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트하우스>에서 흥미로운 건 등장인물 모두가 강렬한 욕망을 가진 주체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인물들은 내밀한 욕망까지도 숨김없이 진열하고 때로는 자신의 욕망 그 자체에 도취된다. 마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의심할 바 없는 시대의 미덕이라는 듯이…….
드라마 <펜트하우스> 포스터 (이미지 출처: SBS)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바이러스와의 싸움이 계속되고, 자동화된 인공 지능 서비스가 노동에 대한 의지를 떨어뜨리는 시절이다. 100세 시대가 열렸다고 환호하지만, 가상 화폐와 주식 열풍에 동승하는 것 말고는 그 긴긴 시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다. 딱히 비관론자가 아니더라도 2021년의 삶을 건조하게 되뇌다 보면, 대체 어떤 부분에서 미소를 지어야 할지 난감해지곤 한다.
이 와중에도 드라마라는 이야기 형태가 전 세계적으로 각광받고 있는 현상은 인간 본성과 이야기 간에 관련이 있거나 현실에 있어 이야기 이상으로 즐거움을 줄 만한 대상이 없음을 짐작게 한다. 최근 인기를 모은 한국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넷플릭스의 드라마 <킹덤>이 이야기뿐 아니라 패션까지 글로벌한 화제로 끌어올렸고, tvN의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이 일본에서 ‘제3의 한류’ 효과를 발휘했다고 평가받는 등 대외적인 인정도 강화되는 모양새다. 한국 사회 내부로 눈을 돌리더라도 일상에서 손꼽을 만한 재미가 사라진 요즘, 이야기를 소비하며 매일의 고단함을 덜어내는 광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 중심에 드라마 <펜트하우스>가 있다.
지난해 10월 첫 방송을 시작해 두 번의 시즌을 마무리하고 오는 6월 세 번째 시즌을 앞두고 있는 <펜트하우스>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콘텐츠 무한 경쟁 시대에 최고 시청률 30%를 돌파해 앞으로의 흥행이 기대된다는 점에서, 또한 지상파 방송에서는 드물게 시즌제 드라마로 제작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펜트하우스>를 바라보는 평단의 시각은 다양하지만, 이 드라마가 동시대에 소급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 하나만큼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과장을 조금 더 보태자면 <펜트하우스>의 서사가 소비되는 맥락에서 오늘날의 진정성을 엿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날 것 그대로의 욕망을 긍정하고 전시하며 끊임없이 투쟁하는, 바로 그곳에서 말이다.
막장의 장르화
<펜트하우스>가 변화시킨 감각 중 하나는 흔히 드라마의 설정이나 평가를 냉소할 때 사용되던 ‘막장’이란 표현을 일종의 장르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는 데 있다. 사전적으로 ‘마지막 장’ 또는 ‘특정한 상황의 마지막 장에 다다른 사람’을 이르는 말인 ‘막장’은 2000년대 이후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설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드라마에 관한 부정적인 수식어로 사용되곤 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새로운 막장의 요소가 등장할수록 대중성이 뒤따라오는 아이러니한 현실이 함께 자리해왔다. ‘욕하면서 보는’, 말하자면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 끌린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쾌감을 느끼는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의 원형으로 막장 드라마가 생명력을 이어올 수 있었던 셈이다.
그런 점에서 방송을 거듭할수록 <펜트하우스>식 ‘막장’을 일종의 장르로 받아들이자는 대중의 목소리가 커졌다는 사실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이는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의 속물 근성이나 치정과 같은 관계성을 소비하는 데 있어 죄책감을 덜어내고 쾌감만을 누리고 싶다는 선언일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드라마 내에서의 설정이 현실적이냐 개연성이 존재하냐의 문제를 따지는 것이 픽션의 소비에서 더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판단의 결과일 수도 있다. 좀 더 거시적으로 볼 때, 기술·환경·경제적 위기가 일상적으로 출몰하는 이 시기에 막장 드라마의 설정이 그다지 비현실적이거나 부도덕하게 다가가지 않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욕망의 진열대
<펜트하우스>에 등장하는 세 명의 여성 캐릭터 (이미지 출처: SBS)
<펜트하우스>에서 흥미로운 건 등장인물 모두가 강렬한 욕망을 가진 주체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인물들은 내밀한 욕망까지도 숨김없이 진열하고 때로는 자신의 욕망 그 자체에 도취된다. 마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의심할 바 없는 시대의 미덕이라는 듯이 말이다. 그 중심에는 모성을 앞세워 삶을 재조직하는 세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오윤희와 심수련, 천서진이 보여주는 모성은 자식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까지 포함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극단을 내포하는데, 바로 그 욕망화된 모성 때문에 서로를 파괴하기도 하고 함께 공조하기도 한다.
이들을 포함해 <펜트하우스>의 등장인물들이 보이는 공통점은 자신의 욕망을 타인의 욕망 안에 포개어 넣거나 자신의 욕망을 반복적으로 복기하며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언뜻 욕망을 통해 주술적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 욕망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그 주술 효과가 자신만을 향하고 있지 않음을 발견하면 공동체는 언제든지 깨질 준비가 되어 있다.
선악 구도의 붕괴… 상대적 징벌
죽은 줄 알았던 인물이 살아 돌아와 이야기의 반전을 꿈꾸는 <펜트하우스> (이미지 출처: SBS)
전통적인 권선징악의 서사에서 선은 보상을 받고 악은 징벌의 대상이 된다. 이때 악을 벌하는 주체가 반드시 선은 아니지만, 선과 악의 대비를 통해 선이 악을 이기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다크 나이트>와 같은 할리우드 히어로물을 시작으로 두드러진 근래의 경향은 선악의 구도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인데, <펜트하우스> 또한 예외가 아니다. 단순히 악인에게 면죄부를 제공한다기보다 욕망하는 자 중 그 누구도 절대적으로 선할 수 없다는 전제를 담고 있다. 그에 따라 징벌의 요소도 상대적이고 유동적인 관계 내에서 구성된다. 상황에 따라 덜 나쁜 인물이 더 나쁜 인물을 벌하는 식으로 말이다. 예를 들자면 극 중 천서진은 살인과 비리를 저지른 인물로 선보다는 악에 가까운 역할이지만, 주단태라는 거악에 맞서기 위해 다른 인물들과 연대하여 악을 처단한다.
일반적으로 선과 악으로 대변되는 인물 사이에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약한 인물에 감정을 이입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실에서 시청자 자신이 실제 어떤 사람인지와는 별개로 만들어진 이야기를 소비할 때 약자의 편에서 그 약자가 고난 가운데 영웅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함께 하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누구라도 현실이 복잡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고, 그렇기에 픽션에서조차도 절대 선과 악의 구도를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바라보게 된다. 자조 섞인 표현을 빌자면 ‘막장 드라마보다 더 막장 같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막장 드라마’야말로 현실의 ‘순한 맛’ 버전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리셋(reset)이라는 마법
‘텔레노벨라’는 중남미권에서 유행하는 일일드라마 장르를 뜻한다.(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막장 드라마’에 등장하는 단골 요소 중 하나는 인물 간의 관계나 사건의 설정이 어느 순간 리셋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요소는 비단 한국 드라마의 전유물이 아니다. 중남미권의 텔레노벨라(telenovela)나 미국의 장수 시리즈물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리셋의 기능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긴장감을 불어넣어야 할 때, 전개된 상황이 본래대로 돌아가거나 사라진 인물을 다시 투입해야 한다. 또한 이야기가 긴 시간에 걸쳐 이어져야 할 때, 이미 익숙해진 캐릭터를 활용하기도 한다. 물론 리셋된 상황이 지나치게 반복될 때, 사람들이 피로감을 느끼거나 이야기의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느낄 수도 있다.
<펜트하우스>는 리셋의 마법을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예로 죽은 것처럼 그려진 인물이 알고 보면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며 흐름의 반전을 꾀한다. 시즌 1, 2에서 심수련과 배로나가 그랬고, 다가올 시즌에선 로건 리의 생사가 그 역할을 부여받았다. 팬 커뮤니티 내에서는 ‘시체를 보기 전까지 죽은 게 아니’라는 말이 떠돌 정도로 리셋은 <펜트하우스>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하겠지만, 게임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시나리오다. 현실의 조건들이 고정되어있다고 느낄수록 또 다른 기회를 엿볼 수 있는, 상황을 전복시킬 수 있는 <펜트하우스>의 리셋 가능성은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펜트하우스>가 우리에게 남긴 것이 무엇인지 단정하기엔 아직 이르다. 지속될 이야기가 남아있고, 그에 대한 대중의 반응 또한 남아있다. 그나마 분명해 보이는 사실은 <펜트하우스>의 인물들처럼 욕망을 품고 드러내는 것이 더이상 금기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게 욕망은 생존의 증거이자 준거로서 이 시대를 가로지르고 있다.
“욕망이 뭐 어때서요?”
- K컬처로 인문하기 - 인기 드라마 <펜트하우스>와 21세기의 진정성 -
강보라
2021-05-14
<펜트하우스>에서 흥미로운 건 등장인물 모두가 강렬한 욕망을 가진 주체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인물들은 내밀한 욕망까지도 숨김없이 진열하고 때로는 자신의 욕망 그 자체에 도취된다. 마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의심할 바 없는 시대의 미덕이라는 듯이…….
드라마 <펜트하우스> 포스터 (이미지 출처: SBS)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바이러스와의 싸움이 계속되고, 자동화된 인공 지능 서비스가 노동에 대한 의지를 떨어뜨리는 시절이다. 100세 시대가 열렸다고 환호하지만, 가상 화폐와 주식 열풍에 동승하는 것 말고는 그 긴긴 시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다. 딱히 비관론자가 아니더라도 2021년의 삶을 건조하게 되뇌다 보면, 대체 어떤 부분에서 미소를 지어야 할지 난감해지곤 한다.
이 와중에도 드라마라는 이야기 형태가 전 세계적으로 각광받고 있는 현상은 인간 본성과 이야기 간에 관련이 있거나 현실에 있어 이야기 이상으로 즐거움을 줄 만한 대상이 없음을 짐작게 한다. 최근 인기를 모은 한국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넷플릭스의 드라마 <킹덤>이 이야기뿐 아니라 패션까지 글로벌한 화제로 끌어올렸고, tvN의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이 일본에서 ‘제3의 한류’ 효과를 발휘했다고 평가받는 등 대외적인 인정도 강화되는 모양새다. 한국 사회 내부로 눈을 돌리더라도 일상에서 손꼽을 만한 재미가 사라진 요즘, 이야기를 소비하며 매일의 고단함을 덜어내는 광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 중심에 드라마 <펜트하우스>가 있다.
지난해 10월 첫 방송을 시작해 두 번의 시즌을 마무리하고 오는 6월 세 번째 시즌을 앞두고 있는 <펜트하우스>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콘텐츠 무한 경쟁 시대에 최고 시청률 30%를 돌파해 앞으로의 흥행이 기대된다는 점에서, 또한 지상파 방송에서는 드물게 시즌제 드라마로 제작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펜트하우스>를 바라보는 평단의 시각은 다양하지만, 이 드라마가 동시대에 소급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 하나만큼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과장을 조금 더 보태자면 <펜트하우스>의 서사가 소비되는 맥락에서 오늘날의 진정성을 엿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날 것 그대로의 욕망을 긍정하고 전시하며 끊임없이 투쟁하는, 바로 그곳에서 말이다.
막장의 장르화
<펜트하우스>가 변화시킨 감각 중 하나는 흔히 드라마의 설정이나 평가를 냉소할 때 사용되던 ‘막장’이란 표현을 일종의 장르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는 데 있다. 사전적으로 ‘마지막 장’ 또는 ‘특정한 상황의 마지막 장에 다다른 사람’을 이르는 말인 ‘막장’은 2000년대 이후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설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드라마에 관한 부정적인 수식어로 사용되곤 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새로운 막장의 요소가 등장할수록 대중성이 뒤따라오는 아이러니한 현실이 함께 자리해왔다. ‘욕하면서 보는’, 말하자면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 끌린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쾌감을 느끼는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의 원형으로 막장 드라마가 생명력을 이어올 수 있었던 셈이다.
그런 점에서 방송을 거듭할수록 <펜트하우스>식 ‘막장’을 일종의 장르로 받아들이자는 대중의 목소리가 커졌다는 사실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이는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의 속물 근성이나 치정과 같은 관계성을 소비하는 데 있어 죄책감을 덜어내고 쾌감만을 누리고 싶다는 선언일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드라마 내에서의 설정이 현실적이냐 개연성이 존재하냐의 문제를 따지는 것이 픽션의 소비에서 더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판단의 결과일 수도 있다. 좀 더 거시적으로 볼 때, 기술·환경·경제적 위기가 일상적으로 출몰하는 이 시기에 막장 드라마의 설정이 그다지 비현실적이거나 부도덕하게 다가가지 않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욕망의 진열대
<펜트하우스>에 등장하는 세 명의 여성 캐릭터 (이미지 출처: SBS)
<펜트하우스>에서 흥미로운 건 등장인물 모두가 강렬한 욕망을 가진 주체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인물들은 내밀한 욕망까지도 숨김없이 진열하고 때로는 자신의 욕망 그 자체에 도취된다. 마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의심할 바 없는 시대의 미덕이라는 듯이 말이다. 그 중심에는 모성을 앞세워 삶을 재조직하는 세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오윤희와 심수련, 천서진이 보여주는 모성은 자식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까지 포함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극단을 내포하는데, 바로 그 욕망화된 모성 때문에 서로를 파괴하기도 하고 함께 공조하기도 한다.
이들을 포함해 <펜트하우스>의 등장인물들이 보이는 공통점은 자신의 욕망을 타인의 욕망 안에 포개어 넣거나 자신의 욕망을 반복적으로 복기하며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언뜻 욕망을 통해 주술적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 욕망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그 주술 효과가 자신만을 향하고 있지 않음을 발견하면 공동체는 언제든지 깨질 준비가 되어 있다.
선악 구도의 붕괴… 상대적 징벌
죽은 줄 알았던 인물이 살아 돌아와 이야기의 반전을 꿈꾸는 <펜트하우스> (이미지 출처: SBS)
전통적인 권선징악의 서사에서 선은 보상을 받고 악은 징벌의 대상이 된다. 이때 악을 벌하는 주체가 반드시 선은 아니지만, 선과 악의 대비를 통해 선이 악을 이기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다크 나이트>와 같은 할리우드 히어로물을 시작으로 두드러진 근래의 경향은 선악의 구도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인데, <펜트하우스> 또한 예외가 아니다. 단순히 악인에게 면죄부를 제공한다기보다 욕망하는 자 중 그 누구도 절대적으로 선할 수 없다는 전제를 담고 있다. 그에 따라 징벌의 요소도 상대적이고 유동적인 관계 내에서 구성된다. 상황에 따라 덜 나쁜 인물이 더 나쁜 인물을 벌하는 식으로 말이다. 예를 들자면 극 중 천서진은 살인과 비리를 저지른 인물로 선보다는 악에 가까운 역할이지만, 주단태라는 거악에 맞서기 위해 다른 인물들과 연대하여 악을 처단한다.
일반적으로 선과 악으로 대변되는 인물 사이에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약한 인물에 감정을 이입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실에서 시청자 자신이 실제 어떤 사람인지와는 별개로 만들어진 이야기를 소비할 때 약자의 편에서 그 약자가 고난 가운데 영웅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함께 하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누구라도 현실이 복잡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고, 그렇기에 픽션에서조차도 절대 선과 악의 구도를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바라보게 된다. 자조 섞인 표현을 빌자면 ‘막장 드라마보다 더 막장 같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막장 드라마’야말로 현실의 ‘순한 맛’ 버전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리셋(reset)이라는 마법
‘텔레노벨라’는 중남미권에서 유행하는 일일드라마 장르를 뜻한다.(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막장 드라마’에 등장하는 단골 요소 중 하나는 인물 간의 관계나 사건의 설정이 어느 순간 리셋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요소는 비단 한국 드라마의 전유물이 아니다. 중남미권의 텔레노벨라(telenovela)나 미국의 장수 시리즈물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리셋의 기능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긴장감을 불어넣어야 할 때, 전개된 상황이 본래대로 돌아가거나 사라진 인물을 다시 투입해야 한다. 또한 이야기가 긴 시간에 걸쳐 이어져야 할 때, 이미 익숙해진 캐릭터를 활용하기도 한다. 물론 리셋된 상황이 지나치게 반복될 때, 사람들이 피로감을 느끼거나 이야기의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느낄 수도 있다.
<펜트하우스>는 리셋의 마법을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예로 죽은 것처럼 그려진 인물이 알고 보면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며 흐름의 반전을 꾀한다. 시즌 1, 2에서 심수련과 배로나가 그랬고, 다가올 시즌에선 로건 리의 생사가 그 역할을 부여받았다. 팬 커뮤니티 내에서는 ‘시체를 보기 전까지 죽은 게 아니’라는 말이 떠돌 정도로 리셋은 <펜트하우스>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하겠지만, 게임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시나리오다. 현실의 조건들이 고정되어있다고 느낄수록 또 다른 기회를 엿볼 수 있는, 상황을 전복시킬 수 있는 <펜트하우스>의 리셋 가능성은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펜트하우스>가 우리에게 남긴 것이 무엇인지 단정하기엔 아직 이르다. 지속될 이야기가 남아있고, 그에 대한 대중의 반응 또한 남아있다. 그나마 분명해 보이는 사실은 <펜트하우스>의 인물들처럼 욕망을 품고 드러내는 것이 더이상 금기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게 욕망은 생존의 증거이자 준거로서 이 시대를 가로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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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문화연구자.
미디어와 문화 현상 뒤에 숨은 사회의 마음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는 한편, 시각예술 기획 및 비평을 한다. 근작으로 『AI와 더불어 살기』(2020, 공저), 『나만 잘되게 해주세요: 자존과 관종의 감정 사회학』(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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