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정말로 사람들은 ‘하얀색 운동화’보다 ‘화이트 스니커즈’를 더 원할까요? 과연 ‘남성용 회색 양모 외투’는 ‘맨즈 그레이 컬러 울 코튼 오버 코트’보다 덜 팔렸을까요? 홈쇼핑 TV는 소비자를 어떤 존재로 파악하고 있는 것일까요?
나익주 선생님이시라면 홈쇼핑 방송에서 사라진 ‘색깔’이 우리 인간의 어떤 면을 보여주고 있는지 잘 설명해주실 것 같습니다.
[이달의 답변] / 답변자 - 나익주(언어학자)
A. ‘위’만 보다가 색깔은 사라지고 컬러만 남아
오리엔탈리즘을 은유적으로 요약하면, [서양은 위]와 [동양은 아래]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서구어(영어)는 위]가 되고, [한국어는 아래]가 됩니다. 한국어 대화와 글 속에 수많은 영어(음역) 표현들은 바로 이 오리엔탈리즘 사고의 반영이라고 본다면 저만의 억측일까요? 이 그림자는 언어 표현 자체만이 아니라 영어(음역) 표현과 한글을 배치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납니다. 영어(음역) 표현을 위쪽에 크게 표시하고 한글 표현을 한쪽 귀퉁이에 조그맣게 제시한 가게의 간판이나 공공기관과 기업의 도안을 적잖이 볼 수 있습니다.
김종승 선생님이 보내주신 질문인 <홈쇼핑에서 왜 ‘색깔’은 사라졌을까?>를 읽는 순간 잠깐 동안 홈쇼핑 텔레비전의 화면이 천연색에서 흑백으로 바뀌었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텔레비전’과 연결되어 나에게 떠오르는 ‘컬러’의 의미는 “천연색 화면”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질문의 의도는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외래어 ‘컬러’가 고유어 ‘색깔’을 밀어내고 있는 현실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자 머릿속에 두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서울을 오가는 도중에 ‘분명히 한국어 이름인데 왜 ‘제일’이라 쓰지 않고 덜렁 Jeil이라고만 써놓았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바라보았던 철길 옆 한 아파트 벽면입니다. 다음은 통일 교육을 받던 중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정확한 의미를 물었다가 “정말 모르세요?”라며 약간의 핀잔을 들었던 장면입니다. 여전히 저는 이 정책 명칭의 ‘프로세스’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철길을 지나면서 본 Jeil 아파트 벽면
통일 교육 중 보게 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레드’, ‘블루’, ‘옐로우’가 ‘빨강’, ‘파랑’, ‘노랑’을 밀어내고 있는 이 상황에 안타까움을 표하시면서 제기한 김종승 선생님의 질문 덕분에, 우리들이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이러한 외래어나 외국어를 직접 만들어 쓰거나 따라 쓰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이런 점에서 시의적절해 보이는 이 질문의 핵심은 ‘은유는 단순히 언어 사용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 과정의 중요한 기제’라고 주장하는 개념적 은유 이론으로 이 상황을 해명할 수 있는가 여부입니다.
다른 전문가들도 많을 터인데 저에게 답변을 요청하신 김종승 선생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현재 우리 사회에서 외래어와 외국어가 얼마나 많이 사용되고 있는지 그 양상에 대한 언급으로 답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늘어나는 외국어 상호와 아파트 이름들
언제인가부터 결혼식장의 규모가 커지고 내부 조명과 장식이 화려해지면서 ‘명동예식장’, ‘궁전예식장’, ‘행복예식장’, ‘서울예식장’ 등의 간판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에 “결혼을 하는 장소”를 뜻하는 우리말 ‘예식장’은 ‘웨딩홀’, ‘웨딩하우스’, ‘웨딩컨벤션’, ‘웨딩센터’ 등으로 바뀌었고, 그 예식장 상호의 고유성을 알려주는 우리말 ‘명동’, ‘궁전’, ‘행복’, ‘서울’ 등의 자리엔 ‘까사디루체’, ‘아르델’, ‘라플레이스’, ‘드메르’ 등의 외국어가 들어섰습니다.
‘예식장’ 대신 ‘웨딩홀’, ‘웨딩컨벤션’ 등으로 바뀐 결혼식장 명칭 (이미지 출처: 벨라비타 컨벤션)
‘다방’이나 ‘찻집’이라는 간판도 이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 자리는 크고 화려한 간판과 유색(有色)의 통판 유리로 장식된 ‘카페’, ‘커피숍’, ‘커피하우스’로 바뀌었고 ‘투썸플레이스’, ‘까사델라루체’, ‘앤제리너스’, ‘할리스’와 같은 외국어 간판이 들어서 있습니다. 아예 한글로 상호를 적지 않고 로마자 표기로만 적어 놓거나 한글 표기는 아래 한쪽 끝에 조그맣게 표기해 놓은 간판들도 많이 있습니다.
까사델라루체, 앤제리너스, 스타벅스, 카페베네, 이디아커피,
할리스커피, 투썸플레이스, 커피빈&티리프, 비엔나커피하우스, 커피숍 폴모스트
외국어 간판을 사용하는 커피 전문점의 사례
‘헤어(숍)’이나 ‘바버샵’, ‘헤어살롱’이란 간판을 단 미용실이나 이발소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곳은 ‘미용실/이발소’에 비해 규모가 더 크고 화려하며 가격도 더 비쌉니다.
아파트 이름은 훨씬 더 심합니다. 지역 이름을 딴 ‘옥인아파트’나 ‘신수아파트’, 건설회사 이름을 딴 ‘현대아파트’나 ‘경남아파트’, 우리 꽃이나 식물 이름을 딴 ‘개나리아파트’나 ‘무궁화아파트’와 같은 이름은 지어진 지 아주 오래된 아파트에서나 찾아볼 수 있으며, 재건축을 하는 경우에는 외국어 이름으로 다 바뀌었습니다. 아래의 이름에서 보듯이 2000년대 이후에 들어선 아파트에는 거의 다 외국어나 외래어로 지은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그 사이에 드물게 서 있는 ‘풍경채’와 ‘어울림’ 같은 이름은 어색할 지경이며, 특히 높이 200미터가 넘는 초고층아파트의 경우는 우리말로 이름을 지은 아파트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밖에도 많은 기업 명칭과 제품 이름, 상표 이름(브랜드)은 물론 다양한 사건(예: 그루밍)과 현상(예: 님비)의 이름에도 외래어와 외국어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와 같은 공공기관에서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공공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언어, 즉 공공언어의 사용 양상은 어떠할까요?
공공 언어의 풍경: 넘쳐나는 외국어들
공공 영역에서 사용되는 외국어(음역) 표현 사례
이 경향은 공적인 영역의 언어 사용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드라이브 스루 검사’, ‘팬데믹’, ‘코호트 격리’ 등 지난해부터 우리의 활동을 제약하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관련한 현상을 지칭하는 이름이나, 공공기관에서 발행하는 문서를 무작위로 몇 개만 읽어보아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에서 발행하는 문서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외국어(특히 영어) 음역 표현을 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정부 부처의 이름(예: 중소벤처기업부)도 외국어 음역을 담고 있습니다. 다음은 공공기관이 추진하는 사업이나 정책 과제를 지칭하는 수많은 명칭의 일부 사례입니다.
마더세이프전문상담센터, 데이케어센터, 플로팅아일랜드(세빛섬), 맘프러너 창업스쿨,
시프트(서울시 장기임대주택 프로그램), 디자인월드플라자, 도시갤러리프로젝트
리버프런트, 에코델타시티, 에코스마트시티, 굿모닝콜, 메디컬스트리트, 드림스타트,
Bridge of BUSAN 통합 브랜드 네이밍, 로컬푸드, 마이스산업, 희망드림론,
K-move 센터, Work Together 센터, 아웃리치(Out reach, 지역 주민에 대한 기관의 적극적인 봉사 활동),
R&E 페스티벌, 그린시티 대전 프로젝트, 목척교 르네상스 프로젝트, 서울정책아카이브,
클린업 시스템, B2B시스템, 서울에너지드림센터, 에코투어, 3아웃(out) 7업(up) 프로젝트
‘2012년 탑라이스 생산 시범사업’(농림부), ‘그린스타트 운동 확산을 위한 그린 리더 참가신청서’(환경부)
외국어에 능숙한 사람은 별다른 인지적 노력 없이 이러한 외국어 음역을 이해할 수 있겠지만, 상당히 많은 국민들은 이해하려고 애를 쓴다고 해도 이러한 명칭만으로 해당 사업이나 과제 내용을 짐작하기조차 어려울 것입니다. 공공기관의 사업이나 정책의 실행이 국민들의 세금에 근거한다고 할 때 직접 관련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를 위해 공공기관의 정책 이름이나 사업 이름, 기관 이름은 외래어나 외국어로 짓지 못하도록 법으로 강력하게 정해야 할까요?
이처럼 급증하고 있는 외국어의 유입에 대해 크게 두 관점의 주장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언어 순수주의의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 자유주의라 불리는 관점입니다.
언어 순수주의 대 언어 자유주의
1970년대에 정부가 주도했던 국어 순화 운동에 따라 제품 이름을 국어로 바꿔 내놓는 기업이 생겼다. (이미지 출처: 부산일보)
언어 순수주의는 한국어에 상응하는 어구가 이미 존재하는 경우나 쉬운 한국어 표현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경우에는 외래어나 외국어를 사용하지 말자는 입장으로 언어 민족주의 또는 국수수의라 불리기도 합니다. 반면에 언어 자유주의는 민주 사회에서 개인의 선호와 언어 선택권에 대해 ‘순수한 언어’의 사용을 강제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어차피 가능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두면 된다는 입장으로 언어 기술주의라 불리기도 합니다. 이 관점에서는 말에 외국어가 뒤섞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에 무수한 외국어를 내포하고 있는 언어 표현도 수용해야 하며, 이것이 오히려 우리말의 조어 능력을 풍부하게 하고 한국어의 다양성과 포용력을 열어준다고 봅니다.
현재는 언어 순수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더 큰 편입니다. 이에 언어 자유주의자들은 낯선 외래어와 외국어를 쉬운 우리말로 바꾸어 제시하는 국립국어원의 ‘우리말 다듬기’ 활동을 국가의 지나친 개입이라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이것은 외국어와 외래어가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는 우리 언어생활의 실재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는 어느 쪽이 옳은지 논할 생각이 없습니다. 지면상의 한계도 있지만 이 논의는 질문자의 의도와도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두 관점이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는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970년대 박정희 유신 정권에서는 외래어와 외국어를 우리말로 바꾸기 위한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 그 결과 가수 ‘바니걸스’, ‘어니언스’, ‘투에이스’, ‘패티김’ 등은 텔레비전 방송의 출연을 위해 각각 ‘토끼소녀’, ‘양파들’, ‘금과 은’, ‘김혜자’ 등으로 이름을 바꾸어야 했습니다. 당시에 언어 순수주의자들은 이 정책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냈습니다. 하지만 50년이 지난 현재는 언어 순수주의자들이든 언어 자유주의자들이든 단일어의 순수성을 강조함으로써 단일 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한 정치적인 의도를 지닌 그러한 방식의 국어 순화 운동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물론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은 언어 순수주의 입장에서 모든 외국어와 외래어를 추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칠 수도 있겠지만요.
국립국어원 공공언어 통합 지원 사이트 메인 홈페이지
하지만 ‘공공기관에서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공공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언어’, 즉 공공언어를 대상으로 하는 ‘쉬운 우리말 쓰기’ 운동에 대해서는 두 입장이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언어 순주주의자들은 외국어 능력이 부족해 이러한 표현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알권리를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언어 자유주의들은 기표(시니피앙, 형태)와 기의(시니피에, 의미)의 상징 관계가 어차피 약속에 의한 관계이고, 과학 기술의 발전과 시대의 변화로 인해 외국어 음역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실재(實在)가 존재하며 이 실재를 우리말로는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이러한 음역 표현을 없애기는 불가능하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구체적으로 언어 순수주의 관점에서 국립국어원은 2019년 9월부터 중앙행정기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이 쉽고 바른 공공 언어를 사용하도록 지원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시민단체 ‘한글문화연대’는 ‘쉬운 우리말 쓰기’를 알권리와 인권의 차원에서 접근하면서 상응하는 쉬운 우리말이 있는 경우에는 외래어와 외국어를 공공언어의 영역에서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최소한 국민의 생명이나 다양한 유형의 안전과 직접 관련이 있는 용어는 외국어를 쉬운 우리말로 바꾸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컨대 지하철의 ‘스크린도어’나 도로 위의 ‘블랙 아이스’와 같은 표현의 의미 파악은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안전문’이나 ‘도로 살얼음’으로 바꾸어 써야 한다는 것이죠. 반면에 언어 자유주의에서는 이러한 용어마저도 국가나 시민단체가 강제해서는 안 되며, 내가 생산하는 언어 표현이 타인들의 삶에 피해를 주는가 여부는 언어 사용자인 시민들의 언어 감수성과 언어적 윤리성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지금까지 외래어와 외국어의 엄청난 증가 양상과 이들을 대하는 두 관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김종승 선생님께서 답변을 요구하신 질문의 핵심인 ‘홈쇼핑 방송에서 사라진 ‘색깔’이 우리 인간의 어떤 면을 보여주고 있는지’에 대한 저의 생각을 말씀드려 보고자 합니다.
사대주의의 영향과 오리엔탈리즘의 그림자
조지 레이코프의 『삶으로서의 은유』
흔히들 넘쳐나는 외국어 사용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사대주의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설명을 ‘인간의 사고 과정은 대부분 은유로 구성되어 있다.’라고 주장하는 개념적 은유 이론에 따라 해석한다면 ‘마음속 사대주의’는 당연히 은유적인 사고 과정의 일부일 것입니다. 이 사대주의 은유, 구체적으로 말하면 [상대국은 위/자국은 아래]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이 ‘사대주의적’ 사고는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오랫동안 축적된 물리적인 [위-아래] 경험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종종 접했던 골목 싸움을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대개는 키와 몸집이 크고 힘센 사람이, 키와 몸집이 작은 사람을 위에서 내리누르는 장면이 떠오를 것입니다. 몸싸움을 하면서 위에 있을 때 우리는 더 평안함을 느끼고 아래에 있을 때는 숨쉬기도 힘든 답답함과 고통을 느낍니다. 그리고 싸움에서 이기면 기분이 좋고 지면 기분이 나쁩니다. 이것은 사람에 비유되는 국가들 사이의 대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을 떠올려 보십시오. 사극에서 흔히 보듯이 살아남은 병사들은 서 있고 죽거나 부상당한 병사들은 누워 있으며, 승전국 수장은 높은 단 위에 당당히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패전국 수장은 땅에 엎드려 단 위의 장수에게 살려달라고 청합니다.
『은유로 보는 한국 사회』 책 표지.
한국 사회의 대표적 은유들을 통해 세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미지 출처: 알라딘)
사회적으로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우리 인간은 대개 [권력], [강함][평안], [행복], [좋음], [통제], [성공] 등의 개념을 공간적인 [위]에 연결하고, [권력 결여], [약함], [불편], [불행], [나쁨], [복종], [실패] 등의 개념을 공간적 [아래]에 연결합니다. 이러한 경험 덕택에 인간의 사고 속에서 [힘은 위/권력 결여는 아래], [강함은 위/약함은 아래], [행복은 위/불행은 아래], [좋음은 위/나쁨은 아래], [평안은 위/불편은 아래], [통제는 위/복종은 아래], [성공은 위/실패는 아래] 등의 개념적 은유가 발생합니다.
이러한 [위-아래] 은유가 [국가는 사람] 은유와 다시 결합할 때, 은유적으로 힘이 없는 사람으로 개념화되는 약소국이 힘이 강한 사람으로 개념화되는 강대국을 섬기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사대주의 은유가 나옵니다. 한마디로 [강대국은 힘센 자]이고 [약소국은 약한 자]입니다. 이 은유적 사고에서는 당연히 강대국의 국민들이 상급자이고 약소국의 국민들은 하급자이며, 강대국 언어는 고상한 언어이고 약소국 언어는 저급한 언어입니다.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복종하듯이, 약소국은 강대국을 숭배해야 합니다. 환유적으로는 강대국의 언어를 숭배하고 존중하는 것이 바로 강대국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대주의는 역사적으로 축적된 우리의 신체적 경험에 근거를 두고 있는 은유적 사고의 일부입니다. 우리 민족은 생존 전략의 하나로 사대주의를 택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대주의적인 사고 속에서는 늘 한국어는 [아래]였고 다른 강대국의 언어가 [위]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식민지 이전까지는 중국어가 [위]였고, 식민지 시대에는 일본어가 [위]였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사고 속에서 서구의 언어―특히 영어―가 [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은유적 사고에서는 역사적으로 중국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사대주의’의 영향보다 서구인들이 동양과 동양인들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구성해 우리들의 마음속에 심어놓은 일련의 고정관념인 오리엔탈리즘의 그림자를 볼 수 있습니다. 이 틀에서 서양(인)을 대표하는 특성은 문명, 강함, 성숙, 합리성, 안정성, 화려함 등인 반면, 동양(인)을 대표하는 특성은 야만, 허약, 미성숙, 비합리성, 불안정성, 초라함 등입니다. 어떤 문화에서나 이러한 특성은 흔히 물리적인 수직성 개념 [위-아래]의 관점에서 은유적으로 이해합니다. 은유적으로 [강함은 위]이고 [약함은 아래]이며, [성숙은 위]이고 [미성숙은 아래]이며, [문명은 위]이고 [야만은 아래]이며, [합리성은 위]이고 [비합리성은 아래]이며, [화려함은 위]이고 [초라함은 아래]입니다.
영어(음역) 표현을 강조한 커피 전문점의 간판 사례 (이미지 출처: 일요경제)
영어(음역) 표현을 강조한 공공기관의 로고 사례
오리엔탈리즘을 은유적으로 요약하면, [서양은 위]와 [동양은 아래]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서구어(영어)는 위]가 되고, [한국어는 아래]가 됩니다. 한국어 대화와 글 속에 수많은 영어(음역) 표현들은 바로 이 오리엔탈리즘 사고의 반영이라고 본다면 저만의 억측일까요? 이 그림자는 언어 표현 자체만이 아니라 영어(음역) 표현과 한글을 배치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납니다. 영어(음역) 표현을 위쪽에 크게 표시하고 한글 표현을 한쪽 귀퉁이에 조그맣게 제시한 가게의 간판이나 공공기관과 기업의 도안을 적잖이 볼 수 있습니다. 이 배치 방식도 역시 [서양(어)은 위/동양(어)은 아래]라는 오리엔탈리즘의 발현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 방식에는 ‘역사의 큰 분수령’, ‘대기만성’, ‘고장의 큰 인물’ 등의 표현에서 드러나는 [중요함은 큼] 은유도 들어있지만요.
‘위’를 향한 욕망의 발현으로서의 외국어 상표
한국 사회에서 뛰어난 외국어 구사 능력은 공간적 [위]로 개념화되는 ‘성공’으로 올라가기 위한 튼튼한 사다리의 하나다. (이미지 출처: 데일리투머로우)
외래어의 범람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위로 더 위로’ 올라가고자 끝없이 욕망하고 경쟁하는 한국 사회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현재 경쟁이 일상화된 한국 사회에서 뛰어난 외국어 구사 능력은 공간적 [위]로 개념화되는 ‘성공’으로 올라가기 위한 튼튼한 사다리의 하나입니다. 실제로 새로운 외래어나 외국어(음역) 표현을 만들어내는 일은 아무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세계 경제의 흐름과 과학 기술의 최근 동향에 신속하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외국어 능력이 뛰어나며 대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이미 성공했거나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은유적으로 그들은 ‘성공으로 가는 사다리’의 맨 위나 더 높은 곳에 도달했거나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성공에의 사다리’ 언저리로부터 밀려나면 패자가 된다는 불안감에서나, 외국어 사용을 주도하는 사람들과 동화할수록 성공할 가능성이 더 높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그들의 언어 사용을 따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별화를 통한 성공’을 향한 ‘열망’은 효율적인 언어 소통을 위해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정보를 전달한다.’라는 언어 경제성과 명명의 원리에 어긋나는 이름을 만들어냅니다. 심지어 ‘○○증포3지구 대원칸타빌 2차더테라스’라는 아파트 이름은 18글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영어 음역 사용을 사용한 명명이 과연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실제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을까요? 김종승 선생님의 질문을 빌려 말하자면, 동일한 상품을 ‘하얀색 운동화’보다 ‘화이트 스니커즈’라고 부를 때 더 신고 싶어 할까요? 동일한 상품을 ‘남성 회색 양모 외투’보다 ‘맨즈 그레이 컬러 울 오버 코트’라고 부를 때 더 많이 팔릴까요? 그러한 조사를 직접 해본 적도 없고 그러한 조사 결과를 본 적도 없기에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많은 기업 관계자들은 외국어를 사용한 명명 방식이 소비자들에게 상품이 더 품질이 뛰어나고 더 세련되고 더 우아하다는 등의 느낌을 주어 더 높은 판매 성과를 낼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또한 그러한 믿음과 기대를 지니고 있는 소비자들도 적지 않아 보입니다.
아파트 이름 변경 소송 사례 (이미지 출처: 한겨례)
이러한 기대와 믿음에서 비롯된 욕망은 십여 년 전쯤에 일어난 아파트 이름 변경 소송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파트의 입주민들은 가치를 높이려는 의도에서 명칭을 ‘롯데캐슬’로 바꾸어 달라는 신청을 해당 구청이 거부하자 법원에 소송을 내어 승소를 한 뒤 “판결에 만족…무분별한 명칭 변경은 우리도 반대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름만 바꾸어도 값이 오를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이 없었다면 소송까지 벌일 필요가 있었을까요? 이 소송은 외국어 상호로 된 ‘호화롭고 우아하고 값비싼 고품격 아파트’ 범주 내에 들어가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이었다고 봅니다. 소송 승소 뒤에 입주민 대표가 했던 발언은 그 범주 내에 자신은 들어가야 하지만 타인은 들어오지 말라는 이중적인 욕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양한 상품 이름과 공공기관 이름, 공공기관의 사업과 정책 이름에서 외국어 음역 표현을 엄청나게 많이 사용하고 있는 현상은 자신을 ‘더 고상하게’, ‘더 화려하게’, ‘더 우아하게’, ‘더 품격 있게’, ‘더 가치 있게’ 드러내 보임으로써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더 위로’ 올라가 ‘더 많은’ 부를 모으고자 하는 우리들의 욕망에 기인한다고 봅니다. ‘위’를 향한 이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외국어(음역) 표현’을 도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외국어 기표의 범람은 [서구는 위/동양은 아래] 은유라는 오리엔탈리즘의 그림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혐오와 배제로 이어지는 차별화는 이제 그만!
TV 홈쇼핑 채널 (이미지 출처: 현대백화점)
우리나라 역시 정치적으로 다른 어느 나라에 못지않게 민주주의를 실현해 가고 있고 경제적으로 세계 상위권에 다다른 이 시점에서는 오리엔탈리즘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요? 이제 막 지은 초고층아파트를 ‘아리랑아파트’라고 하면 청약자들이 덜 올까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수많은 외국어 남용의 기저에 있는 [서구는 위/동양은 아래] 은유는 외국어 상표가 상품의 품질을 보증하는 것처럼 우리들에게 허상을 심어주며 실재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외래어 음역 표현을 사용하는 차별화 전략이 배제와 혐오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부 초등학생들과 중학생들의 언어 사용에 등장하는 ‘전거지(전세 사는 거지)’나 ‘월거지(월세 사는 거지)’와 청년들 사이에서 펴져 있는 ‘이백만/삼백만 원 이하의 월 소득자’를 뜻하는 ‘이백충(蟲)’이나 ‘삼백충(蟲)’등의 상대를 비하하기 위한 표현은 이 차별화 전략이 빚어낸 배제와 혐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차별화’ 전략을 사용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자신들의 의도대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성공의 사다리’를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겠지만 다수는 배제와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아쉽게도 현재의 한국 사회는 이런 모습으로 보입니다. ‘성공의 사다리’ 언저리에도 다가갈 수 없는 사람들을 차별하고 배제하기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생존과 존엄,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함께 나아가는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서구는 위/동양은 아래]나 [영어는 위/한국어는 아래]라는 오리엔탈리즘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하더라도, ‘컬러’와 ‘화이트 스니커즈’, ‘맨즈 그레이 컬러 울 코튼 오버 코트’보다 ‘색깔’과 ‘하얀색 운동화’, ‘남성용 회색 양모 외투’를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시민들의 언어 감수성을 기대해 봅니다. 시민으로서의 이 언어 감수성 실천이 ‘성공의 사다리’를 타고 ‘나만이 먼저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자 끝없이 경쟁하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 ‘삶이 모두가 함께하는 즐거운 여행’인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작은 행동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보니 질문해 주신 김종승 선생님께 충분히 만족스러운 답을 드리지 못한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선생님의 뛰어난 이해 능력을 믿으며 부족한 답변을 마칩니다.
언어학자
전남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서강대와 전남대 대학원에서 영어학으로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 언어학과에서 객원 학자로 은유와 인지언어학을 공부했다. 전남대와 충남대에서 강의했고 한국담화인지언어학회의 연구 이사를 지냈다. 현재 학술지 [담화와 인지] 편집위원회의 인지분과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한겨레말글연구소의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 『은유로 보는 한국 사회』, 『조지 레이코프』, 『프레임 전쟁』,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 『이기는 프레임』, 『폴리티컬 마인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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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위’만 보다가 색깔은 사라지고 컬러만 남아' 저작물은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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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 보다가 색깔은 사라지고 컬러만 남아
- 이달의 답변 - 개념적 은유 이론으로 살펴본 우리 시대 외국어 범람 현상 -
나익주
2021-05-07
[이달의 질문] 홈쇼핑 채널에서 ‘색깔’은 왜 사라졌을까? / 질문자 - 김종승(미디어 컨설턴트)
Q. 정말로 사람들은 ‘하얀색 운동화’보다 ‘화이트 스니커즈’를 더 원할까요? 과연 ‘남성용 회색 양모 외투’는 ‘맨즈 그레이 컬러 울 코튼 오버 코트’보다 덜 팔렸을까요? 홈쇼핑 TV는 소비자를 어떤 존재로 파악하고 있는 것일까요?
나익주 선생님이시라면 홈쇼핑 방송에서 사라진 ‘색깔’이 우리 인간의 어떤 면을 보여주고 있는지 잘 설명해주실 것 같습니다.
[이달의 답변] / 답변자 - 나익주(언어학자)
A. ‘위’만 보다가 색깔은 사라지고 컬러만 남아
오리엔탈리즘을 은유적으로 요약하면, [서양은 위]와 [동양은 아래]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서구어(영어)는 위]가 되고, [한국어는 아래]가 됩니다. 한국어 대화와 글 속에 수많은 영어(음역) 표현들은 바로 이 오리엔탈리즘 사고의 반영이라고 본다면 저만의 억측일까요? 이 그림자는 언어 표현 자체만이 아니라 영어(음역) 표현과 한글을 배치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납니다. 영어(음역) 표현을 위쪽에 크게 표시하고 한글 표현을 한쪽 귀퉁이에 조그맣게 제시한 가게의 간판이나 공공기관과 기업의 도안을 적잖이 볼 수 있습니다.
김종승 선생님이 보내주신 질문인 <홈쇼핑에서 왜 ‘색깔’은 사라졌을까?>를 읽는 순간 잠깐 동안 홈쇼핑 텔레비전의 화면이 천연색에서 흑백으로 바뀌었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텔레비전’과 연결되어 나에게 떠오르는 ‘컬러’의 의미는 “천연색 화면”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질문의 의도는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외래어 ‘컬러’가 고유어 ‘색깔’을 밀어내고 있는 현실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자 머릿속에 두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서울을 오가는 도중에 ‘분명히 한국어 이름인데 왜 ‘제일’이라 쓰지 않고 덜렁 Jeil이라고만 써놓았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바라보았던 철길 옆 한 아파트 벽면입니다. 다음은 통일 교육을 받던 중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정확한 의미를 물었다가 “정말 모르세요?”라며 약간의 핀잔을 들었던 장면입니다. 여전히 저는 이 정책 명칭의 ‘프로세스’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철길을 지나면서 본 Jeil 아파트 벽면
통일 교육 중 보게 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레드’, ‘블루’, ‘옐로우’가 ‘빨강’, ‘파랑’, ‘노랑’을 밀어내고 있는 이 상황에 안타까움을 표하시면서 제기한 김종승 선생님의 질문 덕분에, 우리들이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이러한 외래어나 외국어를 직접 만들어 쓰거나 따라 쓰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이런 점에서 시의적절해 보이는 이 질문의 핵심은 ‘은유는 단순히 언어 사용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 과정의 중요한 기제’라고 주장하는 개념적 은유 이론으로 이 상황을 해명할 수 있는가 여부입니다.
다른 전문가들도 많을 터인데 저에게 답변을 요청하신 김종승 선생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현재 우리 사회에서 외래어와 외국어가 얼마나 많이 사용되고 있는지 그 양상에 대한 언급으로 답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늘어나는 외국어 상호와 아파트 이름들
언제인가부터 결혼식장의 규모가 커지고 내부 조명과 장식이 화려해지면서 ‘명동예식장’, ‘궁전예식장’, ‘행복예식장’, ‘서울예식장’ 등의 간판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에 “결혼을 하는 장소”를 뜻하는 우리말 ‘예식장’은 ‘웨딩홀’, ‘웨딩하우스’, ‘웨딩컨벤션’, ‘웨딩센터’ 등으로 바뀌었고, 그 예식장 상호의 고유성을 알려주는 우리말 ‘명동’, ‘궁전’, ‘행복’, ‘서울’ 등의 자리엔 ‘까사디루체’, ‘아르델’, ‘라플레이스’, ‘드메르’ 등의 외국어가 들어섰습니다.
까사디루체 웨딩컨벤션, 아르델 웨딩컨벤션, 웨딩홀 라루체 (아이리스홀),
노블레스 웨딩홀컨벤션, 라플레이스 웨딩하우스, 더바인웨딩홀, 드메르 웨딩홀, 더라움 웨딩센터
‘예식장’ 대신 ‘웨딩홀’, ‘웨딩컨벤션’ 등으로 바뀐 결혼식장 명칭 (이미지 출처: 벨라비타 컨벤션)
‘다방’이나 ‘찻집’이라는 간판도 이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 자리는 크고 화려한 간판과 유색(有色)의 통판 유리로 장식된 ‘카페’, ‘커피숍’, ‘커피하우스’로 바뀌었고 ‘투썸플레이스’, ‘까사델라루체’, ‘앤제리너스’, ‘할리스’와 같은 외국어 간판이 들어서 있습니다. 아예 한글로 상호를 적지 않고 로마자 표기로만 적어 놓거나 한글 표기는 아래 한쪽 끝에 조그맣게 표기해 놓은 간판들도 많이 있습니다.
까사델라루체, 앤제리너스, 스타벅스, 카페베네, 이디아커피,
할리스커피, 투썸플레이스, 커피빈&티리프, 비엔나커피하우스, 커피숍 폴모스트
외국어 간판을 사용하는 커피 전문점의 사례
‘헤어(숍)’이나 ‘바버샵’, ‘헤어살롱’이란 간판을 단 미용실이나 이발소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곳은 ‘미용실/이발소’에 비해 규모가 더 크고 화려하며 가격도 더 비쌉니다.
까사델헤어, 제이진헤어, 버터바버샵, 아이펠마르 뷰티헤어, 르마레 헤어살롱, 헤어살롱 토니앤가이
아파트 이름은 훨씬 더 심합니다. 지역 이름을 딴 ‘옥인아파트’나 ‘신수아파트’, 건설회사 이름을 딴 ‘현대아파트’나 ‘경남아파트’, 우리 꽃이나 식물 이름을 딴 ‘개나리아파트’나 ‘무궁화아파트’와 같은 이름은 지어진 지 아주 오래된 아파트에서나 찾아볼 수 있으며, 재건축을 하는 경우에는 외국어 이름으로 다 바뀌었습니다. 아래의 이름에서 보듯이 2000년대 이후에 들어선 아파트에는 거의 다 외국어나 외래어로 지은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그 사이에 드물게 서 있는 ‘풍경채’와 ‘어울림’ 같은 이름은 어색할 지경이며, 특히 높이 200미터가 넘는 초고층아파트의 경우는 우리말로 이름을 지은 아파트가 하나도 없습니다.
위브더제니스, 아이파크, 더샵 레이크파크, 더샵 센트럴스타, 더샵 퍼스트월드, 타워팰리스, 트라팰리스,
갤러리아팰리스, 하이페리온 타워, 메타폴리스, 위브포세이돈, 리첸시아, 펜타포트, 트럼프월드,
리더스뷰, 더샵 센텀스타, 래미안 첼리투스, 엑소디움, 위브센티움, 베르디움, 아델리움,
메가트리움, 그라시움, 리츠빌카일룸, 피오레, 리젠시빌, 루센티아, 래미안 블레스티지,
트루엘, 힐스테이트, 아데나루체, 미켈란쉐르빌, 아이유쉘 메가시티, 와이시티 (비교: 풍경채, 어울림)
이밖에도 많은 기업 명칭과 제품 이름, 상표 이름(브랜드)은 물론 다양한 사건(예: 그루밍)과 현상(예: 님비)의 이름에도 외래어와 외국어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와 같은 공공기관에서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공공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언어, 즉 공공언어의 사용 양상은 어떠할까요?
공공 언어의 풍경: 넘쳐나는 외국어들
공공 영역에서 사용되는 외국어(음역) 표현 사례
이 경향은 공적인 영역의 언어 사용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드라이브 스루 검사’, ‘팬데믹’, ‘코호트 격리’ 등 지난해부터 우리의 활동을 제약하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관련한 현상을 지칭하는 이름이나, 공공기관에서 발행하는 문서를 무작위로 몇 개만 읽어보아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에서 발행하는 문서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외국어(특히 영어) 음역 표현을 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정부 부처의 이름(예: 중소벤처기업부)도 외국어 음역을 담고 있습니다. 다음은 공공기관이 추진하는 사업이나 정책 과제를 지칭하는 수많은 명칭의 일부 사례입니다.
마더세이프전문상담센터, 데이케어센터, 플로팅아일랜드(세빛섬), 맘프러너 창업스쿨,
시프트(서울시 장기임대주택 프로그램), 디자인월드플라자, 도시갤러리프로젝트
리버프런트, 에코델타시티, 에코스마트시티, 굿모닝콜, 메디컬스트리트, 드림스타트,
Bridge of BUSAN 통합 브랜드 네이밍, 로컬푸드, 마이스산업, 희망드림론,
K-move 센터, Work Together 센터, 아웃리치(Out reach, 지역 주민에 대한 기관의 적극적인 봉사 활동),
R&E 페스티벌, 그린시티 대전 프로젝트, 목척교 르네상스 프로젝트, 서울정책아카이브,
클린업 시스템, B2B시스템, 서울에너지드림센터, 에코투어, 3아웃(out) 7업(up) 프로젝트
‘그린필드형 투자’, ‘밸류 체인’(외교부), ‘Safe & Clean Hub’(검찰청), ‘Support-chain’(산업통상자원부),
‘Go! Region, Get Vision’(지역박람회 표어), ‘홈리스’(보건복지부),
‘2012년 탑라이스 생산 시범사업’(농림부), ‘그린스타트 운동 확산을 위한 그린 리더 참가신청서’(환경부)
외국어에 능숙한 사람은 별다른 인지적 노력 없이 이러한 외국어 음역을 이해할 수 있겠지만, 상당히 많은 국민들은 이해하려고 애를 쓴다고 해도 이러한 명칭만으로 해당 사업이나 과제 내용을 짐작하기조차 어려울 것입니다. 공공기관의 사업이나 정책의 실행이 국민들의 세금에 근거한다고 할 때 직접 관련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를 위해 공공기관의 정책 이름이나 사업 이름, 기관 이름은 외래어나 외국어로 짓지 못하도록 법으로 강력하게 정해야 할까요?
이처럼 급증하고 있는 외국어의 유입에 대해 크게 두 관점의 주장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언어 순수주의의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 자유주의라 불리는 관점입니다.
언어 순수주의 대 언어 자유주의
1970년대에 정부가 주도했던 국어 순화 운동에 따라 제품 이름을 국어로 바꿔 내놓는 기업이 생겼다. (이미지 출처: 부산일보)
언어 순수주의는 한국어에 상응하는 어구가 이미 존재하는 경우나 쉬운 한국어 표현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경우에는 외래어나 외국어를 사용하지 말자는 입장으로 언어 민족주의 또는 국수수의라 불리기도 합니다. 반면에 언어 자유주의는 민주 사회에서 개인의 선호와 언어 선택권에 대해 ‘순수한 언어’의 사용을 강제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어차피 가능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두면 된다는 입장으로 언어 기술주의라 불리기도 합니다. 이 관점에서는 말에 외국어가 뒤섞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에 무수한 외국어를 내포하고 있는 언어 표현도 수용해야 하며, 이것이 오히려 우리말의 조어 능력을 풍부하게 하고 한국어의 다양성과 포용력을 열어준다고 봅니다.
현재는 언어 순수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더 큰 편입니다. 이에 언어 자유주의자들은 낯선 외래어와 외국어를 쉬운 우리말로 바꾸어 제시하는 국립국어원의 ‘우리말 다듬기’ 활동을 국가의 지나친 개입이라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이것은 외국어와 외래어가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는 우리 언어생활의 실재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는 어느 쪽이 옳은지 논할 생각이 없습니다. 지면상의 한계도 있지만 이 논의는 질문자의 의도와도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두 관점이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는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970년대 박정희 유신 정권에서는 외래어와 외국어를 우리말로 바꾸기 위한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 그 결과 가수 ‘바니걸스’, ‘어니언스’, ‘투에이스’, ‘패티김’ 등은 텔레비전 방송의 출연을 위해 각각 ‘토끼소녀’, ‘양파들’, ‘금과 은’, ‘김혜자’ 등으로 이름을 바꾸어야 했습니다. 당시에 언어 순수주의자들은 이 정책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냈습니다. 하지만 50년이 지난 현재는 언어 순수주의자들이든 언어 자유주의자들이든 단일어의 순수성을 강조함으로써 단일 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한 정치적인 의도를 지닌 그러한 방식의 국어 순화 운동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물론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은 언어 순수주의 입장에서 모든 외국어와 외래어를 추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칠 수도 있겠지만요.
국립국어원 공공언어 통합 지원 사이트 메인 홈페이지
하지만 ‘공공기관에서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공공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언어’, 즉 공공언어를 대상으로 하는 ‘쉬운 우리말 쓰기’ 운동에 대해서는 두 입장이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언어 순주주의자들은 외국어 능력이 부족해 이러한 표현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알권리를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언어 자유주의들은 기표(시니피앙, 형태)와 기의(시니피에, 의미)의 상징 관계가 어차피 약속에 의한 관계이고, 과학 기술의 발전과 시대의 변화로 인해 외국어 음역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실재(實在)가 존재하며 이 실재를 우리말로는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이러한 음역 표현을 없애기는 불가능하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구체적으로 언어 순수주의 관점에서 국립국어원은 2019년 9월부터 중앙행정기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이 쉽고 바른 공공 언어를 사용하도록 지원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시민단체 ‘한글문화연대’는 ‘쉬운 우리말 쓰기’를 알권리와 인권의 차원에서 접근하면서 상응하는 쉬운 우리말이 있는 경우에는 외래어와 외국어를 공공언어의 영역에서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최소한 국민의 생명이나 다양한 유형의 안전과 직접 관련이 있는 용어는 외국어를 쉬운 우리말로 바꾸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컨대 지하철의 ‘스크린도어’나 도로 위의 ‘블랙 아이스’와 같은 표현의 의미 파악은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안전문’이나 ‘도로 살얼음’으로 바꾸어 써야 한다는 것이죠. 반면에 언어 자유주의에서는 이러한 용어마저도 국가나 시민단체가 강제해서는 안 되며, 내가 생산하는 언어 표현이 타인들의 삶에 피해를 주는가 여부는 언어 사용자인 시민들의 언어 감수성과 언어적 윤리성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지금까지 외래어와 외국어의 엄청난 증가 양상과 이들을 대하는 두 관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김종승 선생님께서 답변을 요구하신 질문의 핵심인 ‘홈쇼핑 방송에서 사라진 ‘색깔’이 우리 인간의 어떤 면을 보여주고 있는지’에 대한 저의 생각을 말씀드려 보고자 합니다.
사대주의의 영향과 오리엔탈리즘의 그림자
조지 레이코프의 『삶으로서의 은유』
흔히들 넘쳐나는 외국어 사용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사대주의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설명을 ‘인간의 사고 과정은 대부분 은유로 구성되어 있다.’라고 주장하는 개념적 은유 이론에 따라 해석한다면 ‘마음속 사대주의’는 당연히 은유적인 사고 과정의 일부일 것입니다. 이 사대주의 은유, 구체적으로 말하면 [상대국은 위/자국은 아래]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이 ‘사대주의적’ 사고는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오랫동안 축적된 물리적인 [위-아래] 경험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종종 접했던 골목 싸움을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대개는 키와 몸집이 크고 힘센 사람이, 키와 몸집이 작은 사람을 위에서 내리누르는 장면이 떠오를 것입니다. 몸싸움을 하면서 위에 있을 때 우리는 더 평안함을 느끼고 아래에 있을 때는 숨쉬기도 힘든 답답함과 고통을 느낍니다. 그리고 싸움에서 이기면 기분이 좋고 지면 기분이 나쁩니다. 이것은 사람에 비유되는 국가들 사이의 대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을 떠올려 보십시오. 사극에서 흔히 보듯이 살아남은 병사들은 서 있고 죽거나 부상당한 병사들은 누워 있으며, 승전국 수장은 높은 단 위에 당당히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패전국 수장은 땅에 엎드려 단 위의 장수에게 살려달라고 청합니다.
『은유로 보는 한국 사회』 책 표지.
한국 사회의 대표적 은유들을 통해 세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미지 출처: 알라딘)
사회적으로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우리 인간은 대개 [권력], [강함][평안], [행복], [좋음], [통제], [성공] 등의 개념을 공간적인 [위]에 연결하고, [권력 결여], [약함], [불편], [불행], [나쁨], [복종], [실패] 등의 개념을 공간적 [아래]에 연결합니다. 이러한 경험 덕택에 인간의 사고 속에서 [힘은 위/권력 결여는 아래], [강함은 위/약함은 아래], [행복은 위/불행은 아래], [좋음은 위/나쁨은 아래], [평안은 위/불편은 아래], [통제는 위/복종은 아래], [성공은 위/실패는 아래] 등의 개념적 은유가 발생합니다.
이러한 [위-아래] 은유가 [국가는 사람] 은유와 다시 결합할 때, 은유적으로 힘이 없는 사람으로 개념화되는 약소국이 힘이 강한 사람으로 개념화되는 강대국을 섬기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사대주의 은유가 나옵니다. 한마디로 [강대국은 힘센 자]이고 [약소국은 약한 자]입니다. 이 은유적 사고에서는 당연히 강대국의 국민들이 상급자이고 약소국의 국민들은 하급자이며, 강대국 언어는 고상한 언어이고 약소국 언어는 저급한 언어입니다.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복종하듯이, 약소국은 강대국을 숭배해야 합니다. 환유적으로는 강대국의 언어를 숭배하고 존중하는 것이 바로 강대국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대주의는 역사적으로 축적된 우리의 신체적 경험에 근거를 두고 있는 은유적 사고의 일부입니다. 우리 민족은 생존 전략의 하나로 사대주의를 택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대주의적인 사고 속에서는 늘 한국어는 [아래]였고 다른 강대국의 언어가 [위]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식민지 이전까지는 중국어가 [위]였고, 식민지 시대에는 일본어가 [위]였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사고 속에서 서구의 언어―특히 영어―가 [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은유적 사고에서는 역사적으로 중국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사대주의’의 영향보다 서구인들이 동양과 동양인들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구성해 우리들의 마음속에 심어놓은 일련의 고정관념인 오리엔탈리즘의 그림자를 볼 수 있습니다. 이 틀에서 서양(인)을 대표하는 특성은 문명, 강함, 성숙, 합리성, 안정성, 화려함 등인 반면, 동양(인)을 대표하는 특성은 야만, 허약, 미성숙, 비합리성, 불안정성, 초라함 등입니다. 어떤 문화에서나 이러한 특성은 흔히 물리적인 수직성 개념 [위-아래]의 관점에서 은유적으로 이해합니다. 은유적으로 [강함은 위]이고 [약함은 아래]이며, [성숙은 위]이고 [미성숙은 아래]이며, [문명은 위]이고 [야만은 아래]이며, [합리성은 위]이고 [비합리성은 아래]이며, [화려함은 위]이고 [초라함은 아래]입니다.
영어(음역) 표현을 강조한 커피 전문점의 간판 사례 (이미지 출처: 일요경제)
영어(음역) 표현을 강조한 공공기관의 로고 사례
오리엔탈리즘을 은유적으로 요약하면, [서양은 위]와 [동양은 아래]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서구어(영어)는 위]가 되고, [한국어는 아래]가 됩니다. 한국어 대화와 글 속에 수많은 영어(음역) 표현들은 바로 이 오리엔탈리즘 사고의 반영이라고 본다면 저만의 억측일까요? 이 그림자는 언어 표현 자체만이 아니라 영어(음역) 표현과 한글을 배치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납니다. 영어(음역) 표현을 위쪽에 크게 표시하고 한글 표현을 한쪽 귀퉁이에 조그맣게 제시한 가게의 간판이나 공공기관과 기업의 도안을 적잖이 볼 수 있습니다. 이 배치 방식도 역시 [서양(어)은 위/동양(어)은 아래]라는 오리엔탈리즘의 발현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 방식에는 ‘역사의 큰 분수령’, ‘대기만성’, ‘고장의 큰 인물’ 등의 표현에서 드러나는 [중요함은 큼] 은유도 들어있지만요.
‘위’를 향한 욕망의 발현으로서의 외국어 상표
한국 사회에서 뛰어난 외국어 구사 능력은 공간적 [위]로 개념화되는 ‘성공’으로 올라가기 위한 튼튼한 사다리의 하나다. (이미지 출처: 데일리투머로우)
외래어의 범람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위로 더 위로’ 올라가고자 끝없이 욕망하고 경쟁하는 한국 사회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현재 경쟁이 일상화된 한국 사회에서 뛰어난 외국어 구사 능력은 공간적 [위]로 개념화되는 ‘성공’으로 올라가기 위한 튼튼한 사다리의 하나입니다. 실제로 새로운 외래어나 외국어(음역) 표현을 만들어내는 일은 아무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세계 경제의 흐름과 과학 기술의 최근 동향에 신속하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외국어 능력이 뛰어나며 대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이미 성공했거나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은유적으로 그들은 ‘성공으로 가는 사다리’의 맨 위나 더 높은 곳에 도달했거나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성공에의 사다리’ 언저리로부터 밀려나면 패자가 된다는 불안감에서나, 외국어 사용을 주도하는 사람들과 동화할수록 성공할 가능성이 더 높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그들의 언어 사용을 따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별화를 통한 성공’을 향한 ‘열망’은 효율적인 언어 소통을 위해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정보를 전달한다.’라는 언어 경제성과 명명의 원리에 어긋나는 이름을 만들어냅니다. 심지어 ‘○○증포3지구 대원칸타빌 2차더테라스’라는 아파트 이름은 18글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영어 음역 사용을 사용한 명명이 과연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실제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을까요? 김종승 선생님의 질문을 빌려 말하자면, 동일한 상품을 ‘하얀색 운동화’보다 ‘화이트 스니커즈’라고 부를 때 더 신고 싶어 할까요? 동일한 상품을 ‘남성 회색 양모 외투’보다 ‘맨즈 그레이 컬러 울 오버 코트’라고 부를 때 더 많이 팔릴까요? 그러한 조사를 직접 해본 적도 없고 그러한 조사 결과를 본 적도 없기에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많은 기업 관계자들은 외국어를 사용한 명명 방식이 소비자들에게 상품이 더 품질이 뛰어나고 더 세련되고 더 우아하다는 등의 느낌을 주어 더 높은 판매 성과를 낼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또한 그러한 믿음과 기대를 지니고 있는 소비자들도 적지 않아 보입니다.
아파트 이름 변경 소송 사례 (이미지 출처: 한겨례)
이러한 기대와 믿음에서 비롯된 욕망은 십여 년 전쯤에 일어난 아파트 이름 변경 소송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파트의 입주민들은 가치를 높이려는 의도에서 명칭을 ‘롯데캐슬’로 바꾸어 달라는 신청을 해당 구청이 거부하자 법원에 소송을 내어 승소를 한 뒤 “판결에 만족…무분별한 명칭 변경은 우리도 반대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름만 바꾸어도 값이 오를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이 없었다면 소송까지 벌일 필요가 있었을까요? 이 소송은 외국어 상호로 된 ‘호화롭고 우아하고 값비싼 고품격 아파트’ 범주 내에 들어가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이었다고 봅니다. 소송 승소 뒤에 입주민 대표가 했던 발언은 그 범주 내에 자신은 들어가야 하지만 타인은 들어오지 말라는 이중적인 욕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양한 상품 이름과 공공기관 이름, 공공기관의 사업과 정책 이름에서 외국어 음역 표현을 엄청나게 많이 사용하고 있는 현상은 자신을 ‘더 고상하게’, ‘더 화려하게’, ‘더 우아하게’, ‘더 품격 있게’, ‘더 가치 있게’ 드러내 보임으로써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더 위로’ 올라가 ‘더 많은’ 부를 모으고자 하는 우리들의 욕망에 기인한다고 봅니다. ‘위’를 향한 이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외국어(음역) 표현’을 도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외국어 기표의 범람은 [서구는 위/동양은 아래] 은유라는 오리엔탈리즘의 그림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혐오와 배제로 이어지는 차별화는 이제 그만!
TV 홈쇼핑 채널 (이미지 출처: 현대백화점)
우리나라 역시 정치적으로 다른 어느 나라에 못지않게 민주주의를 실현해 가고 있고 경제적으로 세계 상위권에 다다른 이 시점에서는 오리엔탈리즘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요? 이제 막 지은 초고층아파트를 ‘아리랑아파트’라고 하면 청약자들이 덜 올까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수많은 외국어 남용의 기저에 있는 [서구는 위/동양은 아래] 은유는 외국어 상표가 상품의 품질을 보증하는 것처럼 우리들에게 허상을 심어주며 실재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외래어 음역 표현을 사용하는 차별화 전략이 배제와 혐오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부 초등학생들과 중학생들의 언어 사용에 등장하는 ‘전거지(전세 사는 거지)’나 ‘월거지(월세 사는 거지)’와 청년들 사이에서 펴져 있는 ‘이백만/삼백만 원 이하의 월 소득자’를 뜻하는 ‘이백충(蟲)’이나 ‘삼백충(蟲)’등의 상대를 비하하기 위한 표현은 이 차별화 전략이 빚어낸 배제와 혐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차별화’ 전략을 사용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자신들의 의도대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성공의 사다리’를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겠지만 다수는 배제와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아쉽게도 현재의 한국 사회는 이런 모습으로 보입니다. ‘성공의 사다리’ 언저리에도 다가갈 수 없는 사람들을 차별하고 배제하기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생존과 존엄,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함께 나아가는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서구는 위/동양은 아래]나 [영어는 위/한국어는 아래]라는 오리엔탈리즘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하더라도, ‘컬러’와 ‘화이트 스니커즈’, ‘맨즈 그레이 컬러 울 코튼 오버 코트’보다 ‘색깔’과 ‘하얀색 운동화’, ‘남성용 회색 양모 외투’를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시민들의 언어 감수성을 기대해 봅니다. 시민으로서의 이 언어 감수성 실천이 ‘성공의 사다리’를 타고 ‘나만이 먼저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자 끝없이 경쟁하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 ‘삶이 모두가 함께하는 즐거운 여행’인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작은 행동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보니 질문해 주신 김종승 선생님께 충분히 만족스러운 답을 드리지 못한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선생님의 뛰어난 이해 능력을 믿으며 부족한 답변을 마칩니다.
5월 [이달의 답변] ‘위’만 보다가 색깔은 사라지고 컬러만 남아 ⑲
5월 [이달의 질문] 홈쇼핑 채널에서 ‘색깔’은 왜 사라졌을까? ⑱
언어학자
전남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서강대와 전남대 대학원에서 영어학으로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 언어학과에서 객원 학자로 은유와 인지언어학을 공부했다. 전남대와 충남대에서 강의했고 한국담화인지언어학회의 연구 이사를 지냈다. 현재 학술지 [담화와 인지] 편집위원회의 인지분과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한겨레말글연구소의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 『은유로 보는 한국 사회』, 『조지 레이코프』, 『프레임 전쟁』,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 『이기는 프레임』, 『폴리티컬 마인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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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쇼핑 채널에서 ‘색깔’은 왜 사라졌을까?
김종승
[인문, 깜짝 퀴즈] 소설가 이희영(정답, 해설 포함)
이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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