면 예쁘다고 손잡던 그이.’
고등학생 시절 즐겨 듣던 박인희의 〈내 사랑아〉였다. 머릿속에 어떤 단어가 떠오르면 거기에서 노래 가사를 연상하고, 온종일 같은 노래를 흥얼거리는 건 나의 오랜 버릇이었다.
가수 존 레논(John Lennon) (이미지 출처: 지니뮤직)
그런데 내 노래를 들은 남편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거 존 레논의 〈Oh My Love〉잖아. 왜 엉뚱한 가사를 붙여?” 남편은 중학생 때부터 팝 음악에 심취해 한국 가요를 거의 듣지 않았다. 그래서 그 노래가 번안곡으로 불렸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모양이었다. 나는 당장 인터넷 검색으로 ‘내 사랑아’를 찾아 들려주었다. 박인희의 담백한 목소리에 실린 순진한 가사가 없으면 그 노래의 절제된 아름다움이 결코 살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그러다가 내친김에 그 시절 좋아했던 가요들을 검색해 듣기 시작했다.
‘어젯밤 꿈속에서 보랏빛 새 한 마리 밤이 새도록 쫓아 헤매다 잠에서 깨어났지요. 나는 괴롭힐 사람 없는 조용한 여자랍니다’ 는 이연실의 〈조용한 여자〉이다.
‘어두운 비 내려오면 처마 밑에 한 아이 울고 서 있네. 그 맑은 두 눈에 눈물 고이면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이 노래는 현경과 영애의 〈아름다운 사람〉.
‘꽃잎은 바람결에 떨어져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데 떠나간 그 사람은 지금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는 전영의 〈어디쯤 가고 있을까〉의 한 구절이다.
가요에는 그 시절 대중들의 사회적 정서가
하나같이 담담한 듯 쓸쓸한 노래들이었다. 그런 노래들로 나는 들끓는 혼란과 불안을 잠재우며 청소년기를 통과했던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런 정서는 70년대 독재 정권 시절 한국 가요가 취할 수 있는 반항과 도피의 은유이기도 했다. 가요에는 그 시절 대중의 사회적 정서가 담기기 마련이다. 군사 정권이 끝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섰던 90년대 노래에는 개성적인 스타일과 자기주장이 담기기 시작했고 그것은 밀레니엄 시대가 다가오면서 한층 다양해졌다.
필자의 장편 소설 『소년을 위로해줘』 (이미지 출처: YES24)
내가 2010년에 쓴 장편 소설 『소년을 위로해줘』는 같은 제목의 힙합 가요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다. 남자다움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에 상처받는 섬세한 소년의 마음을 그린 노래이다. 그 소설을 준비하고 쓰는 동안 나는 한국의 힙합을 많이 들었다. 소설에 인용하기도 했던 〈Me vs People〉이라는 노래에서 가수 UMC는 기성세대를 향해 이렇게 외친다.
제발 걱정한다면서 조언하지 마 충고하지 마
이래라 저래라 한마디도 하지 마
잘해주지 마 누가 잘해달래
나에게 조언 충고 명령했던 모든 사람들
‘대세를 따르거라 남들 하는 대로 반만 가라
그건 무능력한 너한테는 아주 잘 어울린다’
랩퍼 UMC UW (이미지 출처: 지니뮤직)
나는 이처럼 자신만의 서사를 구현하고 강하게 표현하는 힙합 장르에 한껏 매료되었다. 자기 고백이나 비판, 고발이 실린 그 가사들 속에는 지금까지 내가 알던 문장의 경직성에서 벗어난 자유로움과 패기가 있었다. 그 덕분에 문법에 얽매이지 않는 언어와 감정 표현에 대해 유연해졌고 기성세대로서의 반성문을 한 권의 소설로 쓸 수 있었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데에도 조금 더 당당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좋아하는 노래엔 그 사람의 삶의 궤적이
지난날 좋아했던 노래들을 들으면 그 시절 나의 인생의 풍경도 함께 소환된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내 속마음이 가사 속에 담겨 있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좋아하는 노래의 흐름을 보면 그 사람 삶의 궤적이 보인다. 그것 또한 일종의 자서전이 될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웃음 뒤로 보이는 네게 나는 화가 났을 뿐, 싫었던 건 아냐. 내가 느끼는 그대로 표현 못 한 것뿐.’
강수지의 〈내 마음 알겠니〉 중에서
‘왜 내가 아는 저 많은 사람은 사랑의 과거를 잊는 걸까. 좋았었던 일도 많았었는데 감추려 하는 이유는 뭘까. 난 항상 내 과거를 밝혀왔는데 그게 싫어 떠난 사람도 있어.’
주주클럽의 〈나는 나〉 중에서
이 노래들은 내가 한때 노래방에서 자주 부르던 가요이다. 이런 노래 가사에 공감하던 시절 나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소설을 쓰기 위한 장소를 찾아다닐 때 운전하던 차 안에서는 강산에의 〈너는 할 수 있어〉를 반복해서 들었다. 지금도 그 노래를 들으면 그 시기의 간절함과 불안이 떠오른다. 두려움과 체념과 갈망 같은 동시다발적인 감정이 표현돼 있는 슈프림팀의 〈나만 모르게〉는 글이 안 써질 때 책상에 앉아 멍하니 듣던 노래였다. 나의 복잡한 마음을 누군가 알아주는 듯해서 위안을 얻곤 했다. 또 선우정아의 〈고양이〉를 들으면 언젠가 술집 이 층에서 그 노래에 맞춰 춤췄던 친구들이 그리워진다.
홀로 추웠던 생일, 나를 안심시켰던 노래
가수 이이언(좌)과 〈나의 기념일〉이 수록된 ‘GUILT-FREE’ 앨범(우) (이미지 출처: 지니뮤직)
나에게는 생일을 떠오르게 만드는 특별한 노래가 있다. 이이언의 〈나의 기념일〉이다.
매일매일 지나가는 하루하루 속에
오늘이 특별할 리는 없겠지만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오래전 어느 해
바로 이날에 내 모든 게 시작되었다고
매일 매일 하루씩 사라진 날들 이제
거울 속에 담긴 내 모습을 비추고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오래전 어느 해
첫 번째 파티와 첫 번째 기념일의 기념일
축하해요 고마워요 나에게 내가 말해요
나의 가장 아름다운 날들은 이미 지났어도
나를 웃게 나를 울게 하는 모든 것들과
잘 버티어준 날 기념하는 나의 기념일
스페인 말라가 해변
이 노래를 들은 것은 스페인 말라가에서였다. 작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 그곳에서 석 달을 보내는 동안 혼자 맞게 된 생일. 평소에는 생일이 와도 ‘오늘이 특별할 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그날은 다소 감상적이 되었던지 춥고 외로웠다. 실제로도 나는 방안에서 후드가 달린 파카를 뒤집어쓰고 털양말을 겹쳐 신고 이불 속에서 떨고 있었다. 코스타 델 솔(태양의 해변)을 끼고 있는 도시라서 10월 말까지 바다 수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실내에는 난방 장치가 없어 추웠던 것이다. 거기에다 내 생일이라는 시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장소라는 공간, 이 두 가지가 나를 더욱 춥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메일로 보내온 〈나의 기념일〉을 재생하는 순간 나는 불현듯 시공간에 얽매이지 않는 담담한 마음이 되었다.
‘매일 매일 하루씩 사라진 날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시를 떠오르게 했다.
‘첫 번째 파티와 첫 번째 기념일의 기념일’에서 느껴지는 일상의 반복과 시간의 무심한 흐름.
‘나의 가장 아름다운 날들은 이미 지났어도’ 우리는 잘 버티어준 스스로를 기념하며 그렇게 삶을 이어가는 것이다.
현실적이되 따뜻한 가사였고 담백하지만 마음을 흔드는 운율과 리듬이었다. 그 노래를 듣고 있으니 내 인생이 누군가에게 충분히 이해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웃게’ 하는 사람뿐 아니라 ‘나를 울게 하는’ 사람들까지 기억하며 함께 흘러가는 것이 삶이라는 것. 그 생각이 나를 조용히 안심시켰다. 마치 혼자 생일을 맞거나(그런 사람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생일 파티가 끝나고 혼자 남겨진 누군가와 함께 이 노래를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BTS가 초대하는 따뜻하고 쾌적한 세계
가수 BTS(좌)와 신규 앨범 〈Butter〉(우) (이미지 출처: 지니뮤직)
남편과 술잔을 기울이는 저녁 시간은 지친 하루의 마지막 시간이기도 하다. 하루분의 생활, 관계, 그리고 일과 문장에도 지쳐 더이상 심신에 아무것도 입력할 수 없을 때이다. 그렇다고 잠을 잘 만큼 기력이 바닥난 것은 아니다. 나를 각성시키는 외부 세계로부터 벗어나서 무장 해제의 방임 상태를 즐길 만한 기력은 남아 있다. 그런 기분으로 요즘 우리는 BTS의 노래를 자주 듣는다. 〈다이너마이트〉는 유쾌하고 신곡 〈버터〉도 산뜻하다. 대중의 감각을 공유하는 건 따뜻한 세계로의 진입이다. 편리하고 안전하며 쾌적하다. ‘국뽕’은 흐뭇한 덤이다. 때로 그 정서적 실감은 마치 한국 소설이 그렇듯이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상기시키지만 동시에 부인할 수 없는 애정의 연원이기도 하다. 다름 아닌 내가 속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했던 것들은 어쩔 수 없이 나를 담고 있다.
[당신은 어떤‘가요’] 어쩔 수 없이 그때의 나를 닮은 노래들
- 지난 글: [당신은 어떤‘가요’] 나는 언제나 열아홉 살!
소설가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타인에게 말걸기』,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중국식 룰렛』 등과 장편 소설 『새의 선물』, 『소년을 위로해줘』, 『태연한 인생』, 『빛의 과거』 등이 있음. 이상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 수상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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