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에 빠져있다가 문득 그곳엔 ‘색깔’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정확하게는 ‘색깔’ 또는 ‘색상’이라는 우리말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빨강’, ‘파랑’, ‘노랑’은 ‘레드’, ‘블루’, ‘옐로우’였고, ‘회색’과 ‘검정’은 ‘그레이’와 ‘블랙’이었습니다. 그렇게 ‘컬러’가 된 ‘색상’들은 방송 내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어울리지 못하고 ‘매치(match)’만 했습니다.
TV 홈쇼핑 채널 (이미지 출처: 현대백화점)
꽤 오래전 일입니다. 원하는 프로그램을 찾아 IPTV 리모컨을 돌리던 중 사이사이 요충 대역에 둥지를 튼 TV 홈쇼핑 채널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날따라 그냥 지나치지 않고 눈과 귀가 어느 통신 판매 방송 채널에 잠시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그 방송에서는 ‘놀라운 기능’과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바로 그 제품’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가격’에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저의 관심을 끈 것은 ‘쇼호스트(상품 안내자)’들의 유려한 진행 능력이었습니다.
화사한 미소와 자신감 넘치는 눈빛. 벅찬 듯 살짝 올라간 음성. 급하고 빠른 와중에도 정확한 발음. 제품의 그토록 다양한 장점을 일목요연하게 풀어내는 정연함. ‘그러니까요’, ‘제 말이요’, ‘우와~’, ‘와우’ 등 적절한 추임새로 완성된 진행자 간의 호흡.
그렇게 잠시 방송에 빠져있다가 문득 그곳엔 ‘색깔’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정확하게는 ‘색깔’ 또는 ‘색상’이라는 우리말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빨강’, ‘파랑’, ‘노랑’은 ‘레드’, ‘블루’, ‘옐로우’였고, ‘회색’과 ‘검정’은 ‘그레이’와 ‘블랙’이었습니다. 그렇게 ‘컬러’가 된 ‘색상’들은 방송 내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어울리지 못하고 ‘매치(match)’만 했습니다.
한동안 친구들이 모인 편안한 자리에서 ‘홈쇼핑 색깔 실종 사건’을 잡담의 소재로 끄집어내곤 했습니다. ‘너무 예민한 것 아니냐’, ‘요즘 많이 심심하냐’ 등 대체로 시큰둥한 반응에 어느 순간부터 더이상 이 일을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외국어 상품 묘사가 판매에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의문으로 남았습니다.
코로나19 사태를 맞은 2020년에도 홈쇼핑 업계 매출 증가율은 전년 대비 7.1%를 기록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하고 외국어 상품 묘사가 판매 증대에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로 사람들은 ‘하얀색 운동화’보다 ‘화이트 스니커즈’를 더 원할까요? 과연 ‘남성용 회색 양모 외투’는 ‘맨즈 그레이 컬러 울 코튼 오버 코트’보다 덜 팔렸을까요? 홈쇼핑 TV는 소비자를 어떤 존재로 파악하고 있는 것일까요?
『은유로 보는 한국 사회』 책 표지 (이미지 출처: 알라딘)
얼마 전 『은유로 보는 한국 사회』라는 책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은유’가 인간 사고 과정의 본질적 부분이라는 ‘개념적 은유 이론’을 바탕으로, 일상 언어 분석을 통해 우리 사회의 감춰진 이면을 조명한 매우 흥미로운 책이었습니다. 이 책을 쓰신 나익주 선생님이시라면 홈쇼핑 방송에서 사라진 ‘색깔’이 우리 인간의 어떤 면을 보여주고 있는지 잘 설명해주실 것 같습니다.
미디어 컨설턴트
로이터 통신 북아시아 지역본부 미디어 사업 부문 한국 책임자로 근무했다. 로이터 통신 재직 중 해외 시장 개척을 목표로 영문 한류 뉴스 서비스를 기획하여 상품화했다. 한동안 출판 기획 및 번역가로 활동하며 『하워드 진, 교육을 말하다』 등을 번역하기도 했다. 현재 저소득 모자 가정의 자립을 지원하는 사회복지법인에서 대표 이사로 근무하며, 틈틈이 해외 언론사의 자문에 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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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홈쇼핑 채널에서 ‘색깔’은 왜 사라졌을까?' 저작물은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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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쇼핑 채널에서 ‘색깔’은 왜 사라졌을까?
- 이달의 질문 -
김종승
2021-05-04
방송에 빠져있다가 문득 그곳엔 ‘색깔’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정확하게는 ‘색깔’ 또는 ‘색상’이라는 우리말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빨강’, ‘파랑’, ‘노랑’은 ‘레드’, ‘블루’, ‘옐로우’였고, ‘회색’과 ‘검정’은 ‘그레이’와 ‘블랙’이었습니다. 그렇게 ‘컬러’가 된 ‘색상’들은 방송 내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어울리지 못하고 ‘매치(match)’만 했습니다.
TV 홈쇼핑 채널 (이미지 출처: 현대백화점)
꽤 오래전 일입니다. 원하는 프로그램을 찾아 IPTV 리모컨을 돌리던 중 사이사이 요충 대역에 둥지를 튼 TV 홈쇼핑 채널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날따라 그냥 지나치지 않고 눈과 귀가 어느 통신 판매 방송 채널에 잠시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그 방송에서는 ‘놀라운 기능’과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바로 그 제품’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가격’에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저의 관심을 끈 것은 ‘쇼호스트(상품 안내자)’들의 유려한 진행 능력이었습니다.
화사한 미소와 자신감 넘치는 눈빛. 벅찬 듯 살짝 올라간 음성. 급하고 빠른 와중에도 정확한 발음. 제품의 그토록 다양한 장점을 일목요연하게 풀어내는 정연함. ‘그러니까요’, ‘제 말이요’, ‘우와~’, ‘와우’ 등 적절한 추임새로 완성된 진행자 간의 호흡.
그렇게 잠시 방송에 빠져있다가 문득 그곳엔 ‘색깔’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정확하게는 ‘색깔’ 또는 ‘색상’이라는 우리말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빨강’, ‘파랑’, ‘노랑’은 ‘레드’, ‘블루’, ‘옐로우’였고, ‘회색’과 ‘검정’은 ‘그레이’와 ‘블랙’이었습니다. 그렇게 ‘컬러’가 된 ‘색상’들은 방송 내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어울리지 못하고 ‘매치(match)’만 했습니다.
한동안 친구들이 모인 편안한 자리에서 ‘홈쇼핑 색깔 실종 사건’을 잡담의 소재로 끄집어내곤 했습니다. ‘너무 예민한 것 아니냐’, ‘요즘 많이 심심하냐’ 등 대체로 시큰둥한 반응에 어느 순간부터 더이상 이 일을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외국어 상품 묘사가 판매에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의문으로 남았습니다.
코로나19 사태를 맞은 2020년에도 홈쇼핑 업계 매출 증가율은 전년 대비 7.1%를 기록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하고 외국어 상품 묘사가 판매 증대에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로 사람들은 ‘하얀색 운동화’보다 ‘화이트 스니커즈’를 더 원할까요? 과연 ‘남성용 회색 양모 외투’는 ‘맨즈 그레이 컬러 울 코튼 오버 코트’보다 덜 팔렸을까요? 홈쇼핑 TV는 소비자를 어떤 존재로 파악하고 있는 것일까요?
『은유로 보는 한국 사회』 책 표지 (이미지 출처: 알라딘)
얼마 전 『은유로 보는 한국 사회』라는 책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은유’가 인간 사고 과정의 본질적 부분이라는 ‘개념적 은유 이론’을 바탕으로, 일상 언어 분석을 통해 우리 사회의 감춰진 이면을 조명한 매우 흥미로운 책이었습니다. 이 책을 쓰신 나익주 선생님이시라면 홈쇼핑 방송에서 사라진 ‘색깔’이 우리 인간의 어떤 면을 보여주고 있는지 잘 설명해주실 것 같습니다.
나익주 선생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이달의 질문] 홈쇼핑 채널에서 ‘색깔’은 왜 사라졌을까? / 질문자 - 김종승(미디어 컨설턴트)
Q. 정말로 사람들은 ‘하얀색 운동화’보다 ‘화이트 스니커즈’를 더 원할까요? 과연 ‘남성용 회색 양모 외투’는 ‘맨즈 그레이 컬러 울 코튼 오버 코트’보다 덜 팔렸을까요? 홈쇼핑 TV는 소비자를 어떤 존재로 파악하고 있는 것일까요?
나익주 선생님이시라면 홈쇼핑 방송에서 사라진 ‘색깔’이 우리 인간의 어떤 면을 보여주고 있는지 잘 설명해주실 것 같습니다.
5월 [이달의 질문] 홈쇼핑 채널에서 ‘색깔’은 왜 사라졌을까? ⑱
4월 [이달의 답변] 진정한 애국심은 평등한 자유 시민의 공화국에서만 ⑰
미디어 컨설턴트
로이터 통신 북아시아 지역본부 미디어 사업 부문 한국 책임자로 근무했다. 로이터 통신 재직 중 해외 시장 개척을 목표로 영문 한류 뉴스 서비스를 기획하여 상품화했다. 한동안 출판 기획 및 번역가로 활동하며 『하워드 진, 교육을 말하다』 등을 번역하기도 했다. 현재 저소득 모자 가정의 자립을 지원하는 사회복지법인에서 대표 이사로 근무하며, 틈틈이 해외 언론사의 자문에 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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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홈쇼핑 채널에서 ‘색깔’은 왜 사라졌을까?'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열여섯 살은 아주 오래전에 지났지만
정이현
‘위’만 보다가 색깔은 사라지고 컬러만 남아
나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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